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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상의 제거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사무엘하 강해 45

    삼하 19:1-8

    2020년 6월 14일 주일예배 설교문

    오늘 본문은 다윗이 압살롬으로 말미암아 피난길에 올랐고, 그것으로 인해 시작된 전쟁이 마무리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이를 통해 성도의 영적 여정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다윗의 반응이 우리의 영적 여정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압살롬은 다윗이 무엇보다 의존하고 사랑하는 대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일, 압살롬을 다윗이 별 것 아닌 존재, 불필요한 존재로 여기고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압살롬이 죽은 것이 별로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통쾌하게 여겼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죽이고자 했던 압살롬에 대한 다윗의 반응이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삼하 18:33)

     

    왜 이렇게 다윗이 슬퍼한 것일까요? 단순한 아들, 말 잘 듣는 아들이 아닌 자신을 죽이고자 했던 아들의 죽음에 대해 다윗은 심각한 반응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다윗이 압살롬을 우상으로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힘이 약해집니다. 누군가 나를 닮은 존재가 젊음을 뽐낼 때, 인간은 기대를 하게 됩니다. 자기 자식이 자기를 닮았는데, 그 아이가 나는 잃어버리고 있는 젊음과 영광을 계속해서 보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인간은 그 대상에게 자기 이입을 하여 자기 자아를 확장하는 의존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부모가 자기 자식에게 대해 가지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녀를 자신이 부끄럽지 않은 존재로 만들기 위한 애씁니다.

     

    압살롬은 다윗보다도 멋있는 외모를 가지고 온 이스라엘에서 가장 아름다움을 뽐내던 자입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움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일까요? 아닙니다. 다윗을 닮은 아름다움입니다. 다윗은 늙어가지만 그를 대신할 수 있는 멋진 인간이 등장했고, 다윗은 내적으로 그를 우상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자신이 내적으로 갖고 싶었던 것을 실현할 수 있도록 의존하는 것이 ‘우상’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반드시 우상을 의존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옛 자아는 우상을 의존하지 않고는 불안감을 견뎌낼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우상이 깨어지고 무너지지 않으면, 하나님을 적대시 하는 인간의 본질적 옛 자아가 절대 변화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찾아오셔서, 우리가 의존하는 우상을 깨트리시고 우상의 자리에 하나님이 서도록 일하십니다.

     

    우리는 다윗이 왜 이렇게 이상하게 반응하는 것일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다윗과 같이 반응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개입해 오셔서 다윗처럼 울부짖으며 모든 절망의 상황에 들어간 것처럼 반응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모습으로 성장하도록 우리 삶에 개입하십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 16:24)

     

    복음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누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것일까요?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우상을 파괴하심으로 우상의 손을 놓고 하나님의 손을 잡고 따르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성경은 이런 일을 쉽게 할 수 있는 듯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엡 4:22)

     

    이 말만 들으면 옛사람을 벗는 것이 옷을 벗는 것처럼 쉬워 보입니다. 그런데, 정말 쉬운 것일까요? 옛사람의 본질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이 이루어낼 수 없는 것입니다. 스님은 잠을 안자고 고기를 안 먹고 눕지도 않으며 유혹을 물리치고자 합니다. 일반 사람은 따라갈 수 없는 수행을 하여도 인간은 자신의 욕심의 본질을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개입하십니다. 그 결과 우리는 서서히 우리의 옛사람을 벗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받아들이면 그 고통의 시간이 줄어들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 내내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반항하며 하나님을 향해 거부와 분노를 토해내는 사람이라면, 이 과정 내내 성장이 아닌 고통만을 심각하게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이 우상 과정 안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우상의 제거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1. 구원의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1] 어떤 사람이 요압에게 아뢰되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울며 슬퍼하시나이다 하니

     

    요압은 성경 전체를 보면, 악한 인간으로 묘사됩니다. 자기 맘에 안 들면 누구든 칼을 휘둘러 버립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만 이 요압이 자기 우상이 파괴되어 고통하고 있는 다윗을 하나님의 길로 돌아오게 만드는 ‘긍정적 역할’로 나옵니다. 압살롬이 죽임을 당하지 않았으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전쟁이 끝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압이 압살롬을 죽이지 않았으면 이 상황이 악하게 진행되어져 갔을 것입니다. 요압이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자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한 자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요압은 이 모든 것을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왕이 아들 때문에 심각한 악을 경험할 것이기 때문에, 다윗이 슬퍼할 것을 알았지만 압살롬을 죽인 것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상황에서 다윗이 이렇게 슬퍼하자 백성들은 어떻게 느꼈을까요?

     

    [2] 왕이 그 아들을 위하여 슬퍼한다 함이 그 날에 백성들에게 들리매 그 날의 승리가 모든 백성에게 슬픔이 된지라

     

    처참한 광경입니다. 압살롬이 쳐들어와서 공포스러운 상황 가운데 소수가 다윗 편에 섰습니다. 하나님의 개입과 지형적 이점으로 말미암아 죽을지라도 하는 마음으로 전쟁에 임했더니, 승리를 얻었습니다. 얼마나 기쁨과 놀라운 충만함에 가득 차 왕 앞에 돌아오고 있는 백성이었을까요? 그런데 이 반역자 압살롬이 죽은 것 때문에 왕이 통곡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 백성들이 좌절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3] 그 날에 백성들이 싸움에 쫓겨 부끄러워 도망함 같이 가만히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전쟁에 승리한 기쁨을 한껏 누려야 하는 상황 가운데 패배한 자와 같이 성읍으로 들어갑니다. 다윗은 잘못된 반응을 하고 있습니다. 살아 있으면 안 되는 악당에게 다윗이 자신의 모든 열망을 투영하여 아들을 우상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반응을 한 것입니다. 다윗은 그래서 아들이 죽은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던 것입니다. 그 결과 모든 사람을 슬픔과 좌절, 부끄러움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 가운데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우상을 점점 멋있게 만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깨트려 가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대합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셔서 달라지게 하시겠지라는 마음을 갖습니다. 사람마다 꿈꾸는 미래가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풍족한 삶, 나의 멋진 모습을 만천하에 드러내겠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이와 같이 자신의 놀라운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유튜브에서 ‘너의 목소리가 보여’라는 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황치열이라는 가수가 나왔는데, 원래 그 사람은 오랫동안 무명의 가수였습니다. ‘너목보’는 평범한 사람이 노래를 부를 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외모만 보고 유추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황치열이 무명의 세월을 향한 한을 가지고 노래를 한 후, 큰 유명세를 갖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를 보면서 어떤 희열을 느낄까요? 나도 찌질한 인생을 살고 있지만, 어떤 사람을 만나면, 어떤 일을 이루어내면, 사람들이 놀랄만한 위치에 서게 될 것이라는 열망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희열을 느낍니다.

     

    저도 고등학교에 가면 ‘대학교에만 가면’이라는 꿈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대학교에 가니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때 또 다른 목표를 세웠습니다. ‘멋진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하면’이라는 꿈을 가지게 됩니다. 내 인생 가운데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고 채워질 것이란 생각은 인간의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자신의 힘만으로는 그 성공의 길을 걸어갈 수가 없습니다. 일찌감치 포기하고 좌절하고 자신의 소망을 잃어버린 채로 살아가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입니다.

     

    다른 대상에 나의 열망을 투영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자녀를 이와 같이 자아실현의 우상으로 삼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내가 이루지 못한 것들을 이루어줄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닙니다. 원하는 것을 얻어 보아도 인간은 이런 것들로 만족을 원할 수 없습니다. 일시적인 것은 우리 안에 더 깊은 갈망을 만들어냅니다. 일시적인 만족은 우리 안에 더 큰 절망을 안겨줍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잘못된 우상을 깨트리고 온전한 기쁨을 회복시키고자 하십니다. 이 기쁨은 영적인 것이고 일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가장 큰 기쁨이 죄에 매여 있던 자, 우상에 매여 있던 자를 온전히 자유케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윗에게 압살롬이 기쁨을 준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이라는 존재도 멋있는 존재였을 것입니다. 자신을 닮은 자신의 아들이 완벽한 멋진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 다윗이 누리던 일시적인 기쁨은 어땠을까요? 다윗은 압살롬을 의존했지만 압살롬은 오히려 자신을 의존하는 아버지를 죽이고 파괴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우상의 실체입니다. 누군가 돈을 의존한다면 돈이 그 사람을 파괴할 것입니다. 사람을 의존한다면 사람이 그를 파괴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 가운데서 늘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녀에 거는 기대가 큰 부모는 자녀와 부모 둘 다 고통스럽게 됩니다.

     

    압살롬은 하나님이 요압의 손을 통해 죽이신 것입니다. 제가 지난 주에 말씀드렸듯이 압살롬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상수리나무에 걸려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요압을 통해 그를 심판하신 것입니다. 단순히 압살롬이 나쁜 사람이어서 죽인 것이 아닙니다. 압살롬보다 더 악한 인간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압살롬을 죽이신 이유는 그가 다윗의 우상을 상징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우리 인생 가운데 우상을 죽이실 때, 다윗과 같이 반응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기 위해 이런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사 35:10)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 우상을 깨트리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자들만이 영원한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가장 큰 은혜는 우상이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가장 큰 기쁨이십니다.

     

     

    2. 구원의 도구가 된 자들을 미워합니다.

     

    [4] 왕이 그의 얼굴을 가리고 큰 소리로 부르되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니

     

    요압은 어린 아이와 같은 다윗을 때려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우상이 깨어질 때 반응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이는 모습입니다. 명예를 중요시 여기는 사람에게 명예가 훼손되었을 때의 반응을 보셨나요? 주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합니다. 돈이 중요한 사람에게 돈으로 인해 피해가 갔다면 주변이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 스스로 생각할 때도 용납할 수 없는 이상한 반응이 나옵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요압이 직언을 합니다.

     

    [5] 요압이 집에 들어가서 왕께 말씀 드리되 왕께서 오늘 왕의 생명과 왕의 자녀의 생명과 처첩과 비빈들의 생명을 구원한 모든 부하들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시니

     

    사람들이 나가 싸워 승리를 했습니다. 생명을 내걸고 싸워서 승리한 것입니다. 세력으로는 상대가 안 되는데, 게릴라전을 펼치며 생명을 내걸고 전쟁을 하였습니다. 생명을 내걸고 생명을 구한 자를 부끄럽게 만드는 다윗의 비정상적인 행동을 폭로합니다.

     

    [6] 이는 왕께서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시며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시고 오늘 지휘관들과 부하들을 멸시하심을 나타내심이라 오늘 내가 깨달으니 만일 압살롬이 살고 오늘 우리가 다 죽었더면 왕이 마땅히 여기실 뻔하였나이다

     

    이것이 정답이 아닌가요? 다윗의 반응을 볼 때도 다 죽고 압살롬만 살았더라면 이렇게 슬퍼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었다면 다윗이 죽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상의 실체입니다. 우상은 너무 깊이 영적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것을 희생시키면서도 지키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의 우상을 제거해나갈 때, 그 대상을 미워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우상을 가까운 관계를 통해 제거해 나가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인처럼 성장시키기 위해 가정도 주시고 교회도 주신 것입니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예전의 길을 버려야 합니다. 잘못된 것을 포기하고 버려야합니다. 잘못된 것을 버리고 옛 습관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성장할 수 없습니다. 잘못된 것을 의존하는데도 그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래 습관이 된 것은 고치기가 힘듭니다. 우리의 몸을 바꾸기도 힘든 것이 우리입니다. 억지로 하면 하려 할수록 어렵습니다. 습관이기에 나쁜 것을 알면서도 고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고통스러움이 극에 치달아 죽음의 위협이 올 때 습관을 고치게 됩니다. 고통스럽지 않으면 사람은 바뀌려고 하지 않습니다. 성장은 그러므로 고통을 반드시 야기합니다. 그런데 고통이 나쁜 고통인가요? 아닙니다. 더 나쁜 것을 막기 위한 과정인 것입니다.

     

    결혼하면 무엇이 힘든가요? 내가 기존에 갖고 있던 방식을 포기하고 상대의 방식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만 사랑한다고 자신의 생각을 다 버릴 순 없기 때문입니다. 결혼했지만 자기의 생각이 있습니다. 사람은 쉽게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여 조율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왜냐면 자기의 이기적인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틀과 내 욕심을 깨트리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개입하십니다.

     

    다윗의 우상을 요압이 죽여주었고, 다윗은 드디어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감사하고 있나요? 아닙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슬퍼하며 미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일하심을 우리는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가 내 맘대로 살려고 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가까운 사람들을 통해 내 맘대로 살지 못하며 내 우상이 제거되도록 하나님이 개입해나가십니다. 이것을 가장 강렬하게 경험했던 사람이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의 인생은 정말 불행합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17]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8]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시 105:17-18)

     

    여기 나와 있는 표현은 영혼이 고통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여기서 차꼬를 차다는 것은 영혼이 쇠사슬에 꿰뚫렸다는 표현입니다. 영혼이 파괴되는 이 과정을 벗어났을 때 요셉은 이와 같은 자로 변화합니다.

     

    “[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창 45:4-5)

     

    하나님의 섭리를 어떻게 이해하게 된 것일까요? 쇠꼬챙이로 파괴되는 듯 한 고통을 영혼이 감내한 후, 자신을 판 형을 용서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아직도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있나요? 하나님께서 나의 자아를 깨트리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 자들을 미워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 가운데 이렇게 일하시는구나라고 요셉처럼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3. 인생의 큰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7] 이제 곧 일어나 나가 왕의 부하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말씀하옵소서 내가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옵나니 왕이 만일 나가지 아니하시면 오늘 밤에 한 사람도 왕과 함께 머물지 아니할지라 그리하면 그 화가 왕이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당하신 모든 화보다 더욱 심하리이다 하니

     

    생명을 다해 내걸고 싸웠는데 다윗이 이렇게 반응한다면 이런 결과는 당연한 것입니다.

     

    [7b] 그리하면 그 화가 왕이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당하신 모든 화보다 더욱 심하리이다 하니

     

    사실입니다. 이것이 우상이 깨어지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의 최후입니다. 그제야 다윗이 정신을 차립니다.

     

    [8] 왕이 일어나 성문에 앉으매 어떤 사람이 모든 백성에게 말하되 왕이 문에 앉아 계신다 하니 모든 백성이 왕 앞으로 나아오니라 이스라엘은 이미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더라

     

    다윗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상이 제거될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고 있냐는 것입니다. 자신의 열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사람은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몇 십억씩의 사기를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기꾼들이 정상적인 사람에게는 접근하지 않습니다. 돈으로 어떻게든 이익을 얻으려는 사람에게 접근합니다. 돈에 대한 열망이 강렬한 사람은 정상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고, 돈을 부풀릴 수 있다는 미끼에 걸려듭니다.

     

    자아가 죽임을 당하는 것, 의존의 대상이 제거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그것이 더 큰 고통을 야기하게 됩니다. 돈을 의존하는 사람이 사기를 당하고 실패했다면 어떻게 될까요? 인생이 끝장일 것입니다. 그런데 돈을 잃어버렸다고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것일까요? 가족이 있을 수 있고, 건강이 있을 수 있습니다. 돈이 큰 우상이 아닌 사람은 회복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로 인해 건강과 가족 모두가 깨져버릴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이 일찍 개입하셔서 내가 의존하고 있는 우상을 파괴해나가실 때, 이를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우상으로 인한 더 큰 화를 당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역시 우상을 의존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상이 빼앗길까봐 위기를 느낄 때, 움찔하며 분노와 미움을 나타내는 것이 우리입니다. 이때마다 우리는 ‘아 내가 아직도 우상을 의존하고 있구나’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을 깨트려 나에게 참된 기쁨을 알게 하시려고 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 안에서 참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