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악의 거울
사무엘하 강해 31
2020년 3월 1일 주일예배 설교문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 중 하나가 자신의 죄를 명확하게 보는 것입니다.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듯이 자신의 죄악을 전부 깨닫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죄악은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영혼에서 우러나온 내적 경향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잘못된 행동을 하면서도 상황 탓, 남 탓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악을 직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성도가 어쩌다가 자신의 죄악을 깨닫게 되더라도 이것은 그가 뛰어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에 의한 것입니다.
다윗도 죄를 깨달았습니다. 다윗도 하나님의 개입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다윗은 죄악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성령으로 개입하실 때도 있지만 이것도 그 사람이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때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보게 하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가까운 사람의 죄악의 모습을 경험하고 그 사람이 고통하는 것이 나의 고통이 되면서 경험하고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정도로 나를 고통하고 파괴할 만큼 가까운 사람은 가족밖에 없습니다.
다윗이 바로 그런 상황에 처해있었습니다. 다윗이 했던 모든 죄악을 암논이라는 다윗의 장자를 통해 반복되고 있고, 압살롬을 통해서 다시 반복되고 있습니다. 다윗의 죄악의 똑같은 모습이 자녀들에게 반복되는 것을 보면서 다윗은 자신의 죄를 들여다보게 됩니다. 인간의 죄성은 근원적 모습이 비슷한데, 다윗이라는 한 사람을 통해 그 죄악의 참혹함과 고통을 더 또렷하게 목격하게 하신 것입니다.
결국 가족이라는 존재가 자신의 죄악을 반영하는 도구가 되는 것을 왕왕 봅니다. 가족의 죄악을 보면서 내가 깨닫지 못한다면 심각한 것입니다. 가족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죄악을 발견해야 하는데 남 탓만 한다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여정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1. 죄악의 거울에 무엇이 반사되는가_거짓이 반영됩니다.
[1a]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앞장의 내용과 이 내용은 아주 연관이 깊습니다.
[1b]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게 아름다운 누이가 있으니 이름은 다말이라 다윗의 다른 아들 암논이 그를 사랑하나
다윗은 여러 아내를 통해 여러 자식들을 두고 있었습니다. 암논은 아히노암의 아들이고, 압솔람은 다른 사람의 아들입니다. 압살롬에게 누이가 있었는데 그게 다말입니다. 압살롬이 미남이었듯 다말도 미인이었습니다. 암논은 다말을 사랑했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이건 정욕적인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파멸을 몰고 옵니다.
[2] 그는 처녀이므로 어찌할 수 없는 줄을 알고 암논이 그의 누이 다말 때문에 울화로 말미암아 병이 되니라
원래 처녀라고 하면 더 좋은 것 아니었나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유부녀였다면 더 사귀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암논은 이 사실 때문에 병이 걸릴 정도로 갈등이 됩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암논의 사랑이 정상적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처녀성을 빼앗는 것은 율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암논은 다말을 알아가고, 관계를 만들어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저 몸을 가지고 싶었습니다.
“그 동침한 남자는 그 처녀의 아버지에게 은 오십 세겔을 주고 그 처녀를 아내로 삼을 것이라 그가 그 처녀를 욕보였은즉 평생에 그를 버리지 못하리라” (신22:29)
지금으로 보면 적용되지 못하는 율법이지만, 당시로 보면 처녀성을 너무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처녀성이 훼손되면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기에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더불어 이복누이와는 결혼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암논은 다말을 욕정을 충족시킬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혼의 대상으로는 율법으로 막혀져 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병이 되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에게는 비슷한 친구가 있기 마련입니다.
[3] 암논에게 요나답이라 하는 친구가 있으니 그는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이요 심히 간교한 자라
사실 '간교'라는 단어는 보통 '지혜'로 번역됩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아주 나쁜 아이디어였기 때문에 간교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친구 요나답은 아주 나쁜 아이디어를 줍니다. 거짓말을 하는 것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5] 요나답이 그에게 이르되 침상에 누워 병든 체하다가 네 아버지가 너를 보러 오거든 너는 그에게 말하기를 원하건대 내 누이 다말이 와서 내게 떡을 먹이되 내가 보는 데에서 떡을 차려 그의 손으로 먹여 주게 하옵소서 하라 하니
아픈 척을 해서 병간호를 하게 해서 욕을 보이라고 한 것입니다. 거짓말이라는 것은 자신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충족할 수 없을 때 취하는 악한 방법입니다. 암논의 거짓말에 다윗이 넘어가고, 이를 허락함으로써 결국 다말이 욕을 보이게 됨으로서 이 모든 것의 책임에 다윗이 있음을 보여주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도 거짓말을 했었습니다.
[7] 우리아가 다윗에게 이르매 다윗이 요압의 안부와 군사의 안부와 싸움이 어떠했는지를 묻고
[8] 그가 또 우리아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내려가서 발을 씻으라 하니 우리아가 왕궁에서 나가매 왕의 음식물이 뒤따라 가니라 (삼하11:7-8)
마치 다윗은 전쟁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지만 다윗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감추고자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다윗도 암논, 요나답과 비슷한 간교한 모습으로 타인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용하는 모습입니다.
어떤 욕망이 있는데 이를 정상적으로 취할 수 없을 때 하는 것이 거짓말입니다. 그리고 이 욕망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성의 일부입니다. 그래서 우리 어느 누구도 이 거짓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거짓말을 우리는 아무도 안하고 살까요? 거짓말을 나는 절대 안한다는 것이 가장 큰 거짓말입니다. 속으로는 불편한데 '괜찮아요'라는 거짓말, 누군가를 싫어하는데 좋아하는 척 하는 거짓말,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의 근원은 인간의 욕망이 죄를 만들어내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습이 마귀의 모습과 닮아져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요8:44)
마귀의 본질을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욕심, 거짓말, 살인’, 결국 다윗의 삶 가운데 밧세바의 사건을 통해 드러난 것이 마귀의 본질과 닮아 있었는데 암논을 통해서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다윗, 암논과 같이 특별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특질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있는 모습이며 이것이 계속해서 들통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들통 나야 합니다. 나는 선하고 착한 사람이라는 것, 나는 악한 사람에 비해 나는 선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큰 문제입니다. 마귀와 영혼의 본질에서부터 너무나도 닮아서 남에게 해악을 끼치면서도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못하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신천지도 그 중 하나입니다. 신천지의 가장 독특한 점은 거짓말을 자신의 공식전략으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구의 아주머니가 글을 올렸습니다. 가족이 모두 코로나가 걸렸습니다. 아들을 방문 교사가 가르쳤는데, 코로나에 걸린 이후에 알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알고 보니 신천지 교인이었습니다. 그는 신천지교인은 모두 자가격리하라는 문자도 받았는데, 자신이 신천지임이 들키지 않기 위해 방문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집에는 폐암으로 투병하는 아버지가 있었는데 그마저 걸려버린 것이었습니다.
신천지 사람들은 자신으로 말미암아 타인이 고통을 받을지라도 끊임없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31번 환자는 자신이 병을 퍼뜨리고도 자신이 타인의 생명을 구했다고 이야기 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구원자라고 이야기하는 이만희의 모습, 인간이 어떻게 영생할 수 있을까요? 이만희가 빨리 죽어야 이런 논쟁이 수그러들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에 속은 사람들이 우둔하기 때문일까요? 이는 영적 힘에 의해 사로잡힌 것입니다. 세상을 탈출하고 싶고 괴로운데, 누군가가 이곳에서 떠나고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짓에 사로잡혀 신천지라는 늪에 빠져드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회복시키시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신천지에 다니던 사람들의 대부분이 교회에 다니고 있었던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교회에 다녔음에도 예수를 믿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신천지에 가면 성경을 가르쳐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금만 성경을 안다면 이것이 말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지 못하고 따라가다가 이만희를 구원자로 믿을 만큼 한국교회가 성경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이 뼈아픈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믿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죄악의 거울에 무엇이 반사되는가_강간입니다.
[8] 다말이 그 오라버니 암논의 집에 이르매 그가 누웠더라 다말이 밀가루를 가지고 반죽하여 그가 보는 데서 과자를 만들고 그 과자를 굽고
결국 다말을 부른 다음 자신의 본색을 드러냅니다.
[11] 그에게 먹이려고 가까이 가지고 갈 때에 암논이 그를 붙잡고 그에게 이르되 나의 누이야 와서 나와 동침하자 하는지라
진짜 미친놈입니다. 누이라고 부르면서 자신과 동침하자고 합니다. 다말은 이에 동의할 수 없는 정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12] 그가 그에게 대답하되 아니라 내 오라버니여 나를 욕되게 하지 말라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마땅히 행하지 못할 것이니 이 어리석은 일을 행하지 말라
다말은 절제해서 이야기 하지만 속으로는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구들은 모두 어떤 사건들과 연관된 표현들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들에서 이를 듣고 돌아와서 그들 모두가 근심하고 심히 노하였으니 이는 세겜이 야곱의 딸을 강간하여 이스라엘에게 부끄러운 일 곧 행하지 못할 일을 행하였음이더라” (창34:7)
절대로 일어나야 할 일, 이스라엘에서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일이었습니다. 세겜 사람들이 야곱의 딸들을 강간한 사건에서 나오는 문구입니다. 부끄러운 일, 우둔한 일은 '나발이라는 단어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남자는 완고하고 행실이 악하며 그는 갈렙 족속이었더라” (삼상25:3)
이는 나발에 관한 사건을 언급한 것이었습니다. 나발이라는 단어의 뜻은 원래 멍청하다는 뜻인데, 이 두 사건들의 결과는 모두 죽음이었습니다. 이 두 사건들을 언급하면서 다말은 이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욕망에 사로잡혀 인간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암논은 하고 맙니다.
[14] 암논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고 다말보다 힘이 세므로 억지로 그와 동침하니라
그리고 힘을 가진 암논이 때리며 다말을 강간합니다. 힘으로 여성을 억압하여 강간한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과 닮아 있습니다.
“다윗이 전령을 보내어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고 그 여자가 그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그 여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삼하11:4)
다윗은 왕이었습니다. 절대군주제에서 왕은 힘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밧세바는 이를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가장을 망가뜨리면서 까지도 나의 욕구를 이루는 나의 모습, 그런데 이런 모습과 우리가 똑같다는 것입니다. 죄가 나타나면 우리와 주변을 고통하게 만들고, 죄는 모든 사람을 고통과 파멸로 이끌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근원은 욕망이고, 이는 하나님과 단절된 우리가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한 다윗도 이를 다스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작은 욕망과 싸우며 이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거대한 욕망에 맞서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임재를 간구하며 우리가 우리의 욕망을 다스리는 것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마지막 열매가 절제입니다. 성령의 다스림으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맺어지는 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을 붙들고 예수의 손을 꼭 붙들고 걸어갈 때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우리의 작은 욕망들에 관해 하나님께 복종하며 하나님 우리를 도와주세요라고 살아가지 못하면 욕망이 점점 커져서 나의 인생 뿐 아니라 타인의 인생을 파멸하는 자리에 가서도 절제하지 못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보며 ‘저 사람은 왜 음식을 절제하지 못해?’ ‘왜 쇼핑을 절제하지 못해?’라고 손가락질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습을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모습은 쟤는 왜 저래가 아니라, 나는 어떻게 나의 은밀한 욕망을 추구하며 사는가를 발견하여 결국 악을 퍼뜨리는 도구가 되기 전에 나의 욕망이 드러나 하나님 앞에 다스림을 받도록 하기를 원하십니다.
정욕이 가득한 남자들만 욕망으로 강간을 낳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모두 우리의 욕망이 팽배하면 타인을 파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그래서 타인의 죄를 보며 나의 모습이구나를 발견하며 하나님께 끊임없이 회개해야 합니다.
자녀의 모습에서 우리는 보지 않습니까? 자녀 안에서 우리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 속에서 저렇게 자라면 안 될 텐데… 라고 생각하며 위기감을 느낍니다. 그럴 때 야단을 치기만 하면 이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자녀가 어떤 욕망을 야단만 치면 그 아이가 절제하는 아이로 자라 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큰 사고를 칩니다.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 아이에게 은혜를 간구하는 부모의 자세가 필요하고 저 모습이 나의 모습인 것을 고백하고 나의 모습이 하나님의 은혜를 표출하는 인생이 되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3. 죄악의 거울에 무엇이 반사되는가_이중성이 반사됩니다.
[15] 그리하고 암논이 그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전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한지라 암논이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 가라 하니
암논이 미친놈이 아니라 이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잘못을 저지른 것에 대한 책임이 마주하게 되자 이를 부인하고 회피하고자 하는 암논의 마음입니다. 암논이 책임지는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더 추한 모습으로 다말을 욕보입니다.
[17] 그가 부리는 종을 불러 이르되 이 계집을 내게서 이제 내보내고 곧 문빗장을 지르라 하니
아까까지는 누이라고 부르더니 이제는 이 여자, 이 계집이라고 부릅니다. 성욕을 풀기 전까지는 마구 다가가더니 성욕을 풀고 나서는 미친놈처럼 행동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다말은 무슨 죄가 있습니까? 다말은 비참함을 경험합니다.
[19] 다말이 재를 자기의 머리에 덮어쓰고 그의 채색옷을 찢고 손을 머리 위에 얹고 가서 크게 울부짖으니라
고대에 처녀성을 상실했다는 것은 결혼도 할 수 없고, 살아도 살아가는 것이 아닌 삶입니다. 결혼을 위해 가장 소중한 처녀성을 잃어버리게 된 사람의 슬픔과 눈물. 이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무자비한 이중성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우리아를 대하던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다윗은 우리아를 불러 아주 배려심이 많은 것처럼 대합니다.
“그가 또 우리아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내려가서 발을 씻으라 하니 우리아가 왕궁에서 나가매 왕의 음식물이 뒤따라 가니라” (삼하11:8)
사랑하는 장군을 향한 왕의 사랑이 담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아뢰되 우리아가 그의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였나이다 다윗이 우리아에게 이르되 네가 길 갔다가 돌아온 것이 아니냐 어찌하여 네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삼하11:10)
정말 사랑이 철철 넘치는 왕의 배려같이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아가 죽었을 때 다윗이 어떻게 반응했나요?
[24] 활 쏘는 자들이 성 위에서 왕의 부하들을 향하여 쏘매 왕의 부하 중 몇 사람이 죽고 왕의 종 헷 사람 우리아도 죽었나이다 하니 [25] 다윗이 전령에게 이르되 너는 요압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이 일로 걱정하지 말라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삼키느니라 그 성을 향하여 더욱 힘써 싸워 함락시키라 하여 너는 그를 담대하게 하라 하니라 (삼하11:24-25)
‘전쟁하며 다 죽지 뭐’라며 아무런 관심이 없는 한 사람이 죽은 것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반응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악이 드러날 까 두려워할 때는, 친절하게 우리아에게 잘 대해주다가 이제 죄악이 드러나지 않겠다 싶으니까 우리아의 죽음에 눈 깜짝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이익이 될 것 같을 때에는 친절하게 대하다가,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을 때 전혀 관심 없이 대합니다.
젊은이들은 잘생기고 예쁜 사람에게 노골적으로 잘해줍니다. 그리고 이런 것이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것을 다 탓할 수 없습니다. 예전에 한국교회에도 남녀를 나눠서 예배드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지 않습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욕구가 바뀌어갑니다. 그래서 그 욕구의 변화에 따라 나의 욕구를 채워줄 대상에 대해서는 친절하게 대해주다가 이를 채워주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안면을 깔아버리는 행태를 보여줍니다. 이런 태도를 우리는 끊임없이 보여줍니다. 이것이 야고보서에까지 문제가 되어서 야고보서에서는 부자에게 만 잘해주지 말라는 말을 성경에 기록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다윗은 이런 일을 멀리서 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딸과 아들에게 벌어진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이 모든 일에 자신이 관여되어 있었습니다.
[21] 다윗 왕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하니라
사실 다윗이 화난 것 이후에 어떤 행동이 있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다윗은 암논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죄악을 남의 모습에서 발견할 때 마비가 되어버립니다.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습니다.
심판하고 보복한다고 해결되지 않는 다는 것을 경험해보았습니까? 어쩌면 다윗과 같은 반응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심판하고 징계한다고 뭔가 달라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무언가 하기는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다윗에게 암논은 장남입니다. 나랑 똑같습니다. 나랑 하는 짓도 똑같습니다. 그래서 남들을 고통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죄를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방식이고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만약 아들이 아니라 동네사람이었다면 다윗은 냉정한 심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족을 통해 하나님은 다윗에게 다윗의 죄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반응합니까? 우리는 주변사람의 죄를 보며 “나쁜놈아!”하면서 손가락질 합니까, 아니면 나의 죄를 발견하여 하나님 앞에 회개합니까? 우리가 회개로 나아갈 때 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더 선명하게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