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법
요한복음 강해 04
요 1:6-13
2021년 2월 21일 주일예배 설교문
몇 년 전 부터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라는 이야기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계층이 견고해지면서 어떤 계층에 들어가면 다른 계층으로 이동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가난하게 살다가 부자가 되는 일도 있었는데 이제는 한 번 사회적 지위가 마련되고 나면 다른 지위로 넘어가기가 어려워졌습니다.
몇 년 전 나온 “학생의 잠재력인가 부모의 소득인가” 라는 논문에서는 서울대에 합격한 학생 중 잠재력과 부모의 능력을 비교했습니다. 예전에는 잠재력이 있는 학생들이 합격하는 것이 당연했는데 이제는 부모의 재력이 학생의 잠재력보다 20배나 더 높은 영향력을 미친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다른 논문에서는 서울대 합격률은 아파트 평당 가격과 비례한다는 논문도 나왔습니다. 이처럼 내가 별 능력이 없어도 부요한 삶이 보장되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면 좋을 것입니다. 예전에는 귀족으로 태어나면 이런 부를 누리고 사는 것이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흙수저라는 것이 현실입니다. 성도들 가운데에서도 부모가 금수저를 제공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도 흙수저로 마무리될 수 있는 것 아닌가 한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금수저보다도 더 귀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방법을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살다보면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흔들리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을까요?
1.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요한은 세례요한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세례요한을 어떤 목적을 가지고 보내셨다고 합니다.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요한의 목적은 증언을 하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증언은 법정에서 쓰는 단어입니다. 어떤 사람이 확실하게 죄가 있다거나 없다고 증언을 해서 확실한 결정을 이끌어내는 것에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세례요한은 무엇을 확실하게 이야기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인가요?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확실하게 증언하기 위해 보냄 받은 것입니다.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증언을 하러 온 것이지 요한이 메시아가 아닌 것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당시 세례요한이 메시아인줄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이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눅 3:15)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렸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자체가 이스라엘이 망한 이후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던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 메시아가 오면 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서 자유를 누릴 것을 이야기했기 때문에 메시아에 대한 열망이 커졌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을 그냥 보내시면 되지 왜 세례요한을 먼저 보내신 것일까요?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빛이 어둠가운데 임하면 모를 수 있을까요? 어둠 가운데 아주 작은 빛이라도 임하면 빛은 어둠을 물리칩니다. 시골 같은데 가서 하루를 지내보면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별들이 가득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빛이신 예수가 오셨는데 인간이 빛을 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완전히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이 빛을 받아들일 수 없는 완전한 타락의 상태였기에 사람들이 빛을 받아들이도록 미리 알려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왜 메시아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일까요? 가장 큰 이유는 메시아가 자신의 유익을 위한 존재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을 나의 문제를 해결해 줄 자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의 모든 사람들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부요케 해주는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이 모습과 우리가 신앙이 약할 때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모습이 차이가 있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모든 사람들의 예수가 같은 예수가 아니라, 자신의 유익을 가져다주며 필요할 때 도움을 주는 정도의 신이라면 그 신이 어떤 신이던 상관이 없다는 것이 사람의 태도입니다. 이것이 죄의 모습입니다. 죄는 자기중심적이며 방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마저도 나의 유익을 위한 도구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그렇게 바라보든 하나님을 그렇게 바라보든 관계는 깨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나의 유익만을 위한 존재로 바라본다면 관계는 깨지게 되어있습니다. 상대방을 자신의 유익을 위해 바라본다면 이는 욕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자신의 욕망을 위해 바라본다면 이것이 어둠이고 죄악입니다.
조엘 오스틴 목사가 이끄는 레이크 우드 교회는 미국에서 가장 큰 교회입니다. 예전에 조엘 오스틴에 대해 너무 멋지고 대단하다고 여기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상했습니다. 긍정적인 생각만 가지면 누구나 부자가 되고 누구나 잘 될 것 같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기독교인가 생각했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가보지도 않고 비판한다고 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6시간 정도 차로 걸리는 거리라 리더십세미나에 참여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첫 세션에 하나님은 부자이시고 하나님은 좋은 것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부자아버지가 자녀가 굶고 있는데 주지 않는다면 부모로서 책임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못 받느냐, 아들이 불평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좋은 아버지니까 내가 필요한 돈을 다 채워줄 꺼야 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둠의 본질입니다. 어둠의 본질을 가지고 하나님을 접근하면 하나님을 절대 알 수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좋은 분이십니다. 모든 능력도 다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가장 좋으신 이유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이 세상의 부귀보다 더 뛰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가장 먼저 어둠을 깨우치기 위해서 한 행동은 듣는 자들을 깨우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이야기 한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마 3:7,9)
성경에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워낙 예수님을 핍박하고 욕을 많이 먹어서 정말 나쁜 사람들이라고 우리는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당시 그들은 당대에 가장 존경받고 인정받는 종교인들이었습니다. 아마 지금으로 치면면 엄청 유명한 목사님, 대단한 영향력을 미치는 장로님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향해 무엇이라고 부르나요?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부릅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자녀들이야, 아브라함의 좋은 것을 다 누릴 것이야’라고 당연히 여기고 있는 그들을 독사의 자식이라고 부릅니다. 독사는 성경에서 사탄을 이야기 합니다. 자기 자신을 괜찮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마귀의 자식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향한 전적 믿음과 의존을 이야기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예수님을 필요 없게 되는 어떤 의존의 대상도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의 의이건, 선이건, 교만이건, 부이건 어떤 것이라도 인간은 아주 조그만 것이라도 자신이 잘한다면 예수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설사 말을 그리 하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또한 세례요한은 두 번째로 예수님이 얼마나 높고 위대한 분이신지를 이야기 합니다.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막 1:7)
신발 끈이 무엇이길래 신발 끈도 못 묶느냐고 생각하지만, 고대의 발은 워낙 더러운 것이었습니다. 포장되지 않은 도로에서 오물을 밟고 다녔던 고대에 발은 웬만하면 만지지 않아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신발을 닦는 하인은 가장 낮은 하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얼마나 높은 분이신지 신발 끈조차 멜 수 없다고 높이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어떤 일이 가능한지 이야기 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막 1:8)
세례요한이 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모형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진짜는 예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중요한 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 세례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자리를 망각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나요? 이것은 눈으로 보이는 변화가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게 하십니다. 어둠의 실체가 드러나게 하시며, 이를 통해 예수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예수님 앞에 나아가게 하십니다. 내가 스스로 잘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매일 의존하며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안해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생각보다 나의 생각이 더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이것마저도 어찌 보면 어두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생각이 나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길잡이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빛 되신 예수그리스도에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을 주인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눈에 보이는 빛이 아닙니다. 참된 빛이 있다고 합니다. 영적 어둠을 물러나게 하는 빛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참 빛이 비췄는데 어떤 일이 일어났나요?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참 안타까운 것 아닌가요? 예수님이 이 세상을 지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이 오셨는데 지음 받은 존재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엄마 아빠가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키워주고 낳아준 엄마 아빠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엄마를 아줌마로 부르고 아빠를 아저씨라고 부르면 얼마나 비참한 상황인가요. 예수님이 만드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만드신 예수님이 오셨는데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땅도 예수님 땅이며 백성도 예수님의 것이며, 다 예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영접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영접한다는 것은 어떤 대상과 친밀한 관계를 위해 붙잡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건을 영접한다고 하면 물건을 꽉 잡아서 취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그를 꼭 붙들고 의존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수님의 땅에 오셨는데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죄의 가장 근원적인 속성입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죄는 인간을 하나님처럼 만들고자 하는 근원적 영향력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면 예수님이 나의 결정권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주인이었을 때는 내가 나의 기준을 가지고 살고 있는데, 주인이 나타나서 어떤 것이 좋은 것이라고 이야기 해주는데 여기서 갈등이 생깁니다. 이런 주도권 싸움이 죄의 본질입니다. 성경에서 볼 때 지금의 관점으로 얼마나 나쁜 짓을 한 사람들이 많은가요? 다윗은 살인교사, 간음을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이야기 합니다. 죄의 본질은 영적 근원에서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믿겠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는 것이고, 그분의 결정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여기서 진짜 하나님의 자녀인가 아닌가 심각한 갈등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부요를 누리지 못하나요? 어떤 영역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만 어떤 영역에서는 받아들이니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 좋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가 원하는 것을 허락하시기도, 하지 않으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진짜 중요하게 원하시는 의존과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진짜 의존하면서 관계를 맺게 된다면 그게 더 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영접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겠습니다. 하지만 내 마음대로 살게요.”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인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예수의 이름의 뜻이 무엇인가요?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죄에서 구원받는 것이 예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고 그분이 나의 삶의 주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 삶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내가 원하는 것이 이뤄지지 않아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더라도 하나님 맞습니다. 하나님이 선하십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떠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그것으로 만족하고 자족할 수 있는 것이 죄에서 벗어나고 예수를 잘 믿는 사람,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골 2:6)
‘받았으니’라는 단어가 영접하다와 같은 단어입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인이시고 우리가 종인 상태, 예수님의 마음에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매순간 예수님의 뜻을 의존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신가, 어떤 마음을 가진가를 고민하며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영접하면 다른 주인이 예수와 경쟁하면 안 됩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마 6:24)
우리 인생에서 계속 벌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두 주인을 섬기기에 어려운 것입니다. 한 주인의 영향만 받으면 편한데, ‘부자가 되는 것이 최고야, 너만 부자가 되지 않고 있잖아, 너는 성공하지 못하면 불행한 거야, 너는 잘못 선택하면 벼락거지가 되어서 영원히 고통받을 거야.’라는 말이 계속 우리 귀를 맴돌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벼락부자가 되지 못하고, 남들과 같은 편의를 누리지 못하더라도 예수그리스도로 인해서 만족을 누리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노력한다고 되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이것은 다른 주인을 섬기는 우리의 옛사람이 죽는 것만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갈 2:20)
이렇게 되어야지만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게 하는 옛 자아가 죽고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도록 하는 자리에 이끌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하면 당연히 이런 과정이 일어나야 마땅합니다. 나의 삶에도 계속해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주인이 두 명도 아니고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주인들이 하나 하나 떨어져가며 예전에 가지고 있던 불안으로부터 엄청난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어지는 영적 견고함입니다.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하나님께로 난 모든 사람에게 이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날 수 있는가요?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5-6)
그래서 이 세례요한이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자들만이 가짜 주인, 우리를 멸망하게 하는 사람들로부터 자유하게 되어 우리를 멸망으로부터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얻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하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