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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만한 자의 결국

    사무엘하 강해 43

    삼하 18:1-18

    2020년 5월 31일 주일예배 설교문

    교만에 관한 가장 유명한 구절은 잠언 16장 18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

     

    오늘 말씀에 나오는 압살롬 이야기가 잠언 말씀이 가장 잘 적용되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잠언은 교만하면 반드시 패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교만한 자의 결국이 어떻게 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자신의 힘만 믿다가 패배하게 됩니다.

     

    [1] 이에 다윗이 그와 함께 한 백성을 찾아가서 천부장과 백부장을 그들 위에 세우고

     

    다윗은 전쟁을 준비하며 군사체계를 세우고 군사들을 배치합니다.

     

    [2a] 다윗이 그의 백성을 내보낼새 삼분의 일은 요압의 휘하에, 삼분의 일은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동생 아비새의 휘하에 넘기고 삼분의 일은 가드 사람 잇대의 휘하에 넘기고

     

    다윗은 군대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배치를 합니다. 왜 이렇게 한 것 일 까요? 세력이 약한 편은 원래 이렇게 군대를 나누어 게릴라전을 진행합니다. 다윗은 현재 압살롬과 힘을 겨루어 이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압살롬의 군대는 그렇다면 어떻게 준비하였을까요? 후새의 계략을 받아들여 모든 이스라엘 군대를 모아 다윗과 전쟁하려고 합니다.

     

    “나는 이렇게 계략을 세웠나이다 온 이스라엘을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바닷가의 많은 모래 같이 당신께로 모으고 친히 전장에 나가시고” (삼하 17:11)

     

    압살롬의 허세가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후새의 계략대로 압살롬은 모든 군대를 모아 요단을 건넙니다. 전지파가 자신에게 속했다는 자만심에 가득하였습니다.

     

    “이에 다윗은 마하나임에 이르고 압살롬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과 함께 요단을 건너니라” (삼하 17:24)

     

    [2] 왕이 백성에게 이르되 나도 반드시 너희와 함께 나가리라 하니

     

    이런 다윗의 제안에 대해 벡성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3a] 백성들이 이르되 왕은 나가지 마소서 우리가 도망할지라도 그들은 우리에게 마음을 쓰지 아니할 터이요 우리가 절반이나 죽을지라도 우리에게 마음을 쓰지 아니할 터이라

     

    백성들은 전쟁의 목적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 한 명만 죽이면 전쟁이 끝이라는 상황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전쟁에 져서 도망할 경우까지 생각한 것입니다. 다윗이 죽게 되면 모든 것이 끝나버릴 것을 안 것입니다.

     

    [3b] 왕은 우리 만 명보다 중하시오니 왕은 성읍에 계시다가 우리를 도우심이 좋으니이다 하니라

     

    바로 이곳에 다윗과 함께하는 백성들은 다윗을 사랑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만 명보다 귀한 다윗을 보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제 전쟁이 시작됩니다.

     

    [6] 이에 백성이 이스라엘을 치러 들로 나가서 에브라임 수풀에서 싸우더니

     

    다윗 편에 선 이스라엘 백성들은 넓은 평원에서 싸운 것이 아니라 수풀을 전략적 요충지로 삼았습니다. 풀이 많고 나무가 많은 곳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전략이 잘 맞아떨어졌습니다.

     

    [7]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이 다윗의 부하들에게 패하매 그 날 그 곳에서 전사자가 많아 이만 명에 이르렀고

     

    이스라엘 전체 군대를 데려와 싸운다고 했는데, 이 수풀 속에서 숨어 게릴라전을 펼친 다윗 편의 군대를 당해내지 못한 것입니다. 상황적으로는 지형을 잘 이용하고 게릴라전술을 잘 펼쳤다고 볼 수 있지만, 영적으로 하나님 편에서 승리가 결정된 것입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교만한 압살롬을 꺾으시고 다윗 편의 손을 들어주신 것입니다.

     

    [8] 그 땅에서 사면으로 퍼져 싸웠으므로 그 날에 수풀에서 죽은 자가 칼에 죽은 자보다 많았더라

     

    지형지물을 잘 이용했더니 나무에 걸리고 수풀에 얽힌 자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결국에는 숫자로는 절대 상대가 되지 않았는데, 처참하게 패배하고야 말았습니다. 자신의 힘만 믿고 교만한 이유로 삼았던 압살롬의 군대는 이렇게 패배합니다. 역사상 많은 전투들이 이 세상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역사상 알려진 유명한 전투 가운데는 교만하게 자신의 힘만 믿고 싸우다가 패배하게 된 경우들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강한 힘을 가진 자들이 이기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교만하게 자신의 힘만 믿고 싸우다가 패망한 전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마라톤 전투’입니다.

     

    기원전 492년에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가 그리스를 침공합니다. 성경에는 다리오 왕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을 건축할 때 도움을 준 왕입니다. 수 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다리오 왕이 마라톤 평야에 도착했습니다. 다리우스 1세가 점령하고자 했던 것은 아테네였습니다. 그런데 마라톤 평원은 아테네로부터 40km나 떨어져 있었습니다. 다리우스 1세는 마라톤에 상륙한 이유가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가장 유명한 도시 국가가 아테네였습니다. 다리우스 1세가 마라톤 평원에 도착하자 아테네 국가는 급하게 군대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예측하기엔 그리스가 완전히 패망하고 페르시아가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마라톤 전쟁으로 6400명의 페르시아 군대가 죽게 되고 192명의 아테네 군사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역사상으로도 교만하게 자신의 힘만 믿고 하던 사람들이 자신의 힘이 어떻게 자신을 패배하게 만드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도 세상의 힘에 끊임없이 유혹을 받고 끊임없이 세상의 힘을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유혹의 이유가 우리 또한 세상의 힘을 열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힘을 노력하지 않고도 갖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부러워합니다. 어떻게 저렇게 태어났을까를 생각하며 부러워합니다. 그런데, 결국 자신이 이렇게 가지고 있다는 것, 자랑할 만한 것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의존하다가 패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는 이것이 더 현저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시기에 그것을 의존하다 죽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다릅니다.

     

    교만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다른 것을 의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무서운 죄입니다. 믿음이란 대상 외에는 의존할 대상이 없기에 그 대상에게 나의 모든 것을 의탁하여 그 인도하시는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믿음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반응하는 순종을 자연스럽게 갖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성도로서의 바른 모습은 예수를 의존하여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고 예수의 뜻대로 반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의 힘을 의지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의존하는 힘을 무너뜨리고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믿지 못했던 자리로부터 하나님만을 의존하는 자리로 우리 인생을 불러내실 것입니다.

     

    2. 자랑거리가 올무가 됩니다.

     

    [9a] 압살롬이 다윗의 부하들과 마주치니라

     

    압살롬은 홀로 다윗의 군대와 마주하게 됩니다. 수풀사이로 도망가면 잡히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납니다.

     

    [9b]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의 머리가 그 상수리나무에 걸리매 그가 공중과 그 땅 사이에 달리고 그가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나간지라

     

    이 시대의 왕은 노새를 타고 다녔습니다. 노새를 타고 다니다가 압살롬의 머리카락이 나무에 걸리고야 말았습니다. 하필 왜 상수리 나무일까요?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임하는 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계획하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상수리 나무와 관련된 많은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성경은 상수리 나무가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함을 보여줍니다.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창 13:18)

     

    성경에는 그 상수리 나무 곁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삿 6:11)

     

    기드온에게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상수리 나무 곁에서 천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상수리 나무는 하나님의 임재와 심판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장소입니다. 교만한 압살롬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고 반드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본문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압살롬이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모습인데, 왜 머리털일까요? 머리털은 압살롬의 가장 자랑스러운 부분이었습니다.

     

    “그의 머리털이 무거우므로 연말마다 깎았으며 그의 머리 털을 깎을 때에 그것을 달아본즉 그의 머리털이 왕의 저울로 이백 세겔이었더라” (삼하 14:26)

     

    이 머리털은 압살롬의 자랑이며 영광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누구보다 자랑스러운 모습을 가지고 있던 그가 치렁치렁한 머리를 깎지 않고 무거워 견딜 수 없을 때마다 깎는 모습이 본문에 보이고 있습니다. 이백 세겔의 머리는 2.5kg 정도였습니다. 오늘날처럼 머리 관리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 치렁치렁한 긴 머리를 날리며 압살롬은 자신의 영광을 자랑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어떻게 이야기하였을까요? 압살롬은 정말 화려하다고 이야기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랑거리가 압살롬의 패망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또한 성경은 상수리 나무에 걸려라는 단어를 통해 압살롬이 얼마나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 아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신 23:21)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입니다. 교만한 자는 어떻게 하나님의 저주 아래에 죽을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며 압살롬이 쌤통이다라고만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우리 안에 동일하게 존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그마한 자랑거리가 있어도 자랑하고 싶어 하는 우리의 옛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이 세상도 갖고 싶어 하는 것이라면,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영향력으로 미치며 나의 힘을 확장하려고 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 우리가 그것을 갖지 못하면 비교의식으로 우울해하며 남을 질투하는 모습이 바로 압살롬과 같은 모습입니다. 이 모습이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제거하고자 하시는 모습입니다.

     

    과연 이러한 것에서 자유로우신가요? 아닙니다. 삶에서 끊임없이 열등감을 느끼고 남이 가진 것을 갖고 싶어하며 우울해하는 모습을 우리는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힘이 있었으면, 돈이 있었으며라고 말하며 스스로를 자학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역시 세상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영적인 것을 비교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약하나 예수 그리스도를 의존할 때 무너져 버린 우리를 통해 온전하신 예수의 모습을 문득 마주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를 이용해 세상은 압살롬과 같은 길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이가 들수록 저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며,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인생이 되도록 만들어 가십니다. 겸손한 자리에 서게 될 때, 그 은혜로 말미암아 어두움의 영향력이 아닌 예수의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압살롬이 이렇게 매달려있었더니, 한 사람이 요압에게 고합니다.

     

    [10] 한 사람이 보고 요압에게 알려 이르되 내가 보니 압살롬이 상수리나무에 달렸더이다 하니

     

    그랬더니 요압이 이렇게 반응합니다.

     

    [11] 요압이 그 알린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보고 어찌하여 당장에 쳐서 땅에 떨어뜨리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네게 은 열 개와 띠 하나를 주었으리라 하는지라

     

    원수인 왕이니깐 왜 당장 죽이지 않았냐고 질책합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보고한 군사는 훨씬 더 사려 깊은 자였습니다.

     

    [12] 그 사람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내 손에 은 천 개를 받는다 할지라도 나는 왕의 아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우리가 들었거니와 왕이 당신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삼가 누구든지 젊은 압살롬을 해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다윗이 이렇게 직접 이야기한 것을 모든 백성이 들었던 것입니다.

     

    [5] 왕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 하니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모든 군지휘관에게 명령할 때에 백성들이 다 들으니라

     

    왕의 명령입니다. 물론 죽이고 싶지만 다윗은 끝까지 압살롬을 반역자가 아니라 자신의 아들로 대우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역할을 지금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반역하는 우리를 향해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명령을 이 요압이 반역해버립니다.

     

    [14] 요압이 이르되 나는 너와 같이 지체할 수 없다 하고 손에 작은 창 셋을 가지고 가서 상수리나무 가운데서 아직 살아 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찌르니 [15] 요압의 무기를 든 청년 열 명이 압살롬을 에워싸고 쳐죽이니라

     

    교수대에 매달려있는 압살롬을 비참하게 죽입니다. 심장을 찔렀을 때, 죽었을 텐에 왜 열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또 에워싸고 쳐죽인 것일까요? 정말 처참하게 죽인 것입니다. 저주 받은 존재가 얼마나 비참하게 죽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시신을 훼손하는 것만큼 고인을 모욕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요압이라는 왕의 명령에 반역하는 자의 손에 의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압살롬이라는 반역자를 심판하시기 위해 또 반역하는 자의 손을 사용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잠 16:4)

     

    요압 같은 인간 또한 더 큰 악을 심판하시기 위해 사용하고 계십니다. 지금 세상에서 일어나는 것 또한 이와 같습니다. 가족 안에, 교회 안에 내 말만 듣는 사람들만 가득하다면 내 안에 압살롬과 같은 모습이 어떻게 제거될 수 있는 것일까요? 우리 눈에 악하게 보이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압살롬을 제거하시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물론 성도들 가운데는 미리 성숙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고 회복하는 역할을 합니다. 미숙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성장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3. 약속의 땅에서 영원히 제외됩니다.

     

    [17] 그들이 압살롬을 옮겨다가 수풀 가운데 큰 구멍에 그를 던지고 그 위에 매우 큰 돌무더기를 쌓으니라 온 이스라엘 무리가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니라

     

    온전한 매장이 아니라 구덩이에 던져 돌을 쌓아, 임시 무덤을 만듭니다. 이것 또한 압살롬의 죽음이 얼마나 저주받은 죽음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왕가는 가족묘실에 묻히게 되어있는데, 압살롬은 구덩이에 집어넣어 매장당하고야 만 것입니다.

     

    요단강은 이스라엘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요단강의 서편이 가나안 땅이고 동편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찬양에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도 동편에서 서편으로 가,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압살롬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과 관계 없는 곳에 묻힙니다.

     

    또한 돌무더기가 쌓인 모습을 통해 압살롬이 과거 아간과 같은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25] 여호수아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냐 여호와께서 오늘 너를 괴롭게 하시리라 하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물건들도 돌로 치고 불사르고 [26] 그 위에 돌 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의 맹렬한 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 (수 7:25-26)

     

    아이성을 공격할 때, 아간이 여리고에서 훔친 물건을 숨김으로 이스라엘의 패망을 가져온 자입니다. 배신자입니다. 저주받은 자의 모습이 어떤지를 아간을 죽인 후, 돌무더기를 쌓은 후 ‘아골 골짜기’라고 이름지었습니다. ‘아골 골짜기’의 이름의 뜻은 ‘괴로움의 골짜기’입니다. 저주 받은 자의 모습으로 압살롬이 죽임을 당한 것을 성경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18] 압살롬이 살았을 때에 자기를 위하여 한 비석을 마련하여 세웠으니 이는 그가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내게 없다고 말하였음이더라 그러므로 자기 이름을 기념하여 그 비석에 이름을 붙였으며 그 비석이 왕의 골짜기에 있고 이제까지 그것을 압살롬의 기념비라 일컫더라

     

    살아생전에 자신의 이름을 내기 위해 비석까지 만들었습니다. 원래 비석은 죽은 다음에 만드는 것입니다. 죽은 다음에 그 사람의 일대기를 기록하여 후손이 만듭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살아있을 때 자신의 비석을 만듭니다. 성경이 이를 기록한 이유는 성경의 누군가와 똑같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어떤 사람이 사무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삼상 15:12)

     

    이를 통해 우리는 압살롬의 이야기가 나쁜 아들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울과 그의 모습이 같음을 알려주며, 우리 안에 있는 압살롬과 같은 옛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나의 욕망을 위함이 될 때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압살롬과 같고 사울과 같은 우리에게 개입하셔서, 압살롬이 소리 지르며 죽어가는 과정을 통해 우리가 예수 믿고 예수만을 의존하는 자가 되게 만드십니다. 이 과정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만을 신뢰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