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사랑교회

  • 교회소식

  • 설교영상

  • 자료실

  • 오시는길

  • More

    하늘사랑교회

    © COPYRIGHTS 2018 HNSRCHURCH ALL RIGHTS RESERVED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

    요한복음 강해 03

    요 1:4-5

    2021년 2월 14일 주일예배 설교문

    구약성경에 복 또는 저주라는 단어는 아주 많이 등장합니다. 복과 관련된 단어가 500회 이상 나오며 저주라는 뜻이 담긴 단어는 200회 이상 나옵니다. 우리는 축복과 저주에 대해 구약 성경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단어들이 가장 많이 사용된 곳은 신명기 28장인데, 축복과 저주의 장이라고 불리는 장입니다.

     

    “[3]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4]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5]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 28:3-6)

     

    복에 대한 이 말씀, 우리가 다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도 성경 암송을 하시는 분들 가운데도 신명기 28장 말씀을 중요하게 여기고 암송하였습니다. 특별히 자녀를 가진 분들이 좋아하는 구절은 신명기 28장 13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신 28:13)

     

    그런데 이렇게 구약에 몇 백번이나 사용된 복과 저주라는 단어가 신약성경에는 잘 나오지 않습니다. 물론 축복이라는 단어는 등장하지만 축복이라는 단어조차도 구약에서의 복의 의미가 아니라, ‘축원한다’, ‘인사를 한다’ 정도의 의미를 가집니다. 저주라는 단어도 구약성경에 나오는 내용을 설명하는 용도로만 신약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것일까요? 구약 성경은 신약에서의 실체를 보여주기 위한 그림과도 같은 책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는 복을 보여주기 위해 복을 받으면 장수하며 전쟁에 승리하며 부자가 된다고 했지만, 이는 그림입니다. 신약에서는 더 이상 그림으로 보여 줄 필요가 없기에 이 단어들을 대신한 다른 단어를 사용합니다. 복 대신, 생명이라는 단어 저주 대신 죽음이라는 단어를 등장합니다. 생명이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 165번이 등장하는데, 요한복음에 가장 많이 36번 등장합니다.

     

    [4a]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

     

    여기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예수 안에 생명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구약에서의 ‘복’이라면 예수 안에 복이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생명은 ‘영원’과 합쳐져서 ‘영생’이라는 단어로 자주 사용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복이 부자되고 건강하며 승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복을 충만히 누리는 상태인 영생은 이런 생각과 관련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안다’라는 것은 깊은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생명을 성경은 하나님과 예수와의 친밀한 관계를 누리며 아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면 인간이 인간답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해야만 하는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사람이 태어났을 때, 중요한 장기 없이 태어난다면 ‘살아있다’라고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살아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으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면 죽은 존재인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인간이라는 존재는 육적 부분은 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흙이 인간의 전부가 아니라, 생기라는 살아있는 생명을 불어넣으셨고 이것이 인간을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든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부분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가도록 인간은 창조된 것입니다. 컴퓨터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눈에 보이는 하드웨어가 아무리 좋더라도 하드웨어만 있으면 컴퓨터가 작동되지 않습니다. 하드웨어를 가동시키는 소프트웨어가 없이는 고철덩어리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그러합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부분이 눈에 보이지 않는 생기에 의해 움직여지며, 영향을 받아야만 ‘생명’이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전 3:20)

     

    사람이 죽어 땅에 묻히면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성경은 흙으로 돌아가는 부분 외에 다른 부분이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전 12:7)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 안에 영이라는 부분이 같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 안에 하나님의 생기가 담기는 것입니다. 생기가 담겨있을 때,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생명이 죄로 인해 떠나버린 것입니다. 인간이 생명을 담을 수 있는 영은 가지고 있는데, 그 안이 텅 비어버리고 죄가 가득한 공허한 상태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처음에 이렇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육신은 하나님의 영이 담겨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드신 것입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단순히 잠을 자고 밥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동물의 수준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해서 생명이 있다면, 말씀에 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5, 17)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에 있다는 것은 감정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반드시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복종과 반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하라’는 명령을 주십니다. 하나님을 닮은 우리라는 존재가 생명을 풍성하게 확장하여 더 넓고 풍성한 사랑의 관계를 맺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에서 처음 만들어진 인간은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3-24)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것은 당신은 나의 가장 소중한 존재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다른 대상을 무엇보다 귀하고 가치 있는 존재로 여기는 것입니다. 사랑하게 될 때, 어떤 반응을 할 수 있을까요? 그 상대방의 말에 주의를 집중하게 되고 상대방의 뜻에 따라 움직이며 연합하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하며 다른 사람과 연합하게 됩니다. 연합할 때, 만족하며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한다면 온전한 연합과 사랑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벧전 1:22)

     

    표면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면에서부터 온전한 사랑으로 반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 [8] …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 8)

     

    하나님과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온전하게 사랑하였더니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입니다. 이는 ‘사랑’하기 위한 ‘순종’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성경에서 생명이 충만하다라는 것의 결과는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이웃을 사랑하여 연합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예수님처럼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거짓 없는 사랑을 하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이 없으면 어떤 삶을 살게 될까요? 사랑의 반대는 이기심과 욕심입니다. 이것이 사랑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익이 되는 만큼만 사랑하고 이익이 될 때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다고 할 뿐만 아니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4b] …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생명을 ‘빛’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어떻게 가능할까요? 이는 비유입니다. 빛의 역할이 생명의 역할인 것입니다. 생명이 충만하면 빛이 하는 역할이 인생 가운데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빛은 어두움의 반대말입니다. 어둠은 무엇일까요?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시 107:10)

     

    어둠은 죽음이며 얽매임이며 고통이며 죄악을 비유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흑암과 어둠은 고통과 아픔과 슬픔, 저주를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 어둠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생명의 본질은 사랑으로 말미암은 연합인데, 어둠의 본질은 자기 욕심과 이기심으로 말미암아 관계가 단절되고 고립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자기 중심성’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생명의 빛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동굴 속에 오래 있다가 나오게 되면 빛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동굴 속에 사는 생물은 눈이 퇴화됩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빛을 빛으로 여길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런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 빛을 비추어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1]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사 9:1-2)

     

    앞으로 흑암으로 말미암아 고통하는 자들에게 빛이 임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예언하신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마 4:15-16)

     

    흑암이 가득한 땅에 큰 빛이 비추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 만들어 낸 죄악의 고통과 저주를 밝게 빛나게 만드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빛을 받아들이고 빛이 인도하는 곳을 따라가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대로 사는 것이 옳다고 여깁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요 9:39)

     

    자신이 흑암 가운데 산다고 고백하는 자들은 빛을 주심으로 보게 만드시지만, 자신의 길로 가고자 하는 교만한 자들은 오히려 영적인 세계를 바라볼 수 없게 하셔서 그 상태 그대로 살게 하시는 것이 심판인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심판이 내려진 상황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나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맞는 것이라고 판단하며 살아가며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어둠 가운데 빛을 주셔서 생명을 주러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에게 빛이 비추어 주시나요?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시 119:130)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빛이 비추이면 우리의 어두움이 얼마나 큰 어두움이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어두움의 본질은 죄로 말미암는 영적 공허함이며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이기적으로 반응하며 이웃과 온전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빛이 임하면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이 좁은 생각과 뜻으로 살아가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되며 하나님이 선이라고 하시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말미암아 해부되고 죄가 드러나 참된 본질의 방향성과 모습이 깨달아지며 하나님 앞에서 죄악을 용서받기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영혼에 빛을 비추임 받아 하나님과 이웃과 온전한 관계를 맺는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어둠이 만들어낸 자리로부터 온전한 관계의 자리, 이로 말미암는 행복을 경험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이 풍성한 사람의 모습이며 예수님을 닮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결국 성경은 빛을 진리와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시 43:3)

     

    하나님이 우리에게 빛을 비추시는 것이 진리를 보내어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거룩한 산,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목적하신 것이 무엇인가요? 연합한 우리가 함께 모여 하나님을 경배하며 복종하는 그 자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을 내 안에도 풍성하게 누리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생명의 빛이 우리 안에 비추이게 되면 우리가 발견하지 못했던 이기심과 죄악이 만들어낸 어둠이 빛 가운데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말씀을 사모하게 되며 생명을 얻고자 말씀을 묵상하며 의존하며 귀를 기울여 집중하게 됩니다.

     

    예수를 믿고 있는데도 점점 깨끗해지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면 심각한 오류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도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수 십 년이 지나 죽음을 앞두었을 때, ‘나는 죄인 중에 괴수이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이것이 진리로 인도함을 받아 영혼의 본질이 꿰뚫어진 것입니다. 말씀이 하는 중요한 역할이 이것입니다. 여기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죄악을 고백할 때, 나의 본질과 어둠이 끝이 없으며 흑암의 깊음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깊지만 예수로 말미암아 내 영혼의 깊은 곳에 빛을 비추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생명을 얻게 되어 그 안에서 나는 할 수 없는 말씀에 순종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을 경험할 때, 말씀의 인도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가야 할 길을 비출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생명이신 예수를 믿게 되면 반드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어야 정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면서 나아갈 때, 예수를 알고 깊이 관계를 맺을 때, 빛이 임하여 어둠이 물러가고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게 하셔서 어둠이 물러가며 빛과 생명으로 인도함을 받게 해달라는 기도를 할 때, 생명의 풍성함을 더 크게 누리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