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5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본문에는 예수님이 두 번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왜 같이 계시지 않고 간헐적으로 나타나셨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승천 후에 그들을 다시 볼 수 없을 것이기에 만나실 때마다 중요한 말씀을 하셨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알고자 하는 모든 내용이 다 기록된 것은 아닙니다. 요한은 30절과 31절에 성경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것이 요한복음의 주제 구절이자 성경 전체의 핵심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그리스도, 구원자라는 사실을 믿게 하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또 믿음에서 그치지 않고, 믿음으로 인해 생명을 더 풍성히 누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믿어야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 후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에도 이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엇을 당부하셨나요?
1. 성령으로 죄 사함을 전파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vv.19-23
그렇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엇을 당부하셨나요? 첫 번째로 성령으로 죄 사함을 전파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19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19a]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
‘안식 후 첫날 저녁’은 예수님이 부활 하신 날 저녁입니다. 새벽에 여자들은 무덤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돌아왔는데 그들의 증언을 듣고도 제자들은 여전히 믿지 못했습니다. 그 믿음 없음은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에서 드러납니다. 단순히 문을 닫은 것이 아니라 거처를 들켜 고발 당할까봐 꼭꼭 숨은 것입니다. 그런데 19절 하반절에 예수님이 오십니다.
[19b] …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닫혀 있는 문을 통해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물론 ‘평강이 있을지어다’는 유대인들이 지금도 하는 ‘샬롬’이라는 보편적 인사이지만 예수님이 단순히 ‘안녕’이라고 인사하신 것은 아닙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들에게, 예수님만이 샬롬을 줄 수 있는 분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평화’라고 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조용한 상태를 떠올리실 수도 있겠지만 평화는 ‘무질서했던 상태가 강력한 힘에 의해 질서가 유지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세상은 경찰과 군대 등의 힘에 의해 질서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런 힘이 없다면 질서는 금방 무너질 것입니다.
아침이면 해가 뜨고 봄이 오면 따뜻해지는 당연한 자연 현상에 하나님의 개입이 없다면 모든 것이 무너질 것입니다.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우주 체계도 사실 정교한 엄청난 힘들이 서로 작용하여 굴러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만이 질서와 평화를 주실 수 있나요? 인간의 평화를 파괴해서 인간을 무질서 가운데 고통하게 만드는 것이 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가장 고통하는 이유는 돈이나 건강의 부재보다도 죄 때문입니다. 또 죄가 만들어내는 욕심 때문입니다. 그런 죄와 죽음을 예수님은 부활로 이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평강’을 말씀하신다는 것은 단순히 ‘너가 잘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내가 죄와 죽음을 해결했으니 나를 믿으면 너희도 영원한 평강을 누릴 수 있다’라는 선포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평강을 누리고 계신가요? 아니면 세상 사람들처럼 평화를 위해 몸부림쳐 보지만 여전히 불안과 초조 가운데 살고 계신가요?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서 말씀하시는데도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을 확실하게 받아들이고 있지 못합니다. 20절입니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다렸다면 예수님이 ‘평강’을 말씀하셨을 때 바로 알아보았어야 하는데, 사실 이들은 여자들의 말도 허탄하다 즉, 바보같다고 무시했었습니다. 인간은 상식의 틀에 들어오지 않는 이야기는 흘려듣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예수님이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자 그제야 주를 보고 기뻐합니다. 예수님은 20절에 다시 한 번 말씀하십니다.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두 번째 평강은 앞의 평강과 약간 맥락이 다릅니다. 먼저는 잡혀갈까봐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내가 죄와 죽음을 이긴 진짜 하나님’이라고 선포하셨고 이제는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며 기원하시는 평강입니다. ‘보내다’라는 헬라어 ‘아포스톨로’에서 ‘아포스톨로스’ 즉 ‘사도’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즉 ‘사도’는 예수님이 세상으로 보내신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죄와 죽음을 해결하신 평강의 왕이심을 믿는 자만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예수님을 왕으로 믿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두려움을 깨고 세상과 대면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예수님으로만 평강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알아서 하라’고 하시지 않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성령을 주십니다. 22절입니다.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왜 숨을 내쉬며 성령을 주셨나요? ‘성령이 너희의 생명이며, 마치 숨을 쉬듯이 성령 없이는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즉 성령으로만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활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가요? 23절입니다.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구절은 많은 논란이 됩니다. ‘너의 죄를 사하노라’ 선포하면 죄가 사라지나요? 아니면 너무 악한 사람에게 ‘너의 죄는 사할 수 없다’ 선포하면 죄가 남아 있나요? 아닙니다. 죄인은 다른 죄인의 죄를 사할 권리나 능력이 없습니다. 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사함 받습니다.
즉 성도는 ‘예수님만 죄를 사하십니다, 예수님만 평강을 주십니다’라고 선포해야 하고, 이것을 받아들이는 자는 구원받아 죄가 사하여지고, 거부하는 자는 죄 가운데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표현을 마치 죄사함의 권세가 우리에게 있는 것처럼 하신 것입니다. 왜인가요? 예수의 죄사함과 은혜를 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얼마나 큰 권세인지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전해야만 누군가가 죄사함을 받고 평강을 누리고, 우리가 전하지 않으면 누군가는 죄 가운데 영원한 멸망을 당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깨닫는 일입니다. 죄의 참혹함을 알아야 죄 사함의 감사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목적은 단순히 삶의 수준을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박해를 받으면서도 복음을 전했던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세주이심을 믿고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만이 죄를 해결하신다는 것을 전하는 일은 성도에게 놀라운 권세이며 축복입니다. 이는 바로 성령님의 존재 때문입니다.
성령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선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성령을 충만히 부으시면 우리는 이 땅의 그 어떤 풍성함보다 예수로 인한 풍성함이 얼마나 큰가를 맛보게 됩니다. 그것이 제자들의 삶이었습니다. 박해가 심하고, 고난 받고, 재산을 뺏기고, 심지어 죽임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을 붙들어서 그들은 비교할 수 없는 하늘의 축복을 누렸습니다.
제 인생에서도 가장 은혜가 많았던 시기는 어려움이 깊었던 시기였습니다. 어려움이 많았기에 많이 기도했고,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걸으면서도 지하철에서도 잠들면서도 종일 ‘불쌍히 여겨 주세요’ 매달리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안정되면 기도시간이 줄어듭니다. 간절함이 줄어드는 만큼 은혜가 줄고, 세상의 별것 아닌 것들이 점점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어떤 것보다 행복했던 순간은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할 때였습니다. 성령이 마음을 만지시며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하신 말씀은 세상을 이길 힘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죄 사함의 권세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고 선포하는 사명을 감당할 때 성령이 임하셔서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풍성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엇을 당부하셨나요?
2. 믿음으로 반응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vv.24-29
두 번째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엇을 당부 하셨나요? 믿음으로 반응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24절 말씀입니다.
[24]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히브리식으로는 도마, 헬라식으로 부르면 디두모로서 이 두 이름은 같은 것으로 뜻은 ‘쌍둥이’입니다. 이름의 의미 자체가 도마의 이중적인 인생을 잘 보여줍니다. 3년이나 예수님을 쫓아다니며 기적을 보고 예수님 말씀을 직접 들었지만 어느 누구보다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원래 예루살렘에 계시던 예수님 일행은 유대인들을 피해 도망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죽게 되었다고 연락을 받고 예수님이 ‘나사로를 깨우러 가자’고 하시자 제자들은 모두 걱정했습니다. 그때 도마가 요한복음 11장 16절에 이야기합니다.
요 11:16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가서 죽자’하고 모두가 속으로만 생각한 것을 입으로 말합니다. 현실적인 반응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었으니까 여기까지 따라왔을 것이지만 마음 안에 있는 이성적 반응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 이성적 마음으로 25절에서도 또 이렇게 반응합니다.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요즘의 MBTI로는 T가 99퍼센트인 사람, 즉 내가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도마는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것도 보았습니다. 요한복음 11장 43절과 44절입니다.
요 11:43-44 [43] …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이전에 어린 소녀나 과부의 아들로 살리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죽은 지 얼마 안 되었었고 잠자는 것처럼 누워 있었습니다. 지금 나사로는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무덤 문을 열라고 하시자 이미 썩어 냄새가 나는데 왜 문을 여냐고 사람들이 반대했던 상황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야 나오라 하시자 몸이 썩어 문드러진 그가 걸어 나옵니다. 그것을 두 눈으로 보고도 도마는 지금 자기 손을 넣어봐야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성령이 아니고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기적들을 많이 본 도마도 믿지 못했던 것이 사실 당연한 반응입니다. 여러분이 부활을 믿으신다면 그것이 가장 놀라운 기적입니다. 온몸에 구멍이 나고 물과 피를 흘리며 죽었던 존재가 살아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26절에 예수님이 도마에게 찾아오십니다.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예수님은 우리의 말과 생각을 모두 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듣지 않으신다고 생각하기에 낙심의 말, 믿음 없는 말을 내뱉지만, 하나님은 여러분을 자녀로 구원하셨고, 예수의 피로 값주고 사셨기에 여러분의 신음까지 듣고 계십니다. 그제서야 28절에서 도마가 고백합니다.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늦게라도 고백했으니 잘했다 이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을텐데 예수님은 29절에 말씀하십니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정말 믿는다면 우리는 세상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보다 크신 하나님이 우리를 통치하시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여전히 세상이 두렵고 미래가 불안하다면 여러분은 도마처럼 하나님은 온전히 믿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예수님의 죄 사함을 선포하며, 참 평화를 주실 수 있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