2023년 1월 29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은 성도 인생에 중요한 영향력을 미칩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를 통해 부활이 가져오는 변화가 무엇인가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가져오는 변화는 무엇인가요?
슬픔에서 기쁨으로의 변화입니다. v.11
예수님의 부활이 가져오는 변화는 첫 번째로 슬픔에서 기쁨으로의 변화입니다. 11절입니다.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마리아는 왜 이렇게 슬퍼했나요?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의지하는 사랑의 대상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의지하고 사랑하는 대상이 사라질 때 동일한 슬픔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지금 예수님을 문제를 해결해 줄 인간적 차원의 구원자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진짜 하나님으로 믿었다면, 그래서 죽음이 하나님을 이기지 못함을 믿었다면,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이렇게 고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살아 계실 때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었다가 살아날 것을 누차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9장 22절을 보시면
눅 9:22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예수님은 여러 차례 말씀하신대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 의해 고난 받으시고 삼일째에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뿐 아니라 제자들도 이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생각의 틀 안에 이 말씀은 전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놀라운 분이라는 사실은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물고기 몇 마리와 떡으로 수천 명을 먹이신 것, 바다 위를 걸어가신 것, 폭풍우를 잠잠케하신 것을 보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했습니다. 썩어서 냄새나던 나사로를 살리시며 죽음을 이기시는 분임을 보았음에도 예수님을 육적 능력이 많은 인간적 구원자로 보았던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많은 사람들도 육적 차원에서 예수님을 바랍니다. 인간은 눈에 보는 것 외에는 의존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에 복음이 처음 전파될 때 이런 미련한 방법이 사용되었습니다. 저희 집안이 예수를 믿은 것도 저희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뻔하다가 기도를 받고 살아나시는 기적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수십 년 전에는 기적 없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기에 하나님은 믿음의 시작점으로 기적을 허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내 문제를 해결하시는 인간적 구원자 정도로만 믿는다면, 이는 우상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한국교회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고들 합니다. 기본적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 자체가 줄었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도 많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젊은 세대가 종교에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20대 청년 열 명 중 종교에 관심이 있다는 수는 두 명 정도입니다. 30년 전 같은 조사에서, 열에 일곱이었던 이 이 차이는 바로 물질적 풍요입니다.
예전에는 경제적으로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지금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구원자를 쉽게 의지했습니다. 이제는 돈이 그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게까지 도움을 청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지만 진짜 부활하신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귀신 들려 모든 삶이 다 파괴되었을 때 자신을 구원하여 준 분으로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또 시체가 사라졌을 때 슬피 운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믿고 계신가요?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수준의 하나님을 찾는다면 여러분은 그 분으로 인해 실망하고 슬픔에 사로잡힐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예수를 잘 믿어도 하나님은 여러분이 이 땅에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채워주시지 않고, 영적으로 훨씬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들을 공급해 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가의 여부는 우리 인생에 차이를 가져옵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고 살아가는 이유는 영원한 것을 보지 못하고 이 땅이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5장 19절에서 이야기합니다.
고전 15: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예수님이 부활하신 뒤 초대 교회 성도들은 고난과 박해도 많이 당했지만, 하나님이 기독교를 처음 세우시기 위에 성령의 강력한 역사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와 성령의 능력으로 주셨던 마음의 하나가 바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었습니다. 그 소망은 지금 어디로 갔나요? 이 세상이 마치 눈에 보이는 천국처럼 여겨져 소망이 사라져버린 것은 아닌가요?
아무리 이 땅의 것을 의존해도 온전한 만족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일시적 행복을 맛볼 때도 있지만 물건은 닳고, 사람은 떠나보내야 하며, 우리 또한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은, 부활을 믿는 자들만이 갖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를 이 영원한 슬픔에서 자유케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5장 17절과 18절에서
고전 15:17-18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부활에 대한 소망은 일 년에 한 번 부활절에만 기억할 것이 아니라 우리 믿음의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인생에서 내가 의존하는 것이 사라지는 고통을 경험할 때에도, 부활에 대한 확실한 소망과 믿음이 있다면, 슬픔을 넘어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슬픔이란 고통이 만들어 내는 결과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성경에서 중요한 여인으로 자주 나오는 이유는 마리아의 인생이 바로 우리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라는 이름 자체가 구약의 미리암, 즉 ‘마라’라는 히브리어에서 나온 단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고통, 씀, 슬픔,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신약에 많은 마리아들이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예수님이 고통의 인생들에게 유일한 해결책이 되심을 가르쳐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으로 슬픔을 이기고자 하시나요? 우리를 짓누르는 상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참 소망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으로, 슬픔으로부터 기쁨을 되찾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가져오는 변화는 무엇인가요?
2. 영적 시각의 변화입니다. vv.12-16
두 번째로 예수님의 부활이 가져오는 변화는 영적 시각의 변화입니다. 12절 말씀입니다.
[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지난 본문에 보았듯 다섯 명 이상의 여자들이 무덤에 같이 갔습니다. 그런데 무덤에 예수님의 시체가 없는 것을 보자 막달라 마리아는 혼자 제자들에게 달려갔습니다. 다른 여인들은 천사도 만나고 예수님도 만났기에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확신 있게 제자들에게 전하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다시 돌아왔으나 여전히 시체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해서 울고 있는 상황입니다.
여인들은 두려워하며 놀라며 그들이 천사인 걸 알아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슬픔에 차 우느라 이들이 천사인지 누군지 분간을 못하고 있습니다. 13절입니다.
[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다른 여인들한테는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말해주었는데 마리아는 얼마나 심하게 우는지 천사들이 왜 우느냐고 묻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의존하고 붙들고 있던 것이 망가지고 나니 슬픔에 사로잡히고 눈이 가리워져 심지어 예수님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14절입니다.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성경은 일부러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자들을 대조적으로 보여줍니다. 다른 여인들은 예수님을 만나자 발 앞에 엎드려 경배했으나 막달라 마리아는 알아보지 못합니다. 단순히 울어서 안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어두운 상태임을 보여주기 위해 15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님도 천사와 같은 질문을 하셨고 마리아는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착각했다고 합니다. 인간이 영적으로 어두워진 진짜 이유는 구약의 어떤 ‘동산’에서 벌어진 일의 결과 때문입니다. 인간이 왜 눈에 보는 것이 아니면 믿지 못하게 되었나요? 왜 보이지 않는 하나님마저도 우상처럼 섬기게 되었나요? 에덴동산에 죄가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 5절을 보시면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뱀의 유혹대로 육적인 것을 보는 눈이 밝아졌습니다. 힘을 보면 의존하고 싶고, 멋진 것을 보면 갖고 싶고, 보이는 것만 의존하는 눈이 밝아졌고 하나님을 향한 눈은 어두워졌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눈동자같이 지키신다는 것은 잊게 되었습니다.
가까이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동산지기’로 착각했음을 일부러 기록한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을 믿지 못하고 육적 차원에서 세상을 사는 인간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육적 눈만 밝으니 어떤 일이 벌어졌나요? 창세기 3장 7절입니다.
창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또 어떤 눈이 밝아졌나요? 수치를 보는 눈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아름답게 만드셨는데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육적 존재로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죄가 들어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구는 강력해졌지만 스스로의 상태는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남보다 뛰어나고자 하는 근원도 수치감을 벗기 위함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똑똑하고, 능력 있고, 다른 사람들의 선망이 되고 싶은 열망은 가득한데 우리 육적 능력으로는 그 열망을 채울 수 없어서 열등감을 느끼게 되고 결국 이 마음 때문에 관계가 틀어집니다.
한국 사람은 수치에 근거한 행동을 가장 많이 하며 그것이 수준에 맞지 않는 과장과 허세로 나타납니다. 작년 1인당 명품구입액수가 가장 높은 나라 1위였다고 합니다. 결국 물건으로 수치를 가리고, 물건으로 영광을 추구하는 열망에 한국이 중독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처럼, 막달라 마리아처럼, 어두움 속에서 육적인 것만 바라보면서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운 아름다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신가요? 이제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셔야 합니다. 눈물가운데 예수님도 알아보지 못하던 마리아가 어떻게 되나요? 16절입니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예수님이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단순히 이름만 부른 것이 아니라, 사랑을 담아, 내가 너를 안다, 라고 존재를 깨닫게 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도 부르십니다. 큰 일을 해야겠다고 세상만 바라보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예수님에게 집중하라고 우리의 시선을 모으십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그 마음과 같은 시가 한 편 있습니다. 김춘수의 ‘꽃’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우리도 다 무언가가 되고 싶어 하지만 세상의 칭찬은 우리의 본질을 바꿀 수 없습니다. 허무감만 가져올 뿐입니다. 온 세상의 찬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이기 때문입니다. 운동선수 몇, 똑똑한 사람 몇, 돈을 많이 번 사람 몇을 제외하고 대다수의 사람은 그런 칭찬을 듣지 못 합니다. 우리의 본질,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아시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진짜 나를 알고 불러주시는 그 분의 음성을 듣는 자만이 열등감과 혐오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너는 나의 사랑받는 자요, 내가 너를 위해 생명을 바쳤으며, 나에게 소중한 존재라고 말씀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은 어두움 가운데 있는 우리 눈을 띄워 하나님의 빛을 볼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가져오는 변화는 무엇인가요?
3. 하나님과의 관계의 변화입니다. vv.17-18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부활이 가져오는 변화는 무엇인가요? 하나님과의 관계의 변화입니다. 17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17a]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붙든다’는 영어로 hold on to me 즉 놓지 않으려는 꽉 매달리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체가 사라지자 앞뒤 분간을 못할 만큼 슬펐다가 예수님을 만났기에, 예수님이 또 사라지실까봐 온 힘을 다해 매달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붙들려 계실 수 없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가 부활하신 하나님으로 하늘에 가시고 대신 보혜사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제는 예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17절 중반절입니다.
[17b]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이제 아버지께로 가셔서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하기에 마리아가 예수님을 붙잡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새로운 관계인가요? 17절 하반절입니다.
[17c]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구약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멀리 계시고 무서운 분으로, 얼마나 경외감이 컸는지 이름도 부르지 못했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그냥 ‘주님’이라고 불렀고, 자음으로만 된 하나님의 이름에, 주님이라는 뜻의 ‘아도네’의 모음을 붙였던 것이 여태까지 전승되어 우리가 지금 여호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름만 경외한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은 성경을 기록하다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면 모든 것을 내려두고 목욕을 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분이 이제 너희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해졌나요? 예수님이 부활하시며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새로운 관계가 열린 것, 이것이 부활의 가장 좋은 결과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며 죽음을 이기시고 죄를 해결하셨기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 울고 어리광피우고 우리 필요를 간구하며 긍휼과 은혜를 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 그래서 육적 차원의 시각이 영적 차원으로 변화되고, 예수님이 진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다음에야 무엇을 할 수 있나요? 18절 말씀입니다.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그제야 우리는 증인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육적 차원에서 전하기도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육적 예수님을 원해서 온 사람들이 변하지 않고 그 수준에서 머물면 하나님과 더 이상 관계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에서 병 나은 분은 많지만 더 이상의 공급이 없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을 떠난 분도 많습니다.
하나님은 물론 우리가 아픈 것 아시고,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다 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우리 영혼을 가득 채운 욕망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하나님이 진짜 구원자이심을 맛보게 하시는 훨씬 더 큰 축복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으로, 슬픔이 기쁨이 되고, 영적 눈이 열려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