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전략
사무엘하 강해 41
삼하 16:15-19, 17:5-14
2020년 5월 17일 주일예배 설교문
지난번 설교 때 마귀가 어떻게 성도를 무너뜨리려하는지에 관해 살펴 보았습니다. 마귀는 관계를 깨뜨리고 쉬운 승리를 약속하면서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마귀의 유혹인가 아닌가 하는 것에 관한 선택을 검토해보려면 위와 같은 두 가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마귀들은 끊임없이 성도들은 넘어뜨리려 하는데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을 나름대로 실행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마귀는 항상 실패하고 하나님은 항상 승리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전략으로 일하시나요?
1. 적들처럼 낮아집니다.
[15] 압살롬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이르고 아히도벨도 그와 함께 이른지라
압살롬은 예루살렘에 무혈입성을 합니다. 압살롬은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전쟁에서 중요한 수도를 잡았으니, 나머지는 더 쉬울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의 생각에 사로잡혀 관계를 깨뜨리고 쉬운 성공을 하려는 사람들 앞에 후새가 나타났습니다.
[16] 다윗의 친구 아렉 사람 후새가 압살롬에게 나갈 때에 그에게 말하기를 왕이여 만세, 왕이여 만세 하니
우리는 후새가 다윗과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알고 있지만, 압살롬은 의외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후새가 다윗과 얼마나 친하나 사람인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7] 압살롬이 후새에게 이르되 이것이 네가 친구를 후대하는 것이냐 네가 어찌하여 네 친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전에 그렇게 다윗과 친했는데 어떻게 나를 환영해? 무슨 이유가 있는거야? 라고 질문한 것입니다.
[18]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여호와와 이 백성 모든 이스라엘의 택한 자에게 속하여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이다
이 말만 보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겠다는 답이지만, 상당히 모호한 대답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은 다윗입니다. 즉, 다윗과 함께하겠다는 대답을 한 것입니다. 온 이스라엘이 지지하는 사람이라는 말도 그러합니다.
[19] 또 내가 이제 누구를 섬기리이까 그의 아들이 아니니이까 내가 전에 왕의 아버지를 섬긴 것 같이 왕을 섬기리이다 하니라
그리고 압살롬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위와 같은 말을 합니다. 압살롬은 충분히 의심할 수 있었지만 자신이 쉽게 승리하는 과정에서 자만심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쉽게 속아 넘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이 적혀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이뤄지는지에 대해 전하기 위함입니다. 후새는 고귀하고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아버지를 죽이겠다는 반역자의 옆에 서겠다고 하는 것일까요? 자신의 체면을 모두 내려놓아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후새는 이곳에서 아주 중요한 구원자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고귀함을 버리고 반역자의 편에 선 것 처럼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어떻게 이 땅에 내려오실지 보여주시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힘이 강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인을 죽이고 임하시는 방식으로 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이 땅에 낮고 낮게 내려오셔서 구원을 주십니다.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6-8)
하나님이 이 땅에 내려오신 것에 대해서 우리는 그저 성육신이지 뭐 그럴 수 있지만 모든 영광을 누리시던 분이 오염되고 더러운 죄인인 인간의 모습을 입으시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거룩입니다. 그리고 관계적으로는 사랑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중요한 본질인 거룩과 사랑을 잃은 존재입니다. 거룩하지 않으니까 사랑할 수 없는 더러운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은 그렇지 않지만 인간처럼 더러운 취급을 받기로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도 자신이 어떤 지위에 있다면 그에 걸맞게 대우받기를 원합니다. 높은 사람임을 알면 사람들이 알아서 그에게 대우를 합니다. 수준에 따라 반응하며 대우해주지 않으면 내가 얼마나 멋지고 위대한 존재인지 끊임없이 어필하게 됩니다.
대기업 ceo라면 누가 봐도 그가 누구인지 알 것입니다. 하지만 큰 회사라도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면 종종 스스로가 어떤 존재인지 굳이 밝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평등하게 서로를 보는게 아니라 내가 이정도의 사람이니까 이정도의 대우를 해달라고 하며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본질입니다. 만약 이런 생각을 가지지 않는다면 세상에서 많은 것들이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내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인지 알려주고자 하는 여러 노력들도 그러합니다. 그리고 이런 노력이 얼마나 천박한 것인지 세상 사람들도 다 알고 있습니다.
아메리칸 사이코라는 영화에는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옵니다. 미국금융권에서 서로 비슷한 수준의 삶을 살면서 자신들이 지위를 높입니다. 그러면서 명함이 얼마나 멋진지 서로 비교하면서 자랑합니다. 그런데 그 중 사이코가 한 명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의 명함이 나의 명함보다 나은 게 화가 나서 살인을 시작합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추잡한 우위 경쟁임을 들추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든 것이 감독의 의도입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의 길과 반대되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낮아지셨습니다. 예수님이 낮아지신 것을 적은 것은 우리가 같은 마음을 가지기를 원하시는 이유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이고, 이 마음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가 살아야 할 방향입니다.
“[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빌 2:2-4)
사랑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더 높은 자리에 있기에 누구에게 무엇인가를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한 마음으로 함께 있는 것입니다. 다툼은 항상 내가 남보다 나은 존재라고 하는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남의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남보다 나은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생각이 더 똑똑하고 맞다고 생각하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빌 2:4)
자기일을 아예 돌보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남의 일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은 나의 일을 돌아보며 이를 넘어 남의 일까지 돌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높은 자리에 가기를, 힘 있는 자가 되기를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낮아져서 다른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존귀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우리가 받아들이기 힘든 것마져도 받아들이며 살아갈 때, 하나님의 영향력이 미쳐지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전략으로 일하시나요?
2. 적들을 두렵게 합니다.
[17:5] 압살롬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도 부르라 우리가 이제 그의 말도 듣자 하니라
아히도벨이 이미 좋은 계략을 냈지만 압살롬은 후새 이야기도 듣기를 원합니다. 만약 아히도벨의 말대로 했다면 다윗을 금방 잡아서 죽였을 것입니다. 다윗은 당시에 신발도 못 신고 머리도 풀어 헤치고 노약자를 데리고 가고 있었습니다. 군인들처럼 말을 타고 빠르게 가고 있지 못합니다. 군인들이 빠르게 갔다면 잡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후새의 이야기를 듣고자 합니다.
[6]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매 압살롬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아히도벨이 이러이러하게 말하니 우리가 그 말대로 행하랴 그렇지 아니하거든 너는 말하라 하니
후새는 큰일났다고 생각하고 이에 반대합니다.
[7]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되 이번에는 아히도벨이 베푼 계략이 좋지 아니하니이다 하고
그리고 후새는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두 가지 근거를 댑니다.
[8] 또 후새가 말하되 왕도 아시거니와 왕의 아버지와 그의 추종자들은 용사라 그들은 들에 있는 곰이 새끼를 빼앗긴 것 같이 격분하였고 왕의 부친은 전쟁에 익숙한 사람인즉 백성과 함께 자지 아니하고[9] 지금 그가 어느 굴에나 어느 곳에 숨어 있으리니 혹 무리 중에 몇이 먼저 엎드러지면 그 소문을 듣는 자가 말하기를 압살롬을 따르는 자 가운데에서 패함을 당하였다 할지라
다윗과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이 얼마나 용맹한 사람인지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이를 비유를 사용해 정서를 자극합니다. 새끼를 빼앗긴 곰이라니, 정말 만나고 싶지 않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이를 과장하듯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렇게 사나운 군인들과 싸우다가 압살롬의 군이 몇몇이라도 다윗의 군인들에게 죽는다면 전체군의 사기가 꺾일 것이라고 사람들의 두려움을 자극합니다.
[10] 비록 그가 사자 같은 마음을 가진 용사의 아들일지라도 낙심하리니 이는 이스라엘 무리가 왕의 아버지는 영웅이요 그의 추종자들도 용사인 줄 앎이니이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두려움이 없어 보이는 사람도 가까이 가서 보면 근원적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더 애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두려움을 사용하십니다. 이 세상이 존재들은 두려움을 벗어나기 위해 어떤 행동을 반드시 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통해 세상을 무너뜨리십니다.
사람들은 많은 돈, 높은 권력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로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 산더미처럼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더러 하나님을 온전히 두려워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을 두려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삿대질 하는 미련함이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존재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아니, 하나님만 두려워합니다. 그런 존재들이 마귀와 그의 졸개들입니다.
“[23]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막1:23-24)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 그분이 누구신지 알았던 귀신들은 예수님을 아주 두려워했습니다. 영적 존재들은 예수님을 영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분의 능력과 권세를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이지 않은 인간만 하나님을 온전히 두려워하지 못합니다. 그 결과 인간들은 다른 것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압살롬은 모든 것을 얻는 것 같습니다. 모든 이스라엘이 자신을 따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장 지혜롭다는 아히도벨과 후새도 자신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도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후새가 공포감을 조성하자 여기에 넘어갑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건강에 대해 너무 큰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까? 미래에 너무 나쁜 일이 일어날까봐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이러면 반드시 올무에 걸려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걱정해도 그런 걱정을 해소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만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돈과 힘보다 강하다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의 결국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계 21:8)
우상숭배자, 악을 행하는자, 살인자, 거짓말하는 자 등등은 어찌 보면 벌 받는게 합당합니다. 하지만 두려워하는자도 같이 벌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두려워하다가 결국 우상 숭배하게 되고, 악을 행하고, 살인하며, 거짓말 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만 두려워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잘못된 의존의 대상에 근거했던 것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삶을 통해 잘못된 두려움을 택하며 돈이 최고지 돈이 최고지 하면 그들에게 이런 결과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일4:18)
하나님께서는 참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보여주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능력은 거룩하신 분이 우리 같은 죄인을 위해 자신을 죽여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두려움을 벗어나라 하십니다. 하지만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패배와 수치가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전략으로 일하시나요?
3. 적들의 허영심을 자극합니다.
[11] 나는 이렇게 계략을 세웠나이다 온 이스라엘을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바닷가의 많은 모래 같이 당신께로 모으고 친히 전장에 나가시고
후새의 짧은 전략 안에 많은 이미지들이 존재합니다. 많은 바닷가의 모래와 같은 이미지를 통해 감정들을 일으키고자 기교 있게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부터 브엘세바는 이스라엘의 북쪽에서 남쪽까지를 이야기 합니다. 너의 힘을 보여줘! 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후새는 마귀와 같은 사람들을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 유혹합니다. “너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줘봐, 너가 얼마나 강한지 한 번 보여줘!”라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잘나가게 하시고 멋지게 하시면 이게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멸망의 길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거대하게 되지 않았다면 그런 죄를 짓지 않았을텐데, 이렇게 돈이 많지 않았다면 그렇게 타락하지 않았을 텐데, 힘과 돈이 생긴 결과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드러내려고 하다가 죄를 짓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거짓을 쫒는 사람들을 패배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이런 소리들이 왕왕합니다. 더 기도하면 원하는 일이 이뤄질 거야, 더 헌신하면 더 잘 될 거야. 그런데 우리도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하나님이 우리의 허영심을 드러내어 토해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을 높이는 사람은 완전히 죽어지고 하나님만을 높이는 사람이 되도록 하게 하시는 과정인 것입니다.
[12] 우리가 그 만날 만한 곳에서 그를 기습하기를 이슬이 땅에 내림 같이 우리가 그의 위에 덮여 그와 그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을 하나도 남겨 두지 아니할 것이요
중동에는 아침에 이슬에 맺혀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처럼 한꺼번에 일을 마치자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13] 또 만일 그가 어느 성에 들었으면 온 이스라엘이 밧줄을 가져다가 그 성을 강으로 끌어들여서 그 곳에 작은 돌 하나도 보이지 아니하게 할 것이니이다 하매
후새는 언어에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계략이 후새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허영심이 가득한 자들을 자극하는 말이 가득합니다. 허영심이 가득한 사람들은 패망의 길로 갑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을 높일 수 없으면 자신의 자녀를 높이려고 합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픕니다. 사실 모르는 사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픕니다. 누군가 내가 원하는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나의 마음이 불편하다면, 내가 비판하는 모든 중심에는 내가 비판하는 어떤 것이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비판한다면 그것이 나에게 중요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짓말과 끊임없이 싸워야 합니다. 자기밖에 없는 인간들이 본질이 변화되어 하나님을 높이고 다른 사람들을 높이는 것이 천국인 것입니다. 안되면 이도 깨물고, 안되면 기도 하면서, “아직도 누가 밉네요”, “누가 질투가 나네요.”라고 이 죄악된 본질을 고백하며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날까지 겸손히 그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허영심이 가득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릅니다.
[14a]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계략은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다 하니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멋져보이는 길이라면 우리도 그 길로 가기 때문입니다.
[14b]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셨음이더라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난 이유는 하나님이 뒤에서 일하고 계셨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경우가 자주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헤롯 아그립바 1세, 사도행전에 나오는 헤롯입니다. 헤롯은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열망이 가득하던 사람입니다. 헤롯은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환호성을 해주지 않으면 만족하지 못하는 일그러진 자아상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헤롯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잡아 죽였습니다. 헤롯은 반짝반짝 빛나는 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21]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니 [22]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23]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행 12:21-23)
헤롯은 배가 너무 아파서 5일동안 떼굴떼굴 구르다가 죽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아마도 회충 때문에 죽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당시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 회충이 많이 들어갔는데 창자 속에서 회충이 너무 길어지면서 창자가 꼬여 죽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선택의 대부분은 관계를 깨뜨리더라도 나를 더 높이는 선택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높이는 길을 선택하면 멸망이 기다린다고 말씀하십니다. 낮아지는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 눈에는 누추해 보이더라도 하나님의 나라가 그 사람들을 통해 확장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