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악의 추악함
사무엘하 강해 35
2020년 3월 29일 주일예배 설교문
루키즘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한글로 번역을 하면 ‘외모지상주의’라고 번역하면 됩니다.
보이는 외모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루키즘’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루키즘’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외모지상주의가 유행하고 있는 것일까요? 바로 대중매체의 영향 때문입니다. 우리가 쉽게 볼 수 없는 잘 생긴 사람들을 끊임없이 보면서, 저 모습이 ‘표준’이구나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외모가 출중한 사람들은 매체에 등장하는 것만으로 한 달에 수천, 수 억원을 법니다. 이러한 현실을 보면서, 사람들은 외모에 대한 열망과 집착이 커져가고 있습니다. 또 재정적 여유가 생기면서 그 여유로 자신을 꾸미며 살아가며,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갖고자 하는 열망을 해결해나가고자 합니다. ‘성형’, ‘미용’, ‘의복’과 같은 산업은 날마다 발전해 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절정에 이른 시대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외모에 대한 집착이 커져가면서, 외모에 대한 욕구를 계속해서 키워나가고 있고 이것이 보편적인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이 이 시대만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보편화되었다는 것만 차이가 있지 과거와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25절에 그것이 나타나 있습니다.
[25] 온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 받는 자가 없었으니 그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
3천년 전에도 한 사람을 보면서 아름답다라고 칭할만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온 이스라엘에서 가장 아름답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수리부터 발까지 한 곳도 흠이 없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이럴 수 있을까요?
고대였기에 성형이라는 기술도 없었습니다. 압살롬이 이렇게 잘 생기게 태어난 것은 태어나면서부터 물려받은 특별한 ‘능력’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잘생긴 이 사람의 모습을 왜 이렇게도 자세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요? 바로, 외적인 완벽함에 비해 내적인 모습이 얼마나 추악한지를 대조하여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깨끗한 곳을 보면 더러운 것이 쉽게 티가 나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의 외모의 아름다운 모습을 성경이 말하는 이유는 그의 죄악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성경은 도덕적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성경이 보여주는 인물이 인간의 대표저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과 ‘다윗’도 ‘나쁜 왕’과 ‘좋은 왕’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사울이라는 존재를 통해 사람의 ‘옛 사람’의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하나님 노릇하며 내 뜻이 좌절되면 끊임없이 분노하는 인간의 죄된 모습을 ‘사울’을 통해 보여준 것입니다. ‘압살롬’을 통해 우리는 ‘외모’만 추구하는 인간의 죄악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압살롬’과 같은 외모의 아름다움이 없는 가운데도 내면이 압살롬의 모습을 닮을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은 이와 같은 추함을 발견하여, 이 추함을 극복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합니다.
죄악은 어떤 추악한 모습을 가지고 있나요?
1. 교만합니다.
[26] 그의 머리털이 무거우므로 연말마다 깎았으며 그의 머리 털을 깎을 때에 그것을 달아본즉 그의 머리털이 왕의 저울로 이백 세겔이었더라
26절은 압살롬의 아름다움을 구체적인 상황을 통해 보여주고자 기록된 것입니다. 압살롬의 아름다움 가운데, 특별히 자랑할 만한 것이 ‘머리털’이었습니다. 압살롬은 1년에 한 번 정도 머리를 깎았습니다. 1년에 자른 머리가 200세겔 정도였습니다. 200세겔은 2.28kg의 무게입니다. 여자의 허리까지 오는 머리를 자르면 3-400g 정도 나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압살롬의 머리를 잘랐더니 무거워서 자른 정도의 머리가 2.28kg가 나온다면 엄청난 것입니다.
이 무게를 가지고도 왜 압살롬은 1년에 한 번만 머리를 잘랐을까요? 압살롬의 최고의 자랑이었기 때문입니다. 목을 가눌 수 없게 되었을 때나 머리를 잘랐지, 평소에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머리를 자랑하며 다닌 것입니다. 압살롬은 자신의 자랑거리를 감추고 싶지 않아했습니다. 나는 다른 그 누구보다 멋지고 아름다운 사람임을 자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압살롬의 머리는 ‘교만의 상징’, 즉, ‘자랑의 상징’이었습니다. 성경이 압살롬의 머리를 말하고 있는 이유는 압살롬의 교만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교만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힘을 삼아 의존하며, 이것으로 자신을 높이며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가고자 하는 인간의 중심성을 의미합니다.
문제는 이런 모습으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할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면, 그것이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음을 깨달아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만드십니다. 압살롬이 예쁘고 풍성한 머리카락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압살롬의 공이 아닙니다. 아버지 다윗과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유전의 결과입니다. 압살롬이 왕자로 태어난 것도 압살롬이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노력도 아니고 행운처럼 주어진 것을 사람들이 좋아하며 열망하니,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삼고 교만이 점점 커져 갔던 것입니다.
압살롬에게 주어진 좋은 환경과 아름다움은 영적으로는 그에게 독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압살롬과 같은 아름다움을 같기를 원합니다. 어떤 사람은 학력을, 어떤 사람은 자신의 실력으로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른 사람이라며 자신을 뽐냅니다. 사람마다 자신을 교만하게 만드는 의존의 대상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의존의 대상들이 대부분 자신의 노력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물려받은 것’입니다. 공부도 유전의 영향력이 큽니다. 음악적 재능도 유전적 영향력도 크고 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우연히 얻게 된 무언가를 통해 다른 사람과 다른 특별한 결과를 낼 수 있는데, 이것이 본질적으로 자신의 것이라는 착각 속에 그것들을 의지하며 나아갑니다.
더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으면 더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결국 이는 압살롬과 같은 인생을 살게 될 기회를 얻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갖지 못하고 주지 못한 것에 대해 자책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식에게 좋은 것을 물려주고자 노력하여도 오히려 그 인생을 망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모두가 다 ‘교만’합니다. 이런 내적 교만을 더 크게 만들 수 있는 환경으로 인해 누군가를 집어삼킬 정도의 교만이 될 수 있는데, 이러한 것의 전형적인 예가 ‘압살롬’입니다. 압살롬이 다윗처럼 고난의 시간을 경험할 수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교만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붙잡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압살롬은 탁월한 환경으로 인해 하나님을 만날 기회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우리가 교만한지 아닌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내가 세상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을 포기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의존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포기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 사람이 얼마나 교만한지를 보여줍니다. ‘돈’은 물론 자신의 인생 가운데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남들이 침해한다면 그것에 대해 분노를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자신을 교만하게 만드는 ‘도구’인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마저도 자신의 인생의 ‘교만’으로 생각될 수 있는 ‘가치’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인생에서 자기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을 내려놓게 하십니다. 그것을 내려놓을 때, 불편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교만’입니다. 자기 우상을 하나님 앞에서 직면하지 못하면 인간은 그 우상의 영향력을 받아 외적인 모습은 아름다울 수는 있어도 주변 사람을 악으로 몰아넣는 ‘압살롬’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교만했던 압살롬은 그 교만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인생에서 방해되는 사람들을 다 죽이려고 합니다. 이들이 자신의 원수가 아닙니다. 자신의 아버지이고 자신의 형인 가족들입니다. 압살롬이 암논을 죽인 이유도 자신이 왕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왕이 되는 것에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 ‘암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무서운 교만의 결과입니다. 내가 무조건 왕이어야 합니다. 내가 주변 사람들보다 높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교만이 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잘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는 왕자였지만 장남으로 태어나지를 못했습니다. 그랬더니 자신의 형을 죽이면서까지 왕의 자리에 서고자 합니다. 이것이 교만한 자의 모습입니다.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을 보며 ‘질투’하고 내 스스로 대한 ‘열망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로 인해 인간은 ‘비교의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보며 계속해서 부러워진다면, 내 안에 교만이 그것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압살롬이 왕이 되고자 아버지마저 죽이려고 한 것이 그 사람의 본질인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왕으로 삼지 않자 스스로 왕이 되었다 이야기합니다.
“이에 압살롬이 정탐을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에 두루 보내 이르기를 너희는 나팔 소리를 듣거든 곧 말하기를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 하라 하니라” (삼하 15:10)
아버지가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자신이 왕이 되었다고 선포하는 이런 모습은 교만한 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교만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 파괴되게 됩니다. 교만하여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어지는 사람은 자신 안에 있는 무서운 교만이 만들어 낸 결과입니다. 교만은 하나님 말고 다른 것을 의지하는 우상 숭배를 하게 되고, 하나님마저 우상으로 만들어 내며, 주변 사람들을 파괴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삶의 문제는 교만으로 말미암아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압살롬이 다윗의 부하들과 마주 치니라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의 머리가 그 상수리나무에 걸리매 그가 공중과 그 땅 사이에 달리고 그가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나간지라” (삼하 18:9)
다윗을 반역하다 전쟁에서 지게 됩니다. 자신이 자랑스럽게 여기던 머리가 나무에 매달리는 일이 발생합니다. 압살롬의 머리는 파마를 안 해도 되는 곱슬머리였던 거 같습니다. 멋진 자랑의 상징인 머리로 인해 그는 죽임을 당합니다.
“[14] 요압이 이르되 나는 너와 같이 지체할 수 없다 하고 손에 작은 창 셋을 가지고 가서 상수리나무 가운데서 아직 살아 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찌르니 [15] 요압의 무기를 든 청년 열 명이 압살롬을 에워싸고 쳐죽이니라” (삼하 18:14-15)
이것이 성경이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교만한 인간의 끝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교만은 인간의 악이 가장 추하게 드러나는 본질이기 때문에, 교만이 점점 커지면 그 사람의 인생을 사로잡게 됩니다. 자주 열등감을 느끼고 우월감을 느끼십니까? 하나님이 무엇을 요구하실 때, 그것을 포기하기 어렵습니까? 주변 관계에서 힘듦을 느끼고 있습니까? 회개하셔야 합니다.
2.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23] 요압이 일어나 그술로 가서 압살롬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오니 [24] 왕이 이르되 그를 그의 집으로 물러가게 하여 내 얼굴을 볼 수 없게 하라 하매 압살롬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라
다윗은 왜 압살롬을 보지 않았을까요? 다윗이 얼마나 많은 내적 갈등을 했는지가 나타나는 부분 입니다. 심판자이자 아버지로서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압살롬을 불러오자 자신이 보지 않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는 압살롬의 죄가 얼마나 큰지 알려줍니다. 이로 인해 압살롬은 안달나기 시작합니다.
[32a] 압살롬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일찍이 사람을 네게 보내 너를 이리로 오라고 청한 것은 내가 너를 왕께 보내 아뢰게 하기를 어찌하여 내가 그술에서 돌아오게 되었나이까 이 때까지 거기에 있는 것이 내게 나았으리이다 하려 함이로라 이제는 네가 나로 하여금 왕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하라
요압을 통해 왕을 보기를 열망합니다. 아버지를 사랑해서 그런 것일까요? 아닙니다. 다음 장을 보면 압살롬에게 아버지를 향한 사랑이 전혀 없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를 빨리 죽여 왕이 되고자 하는 그가 왜 다윗을 보려고 하는 것일까요? 다윗에게 인정을 받아야 자신이 활동을 편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도움이 될 거 같아 아버지를 이용하려고 합니다.
[32b] … 내가 만일 죄가 있으면 왕이 나를 죽이시는 것이 옳으니라 하는지라
내가 죄가 있어서 죽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은 죄가 없어서 왕이 자신을 죽이지 못할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뻔뻔한 상황입니다.
다윗은 갈등으로 인해 압살롬을 보지 않고 있는 것인데, 자신은 아버지를 보려고 하는 이유는 자신이 죄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교만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자기 정당화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반응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이 틀렸다는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나는 틀린 적이 없고 실패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이런 모습은 많이 나타납니다. 부부 싸움이 왜 일어나는 것일까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음으로, 다른 사람을 지적함으로서 부부 싸움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배워서 일어나는 결과일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질입니다.
왜 압살롬을 통해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일까요? 교만이 가득한 자는 진정한 용서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아들은 다윗의 용서를 감사해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는 죄에 눈 뜨지 못한 자의 모습입니다.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면, 자신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깨닫지 못합니다. 그 죄에서 벗어나야 함을 깨닫지 못합니다. 말씀을 통해 죄를 깨달아야 합니다. 상황이 악화되고 관계가 파괴되고 나서 깨닫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말씀을 통해 나의 죄의 본질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나의 교만을 용서해달라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바디매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은 왜 바디매오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일까요?
“[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막 10:46-48)
간절한 바디매오의 결과는 어떠하였나요?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막 10:51-52)
성경이 바디매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마가복음 10장에 나타난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간절히 부르짖으면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10장에서 예수님께 자신을 예수님 좌우에 앉혀달라고 말합니다. 그들에게 알려주고자 하시는 게 무엇인지 알려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눈을 뜨라는 것입니다. 교만한 자리에서 벗어나 눈을 뜨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 가운데 바디매오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바디매오를 통해 죄를 보려고 하는 것을 요청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임을 볼 수 있기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할 수 있기 위해서는 눈을 뜨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의 눈을 뜨게 해주셔서, 나의 교만과 나의 죄악을 보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눈을 뜨게 해달라는 간구를 할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가장 무서운 죄는 이것입니다. 남과 비교하는 것 때문에 우리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에는 관심이 없고 이 땅에서 얻을 것에만 관심을 갖기 때문에 불행한 것입니다.
눈을 뜨지 못하면 우리는 바리새인처럼 살게 됩니다. 시몬이라는 사람은 바리새인으로서 예수님을 초청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존경하는 마음이 없을 때, 예수님을 부릅니다. 그 때, 한 죄인이었던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37]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눅 7:37-38)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눅 7:39)
마음으로 예수를 비난하였습니다. 시몬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한 것이 아니라 한 선지자일까 확인해보고자 부른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4]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눅 7:44-46)
예수를 향해 전혀 다른 반응을 하는 두 종류의 무리가 나옵니다. 죄인이라는 사람은 예수님을 만난 것이 너무 부끄러워 눈물로 예수를 영접하였는데, 이 바리새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7)
죄인이었는데 죄를 사함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예수 앞에 자신의 죄를 사한 예수 앞에 눈물로 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예수님 앞에 드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예수를 보내셨다는 것을 깨닫길 원하십니다. 내 아버지가 나를 구원하기 위해 어떤 희생을 감당하셨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사함이 적은 자는 시몬과 같은 냉소적인 반응과 태도가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는 압살롬과 같은 죄인입니다. 압살롬과 같이 특별한 기회를 갖지 못해 교만을 표출하지 못할 뿐이지 우리는 추악한 죄인입니다. 이와 같은 죄인인 우리를 위해 어떤 사랑을 베푸셨는지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며 하나님만을 경배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