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19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사람들은 죄의 영향력이 얼마나 깊고 강력한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죄를 짓고 넘어지는 것을 보면 쉽게 손가락질을 합니다. 또 ‘나는 저런 심각한 죄는 짓지 않는다’고 장담하며 자기 의를 내세웁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아직 죄의 영향력에 사로잡히지 않았을 뿐 어느 누구도 내면에서 영적으로 영향 미치는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베드로도 그러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확신에 가득 차 있었으나, 결국 죄를 짓고 실족하고 맙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그를 죄로부터 회복시켜주십니다.
예수님은 죄로부터 어떻게 회복시키시나요?
1. 죄의 내적 동기를 드러내십니다. v.15
그렇다면 예수님은 죄로부터 어떻게 회복시키시나요? 첫 번째 죄의 내적 동기를 드러내십니다. 15절 상반 말씀입니다.
[15a]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직접 말씀하시기 전에 숯불을 피우시고, 물고기와 떡을 준비하셨습니다. 숯불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던 바로 그 현장에 있던 소품입니다. 같은 환경에서 베드로를 대면하심으로 그의 죄를 드러내시고 해결하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같은 질문을 세 번 하셨는데 첫 번째만 ‘이 사람들보다’라는 비교 구절을 넣으셨습니다. 이는 베드로가 실패한 진짜 중요한 내적 동기가 비교의식으로 말미암은 자만심이었음을 보여줍니다. 흔히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것이 고난이 두려워서라고들 생각합니다. 물론 맞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근원이 되는 내적 동기는 베드로의 자만심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3절입니다.
마 26:33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베드로 눈에 다른 제자들은 미덥지가 않았습니다. 같이 3년 동안 지내며 자신 빼고 다 부족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판단의 근거는 자만심입니다. 자만심은 자존감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자존감은 자신은 존재 자체로 사랑받는다는 사실에 근거하지만, 자만은 타인과 비교하여 자신이 낫다고 인식하는것에 기반을 둡니다. 즉 자만은 죄에 기반한 인간의 내적 반응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고자 선악과를 먹었지만 죄로 인해 마귀의 영향력에 사로잡힌 인간은 하나님처럼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남보다 나를 높이려는 열망 가운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다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결국 비교의식은 내가 잘난 영역에서는 남을 비하하고, 내가 열등한 영역에서는 자기를 비하함으로 모든 인간관계를 깨뜨립니다.
모든 사람은 다 존중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무시하면 관계가 지속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경우였습니다. 또한 자만심이 있으면 타인과의 관계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도 파괴됩니다. 베드로가 다른 사람과 달리 주를 따르겠다고 할 때 예수님이 마태복음 26장 34절과 35절에 뭐라고 하셨나요?
마 26:34-35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5]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님은 틀렸어요. 나는 그렇지 않아요’라고 자신한 것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능력을 뛰어넘을 수 있나요? 그런데 베드로는 자기 확신에 차 있으니까 예수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관계는 말을 듣고 반응하는 것으로 발전됩니다.
베드로가 겸손한 상태였다면 ‘제가요?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요?’ 질문하며 그 상황을 준비했어야 하는데 자만심이 너무 강했던 나머지 생명을 걸고 맹세한 것입니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 자만은 실패로 귀결되며 베드로는 심각한 자기 혐오와 실패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누가복음 22장 61절과 62절을 보시면
눅 22:61-62 [61] …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무엇인가 잘해보려는 생각이 완벽히 실패하고 나면, 자기 자신에 대해 철저히 절망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자기 의가 실패하여 통곡한 것입니다. 결국 자만감은 타인과 멀어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신에게는 패배감과 우울증을 가져오는 등 모든 관계를 파괴시킵니다.
예수님은 왜 ‘나를 사랑하느냐?’가 아니라 ‘이 사람들보다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며 베드로의 아픔과 실패를 상기시키셨을까요? 예수님은 베드로를 회복시키고자 질문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은 죄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아버지 앞에서 너를 부인할 것이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심각한 죄입니다. 이 죄를 회복시키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회복이 필요 없는 가룟 유다에게는 가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심각한 죄를 지어도 예수님이 회복시켜 주시는 사람은 은혜로 회복됩니다. 베드로에게 회복이 구체적이고 반복적으로 필요했던 이유는 그가 초대교회의 중요한 지도자 역할을 맡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자만이 드러나고 제거되지 않았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베드로 때문에 상처받고 떠났을 것입니다. 자만한데 힘이 없으면 속으로 비교하고 끝납니다. 그러나 자만하고 힘이 있으면 공개적으로 비난함으로 다른 사람들을 파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자기만큼 헌신한지 않는 자들을 닦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어떤 일을 하기 전에 가장 중요한 일은 비교의식과 자만이라는 내적 죄악이 해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 인생에도 이 자만을 제거하시고자 개입하셨습니다.
제가 텍사스에서 박사를 시작할 때였습니다. 학교의 유학생 모임에서 강의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그 때 저는 새벽 네 시에 일어나서 종일 말씀보고 기도하던 때라 때마다 여행다니는 분들, 주말마다 텔레비전 보는 분들, 몰려다니면서 밥 먹는 분들에게 불만이 있었습니다. 특히 박사 공부만을 하는 사람들은 성경 전체를 관망하지 못하고 특정 부분만 깊이 연구하는 것이라 부족해 보였습니다.
이 분들을 정신 차리게 할 강의안을 완성한 뒤, 말씀에 정진하지 못하는 목사들을 박살낼 각오로 기도를 하는데 감정이 올라오며 마침 베드로 생각이 났습니다. ‘다 주를 부인할지라도 나는 부인하지 않겠다’라는 그의 자만처럼 ‘다 놀러다녀도 나는 최고의 목사가 되겠다’라고 잘난 체 하는 저의 모습이 생각나며 많은 이들 앞에서 들킨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이 기도가 아니었다면 저는 강의에서 목사님들을 비난했을 것이고, 그것이 박사과정 초기였기 때문에 그 이후 6년 동안 무척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 안의 자만심을 마주하며,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 보는 것조차도 하나님이 시간과 기회를 주신 은혜의 결과인데 남을 야단치려고 하는 하나님 되려는 마음을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강의안을 새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부족한 저에게 하나님이 은혜로 깨닫게 하신 것들이 얼마나 놀라운가 하는 간증이었습니다. 가르치려 하지 않고 받은 은혜를 나눴더니 그 분들도 은혜를 받으셨습니다. 강의 후 몇 분이 성경 공부를 하자고 요청하셨고, 그 모임이 커져서 나중에는 학교 강의실을 빌려 목사님, 사모님, 전도사님 7, 80명과 6년을 공부했습니다. 그것이 지금 제가 목회자들을 가르치는 ‘묵상의 숲’의 전신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의 교만함을 드러내신 것은 제 사명이 목회자들을 가르치고 복음을 바로 알게 하는 것이며, 그 강의가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남을 판단하는 인간의 근원적 자만을 가진 채로는 하나님은 여러분을 통해 아무 일도 하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여러분의 근원적인 마음을 드러주실 때 회개하시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통해 많은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로부터 어떻게 회복시키시나요?
2. 사명을 새롭게 하십니다. v.16
두 번째로 예수님은 죄로부터 어떻게 회복시키시나요? 사명을 새롭게 하십니다. 16절입니다.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예수님은 세 번이나 양을 치고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왜 반복하셨을까요? 베드로는 자기에 대해 실망했기 때문에 자기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실패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 실패감을 경험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실패하기 전에 힘이 주어지면 하나님 나라에 방해가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대부분은 사람을 돌보고 먹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을 끝내는 것이 목표라면 하나님은 천사들을 동원하시면 쉽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먹이고, 사람을 케어하고, 사람을 성장하도록 돕는 일입니다. 자기 중심성을 가지고는 가족, 성도, 세상에서 만난 어떤 사람을 온전하게 예수님의 마음으로 돌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실패감을 경험한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사명을 새롭게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처음에 어떻게 부름을 받았나요? 마가복음 1장 16절부터 18절입니다.
막 1:16-18 [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베드로는 생업을 버리고 3년간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생업보다 훨씬 더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을 선택한 것입니다. 무엇인가요? 사람을 낚는 일입니다. 사람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게 하고 성장하게 돕는 일이 얼마나 멋진가를 발견한 것입니다.
범위와 대상은 달라도 이것은 모든 성도의 사명입니다. 단순히 밥 같이 먹으라고 식구로 모아주신 것 아닙니다. 같이 놀러 다니라고 친구를 주신 것 아닙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대상을 하나님 마음으로 바라보며 그들을 구원하고 성장시킬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사람은 빠진 채로 목표만이 존재한다면 인생은 허무할 수밖에 없습니다. 10억을 벌겠다! 그래서 10억을 벌면 그 뒤는 무엇인가요? 높은 자리에 올라가겠다! 그래서 올라가면요? 사람들은 이런 허무를 채우고자 쾌락에 중독되고 탐닉적인 생활을 하거나 더 높은 목표를 세웁니다. 그러나 이런 것으로는 진정한 의미와 행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가 진짜 하나님이심을 전하고, 예수 옆에 서는 영광을 맛보았던 베드로도 지금 사명을 잃고 방황하자 하나님은 사명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세상의 쾌락에 빠지거나, 자기 실패로 포기하고, 복음 안에서 온전히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도 사명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작년에 부산에 사는 제자를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두 살부터 아홉 살까지 딸이 넷인 부산의 내과의사인데 근황을 나누는 중 가을에 캄보디아 선교사로 떠난다고 했습니다. 다니는 교회에서 여름마다 캄보디아로 의료선교를 갔는데 재작년에 문득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흔하디 흔한 의사일 뿐이었는데, 캄보디아 땅에서는 자신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존재인지, 사람들이 1년 동안 오매불망 기다린다고 합니다. 중요하고 가치 있게 쓰임 받는 것이 하나님 뜻이 아닌지, 또한 내가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라면 내가 전하는 복음도 그들에게 영향력이 있지 않을지 고민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네 아이 중 하나가 심각한 악성 빈혈 증세가 있어서 사경을 헤매고, 약도 못 쓰고, 서울 응급실을 오가며 아이를 잃을까 두려운 순간을 지나며 부부가 하나님을 깊이 만났다고 합니다. 겨우 안정기에 들어선 아픈 아이를 데리고 선교를 가도 될지, 아내가 동의할지, 의문을 가지고 한국에 돌아오며, 하나님 뜻이라면 아내에게 직접 말씀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교회의 특별새벽기도 주간에 아내가 갑자기 ‘하나님이 우리 가족을 선교지로 부르시는 것 같다’고 말을 꺼내서, 일사천리로 떠나게 된 것입니다. 2주 전에 온 기도편지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지 모릅니다’라는 제목인데 짧게 읽어드리겠습니다.
티어리스 할아버지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아들들에게 선명하게 믿음을 고백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가슴이 뜨거워졌는지 모릅니다. 너무 행복해서 잠자리에서도 기쁨을 못 이겨 뒤척였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병상에서 믿게 된 작고 연약한 믿음이라고만 생각했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 생각을 아득히 뛰어넘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라고는 병상을 매어 예수님께 달아내리는 일밖에는 없지만, 그것은 믿음의 일이며 믿음의 일이기에 하나님의 일입니다.
예수님은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중풍병자가 죄사함을 얻고 구원을 얻었을 때 친구들은 뛸 듯이 기뻤을 것입니다. 이 기쁨이 너무 커서 다른 기쁨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에서 잔치를 베풀셨을 것이고, 천국의 성도들도 함께 티어리스의 할아버지를 안고 함께 크게 기뻐했을 것입니다.
이 기도 편지를 읽는데 이 친구의 행복과 기쁨이 전달되었습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시골 할아버지가 예수님을 믿고 가족들을 전도하고, 그 행복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전달자. 이것이 바로 사명을 따라 사는 사람의 기쁨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일을 이뤄나가는 기쁨을 맛보지 못하면 결국 세상의 사소한 기쁨, 맛있는 것 먹는 기쁨, 재미있는 것 하는 기쁨, 소소한 그림자 같은 것만으로 이 땅을 살아가게 됩니다. .
하나님이 주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섬길 기회를 주셨음에도 자기탐닉과 쾌락에 이끌려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요? 여러분은 사명을 회복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셔야 합니다. 나의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나를 통해 어떤 사람을 회복시키실 것인가?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음성에 순종하실 때 죄에서 벗어나 큰 행복을 누리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로부터 어떻게 회복시키시나요?
3. 공적으로 회복할 기회를 주십니다. v.17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죄로부터 어떻게 회복시키시나요? 공적으로 회복할 기회를 주십니다. 17절 말씀입니다.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예수님이 똑같은 질문을 세 번 하신 이유는 베드로가 세 번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한 번, 두 번, 세 번을 거치며 베드로 안에 깊이 잠식된 죄책감과 실패감으로부터 그를 끌어 올리시고자 일부러 반복해서 질문하신 것입니다.
베드로의 첫 고백이 거짓이었을까요? 아니, 진심입니다. 그런데 같은 질문이 반복되니까 예수님이 내 진심을 모르시나? 고민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늘 진심이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부인하는 순간에도 그 사랑은 진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진심은 죄의 영향력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죄는 진심보다 더 깊은 곳에서 영혼을 사로잡고 우리를 끌어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이 고백을 구체적으로 반복함으로, 묶여있던 자리에서 벗어나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을 원어로 보면 한글에 드러나지 않는 차이가 있습니다. 첫 째와 두 번째에는 ‘네가 나를 아가페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헬라어 아가페는 아시다시피 진실되고 헌신된 예수님의 사랑을 말할 때 주로 사용됩니다.
‘네가 나를 아가페 하느냐’의 질문에는 어떻게 답해야 할까요? ‘예, 제가 아가페 합니다’가 정상일 것 같은데 베드로는 그 답을 하지 못합니다. 베드로는 세 번 다 ‘저는 필레오 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필레오는 형제들 사이의 사랑,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수준의 사랑입니다.
베드로는 실패하기 전이라면 당연히 ‘예수님을 아가페 합니다’라고 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그 고백을 할 수 없자 예수님이 세 번째에는 ‘네가 나를 필레오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형제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겠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인가요?
예수님은 베드로의 눌려 찌그러진 마음, 예수님의 수준으로 사랑할 수 없는 그의 마음을 아시고, 베드로의 수준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아가페 하지 못한다는 것이 드러났기에 지금의 마음으로는 필레오의 사랑 정도는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필레오는 아가페보다 못한 사랑이지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확신을 주시고자 베드로의 수준으로 질문을 바꾸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수준을 아십니다. 우리의 능력과 헌신도도 아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 쉬운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힘든 일입니다.
사람마다 고민하는 영역과 시험의 영역이 다릅니다. 즉 자기 힘으로는 불가능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주도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수준으로 내려오셔서 ‘이 정도 는 할 수 있겠니?’라고 손을 내미실 때 그 손을 붙드는 자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아시고 회복시키시는 예수님의 세밀하고 자비로운 개입입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무서운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잘못하기를 기다리다 벌주는 분이라고 오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보신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신음을 들으시며, 우리의 눈높이를 맞추시며,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며, 은혜로 세워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은혜를 받은 베드로가 나중에 어떻게 되나요? 예수님을 형제로 사랑한 정도가 아니라 자기 인생 전부를 바쳐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기까지 헌신했습니다. 우리도 지금은 실패하고 넘어지지만, 예수님의 세밀한 은혜를 받아 죄에서 회복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