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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의 복귀에 대한 반응들

    사무엘하 강해 47

    삼하 19:15-30

    2020년 7월 5일 주일예배 설교문

    전쟁이 끝나고 이제 다윗 왕을 불러오겠다고 하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의 동의가 있었습니다. 이제 드디어 다윗 왕이 왕권을 회복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상황입니다.

     

    [15] 왕이 돌아와 요단에 이르매 유다 족속이 왕을 맞아 요단을 건너가게 하려고 길갈로 오니라

     

    왕이 돌아오는데, 유다 족속이 먼저 맞이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와 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먼저 나온 것은 유다 지파가 다윗 왕의 출신 지파이기도 하지만 이들이 다윗 왕의 출신 지파였음에도 불구하고 압살롬의 반역 때, 압살롬의 편에 섰지만 다윗이 그들의 죄를 다 용서하고 그들에게 먼저 다가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는데 성경은 다윗 왕을 맞이하러 왔던 자 중에 두 사람에 대해 집중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시므이 한 사람은 므비보셋입니다. 이 두 사람은 서로 상반된 태도를 가지고 왕께 나아옵니다.

     

    이들이 반응하는 태도를 통해 어떻게 왕의 복귀에 대해 어떻게 사람들이 반응하는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1. 가식적으로 환영합니다.

     

    [16] 바후림에 있는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급히 유다 사람과 함께 다윗 왕을 맞으러 내려올 때에

     

    유다 지파가 왕을 맞이하러 온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 사람 틈에 시므이가 끼어 있었다는 것은 의외의 일입니다. 시므이는 누구인가요? 다윗이 피난길에 올랐을 때, 다윗을 저주한 사람입니다.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는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그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리더라” (삼하 16:13)

     

    말로도 아주 악한 저주를 했습니다. 너 같은 자는 죽어 마땅하다고 하며 돌까지 던졌습니다. 이 행위는 단순히 모욕하는 것을 넘어서 심각한 죄를 지은 사람을 사형 시키는 행위였습니다. 다윗을 향한 살해의지를 드러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므이가 환영 인파 가운데 먼저 다가와 다윗에게 다가옵니다.

     

    [18b] 왕이 요단을 건너가게 할 때에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왕 앞에 엎드려

     

    급하게 왕 앞에 다가왔습니다. 어차피 다윗이 요단강을 건너야 하기 강 저편에서 기다려도 되지만 시므이는 강을 건너와 왕 앞에 엎드립니다. 다윗을 왜 이렇게 환영하는 것일까요? 시므이는 다윗이 왕의 자리에 있을 때에도 그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시므이는 사울 왕 때, 많은 권세를 누리고 있었기에 다윗을 향한 미움과 분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왕을 인정하지 않지만 다윗이 권력의 자리에 있을 때, 침묵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왕권에서 내려오자 그의 본심을 드러내어 다윗을 저주한 것입니다. 결국 권력 앞에서 철저하게 그의 정체를 감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시므이는 굉장히 다혈질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윗을 향해 죽어라고 소리 지르다가도 다윗이 돌아온다고 하자, 두려워하며 다윗 앞에 엎드리다니요, 이것이 바로 가식입니다. 시므이가 다윗을 왕으로 인정했을까요? 아닙니다. 시므이의 본질은 언제라도 다윗이 힘을 잃으면 배신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본심입니다.

     

    [19] 왕께 아뢰되 내 주여 원하건대 내게 죄를 돌리지 마옵소서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시던 날에 종의 패역한 일을 기억하지 마시오며 왕의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 [20] 왕의 종 내가 범죄한 줄 아옵기에 오늘 요셉의 온 족속 중 내가 먼저 내려와서 내 주 왕을 영접하나이다 하니

     

    얼마나 철저한 회개를 하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까? 누구보다 자신이 먼저 달려왔다고 이야기하며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 사람이 정말 회개했구나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가식적인지 우리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시므이의 모습은 무엇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다니고 있지만, 시므이와 같은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본질 안에서는 예수를 참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가 큰 힘이 되어줄 거 같을 때는 예수를 믿지만 그렇지 않다고 생각되자마자 심적으로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을 진정한 구속주, 전능자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줄 수 있는 혜택과 힘만을 열망하는 ‘기복주의적 신앙’으로 반응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믿는 신의 자리가 어떤 신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 같지만 미래를 보장 받기 위한 수많은 다른 신을 믿으며 우상숭배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정적 순간이 되면 얼마든지 예수님을 버릴 수 있습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데도 자신이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괴로워하며 자신이 진짜 믿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드러나게 됩니다. 진짜 은혜를 받은 사람은 자신이 기도했는데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응답되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힘든 고난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 신앙이 더 단단해지게 됩니다.

     

    힘 있는 존재로 하나님을 바라보다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되면 하나님을 외면하는 자와 달리, 하나님과 신뢰의 관계를 갖고 있던 자는 고통의 때에 다르게 반응합니다. 시므이 역시 그러했습니다. 시므이의 모습을 보고 한 사람이 화가 나 이렇게 말합니다.

     

    [21]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대답하여 이르되 시므이가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를 저주하였으니 그로 말미암아 죽어야 마땅하지 아니하니이까 하니라

     

    옆에서 보니 화가 났던 것입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봐도 시므이의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아비새는 다윗이 힘들 때마다 함께 했던 충성된 부하입니다. 그런데 충성되었지만 다윗의 마음은 전혀 알지 못한 자였습니다. 아비새는 지금까지 세 번이나 다윗을 대신해서 죽이겠다고 말했지만, 그때마다 다윗에게 혼이 났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정신을 못 차리고 지금 이 상황에서도 다윗에게 자신이 죽이겠다고 말하자 혼이 납니다.

     

    사실, 이 아비새가 딱 우리 수준입니다. 세상을 보면 당장 심판을 받아야 할 사람들을 하나님이 가만히 두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이라면’이라는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시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아비새와 같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지금 당장 심판이 임해 내 마음에 안드는 사람과 상황을 제거해버리시기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때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22a] 다윗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너희가 오늘 나의 원수가 되느냐

     

    다윗은 자신이 행하고자 하는 행동과 반대되는 행동을 해서, 왜 자신과 원수가 되려고 하냐고 말합니다.

     

    [22b] 오늘 어찌하여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사람을 죽이겠느냐 내가 오늘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을 내가 알지 못하리요 하고

     

    압살롬을 따르던 사람이 겨우 다윗을 향한 두려움을 물리치고 나아왔는데, 이 자리에서 시므이를 죽인다면 사람들의 마음이 또 다시 흩어져 버릴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윗이 자신들을 보복하면 어떻게하지라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왜 나의 마음을 모르고 나의 원수가 되려고 하냐고 말합니다. 다윗은 시므이에게 이렇게 약속합니다.

     

    [23] 왕이 시므이에게 이르되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고 그에게 맹세하니라

     

    죽지 않는다고 해서 영원히 그러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시므이는 결국 심판을 받게 되지만, 지금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도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위기에 처한 자들을 도우시는 때가 많고 우리 인생 가운데 경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우리는 그 은혜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보다 훨씬 더 안 이루어지는 것이 ‘심판’입니다. 누군가 하나님께 심판을 받았으면 하지만, 오히려 그 일은 빠르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교회를 망가트리는 악인들을 볼 때마다 또 어린 아이들을 성노예로 삼는 자들, 운동선수들을 폭행하는 코치 등 세상에는 악한 인간들이 너무 많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들은 내버려 두시는 것 같을까요?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가라지 비유를 하십니다.

     

    “[28]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29]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마 13:28-30)

     

    딱 구분되는 잡초가 아니라, 곡식과 비슷한 가라지를 심어버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똑같이 예수를 믿는 것 같고 똑같이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수없이 많은 이단들과 교회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심판하지 않으실까요? 미성숙한 신앙을 가진 우리들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다리셔서 우리에게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심판이 이루어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진리를 깨닫는 자리까지 우리가 서도록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렇다고 심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시므이가 평안히 눈을 감게 되나요? 아닙니다. 다윗이 자신의 아들에게 죽기 전 시므이가 평안히 죽지 못하게 하라고 당부합니다. 다윗이 뒤끝이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원리를 보여주고자 기록한 것이기에 당장에 심판하지 않으실지라도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실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솔로몬은 아버지의 유언을 받아들여 시므이에게 강을 건너지 말라고 합니다. 하지만 시므이는 명령을 어겼고 그 시므이를 향해 솔로몬이 이렇게 말합니다.

     

    “[26] 왕이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네 고향 아나돗으로 가라 너는 마땅히 죽을 자이로되 네가 내 아버지 다윗 앞에서 주 여호와의 궤를 메었고 또 내 아버지가 모든 환난을 받을 때에 너도 환난을 받았은즉 내가 오늘 너를 죽이지 아니하노라 [44] 왕이 또 시므이에게 이르되 네가 네 마음으로 아는 모든 악 곧 내 아버지에게 행한 바를 네가 스스로 아나니 여호와께서 네 악을 네 머리로 돌려보내시리라” (왕상 2:44,46)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통치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2. 겸손하게 맞이합니다.

     

    [24a]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이 내려와 왕을 맞으니

     

    시므이와 정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왕이 이르되 네 주인의 아들이 어디 있느냐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예루살렘에 있는데 그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버지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 하는지라” (삼하 16:3)

     

    이에 대해 므비보셋이 알고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요? 지금 오해를 받은 상황입니다. 반역죄로 죽임을 당해야 하는 것을 넘어 배은망덕의 끝입니다. 그런데 므비보셋은 자신의 모습으로 진실을 밝힙니다.

     

    [24b] 그는 왕이 떠난 날부터 평안히 돌아오는 날까지 그의 발을 맵시 내지 아니하며 그의 수염을 깎지 아니하며 옷을 빨지 아니하였더라

     

    본문에 나타난 모습은 노숙자와 같은 모습입니다. 지저분한 행색을 하고 다윗 앞에 나아온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의 고통과 왕의 피난길에 동참한다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그때 이렇게 질문합니다.

     

    [25] 예루살렘에서 와서 왕을 맞을 때에 왕이 그에게 물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네가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더냐 하니

     

    궁금할 것입니다. 시바가 이야기한 것 외에 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26] 대답하되 내 주 왕이여 왕의 종인 나는 다리를 절므로 내 나귀에 안장을 지워 그 위에 타고 왕과 함께 가려 하였더니 내 종이 나를 속이고

     

    시바의 주장이 거짓이었던 것입니다. 시바가 도망가는 왕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주며 이야기하니 사실 확인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들으니 므비보셋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므비보셋의 재산을 시바에게 주고 말았습니다. 지금 므비보셋은 모든 것을 빼앗긴 상황이고 이것을 회복해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므비보셋은 시바를 벌해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왕의 처분대로 하옵소서’라고 말합니다.

     

    [27] 종인 나를 내 주 왕께 모함하였나이다 내 주 왕께서는 하나님의 사자와 같으시니 왕의 처분대로 하옵소서

     

    자신이 옳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왕의 처분대로 하옵소서’라는 것은 위험이 있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태도가 왕을 얼마나 겸손하게 인정하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억울하다는 것은 내가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누리지 못할 때, ‘억울하다’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회사의 사장인데 나를 청소부로 알 때, 사장의 대우를 받지 못했기에 ‘억울하다’라고 생각합니다. 므비보셋은 그런데 자신의 억울함을 회복할 기회 가운데 왕의 처분에 맡기겠다고 한 것일까요? 그는 진짜 은혜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28] 내 아버지의 온 집이 내 주 왕 앞에서는 다만 죽을 사람이 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나 종을 왕의 상에서 음식 먹는 자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내게 아직 무슨 공의가 있어서 다시 왕께 부르짖을 수 있사오리이까 하니라

     

    이전에 자기는 죽은 자였던 것입니다. 예전에 나는 괜찮은 자였던 것이 아니라 원래의 시작이 죽은 자였던 것인데 왕이 지금 자신을 높여주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왕족처럼 여김을 받게 되었으나 누명을 쓰게 되었지만 원래의 상태보다는 낫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왕이 어떤 처분을 내리든 받아들이겠다고 말합니다. 왕이 죽은 것과 같은 므비보셋에게 은혜를 베풀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절하여 이르되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하니라” (삼하 9:8)

     

    고대의 개는 하이에나와 같은 존재입니다. 죽어도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존재입니다. 이 마음으로 살아왔던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교만은 내가 괜찮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나옵니다. 시므이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사울 시대에 자신이 누렸던 것을 생각하며, 다윗 때에 동일하게 누리지 못하자 분노가 나타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므비보셋과 같이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찾아 와 죄로 인해 죽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심으로 살려주신 것입니다. 이 은혜를 아는 자들은 나는 괜찮은 존재라며 교만할 수 없습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여전히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자기중심성에서부터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정말 왕으로 섬긴다면 우리 인생 가운데 하나님이 어떤 대우와 판결을 하실지라도 억울함이 없어야 합니다. 늘 우리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나는 좋은 것을 누려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불만족과 하나님을 향한 원망을 가진 모습이 바로 교만의 증거입니다. 우리와 같은 자에게 하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복음을 알게 하신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에게 우리가 하나님을 어떤 존재로 여기고 있는지 물어보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어떤 처분을 내리실지라도 “하나님 그것도 난 괜찮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이미 주신 것들이 너무 감사하여 하나님의 처분에 겸손하게 반응하는 므비보셋의 태도가 진짜 은혜를 받은 사람만이 나타낼 수 있는 태도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며 다른 은혜를 달라고 말하는 성도분이 계십니까? 므비보셋에게 다윗이 이런 결정을 내립니다.

     

    [29] 왕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또 네 일을 말하느냐 내가 이르노니 너는 시바와 밭을 나누라 하니

     

    왕의 피난길을 도운 시바의 것을 다시 빼앗아 올 수 있었던 상황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명확한 결정을 내리기 어려워 밭을 나누라고 말합니다. 저 같으면 “왕이여 어떻게 그럴 수 있나요?”라며 시바를 벌주고 되돌려달라고 말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진짜 은혜를 받은 므비보셋은 어떻게 반응하였을까요?

     

    [30] 므비보셋이 왕께 아뢰되 내 주 왕께서 평안히 왕궁에 돌아오시게 되었으니 그로 그 전부를 차지하게 하옵소서 하니라

     

    이것이 은혜를 받은 태도입니다. 자신의 물질과 지위가 회복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짜 왕을 왕으로 섬기는 자, 겸손한 자는 나의 상황이 중요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늘 기도하는 것은 나의 상황이 바뀌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은혜를 받은 자는 “하나님, 저에게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더라도 예수님이 나의 왕이심에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이 기쁨입니다. 그것만으로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을 통치하시기를 열망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왕의 왕으로 나타내시는 것을 기뻐하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아니면 아직까지 나의 환경과 지위에 관심을 갖고 계십니까? 우리 예수님을 온전한 왕으로 인정하며 예수가 통치하시는 그 어떤 통치도 감사로 받아들이는 성도가 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