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설교 009 고난 05 약 1.2-12 고난의 영적 유익
2025년 10월 12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고난은 인생의 본질 중 하나입니다. 인간인데 고난을 겪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고난과 관련된 구절이나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유사한 단어들인 환란, 근심, 고통 시련 이런 단어들을 검색해 보면 성경에 약 530번이 넘게 나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해 쓰여졌기에 당연히 예수를 많이 이야기하는데 ‘예수는’ 천 번 정도, ‘그리스도’는 500번 정도 나옵니다. 성경의 목적인 ‘그리스도’보다 ‘고난’이 많이 언급되었다는 것만 보아도 고난이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고난을 당하고 싶지 않아 하기에 예수를 잘 믿으면 고난이 사라진다고 믿고 싶어합니다. 이러한 기복주의에 대해 성경은 정반대의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를 잘 믿을수록 고난이 더 심화되고 증가합니다. 예수를 안 믿을 때는 내게 닥친 고난만 경험하면 되는데, 예수를 잘 믿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까지도 함께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바울 사도도 예수님을 몰랐다면 그런 큰 고난을 감당하지 않았어도 되었을 것이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잘 믿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고난을 경험했습니다. 예수를 잘 믿어서 더 많은 고난이 임한다면 억울한 일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고난을 겪는 자들에게 바로 영적인 유익이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고난은 어떤 영적 유익을 가져오나요?
1. 인내를 얻게 합니다. vv.2-4
그렇다면 고난은 어떤 영적 유익을 가져오나요? 첫 번째로 인내를 얻게 합니다. 2절 말씀입니다.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 부분을 헬라어 원문으로 읽으면 이렇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많은 시험을 당할 때마다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한글 번역처럼 ‘시험을 당하거든’은 마치 당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가능성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당할 때마다’는 시험이 반드시 있을 것이며 그 빈도 또한 잦다는 뜻입니다.
또한 ‘시험’은 ‘시련’을 번역한 것입니다. 시련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우리가 낙담하고 좌절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낙담할 상황을 우리는 왜 기쁘게 여겨야 하나요? 3절입니다.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하나님 백성의 인생에 시련은 이유 없이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목적이 있으시며, 시련을 통해 믿음을 테스트 하십니다. ‘시련’은 원래 금과 은을 정련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고대에는 정련 기술이 발전하지 않아서 불순물이 많이 섞이곤 했습니다. 이것을 잘 표현하는 구절이 베드로전서 1장 7절입니다.
벧전 1: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물론 더 뜨거운 불로 금과 은을 녹이면 더 순결한 결정체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시대에는 1800도나 되는 불을 만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약한 불로 반복해서 금을 연단하면 결국 불순물이 태워지면서 순도가 높은 금이 나온다는 것은 알 수 있었습니다.
결국 ‘시련’은 금을 연단하듯 계속 불순물을 태워 조금 더 순도 높은 과정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믿음은 완성된 채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을 통해 불 같은 시험이 계속 오는데 그 과정을 통해 우리 안의 불순물이 태워지며 믿음이 온전한 형태를 갖추게 됩니다. 이렇게 믿음이 온전한 형태를 갖춘 결과가 바로 인내입니다.
이 땅에서 연단을 통해 만들어진 인내가 금보다 귀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하나님의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 이 땅의 현실 가운데 발현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은 ‘인내’를 ‘참는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내는 사우나에서 오래 참는 그런 성격의 견딤이 아닙니다. 구약 성경은 이 같은 단어를 헬라어 ‘소망’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 시편 62편 5절에서는
시 62: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이 구절 안에 ‘인내’가 두 번 나옵니다. 동사 ‘바라다’와 명사 ‘소망’입니다. 하나님을 기다리고 믿고 견디는 것이 인내입니다. 믿음이 시련을 당하면서 불로 태워지는 것처럼 고통하는 과정을 지나지만 그 결과로 우리는 현실에 닥치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기다림으로 버텨낼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것입니다.
믿음은 영적인 것입니다. 누구의 믿음이 큰지 순결한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시련을 통해 연단이 되면 우리 삶에서 인내라는 결과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남이 볼 때는 낙담하고 무너질 만한 상황에서도 이 인내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선하고 온전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상황을 주관하신다는 믿음이 생기면 고통 중에도 낙담하지 않고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25절에서는
롬 8: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여기서는 인내가 ‘참음’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우리가 현실을 참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백성을 세상에 던져놓고 방치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실 정도로 큰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즉 우리의 값어치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값어치와 똑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오해합니다. 인생에 고난이 닥치면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나? 예수 믿는 사람도 흔들립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과정도 의미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지키고 인도하시기에 우리가 육체의 수준이 아니라 영적인 수준에서 인내하며 순결한 믿음이 생기는 과정을 잘 지나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인내는 인생에서 믿음의 마침표를 찍는 것 같이 우리를 온전케 한다는 것입니다. 그림을 그렸는데 눈동자가 없으면 안 되듯이, 믿음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믿음을 온전히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인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온전한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사실 육신적 눈이 닫혀야 됩니다. 믿음이 흔들리는 이유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에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련이라는 과정을 통해 믿음이 얼마나 온전한 수준에 이르렀는가를 확인하십니다.
이 과정을 통해 얻게 된 인내는 성도의 인생 가운데 큰 역할을 합니다. 인생이 마음대로 되지 않고 계획한 것들이 무너지고 고난에 처하면 심한 두려움과 불안으로 무너지거나 하나님을 원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인내가 있다면 하나님을 향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상황도 그 사람의 본질을 흔들 수 없습니다. 인내를 통해 보이지 않는 믿음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인내의 다른 말인 소망은 단순한 희망과는 다른 것입니다. 희망은 눈에 보이는 상황이 바뀌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더 큰 실망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학생은 좋은 대학에 가기를 희망하고 사업하는 사람은 사업이 성공하기를 희망합니다.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소망은 하나님이 내 인생을 향한 계획을 가지고 인도하시기에 내가 망하거나 무너지지 않을 것에 대한 확신으로 하나님을 믿으며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요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요? 하나님이 선하고 사랑이 많은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슬람교의 신과 같다면 우리는 소망을 둘 수 없습니다. 이슬람 교도들이 왜 그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냐면 그들은 그 신이 누군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신이 언제 자기들을 기뻐해서 축복을 내려줄지 끝까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고 성지 순례도 하고 시키는 모든 일을 하지만, 죽을 때까지도 천국에 갈지 지옥에 갈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모든 사랑의 증거를 다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잘하건 못하건 이미 우리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안심할 수 있고 지금 벌어지는 한두 가지 일이 내 인생을 망하게 하지 않는다는 확신으로 하나님을 향해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은 눈에 보이는 상황이 변하기를 기대합니다. 저도 인생 가운데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기보다는 상황이 좋아지기를 기대한 적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하나님은 그것 또한 사용하십니다. 내가 얼마나 잘못된 희망을 갖는지 또 그것이 제 욕심임도 깨닫게 하셨습니다.
미국에서 공부를 마칠 즈음에 와달라는 미국의 한인 교회들이 여럿 있었지만 제 부르심은 한국이라는 생각에 다 거절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두렵기도 했었는데 그 때 의존한 대상이 옥한흠 목사님이었습니다. 제가 수요예배 설교하는 것을 좋게 보시고 따로 불러서 칭찬하신 적이 있었던 데다가 마침 미국에 부흥회를 오셨을 때 2박 3일 동안 수행하고 식사하며 깊이 교제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한테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면 자신을 꼭 찾아오라 말씀하셨습니다. 옥 목사님에게 담임 목사 추천을 부탁하는 교회들이 많은데 추천할 사람이 부족하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저에게는 ‘내가 너의 미래를 보장해 주마’라는 약속으로 들렸습니다. 그래서 귀국 몇 개월 전에 무슨 선물을 사가야 하나 고민하곤 했었는데 그 즈음에 옥 목사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썩은 동아줄이자 막연한 희망이 박살나자 절망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을 인도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점점 힘들어지자 아무 데나 가야겠다 생각하고 담임 목사 공고마다 지원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소망을 두지 않고 막연하게 눈에 보이는 상황이 좋아지기만을 기다리는 조급함은 대가를 치렀고, 하나님은 이 과정마저도 사용하셔서 진짜 믿음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결국 2년 만에 저는 ‘하나님 다 내려놓겠습니다. 하나님이 목회하지 말라고 하시면 제가 목회도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하늘사랑교회를 개척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인생에서도 상황이 좋아지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과정을 하나님이 인도하고 계신다는 믿음으로 인내하시며 믿음의 시련을 통해 여러분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소망의 인내가 만들어지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고난은 어떤 영적 유익을 가져오나요?
2. 지혜를 얻게 합니다. vv.5-11
두 번째로 고난은 어떤 영적 유익을 가져오나요? 지혜를 얻게 합니다. 5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5a]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
시련을 통한 인내를 이야기하다 왜 갑자기 지혜를 언급하나요? 성경은 생각나는 대로 아무 얘기를 하는 책이 아니라 모든 구절에는 맥락이 있습니다. 즉 시련 가운데 영적인 믿음으로 인내를 얻었다면, 인내와 소망으로 상황을 이겨내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이 지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이겨내 볼 수 있고 버텨볼 수 있지만 그런 상황에도 매일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고 지혜의 부족을 강렬하게 느끼게 됩니다. 지혜가 단순히 무엇을 고를까 하는 선택의 문제인가요? 아닙니다. 잠언 9장 10절은 지혜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잠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지혜가 A와 B 중 무엇을 선택하는 문제라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고민하는 이유는 무엇이 나에게 유익이 될까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지혜는 하나님의 영적 시각으로 이 땅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판단합니다. 즉 내게 유익이 되는지가 아닌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17절입니다.
엡 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우리는 영적인 시각으로 우리와 남의 인생을 판단할 수 없고 내일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불안하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혜를 허락하시면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영적인 시각에서 지금을 넘어선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내를 발휘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지혜입니다. 지혜를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를 5절 하반절이 설명합니다.
[5b] …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지혜를 얻는 과정도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신뢰하고 그분에게 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 백성이 다 지혜로운 자가 되기를 원하시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늘 염두에 두고 영적 시각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하나님을 믿기가 쉽지 않고, 심지어 지혜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그러다 시련이 오고 나서야 우리는 깨닫습니다.
하나님 제가 지혜가 없어서 너무 힘이 듭니다. 그 때 어떤 마음으로 간구하셔야 하나요? 하나님이 반드시 주신다는 믿음으로 간구하셔야 합니다. 6절부터 8절입니다.
[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인간은 두 가지 때문에 요동합니다. 일단 하나님이 선하게 우리에게 지혜를 주신다는 믿음이 없어서 요동하고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지 못하고 자꾸 단기적인 유익을 원하니까 요동합니다. 그런데 지혜를 얻게 되면 세상을 전혀 다르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9절부터 10절 상반절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9]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10a]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
세상에서는 가난하면 낮은 자이고 돈이 많으면 대단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모두 높은 자가 되려고 하고 그렇게 되지 못하면 낙담합니다. 성경은 뭐라고 하나요? 지혜를 갖게 되면 내가 가난할지언정 스스로를 높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영적 지혜가 바라보는 세상은 10절 하반절부터 11절에 있습니다.
[10b] …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11]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영적인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에서 높다고 하는 것도 꽃처럼 사라질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려서 저희 집에서 꽃과 식물이 많았는데 그 중에는 선인장도 있었습니다. 물을 주거나 놀다가 찔리면 너무 아프고 예쁘지도 않아서 도대체 어머니가 왜 키우시는지 몰랐는데 어느 날 봉우리가 생기더니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께서 오늘 밤에 꽃을 피울 것 같다고 했는데 정말 깜깜한 밤이 되자 꽃이 피는 것이 실시간으로 보였고 정말 아름답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몇 시간 안 되어서 다시 줄어들기 시작해서 아침에 보니 말라버렸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너무 길게 바라보지만 세상의 아름다움은 영원의 시각에서는 하룻밤에 피었다 사라지는 꽃 같은 것입니다. 찰나입니다. 하나님은 이 과정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시각을 갖길 원하십니다. 12절 말씀입니다.
[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들이 시련을 통해 영원한 면류관을 받을 준비를 시키시려고 고난과 고통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인생 가운데 고난이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이 나에게 참된 믿음을 준비하는 과정을 허락하시는구나’ 기억하시면서 이 시련을 통해 내 안에 참 소망이 만들어지기기를 기도하셔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지혜로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해 달라고 기도하셔야 됩니다. 인생의 이 시련을 통해 이 인내와 지혜를 얻게 되신다면 여러분은 비록 고통스러웠지만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축복을 얻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피할 수는 없지만 고난을 통해 아름다운 영적 유익을 얻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