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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은 어떤 책인가?

    요한복음 강해 01

    요 1:1

    2021년 1월 31일 주일예배 설교문

    성경에는 예수님의 일대기를 다룬 네 권의 책인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공관복음이라고 하여 같은 관점을 가지고 서술하지만 요한복음은 조금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오늘은 요한복음이 어떤 책인가 살펴보고자 합니다.

     

    요한복음은 어떤 책인가요?

     

    1.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려주는 책입니다.

     

    마태복음은 왕이신 예수님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지에 관한 관점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마가복음은 섬기는 종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해 기록하고 있고 누가복음은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의 긍휼과 사랑을 보여줍니다. 공관복음서는 왕이냐 인간이냐, 종이냐 라는 예수님의 역할에 초점을 맞춰 예수님에 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밝히고 있습니다. 정체성은 어떤 상황에도 변하지 않는 한 존재의 본질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은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요 20:31)

     

    요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게 하기 위해 요한복음을 기록하였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그분 자체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본질과 속성을 공유하시기에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이신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이와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이니라 …”(출 3:14)

     

    ‘스스로 있다’는 것은 영어로 ‘I AM’,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현재적 하나님이심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피조물이며 시공간의 제한을 받기 때문에 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늘 현재로 존재하며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구약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그대로 가져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I AM’이라고 일곱 번에 걸쳐서 소개하고 계십니다. 대표적인 구절이 이와 같습니다.

     

    “…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I AM)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 8:24)

     

    한글로는 “내가 그이다”라고 되어 있지만 영어로는 ‘I AM’입니다. “나는 나다”라고 말씀하시며 구약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과 동일하게 예수님께서 자신을 소개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얼마나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요한복음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I AM)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요 18:6)

     

    예수님을 잡으려고 군대가 왔습니다. 예수가 어디 있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이 “I AM”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로 그다”라고 말씀하시니, 하나님의 자기 계시만으로도 예수님을 잡으러 왔던 군대가 뒤로 물러가 땅에 엎드러지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 사건은 왜 기록된 것일까요? 바로, 예수님이 구약에서 하나님으로 계시된 그 분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I AM’에는 풍성한 의미가 있기에, 요한복음에서 7가지로 어떤 하나님의 속성을 가지고 계신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7가지 ‘I AM’의 모습이 요한복음에 등장합니다. 먼저는 ‘생명의 떡’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내가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떡은 우리가 먹는 음식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음식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먹을 수 있는 것일까요? 이는 예수님께서 인간을 살게 하는 진정한 ‘영적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만나와 메추라기로 이스라엘 백성의 공급자 되신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의 영적 생명입니다.

     

    두 번째로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이 빛은 무엇을 상징하나요? 어둠을 물러가게 하는 ‘질서’이며 ‘소망’이며 ‘행복’이며, ‘미래’이며 ‘길’을 의미합니다. 어둠은 죄와 슬픔, 저주와 멸망 가운데 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어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며, 예수를 통해서만 생명의 빛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요 10:7)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밤에는 돌담으로 쌓은 양의 우리에 양들을 다 집어넣고 목자가 그 문 앞에서 지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밤에 양들을 집어넣지 않으면 들짐승들이 다 해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양의 문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양과 같은 우리들을 공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의 백성의 보호자며 인도자이시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하신 것처럼, 예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지키시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선한 목자’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

     

    구약 성경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다윗의 고백이 여기서 예수님이 내가 바로 ‘선한 목자’라는 것으로 비유된 것입니다.

     

    다섯 번째로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 11:25)

     

    죽음을 이기는 놀라운 생명의 능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만이 우리의 생수의 근원 되신다고 기록된 것이 예수를 통해 재현되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하나님께로 인도할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다른 길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아가는 것만이 진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로 ‘참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요 15:1)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 이렇게 비유로 예수님을 설명하고 있는 것일까요? 바로 이 비유들이 구약에서 하나님을 소개하는 내용들이었습니다. 그 예수님이 하나님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하는 분이심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어둠을 물리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을 믿을 때, 우리는 어둠 가운데 자유를 얻고 생명과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2,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증거하는 책입니다.

     

    공관복음에서 예수님이 메시야라고 소개하는 책은 요한복음이 유일합니다.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요 1:41)

     

    메시야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메시야를 헬라어로 바꾼 것이 ‘그리스도’입니다. 복음서에서 메시야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을 뿐이지, 그리스도라는 단어는 자주 등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예수’라는 의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말을 통해서도 이것이 고백됩니다.

     

    “[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요 4:25-26)

     

    사마리아 여인은 깊은 영적 갈망을 해결할 사람을 찾고 있었습니다. 깊은 영적 갈망으로 반복되는 삶을 통해 결론을 얻은 것은 자신을 채워줄 대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절망의 끝에서 발견한 것이 바로 메시야라고 하는 구약 성경이 약속하는 그리스도가 오시면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소망을 이야기했을 때,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바로 그 메시야라고 말하십니다.

     

    기름부음 받은 예수님이 오시면 어떤 일이 이루어졌는지를 구약의 ‘기름부음’ 받은 자들의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론에게 거룩한 옷을 입히고 그에게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하여 그가 내게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게 하라”(출 40:13)

     

    제사장은 죄를 지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들을 위해 희생제물을 바치며 그들의 죄의 사함을 중보하던 자입니다. 기름 부음 받은 자가 존재하지 않으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하나님께 중보할 수 있는 자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름부음 받은 자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유다 사람들이 와서 거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으로 삼았더라 …”(삼하 2:4)

     

    왕은 백성을 통치하는 존재입니다. 백성의 필요를 공급하며 위협으로부터 보호합니다. 예수님이 이와 같은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필요를 공급하시며 위협으로부터 보호하시는 분이십니다.

     

    “…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왕상 19:16)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여 말씀으로 깨우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역할입니다. 예수님 없이는 죄의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없고 통치 받을 수 없습니다. 이런 메시야가 없이는 하나님의 백성은 말씀의 인도를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이런 의미로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전체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2장부터 12장까지는 ‘표적의 책’이라고 해서 7가지 표적이 나오며 13장부터 21장까지는 ‘영광의 책’이라고 해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영광을 받으셨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표적은 단순히 기적이 아닙니다. 실체를 보여주기 위한 표징입니다. 예수님이 구약에서 약속하신 메시야임을 증거 하기 위해 표적을 기록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나의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것,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것,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것, 오병이어의 기적, 물 위를 걸으시며 눈 먼 자를 치유하신 기적,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이 구약이 이야기하던 메시야이심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행한 기적과 아주 유사합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왜 기적을 행했나요? 기름 부음 받은 자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기적을 베풀어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요한은 표적을 통해 구약에서 너희가 기대했던 메시야가 이 분이시라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광’이란 성공하거나 잘 되는 세상적인 시각의 영광과는 다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영광이란 다른 것입니다. ‘영광의 책’에서는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는지 묘사합니다. ‘영광’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적 성품과 아름다움이 나타날 때의 찬란함을 의미합니다. 이 영광은 십자가 사건에서 가장 뛰어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영광이 찬란하게 계시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메시야가 어떻게 영광을 받으실 지에 대한 내용에 이미 다 기록된 내용입니다.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

     

    예수님이 어떻게 이런 영광을 받으셨는지 구약에 이미 계시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아름다운 영광이며 아름다운 하나님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이것을 영광이라 생각하지 않고 수치, 저주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조차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이 영광을 성취하는 일임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떠납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재 모습이 아닌가요? 우리가 좋은 결과를 얻었을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십자가의 방법으로 영광을 받으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 자랑으로 영광을 돌리기 원할 때, 우리는 십자가의 방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가 가장 낮아지고 수치스럽지만 그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공의로우심, 하나님의 사랑하심, 하나님의 용서하심, 긍휼하심, 오래 참으심과 성실하심을 드러내는 자가 된다면 이것이 하나님께 가장 큰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이 생각이 변하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실패할 때, 낙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나의 부끄러움과 나의 수치가 드러나 내 존재가 다른 사람 보기에 부러운 존재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경적 관점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영광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었듯이 우리의 볼품없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목적과 뜻이 드러날 때,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되어서 다른 사람에게 은혜가 흘러간 적이 있나요? 성공을 하여 이름이 알려지니 많은 사람들이 감화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아오게 되나요? 이런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십자가의 방법으로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흠이 많은 우리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나며, 하나님 나라가 확장될 수 있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이 생명을 주심을 소개하는 책입니다.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0-31)

     

    예수님은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기적만 기록하셨을까요?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결과는 우리가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생명이 무엇인가요? 생명은 ‘사람들의 빛’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

     

    빛이 무엇인가요? 빛은 질서이며 온전함이며 저주와 반대되는 것이며, 사람들을 충만하게 채우며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생명은 죄가 가져온 결과에서 온전케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을 충만하게 우리에게 주시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죄의 길은 멸망이고 죽음입니다. 이 길에서 돌이켜 생명을 얻게 하는 유일한 길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영원히 사는 것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의 영생의 개념은 시간의 개념이 아닙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영생은 ‘아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예수님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충만히 흘러 들어오는 것입니다. 서로서로 깊은 사랑 가운데 연합되어 서로 가장 귀한 생명을 나누는 상태입니다. 오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만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가장 깊은 행복하며 만족한 연합의 관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깊은 연합은 우리들의 인생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인생은 근원 안에 이기적인 죄성이 표출되기 때문에 깊이 다가 갈수록 만족은 줄어듭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자기 뜻과 자기의 원함이 있기 때문에 더 깊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만족과 기쁨이 줄어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로 말미암아 죄에서 벗어나고 이기성을 벗어나게 되면, 죄가 없는 존재끼리 만나 충만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우리가 영원히 그 분을 알고 배우고 경험해도 한이 없는 무한한 선함과 온전함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분을 영원히 알아가며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이 우리의 기쁨이며 축복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요한복음을 통해 무엇을 배워야 하나요? 먼저, 예수님이 누구신지 바로 알아야 깊은 믿음을 가지고 그분과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깊이 알고 의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알고 배우기 전보다 배운 후에 예수님이 얼마나 좋은 하나님이시구나, 나의 삶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 그분을 더욱 깊이 사랑하고 의존하는 성도들이 되길 원합니다.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요 16:27)

     

    이런 온전한 사랑의 관계가 요한복음을 통해 우리의 인생 가운데 찾아오길 축원합니다. 사랑만 하면 될까요? 사랑을 하면 반드시 사랑하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존재와 하나된다는 것입니다. 뜻이 하나되며 상대방의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뜻과 우리가 하나가 되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예수님의 말대로 하지 않으며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에 관심이 없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말로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배우자가 나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것과 반대되는 행동을 할 때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은 이런 사랑이 불가능합니다. 인간은 서로의 뜻과 생각이 다 다른데, 자신의 것을 다 버리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의 온전한 모습으로 따라가야 합니다. 요한복음을 배우는 과정을 통해 예수님의 말씀에 더 순종하는 여러분 되시길 원합니다. 이렇게 될 때, 성경은 무엇을 약속하나요?

     

    “…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생명을 더 풍성하게 누리게 됩니다. 이 땅에서 슬퍼하며 좌절하는 이유는 예수님 말고 다른 것을 사랑해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뜻이 아니라 내 뜻과 다른 사람의 뜻을 따라 살아서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을 사랑하게 된다면, 예수님을 의존하게 된다면, 예수님의 뜻대로만 살아가게 된다면, 더 풍성한 생명을 누리며 생명이 주는 풍요와 결과를 다른 사람과도 나누게 될 것입니다. 이런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는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