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마음
사무엘하 강해 33
2020년 3월 15일 주일예배 설교문
만일 우리의 가정이나 주변사람의 가정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이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형제가 있는데 형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고 동생이 보복하기 위해 맘에 품고 있다가 그를 죽이고 동생이 도망간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부모는 이 충격을 이겨내지 못할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이 다윗 가정에서 벌어졌습니다.
죽어버린 아들이나 형을 죽인 아들이나 다윗에게는 잃어버린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압살롬은 셋째 아들입니다. 둘째 아들 길르앗은 이름은 언급되지만 추후 기록이 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어려서 죽은 것으로 보입니다. 첫째는 셋째가 죽였고 둘째는 어려서 죽었고 셋째는 첫째를 죽이고 도망갔습니다. 어느 부모가 이런 일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많이들 다윗이 잘못을 했으니까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성경을 읽는 것을 교훈적으로 읽는다고 합니다. 나쁜 일을 해서 나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 ‘저것 봐라. 저러니까 벌을 받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인과응보적인 반응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과응보를 가르치기 위해 성경을 적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왜 교훈적으로 읽으면 안 되는 것일까요? 성경은 좋은 사람들을 보여주며 이렇게 살면 복을 받을 수 있어 라고 이야기하거나, 저렇게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는다고 적어놓은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목적이 다른데, 이런 방식으로 성경을 읽다보니까 하나님이 진짜 이야기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을 듣지 못합니다.
성경은 복음의 놀라운 은혜를 가르치기 위해 적혀져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 그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윗의 이야기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다윗의 이야기는 모형으로 읽어야 합니다. 모형이라 함은 진짜를 위한 그림과 같은 것입니다. 아파트를 지을 때 모델하우스를 짓는 것과 같습니다. 진짜가 나타나기 전에 진짜가 어떤 것인가를 그림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형으로 보기 어려운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이 너무 이중적으로 나오고 이중적 모형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지난 두 달 동안 다윗이 얼마나 큰 잘못을 보였는지 들었습니다. 지난 두달 간의 설교만 들으면 그는 정말 나쁜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난 1년 반 동안 얼마나 멋진 존재였습니까. 이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다윗을 통해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1. 아버지의 마음은 잃어버린 자식 때문에 통곡합니다.
[30] 그들이 길에 있을 때에 압살롬이 왕의 모든 아들들을 죽이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다는 소문이 다윗에게 이르매
물론 잘못된 소문이었습니다. 누군가가 급히 뛰어와서 암논이 죽자 나머지도 죽지 않았겠나 하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입장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칩시다. 형이 동생들을 모아놓고 다 때렸다고 해도 화가 나는데, 이렇게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아래와 같이 반응합니다.
[31] 왕이 곧 일어나서 자기의 옷을 찢고 땅에 드러눕고 그의 신하들도 다 옷을 찢고 모셔 선지라
다윗은 너무나도 슬펐습니다. 다윗은 자기 자신을 추스르고 온전하게 서있을 수조차 없었습니다. 어떤 아빠가, 어떤 엄마가 이런 소문을 듣고 견뎌낼 수 있을까요. 그런데 요나답은 진짜가 아닐꺼라고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32]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 요나답이 아뢰어 이르되 내 주여 젊은 왕자들이 다 죽임을 당한 줄로 생각하지 마옵소서 오직 암논만 죽었으리이다 그가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욕되게 한 날부터 압살롬이 결심한 것이니이다
요나답은 사실 다 알고 있었습니다. 요나답은 암논이 다말을 강간하도록 술책을 냈던 장본인 이었습니다.
[3] 암논에게 요나답이라 하는 친구가 있으니 … 심히 간교한 자라
[5] 요나답이 그에게 이르되 침상에 누워 병든 체하다가 네 아버지가 너를 보러 오거든 너는 그에게 말하기를 원하건대 내 누이 다말이 와서 … 그의 손으로 떡을 먹여 주게 하옵소서 하라 (삼하13:3, 5)
요나답은 간교함으로 왕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요나답은 압살롬이 암논을 죽일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는 막지 않았을까요? 이것이 간교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간교하게 빠져나가 어떻게든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사람입니다.
실제로 왕자들이 나타납니다.
[34] … 파수하는 청년이 눈을 들어 보니 보아라 뒷산 언덕길로 여러 사람이 오는도다
그들이 나타나자 모두가 통곡합니다.
[36] … 왕자들이 이르러 소리를 높여 통곡하니 왕과 그의 모든 신하들도 심히 통곡하니라
왕자들은 잔치를 하다가 옆에서 형이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도 죽겠구나 했는데 죽이질 않아서 두려움에 도망쳤는데 안도감이 들자 이제 통곡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슬픔은 전염되어 모든 사람들이 안도감에 눈물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전염병으로, 교통사고로, 전쟁에 나가서 죽었다 해도 슬펐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 슬펐던 이유는 가족 안에서 미움과 보복으로 서로를 죽였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 있어서 이렇게 슬픈 것은 없을 것입니다.
세상을 살며 자녀를 잃는 부모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집단적으로 자녀를 잃은 부모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세월호 사건입니다. 세월호 4주년이 되었을 때 잃은 자녀들에게 보낸 편지를 [그리운 너에게]라는 책으로 내었습니다. 그 글들은 눈물 없이 읽을 수 없습니다.
다음은 단원고 2학년 정원석 학생에게 보낸 엄마의 편지입니다.
“사랑하는 아들 원석아 안녕. 그곳에서는 잘 지내고 있지, 네가 엄마 품을 떠난지도 1,394일이 되었구나. … 엄마는 네가 없는 날을 세어 보는 것이 하루의 일과가 되어버렸구나. 네가 떠난 그 날을 엄마가 어찌 잊을 수 있겠니.… 수학 여행 간다며 들떠 있던 네 모습, 예쁜 사진을 남기고 싶다며 새 옷을 사고 기뻐하던 네 모습, 짐을 싸면서 설레어 하던 네 모습. 엄마는 어느 것 하나 잊혀지지 않는구나.… 가끔 삶에 치어 정신없이 지내다 문득 너를 생각하지 못했구나 할 때면 엄마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과 이렇게도 살아지는구나 하는 허망함이 몰려와 자식을 잃은 엄마의 모습이 맞는지. 내가 이렇게 살아 있어도 되는지 하는 자책감이 몰려올 때면 엄마도 너를 따라 가고 싶다는 생각을 수없이 한단다.”
이것이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입니다. 자식을 잃은 사람의 마음을 누가 위로 할 수 있을까요?
다윗이 고통 하는 것이 이런 고통입니다. 다윗이 죄악이 만들어낸 고통으로 만들어낸 고통들이 시편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6]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픔 중에 다니나이다 [7] 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 [8]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9] …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10] 내 심장이 뛰고 내 기력이 쇠하여 내 눈의 빛도 나를 떠났나이다 (시 38:6-10)
다윗은 정말 그 고통의 깊은 자리에서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않은 죽은 자와 같은 모습으로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고통을 다윗이 맛보게 하셨을까요? 정말 그가 지었던 죄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마음이신지, 하나님이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어떤 고통을 맛보게 하셨는지 그 일부를 경험하게 하시고자 하나님이 어떤 마음인지 다윗이 경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거룩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7)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 자신과 닮은 존재를 만드셨습니다. 육을 가지고 있지만 영을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의 영향력을 확장하도록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처럼 만드신 것입니다. 죄와 관계없는 거룩한 자로 만드셨지만 죄로 말미암아 끊임없는 욕심에 사로잡히면서 우리는 마귀와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마귀는 뿔이 달린 존재가 아닙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 (요8:44)
마귀는 욕심 때문에 사랑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타인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존재입니다. 마귀와 같은 본질이 사람을 차지하며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잃어버린 존재가 된 것입니다. 죽은 모습입니다. 영생은 우리가 오래 사는 것에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거룩하심의 모습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단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 죽음입니다. 사랑이라는 하나님과 단절된 모습을 우리는 잃어버렸지만 우리는 끊임없는 관계에 대한 갈구가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모든 관계가 단절된 채로 지내고 있습니다. 서로 만나지도 못하고, 집에서만 지내고 있습니다. 이런 것이 1년 동안 진행되면 어떻게 될까요? 우울해질 것입니다. 우리는 관계하도록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랑할 때 행복하고 가장 큰 기쁨을 누리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코로나는 우리의 열망들을 모두 잠재우며 우리는 우리의 건강만 생각하도록 만드는 존재로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욕망으로 인해 이를 채움 받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기 위해 결혼하고 사랑하기 위해 아이를 낳는데 욕심이 개입되어 관계가 모두 파괴되는 것입니다.
육체의 죽음만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진짜 생명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육체의 죽음을 넘으면 오히려 하나님과 영원한 기쁨을 맛보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서도 우리는 더 깊은 사랑 안에서 그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이를 경험하는 것이 성도의 모습이어야 할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우리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 5:12)
하나님이 안타까워하시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자신의 자녀들이 모두 죽어버리고 마귀의 자녀들처럼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수십억의 자녀들이 있는데 이들이 마귀의 자녀들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49:15)
인간은 자녀를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어린 아빠 엄마가 아이를 낳고 방치해서 아이가 굶어죽은 사건이 올해도 있었습니다. 인간 가운데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전하십니다. 하나님이 완전하시다는 것은 그 사랑의 완전함에 관한 것입니다. 사람이 많다고 그중의 일부는 없어져도 된다고 생각하시는 것이 아니시라는 것을 성경은 계속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와 완전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마귀의 자식들이 되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될 때의 모습을 다윗의 통곡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간절함과 아픈 마음으로 세상 사람들을 대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2. 아버지의 마음은 죄인에게 까지도 간절합니다.
[37] 압살롬은 도망하여 그술 왕 암미훌의 아들 달매에게로 갔고 다윗은 날마다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슬퍼하니라
압살롬은 진짜 나쁜놈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를 위해 격렬히 슬퍼합니다. 이런 다윗을 비난하는 사람은 부모가 아닌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나쁜놈이라도 내 자녀입니다. 자녀가 아무리 극악무도한 도적질을 하고 강도짓을 해도 부모는 자신을 질책하고 가슴아파합니다. 그것이 엄마의 마음, 부모의 마음입니다.
압살롬은 도망가서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38] 압살롬이 도망하여 그술로 가서 거기에 산 지 삼 년이라
압살롬은 아마 부모를 다 잊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자식의 마음입니다. 아마 자신이 복수를 한 것이 시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다윗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39a] 다윗 왕의 마음이 압살롬을 향하여 간절하니 …
그술왕의 손자였던 압살롬은 불편함 없이 아마 잘 지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마음은 간절(히브리어로 '칼라')했습니다. 여기서 간절하다는 말은 물이 없어서 물을 너무나도 간절히 찾을 때, 먹을 게 없어서 먹을 것을 찾을 때 쓰는 말입니다. '칼라'는 영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사용됩니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 (시84:2)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런 간절한 마음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39b] …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
이 뜻은 아래 번역이 더 적절합니다.
[39] 다윗 왕은 암논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이 가라앉자, 이제는 압살롬이 매우 보고 싶어졌습니다. (삼하13:39, 쉬운성경)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관계를 도구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도구가 아닌 대상으로 우리를 찾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거룩이 전제가 되여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룩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에 대해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20)
예레미아 전체는 이스라엘의 무서운 죄악을 책망함으로 그 죄가 얼마나 하나님을 아프게 했는지를 적어놓은 책입니다. 하나님과 동등하게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존재마저도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경험하시며 하나님은 관계를 회복시키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아픔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향한 아픔입니다.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욘 4:11)
앗수르는 당대 가장 큰 악으로 사람들을 대한 국가였습니다. 사람들을 잡아서 장대에 꽂아서 말리고 피부를 벗겨 가죽을 벽에 발랐었습니다. 임산부는 배를 터뜨려 죽였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도망간 것이었습니다.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십니다. 그러나 이런 앗수르가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가 우리의 죄악의 반역의 크기보다 더 큽니다. 우리의 죄악에 우리가 빠져 있다면 우리는 우울함만이 가득할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들여다보는 만큼 하나님의 사랑이 더욱 크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너는 안 되는 놈이야”라고 지적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죄악보다 크시며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온전하게 하실 것임을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우리의 죄악을 폭로하시는 것입니다.
찬송가 4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은 그 사랑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나도 큽니다. 우리의 죄악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죄악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대단하신지 말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우리가 어떤 존재로 창조되었는지 우리가 깨닫게 하십니다.
부모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다윗도 불완전한 부모입니다.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이 있더라도 표현도 못합니다. 그런 온전하지 못한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은 아들을 죽이시고 우리에게 사랑으로 반응하십니다. 그래서 죄악에 빠져들지 않고 하나님의 모습으로 살아가라고 우리에게 요청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