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의 기도 1
사무엘하 강해 26
2020년 1월 26일 주일예배 설교문
회개(悔改)라는 단어는 한자어로 뉘우칠 ‘회’, 뉘우칠 ‘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회개란 뉘우치고 바로잡는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회개라는 단어에 사용하는 원어는 ‘수구’인데, 히브리어 ‘수구’는 행동을 돌이켜 반대방향으로 가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헬라어는 ‘메타노에오’인데, 돌이켜서 깊이 생각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행동을, 신약에서는 생각을 바꾸는 것을 회개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행동을 이야기하는 것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라, 내면의 변화를 할 수 없기에 행동의 변화를 추구하도록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후인 신약에서는, 예수님으로 인해 마음의 본질을 바꾸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회개했다고 하는 것은 마음의 본질이 바뀌어 우리의 행동이 바뀌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단을 통해 다윗의 죄를 하나님께서 지적하셨을 때, 다윗은 그것을 바로 인정하였습니다.
[13a]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
그런데 이와 같이 말로 한 고백이 진짜 회개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사람들은 알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말로만 잘못했다고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잘못한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고 겉으로만 잘못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했다고 했던 것은 진정한 회개였습니다. 그 증거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고백을 받으시고 죄를 용서해주셨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3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13b] …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용서를 통해 다윗이 진짜 회개를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증거가 있습니다. 바로 시편 51편입니다. 밧세바 사건 이후에 다윗이 시편 51편을 적으면서 자신이 얼마나 깊은 회개의 과정을 겪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51편의 부제인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예언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시편은 개인적인 일기가 아닙니다. 군중이 함께 부른 찬양집이었으며 사람들이 어떻게 기도할지 모를 때, 하나님께 기도하며 나아가게 되는 공동기도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지금까지도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데 사용되는 중요한 문서인 것입니다.
일기도 아닌데, 다윗이 자신의 죄를 고백한 것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교훈을 받기를 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왜 우리아를 죽였습니까? 다윗은 죄가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서 우리아를 죽였습니다. 자신의 죄가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서 사람을 죽였던 다윗이, 모든 사람들 앞에서 시를 써서 자신의 죄를 공개하는 것 자체가 다윗 자신이 진정 회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사람은 결국 죄의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하면, 하나님 안에서 성장도, 하나님의 풍성함을 누리는 것도, 관계 가운데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회개를 통해 어떻게 이런 것들을 누릴 수 있는 알아보고자 합니다.
1.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의 성품을 믿어야 합니다.
[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본문에는 ‘인자’, ‘은혜’, ‘긍휼’과 같은 단어들이 반복됩니다. 이는 받을 자격이 없는데 주는 자의 주권을 통해 받는 사람이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속성들은 인간관계 가운데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입니다. 사람들은 서로 인자로 반응합니까? 아니면, 은혜로 반응합니까? 사람들은 긍휼이 많은 사람들입니까? 사람들 가운데는 이런 성품을 지닌 사람들이 아주 드뭅니다. 어떤 상황에서만 긍휼을 베풀 뿐입니다. 어떤 항상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극히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왜 하나님께 이렇게 반응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시 103:8)
성경을 읽다보면 이런 문구가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요나서, 시편 등에서 위와 같은 문구가 반복됩니다. 핵심적인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성경에서는 왜 이러한 내용들이 반복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시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러한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조건을 가지고 관계를 맺고, 보복을 하고, 잘못을 끝까지 찾아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자하고 긍휼이 넘친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을 사실 경험한 것으로 반응합니다. 나의 부모님이 나를 대한 방식이 내가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특히 죄로 말미암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르십니다. 사람은 죄를 짓거나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을 드리는데 실패했다고 느낄 때, 하나님 앞에 일정하게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문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의 행위를 오히려 보상받을 것으로 여기며 율법주의적인 행위로 여기게 됩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의 시발점은 이곳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철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수도사가 되길 원했는데, 자신 안에 음란함과 욕망 등이 떠오를 때 그는 진심으로 괴로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을 채찍으로 때렸습니다. 그는 방에 혼자 있을 때, 자기 자신을 심하게 때리며 울부짖으며 기도를 해서 주변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로마에 가서 참회의 계단을 올라가다가 자신이 아무리 노력을 하여도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믿지 못하며, 우리는 우리 안에 죄가 나타나고 실패하면 하나님을 피해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목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지만, 실패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싫어하시겠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뭘 잘해서 좋아하고 못해서 싫어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그냥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냥 하나님 앞으로 나오기를 기다리십니다.
다윗은 끔찍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아내가 한 명 뿐인 사람의 아내를 빼앗고 그를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도 그런 사람을 죽여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시기 때문에 이런 사람에게도 긍휼을 베푸실 수 있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약속을 지킬 힘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 앞에서 약속을 하더라도 약속을 지킬 수 없습니다. 우리가 결혼생활을 할 때, 사람들 앞에서 사랑하기로 약속하지만, 서로 사랑하며 살지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조건을 가지고 결혼할 정도로 노골적입니다. 얼마나 많은 돈을 나에게 제공하는가, 부모는 얼마나 풍요한 재산을 나에게 줄 것인가, 그러데 이런 조건들이 유효합니까? 유효하지 않습니다. 조건들은 바뀝니다. 20대의 조건은 40대에 들어가서 바뀌게 됩니다. 20대의 조건이 50대가 되면 하나도 중요해지지 않습니다. 만약 50대가 되어서도 20대의 조건들을 찾는다면, 절대 이런 것이 채워질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의 필요가 달라지기 때문에 원하는 조건들은 변합니다. 우리는 사랑하려고 결혼합니다. 그리고 이는 만인 앞에서 약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지키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런 관점을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동일하게 가지고 있다면 문제입니다.
우리가 잘해서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만 나아가면, 하나님은 은혜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에 의거해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10번이나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은혜로우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이것이 다시 반복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십자가로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기도의 시작입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잘살았는지 자랑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십자가 앞에서 우리 영혼의 깊은 죄악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 회개의 기도는 자신의 죄악을 인정해야 합니다.
[3]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우리는 우리의 죄악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성숙하게 된다는 것은 우리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죄의 근원은 우리의 영혼에 있습니다. 죄가 있는 영혼은 계속해서 그런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우리는 관계를 계속해서 파괴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성숙하면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의 죄악을 깨닫고 인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영혼의 죄악을 들여다보기 보다는 타인의 죄악을 들추고 지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타인을 지적하는 사람일수록 그것이 자신의 죄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를 깨닫는 것이 정말 어렵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그 부분에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자기교만에 사로잡힌 사람일수록 교만하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없는 경우와 동일합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우리가 죄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죄로 지으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5]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다윗은 어머니가 자신을 죄 중에 잉태했다고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이에 대한 해석이 나오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다윗을 사생아로 여기기도 하지만 이것은 근거가 없는 잘못된 주장입니다. 이 말씀은 다윗이 얼마나 죄의 영향력 아래 있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생명을 넣어주셨는데, 죄가 들어와 생명이 떠난 존재가 되었습니다. 부부가 아이를 만들 때, 몸만 만들지 않습니다. 생명 없는 아이 속에 영이 들어오게 됩니다. 영 안에 영적 생명이 담겨있는데, 영적 생명이 떠나면서 빈 그릇처럼 살아가게 되는 것이 우리입니다. 위의 본문은 이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나더라도 생명이 없이 태어나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것이고, 죄 중에 잉태했다는 것은 이를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온전한 삶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영향 미치지 않으면, 우리는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뿌리부터 죄의 영향을 쉽게 받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와 긍휼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간구하는 복, 그 복의 실체가 하나님의 생명이며 하나님의 성령입니다. 이 성령, 생명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성숙의 척도입니다. 우리는 호흡을 할 때, 우리의 산소총량이 얼마나 필요한지 계산하며 살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공기의 중요함을 절대적으로 깨닫는데, 그는 바로 물속에 빠진 사람입니다. 우리도 가끔 깨닫습니다. 우리가 정말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은 우리이 관계가 파괴되는 고통 가운데 있을 때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악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 깨닫는 순간들이 고통 중에 찾아오고, 하나님이 이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다윗은 사람을 죽이고 여자를 강간했는데, 하나님께만 죄를 지었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죄의 근원과 본질이 원래는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범죄했는데 이것도 근원적으로는 하나님께 범죄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사람들에게 보이는 반응을 하나님 당신에게 보이는 반응으로 보십니다. 주변사람들 중 멋진 사람들에게 하는 반응은 누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 약하고 볼품없고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을 보내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하는 반응을 통해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를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임하는지 알지 못하고 사람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가 펼쳐지는지 알지 못하면, 우리는 사람들을 쉽게 멸시하고 핍박하게 됩니다.
당연히 가져야 할 것을 갖지 못한 사람을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요? 멸시할 것인가요? 그래서 성경은 형제를 보면서 라가(바보)라고 하는 사람은 지옥에 갈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조금만 어떤 것을 더 잘하면 상대방을 비난합니다. 내가 가진 기준을 배우자가 갖추지 못했다면 그를 비난하게 됩니다. 나의 사랑으로 그의 부족함을 채우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섬기기보다는 끊임없이 그를 지적하고 괴롭힙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람을 사랑하기보다는 사람을 파괴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자를 하나님인 것처럼 바라보며 그를 섬기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이전보다 더 성숙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 회개의 기도는 정결케 하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7]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성경은 죄를 오염물질처럼 취급합니다. 우슬초는 피가 묻었을 때 씻어내게 하던 풀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정결하게 만들었습니까?
“우슬초 묶음을 가져다가 그릇에 담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출 12:22)
더러운 것 위에 피를 묻히면 깨끗해지나요?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영적인 것을 시작적인 것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죄의 근원은 영입니다. 우리의 생각의 근원인데, 우리가 깨달을 수 없는 것이며 인지의 수준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채울 수 없는 공허와 결핍을 우리가 깨닫고 인지할 수 있는 수준으로 보여주십니다.
우리의 감정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분노에 대한 영적인 이유는 우리가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해서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나타나는 감정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 노릇을 하고자 한다는 뜻입니다. 슬픔은 우리의 욕망이 채워지지 않을 때, 좌절할 때 나타나는 감정입니다. 비난은 어떤 대상이 우리의 욕구를 채워주는 존재여야 하는데, 만족시켜주지 않을 때 나타나는 감정입니다. 모든 감정을 다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이런 감정들은 우리의 내면이 하나님 없는 영혼으로 채워져 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 안을 하나님의 것으로 채우시고 하나님이 다스리는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가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눈보다 더 희게 만들어주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고통하며 분노하는 이유는 사람이나 환경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본질 안의 문제 때문입니다. 우리가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욕구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만이 나를 만족시키셔서 하나님의 은혜가 다스리는 인생’이 얼마나 더 큰 풍요와 기쁨이 넘치는 인생이 되는지 알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를 찬양하는 백성을 만들고자, 하나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회개할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