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부활절 창 21.22-22.2 이삭과 예수의 죽음과 부활
2026년 4월 5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33]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34] 그가 블레셋 사람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냈더라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오늘은 부활 주일입니다. 죽음은 어떤 인간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기에 죽음과 부활은 성경에서 아주 중요한 주제입니다. 예수님이 그 죽음을 벗어나고 또 부활하심으로 본인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성경은 '이런 일이 있을 것이다'라는 모형을 반복해서 보여줌으로 앞으로 등장할 중요한 사건을 예측하게 해 줍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죽었다가 부활하는 사건들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아이들을 살린 기적 또한 예수님의 부활의 모형입니다. 이 아이들도 독생자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죽음과 부활이 독생자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예표한 것입니다. 진짜 죽지는 않았지만 거의 죽었다가 살아나는 모형도 있는데 물 속에서 3일간 지냈던 요나입니다. 물고기 뱃속에 들어 있다가 살아났다고 하지만 요나는 자신이 이미 죽었던 자라고 요나서에서 고백합니다. 또한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과 이삭 이야기에도 죽음과 부활이 담겨 있습니다.
이 사건들을 통해, 앞으로 죽음을 극복하고 살아날 분이 오시며, 진짜 하나님이신 그 분이 인간은 해결할 수 없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를 부활케 하실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실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번제로 드린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를 어떻게 바치려고 했는지 9절과 10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9] …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아들을 바치되 특별히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번제는 양이나 짐승을 죽인 뒤에 온몸을 작은 조각으로 토막 내고 내장도 꺼내서 태워야 합니다. 아버지가 죽이려고 하면 아들이 반항할 테니까 끈으로 묶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시자마자 번제를 드린 것이 아니라 모리아 산까지 며칠에 걸쳐 걸어오며 이미 번뇌를 끝냈기에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이 이미 죽은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7절에 보면 130세 아브라함이 2, 30세의 아들을 죽여야 했던 마음이 쓰여 있습니다.
히 11: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약속을 하나님께 받았는데 이 아들이 죽으면 약속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신 약속이니까 하나님이 지키시겠지 하는 믿음으로 아들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처음 부르실 때부터 자손과 땅에 대한 두 가지 약속을 이야기하셨습니다.
한 두 명이 아닌 ‘셀 수 없는 자손’ 그리고 ‘보이는 모든 땅’을 약속하셨는데 문제는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75세 때 부름을 받고 100세까지 아들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땅 한 평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어떻게 약속하셨나요? 창세기 13장 15절부터 16절입니다.
창 13:15-16 [15]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16]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수십 년째 불임인 자에게 아들을 주겠다고 하시고 그리고 나서도 아브라함과 사라가 완전히 자손을 가질 수 없는 나이까지 일부러 기다리신 뒤에야 아이를 갖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처녀도 잉태하게 하실 수 있고 100세 된 할머니 할아버지도 아이를 낳게 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 약속은 하나님만이 이루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일부러 그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믿음이 무엇인가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보이는 상황과 정반대되는 일들, 자손과 땅에 대한 얘기를 여러 번 하셨고, 아브라함이 결국 믿게 됩니다. 왜인가요? 모든 가능성이 사라진 후 정말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들을 낳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1장 1절과 2절입니다.
창 21:1-2 [1]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2]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1,2절을 요약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졌으니 믿을 만하다’입니다. 도저히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황에서 아들을 낳게 되자 하나님의 약속이 진짜임을 믿게 된 것입니다.
자손 뿐 아니라 하나님은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땅에 이미 블레셋 사람들이 다스리고 있었고 왕의 이름이 아비멜렉입니다. 이것은 이름이 아니라 ‘내 아버지가 왕이다’라는 뜻입니다. 즉 대대로 블레셋 왕을 아비멜렉이라 부른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21장 22, 23절 보시면
창 21:22-23 [22] 그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23]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보니 할아버지에 불과한 자에게 하나님이 함께 계시자 왕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이 있음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강력한데 저 사람이 우리를 해하려고 하면 우리가 망하겠다'고 두려워한 나머지 찾아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습니다.
아브라함은 물론 양도 많고 종들도 있었지만 일개 목동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한 나라의 왕이 와서 서로 침공하지 않고 잘해주고 거짓말하지 말자고 왕 대 왕으로 언약을 맺자고 합니다. 언약은 생명을 담보로 맺는 약속입니다. 왕이 왜 개인과 언약을 맺었을까요? 하나님이 함께 계신 것을 보자 아브라함을 왕처럼 대우한 것입니다. 땅은 한 평도 없지만 마치 그 땅의 소유주인 것처럼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제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짐을 믿었습니다. 자식을 가질 수 없는데 자식이 생겼고, 왕도 아닌데 땅을 가진 왕처럼 대우 받는 것을 보며 ‘하나님이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분’임을 알게 되엇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창세기 21장 33절에서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창 21:33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에셀 나무는 사막에서도 1년 내내 푸른 상록수입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심을 기억하려고 심은 것입니다. 또한 거기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영원하신 여호와'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오랫동안 계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내가 영원한 언약을 맺어 이 약속을 지키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17장 7절 보시면
창 17: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영원한 여호와”라고 부른 것은 “하나님은 이 언약을 영원히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이라는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내 편에서 불가능하다고 완전히 포기했는데 하나님이 결국에는 이루심을 믿게 된 것입니다.
내면으로 믿은 것은 외적으로 증명이 되어야 합니다. 누군가 여러분을 사랑한다고 얘기하고는 행동은 전혀 그렇지 않다면 믿을 수 있을까요? 사랑하면 반드시 행위로도 표현되어야 합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영적인 것입니다. 이 영적인 것이 진짜라면 우리 삶과 행위를 통해 반드시 증명이 되어야 온전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믿음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
“그 일”이 무엇인가요? “에셀 나무를 심고 여호와를 영원하신 여호와로 부른 그 뒤”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진짜 믿게 된 뒤”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시험하시려고" 했나요? 아브라함의 영적 믿음이 그의 삶에 실제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지를 하나님이 확인하여 온전한 믿음을 만드시려고 시험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시는 목적이 무엇인가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시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우리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을 진짜라고 믿고 그분의 마음을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고 싶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고 하나님의 관심으로 마음이 기울게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모른다는 것은 즉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내 관심과 욕망에 따라 살게 됩니다.
믿음이 생기면 하나님의 마음이 내 안에 들어와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관심을 두게 됩니다. 이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삭을 바치라고 할 때 보면 수식어가 있습니다. 22장 2절입니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 번제로 드리라
'네 아들,' '네 사랑하는 자,' '독생자'입니다. 지나가는 남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유일한 혈육, 가장 애틋하고 온 신경을 쓰는, 유일하고 하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왜 굳이 이렇게 짚어내셨을까요? 이것이 믿음의 본질입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내실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12장 1절 보시면
창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너의) 친척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 …
괄호의 내용이 한글 성경에는 없지만 히브리어 성경에는 일부러 '너의, 너의, 너의'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저 대상들이 아브라함과 뗄 수 없는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기반이 되는 것들입니다.
고향은 땅으로, 삶의 기반인 물질입니다. 친척은 의존할 만한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집은 우리가 명예와 영광으로 삼고 있는 큰 대상을 말합니다. 학교, 회사 등 내가 속한 대상을 말합니다. 세상에서는 이것이 전부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내 물질, 내 사람, 내가 속한 곳이 나를 지켜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곳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것입니다. 의존할 것 없는 곳에서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 믿도록. 아브라함은 이곳에서 하나님의 보호로만 살 수 있음을 배웠습니다. 블레셋 왕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함께 하심을 인정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하나가 남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랑한 단 하나의 대상을 내려놓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아브라함에게 죽음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온전케 할 것입니다. 믿음이 온전해지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즉 하나님은 지금 무엇을 알려주고 싶으셨을까요?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네 사랑하는 자, 네 독생자를 내려놓으라고 요구하셨지만 실제로 하나님이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 하나님의 독생자를 죄인들에게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이 너무 중요하기에 모든 교회는 1년에 한 번씩 수난을 묵상하고 부활 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사실 사람들은 수난과 부활에 정말 큰 은혜를 받는 경우는 잘 없습니다. 다른 말로 얘기하면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이 마음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알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아들을 보내신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며 얼마나 대단한 희생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 믿음이 생기면 우리는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한 의존을 벗어나 하나님만 온전히 믿고 살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이 생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을 내려놓으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특히 언제 요구하실까요? 믿음이 성장할 때입니다. 초신자한테 아들 내려놓으라고 안 하십니다. 믿음이 어느 정도 성장했을 때 오는데, 잘못된 사랑에서 한 걸음 물러나면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마음도 알게 됩니다.
제 인생에서도 제가 한 단계 성장할 때마다 하나님이 내려놓으라고 요구하셨습니다. 미국에서 그런 일들이 많았는데 특히 유학 8년을 마칠 때였습니다. 사실 제 인생 내내 저를 고통스럽게 했던 것은 돈이었습니다. 지금 보니 너무 명확합니다. 제 영혼의 가장 강렬한 열망은 안정감이라 예측 가능하면 행복하고 불확실하고 통제할 수 없으면 고통스럽고 슬퍼집니다.
8년 동안 돈이 없었지만 하나님이 기적으로 살게 하셨는데 유학을 마칠 때쯤 돈이 똑 떨어졌습니다. 귀국할 비행기표 살 돈도 없어서 신용카드로 긁었습니다. 남은 돈으로 아껴 살다가 한국에 오려고 했는데 졸업비를 내야 졸업식을 참석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졸업비는 졸업 가운, 논문 출판, 행사 비용 등 포함해 천 불 정도였습니다.
사실 유학생들은 쓰던 물건들을 같은 처지의 유학생들에게 팔아서 돈을 마련하기도 합니다. 저도 그럴까 했지만 유학의 모든 비용을 하나님이 주셨던 터라 무료로 다 나누어 주었고 마지막으로 차가 한 대 있었습니다. 차를 팔면 비행기표 4,300불, 이사 비용 2,000불, 졸업비 이 정도 나오지 않을까 계산을 하고 있는데 그때 하나님이 차도 팔지 말고 남한테 주라는 감동을 주셨습니다.
사실 결정하고 굉장히 기뻤습니다. 그때부터 누구에게 줄까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신학생들은 다 가난해서 누구에게 주어도 기쁨으로 받았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주고 싶어서 두 사람을 정했습니다. 저와 6년 동안 성경 공부 같이 했던 목사님 중 애가 셋인데 너무 오래되고 조그마한 승용차라 뒤에 카시트 3개 놓기 힘드신 분과, 부부가 성경 공부 열심히 나왔는데 차가 아예 없는 분을 일단 정했습니다.
첫 목사님께 전화를 했더니 마침 그 전 주에 어머니께서 적금을 깨서 돈을 보내 주셔서 차를 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부부에게 주기로 마음을 정했는데 그 부부가 차를 몰고 지나가는 것을 봤습니다. 그래서 계획이 틀어진다고 생각하는 찰나 어떤 분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귀국 소식 들었는데 차는 어떻게 하냐고 묻길래 이러저러하다고 이야기를 했더니 자기도 사정이 딱하니 자기를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제 성경 공부에 나온 적도 없고 특별히 좋은 관계를 맺은 적도 없어서 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안 된다고 할 수도 없고 다른 사람 주겠다고 할 수도 없고 몇 분간의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 분이 당시에는 혼자 나와 계셨는데 곧 가족이 미국에 올 거라서 밴이 필요하다는 것이엇습니다. 그 때 ‘준다고 해라’라는 소리가 제 안에서 점점 커졌습니다.
하나님 말씀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견딜 수 없어서 드리겠다고 답했습니다. 그때부터 한 달간 차만 타면 그 차를 주기 싫다는 마음이 많았습니다. 차라리 사고 나서 망가져서 안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럴수록 졸업을 기다리며, 빨리 주고 한국 가버리자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졸업이 일주일 남았는데 차가 고장이 났는지 앞바퀴에서 덜그덕 소리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후배를 만났는데 자기 차에서도 소리가 나다가 고속도로에서 앞바퀴가 빠져서 죽을 뻔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얘기를 듣자 '돈 없는 목사님이 차 고치지 못하고 혹시라도 달리다가 차 바퀴 빠지는 사고라도 나고 김일승 목사가 줬다고 소문나면 어떻게 하나' 두려움이 몰려들었습니다. 카센터에 가 봤더니 고치려면 천 불이 든다고 하자 제 안에 다시 갈등이 시작됐습니다. 고장 난 차를 줄 것인가? 차를 받아도 고칠 돈도 없는 분인데 어떻게 해야 할까?
제 친구가 상식적으로 너도 돈이 없는데 고쳐서까지 차를 무료로 주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면서 차를 카센터에 팔고, 그 돈으로 졸업비 내고, 가난한 목사님한테는 미안하니까 천 불 정도 드리는 것이 어떤가라고 제안을 했는데 구구절절 옳게 들렸습니다.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그때 또 들렸던 음성이 '고쳐서 줘라'였습니다. 하나님 음성이 매일 들리는 것 아닙니다. 그런데 너무너무 하기 싫은 일에는 하나님 말씀이 명확하게 들렸습니다. 그 때 딱 이 본문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님이 이삭을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실 때 이 마음이었겠구나.'
차 고치는데 천 불을 내면 제가 졸업비를 못 내서 졸업을 못하게 됩니다. 가운 입고 졸업하려고 미국에서 8년 공부했는데 식장에도 못 들어간다니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지만 기도하는데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마지막 시험이구나. 이것이 내 이삭이구나. 자식처럼 귀한 것은 아니지만 내 돈을 포기하고 내 졸업을 포기하고 내 고집을 포기하는 것이 마지막 시험이구나'라는 결론을 내고 차를 고치러 갔습니다. 얼마나 눈물이 나는지 고속도로를 가다 서다 가다 서다 하면서 돈이 아까워서 울었습니다. 그리고 천 불을 내고 차를 고쳐서 고친 차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카센터를 다녀온 날부터 졸업식까지 일주일 동안 미국에서 저와 공부했던 목사님들이 한국과 미국에서 십시일반 돈을 보내주셔서 일주일 사이에 3천 불이 마련되었습니다. 다들 가난한 목사님들이라 그때까지 한 번도 돈을 받은 적이 없었는데 얼마나 시기적절하게 또 풍성하게 왔는지 졸업비도 내고 한국에 이삿짐도 보내고 돈이 조금 남아서 한국에서 도와주신 분들 조그마한 선물도 살 수 있었습니다. 비행기표 사느라 4,300불 카드빚이 있었는데 그것도 귀국 후 얼마 안 되어서 등록금 냈던 돈이 세금 환급 되었다고 4,500불이 나와서 갚고 남은 200불은 처리해주신 목사님 드리면서 빚도 청산했습니다. 돌아보면 졸업식 사진 잘 찾아보지도 않습니다. 아마 나중에 돈 내면 졸업장도 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습니다.
차가 망가져서 안 주었으면 좋겠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는데 그것이 아주 중요한 마지막 시험이었습니다. 믿음을 증명하는 시험. 그리고 몇 년 후에 이 교회를 개척한 것입니다. 그 이후에는 하나님이 돈으로 시험하시지 않습니다. 물론 돈이 넘치는 것은 아니지만 돈이 있든 없든 불안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무엇을 요구하실 때 이제는 고민하지 않고 바로 결정합니다. 옛날처럼 고민하고 기도하고 울지 않아도 내 욕심을 내려놓아야 하니까 하나님 뜻이 맞구나 바로 결정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나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이렇게 큰 은혜를 베푸셨는지 저는 자주 생각합니다. 부활절이라서가 아니라 이번 한 주도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찬양을 들으며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이 내려놓지 못하던 어떤 것을 요구하시는 바로 그 자리가 여러분의 믿음을 증명하고 또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누리게 되는 가장 중요한 시점입니다. 그 때 순종하심으로 놀라운 믿음의 은혜를 누리시게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