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 앞에 드러나는 본심
사무엘하 강해 48
삼하 19:31-43
2020년 7월 12일 주일예배 설교문
다윗이 피난길에 있다가 복귀하면서 이전에는 다윗에게 적대적인 사람들, 문제를 해결 받을 사람들 등 다양한 사람들이 다윗을 만나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 왔습니다. 왕은 사람들의 필요를 공급하면서도 동시에 많은 욕심을 내는 사람들을 제한하여 질서를 유지합니다. 왕 앞에 나아가면 사람들은 본심을 드러내게 됩니다.
1. 순수한 마음을 드러냅니다.
[31]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왕이 요단을 건너가게 하려고 로글림에서 내려와 함께 요단에 이르니
바르실래는 큰 부자로 다윗이 요단강을 건너 있을 때 많은 도움을 줬던 사람입니다.
[32] 바르실래는 매우 늙어 나이가 팔십 세라 그는 큰 부자이므로 왕이 마하나임에 머물 때에 그가 왕을 공궤하였더라
다윗이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못했을 때, 다윗을 많이 도왔던 사람인 것입니다.
“[27] 다윗이 마하나임에 이르렀을 때에 암몬 족속에게 속한 랍바 사람 나하스의 아들 소비와 로데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과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28]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29] 꿀과 버터와 양과 치즈를 가져다가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에게 먹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 생각에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함이더라” (삼하 17:27-29)
왜 바르실래가 도움을 줬던 목록을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바로 그가 아주 세심하게 도움을 줬다는 것을 기록하기 위해서입니다. 팥, 콩 등 정말 필요한 것들을 가져와서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큰 부자니까, 가지고 있는 것이 많으니까 가지고 있는 것 중 일부를 줬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압살롬이 전체 이스라엘의 지지를 받으며 전세가 압살롬에게 완전히 기운 상황입니다. 만약 압살롬이 다윗을 이기고 이스라엘 전부를 통치하면 바르실레는 반역자로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다윗을 도운 것입니다.
다윗은 정말 고마웠을 것입니다. 단순한 물질적 공급 외에도 내 편이 있구나, 내가 포기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바르실래에게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자고 이야기 합니다.
[33] 왕이 바르실래에게 이르되 너는 나와 함께 건너가자 예루살렘에서 내가 너를 공궤하리라
다윗에게 바르실래는 정말 큰 힘이 되어준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자기와 함께 예루살렘에 가서 도움을 받았던 것에 대해 미안함을 갚고자 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함께 가자고 하는 요청이 큰 집에서 같이 살자고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권력의 중심에 설 수 있는 기회입니다. 변방의 족장이 왕과 함께 예루살렘에 돌아가 권력의 중심에 설 수 있는 기회를 다윗이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르실래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34] 바르실래가 왕께 아뢰되 내 생명의 날이 얼마나 있사옵겠기에 어찌 왕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리이까
자신이 나이가 많이 들어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어떻게 가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나이가 들면 욕심을 내려놓고 순수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요? 사람이 나이가 든다는 것은 내가 가진 욕심을 내려놓는 순수한 자리에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감추게 하는 껍데기마저 없어져서 감추지 못하는 상황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욕심을 부리는 가장 강렬한 욕심은 권력에 대한 욕망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내 마음대로 움직이는 권력에 대한 것 말입니다. 바르실래는 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지지 못한 것은 권력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권력욕을 포기하지 못하고 나중에 추하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요. 그런데 바르실래는 자신의 위치와 한계를 명확하게 알고 있던 사람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생명이 남았고,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아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살펴보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이 어떤 사람을 한계와 약점을 지적한다고 생각해봅시다. 그가 만약 자신을 객관적으로 자신을 알고 있으면 그는 잘 수용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내가 남편에게 한계를 지적하면 보통 화가 나고 짜증을 냅니다. 밖의 사람들은 그를 그렇게 보지 않는데 왜 그렇게 보는지 화를 냅니다. 사실 밖에서는 어떤 사람을 진실하게 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약점을 감추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의 약점을 발견하면 이를 통해 공격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열심히 약점을 감춥니다.
[35] 내 나이가 이제 팔십 세라 어떻게 좋고 흉한 것을 분간할 수 있사오며 음식의 맛을 알 수 있사오리이까 이 종이 어떻게 다시 노래하는 남자나 여인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사오리이까 어찌하여 종이 내 주 왕께 아직도 누를 끼치리이까
85세라 옳고 그른 것을 잘 구분하지 못하며, 미각마저 둔해지고 청각마저 안 좋아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자신이 누를 끼칠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자신의 한계를 철저히 인정하며 좋은 것, 맛있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서 좋은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자신이 잘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합니다. 모든 것을 다 잘하기를 우리는 기대합니다. 똑똑하고 관계성도 좋고 절제도 잘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완벽을 기대하고 완벽을 소망하며 다른 사람을 볼 뿐,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완벽해 보이는 사람이 삶에서 자신의 실체가 드러나 버리면 주변사람들이 깜짝 놀랍니다. 어떨 때는 마음속에 추하고 악한 본질이 그 사람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할 때 우리는 놀랍니다.
그러나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계를 인정하지 못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억울함이 쌓입니다. 주변에 보면 나보다 더 잘나지 않은 사람이 더 많은 풍요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을 볼 때, 억울함이 쌓입니다. 나보다 더 똑똑하지 않은 것 같은데, 고등학교 때 나보다 성적이 좋지 않았는데 나보다 더 잘나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실 중고등학교 때 성적이 사람의 행복을 가르는 데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누리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이 누리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억울함이 쌓입니다. 나도 이 정도는 누려야 하는데 라고 생각하며 나의 한계는 바라보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은 나의 욕구를 채워주지 않는 존재일 뿐입니다. “저 사람은 저렇게 높아졌는데, 저 사람은 돈이 많은데 나에게는 왜 주지 않으세요?”라고 말합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결국 사람들과의 관계도 깨어집니다.
우리는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낮은 자존감을 가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잘못된 우리의 한계에 대한 인식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좋은 학교를 나왔는가, 내가 얼마나 많이 소유하고 사는가, 모두 우리의 외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가 더 많은 외적인 것들을 가지게 해달라고 기도해도 하나님은 우리의 감각적 만족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을 응답으로 주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짜 중요한 것을 받아들이는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진짜 중요한 것은 뒤로한 채 자신이 원하는 것을 더 얻으려 합니다. 그래서 결국 더 많은 힘을 향해 가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의 이런 시발점이 된 것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으며 비교를 하며 욕망에 사로집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무슨 기회만 있으면 “하나님 나에게 이걸 또 주세요.”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더 멋진 것을 나에게 주시지 않더라도 나는 만족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불만족을 채우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 그것이 나의 영광이기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옛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감사입니다.
[36] 당신의 종은 왕을 모시고 요단을 건너려는 것뿐이거늘 왕께서 어찌하여 이같은 상으로 내게 갚으려 하시나이까
여기에 온 것이 왕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왕을 그저 만나서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이런 관계가 거의 없습니다. 호의를 베풀 때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누군가 나에게 과도하게 잘해준다면, 그 사람은 사기꾼일 것입니다. 사람은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결혼하기 전에 대부분 결혼하기 전에는 잘했는데 결혼하고 왜 이렇게 변할까 생각합니다. 사기꾼이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결혼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었습니다. 이런 연애 감정조차도 목적이 있을 때 잘합니다. 이 사람과 결혼하면 비참해진다고 생각하면 잘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고 나면 결혼 이후에 더 잘하기가 힘듭니다. 권력이 있는 사람에게 잘한다면 그에게 대가를 기대하고, 그의 말에 순종하는 것처럼 반응해버립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힘이 있는 자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주며 어려움이 닥쳤을 때 도와줄 구원자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권력의 자리에 서면 권력을 향한 열망의 자리에 가게 됩니다. 권력의 자리에 서면 이전의 모든 가치를 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바르실래는 왕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권력과는 차원이 다른 권력자였습니다.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을 높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잘 했는데 아무런 목적이 없이 잘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마음을 정결한, 순수한 마음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순수성을 지닌 마음입니다.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 (잠 22:11)
왕 주변에는 자신의 마음과 다른, 왕의 비위만 맞춰 그에게 도움을 받고자하는 사람들이 천지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왕의 친구가 되나요? 마음에 정결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의 마음에는 위선이 없어서 진솔한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욕심을 이뤄줄 대상으로 하나님을 대합니다. 나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 내가 돈이 없을 때,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떤 대상으로 바라보실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함께할 친밀감의 대상으로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함께 고민하고 함께 사랑할 대상으로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그런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은 우리를 바라보시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해줄 존재로 바라보며 우상으로 여긴다면 얼마나 비극인 것일까요.
만약 결혼을 했는데 배우자가 자신을 돈이 나오는 ATM 기계로 바라보며 얼마를 받아낼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비극일까요? 남편을 바라보며 명품을 받아낼 생각만 한다면 어떤 감정이 들까요?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그렇게 바라볼 때 하나님과의 관계는 왜곡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하고 교제하고 동등된 친구로 여길 수 있도록 더 멋진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는 것이 더 고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을 잘 알게 되어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분이 되시는 것을 알아가는 것이 우리가 알아가야 하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 나의 기쁨이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영광입니다.”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교회에 얼마나 있을까요? 기도하고 나서는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달라고만 이야기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르실래는 이런 요구를 합니다.
[37a] 청하건대 당신의 종을 돌려보내옵소서 내가 내 고향 부모의 묘 곁에서 죽으려 하나이다
바르실래가 당장 죽을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진심임을 강조하여 전달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예루살렘에 가지 않겠다고 이야기를 하지만, 다른 사람을 추천합니다.
[37b] 그러나 왕의 종 김함이 여기 있사오니 청하건대 그가 내 주 왕과 함께 건너가게 하시옵고 왕의 처분대로 그에게 베푸소서 하니라
그러나 왕의 종 김함을 대신 데려가라고 이야기합니다. 김함에 대해 여러 학자는 바르실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길르앗 바르실래의 아들들에게 은총을 베풀어 그들이 네 상에서 먹는 자 중에 참여하게 하라 내가 네 형 압살롬의 낯을 피하여 도망할 때에 그들이 내게 나왔느니라” (왕상2:7)
자신의 아들들을 추천하여 예루살렘으로 갔던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김함 혼자 갔었지만 이후에 그의 형제들을 추천한 것입니다. 바르실래가 자신은 늙었으니 아들을 권력의 자리로 보내고자 하는 현대적 부모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바르실래는 순수한 사람이라는 맥락 가운데 이 부분을 해석해야 합니다. 바스실래는 다윗의 미안한 마음을 덜어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청을 거절하면서 아들이라도 보낸 것입니다. 또한 바르실래는 다윗에게 어떤 사람이 필요한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다윗을 배신했었습니다. 다윗은 외롭고 불안했었을 것입니다. 외롭고 힘든 상황에 있는 다윗을 보좌하는데 유용한 사람을 보낸 것입니다. 다윗 편에 충성하는 사람을 보낸 것입니다. 그랬더니 다윗이 이를 받아들입니다.
[38] 왕이 대답하되 김함이 나와 함께 건너가리니 나는 네가 좋아하는 대로 그에게 베풀겠고 또 네가 내게 구하는 것은 다 너를 위하여 시행하리라 하니라
그제서야 다윗이 바르실래의 마음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렘 41:17 “애굽으로 가려고 떠나 베들레헴 근처에 있는 게롯김함에 머물렀으니”
게롯김함이라는 지명이 나옵니다. 게롯김함이라는 뜻은 김함이 살았던 곳이라는 뜻입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의 인근입니다. 김함의 거할 곳을 다윗이 자신의 고향 인근에 마련해준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 5:8)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질 수 있을까요? 욕망을 가지고 대하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얼굴을 보여주십니다. 이는 비유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누리는 것입니다. 성경의 8복은 세상의 복과 다릅니다. 세상에서 병도 안 걸리고, 자녀들은 출세하는 복이 아닙니다. 마음이 가난해지는 복입니다. 핍박을 받아도 이기는 복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진짜 만난 사람들이 누리는 복입니다.
하나님을 만난다고 병에 안 걸리는 것일까요? 그러나 하나님을 진짜 만난 사람들은 병에 걸려도 하나님 앞에 신실한 반응을 보입니다. 핍박과 환란 속에서도 하나님을 진짜 바라보며 세상과는 다른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성도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2. 갈등을 일으키는 욕망을 드러냅니다.
[41] 온 이스라엘 사람이 왕께 나아와 왕께 아뢰되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이 어찌 왕을 도둑하여 왕과 왕의 집안과 왕을 따르는 모든 사람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가게 하였나이까 하매
왕이 요단강 동에서 서로 건너는데 유다 사람들이 먼저 와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왕이 강을 거의 건넌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정말 왕을 바라보며 그를 반기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들은 가식적인 더러운 마음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자 유다사람들은 또 어떻게 반응하는 것일까요?
[42a] 모든 유다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대답하되 왕은 우리의 종친인 까닭이라
왕이 종친이라 오는 것이 당연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절반의 진실일 뿐입니다. 다윗이 쿡 찔러서 모시러 온 유다민족이었습니다. 다윗이 모든 호의를 베풀어서 오라고 해서 온 것이었습니다. 유다민족이 진짜로 그들을 위해서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서 42절 하반절에서 이야기 합니다.
[42b] 너희가 어찌 이 일에 대하여 분 내느냐 우리가 왕의 것을 조금이라도 얻어 먹었느냐 왕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이 있느냐
자신들은 순수하게 했다고 주장합니다. “왕이 아무것도 안줬어, 우리는 순수하게 이러고 있는데 왜 화를 내고 그래.”라고 소리 지릅니다. 적반하장입니다. 자신의 속마음은 감추고 자신은 순수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화가 납니다. 민족을 위해 이 일을 했습니다라고 이야기 하면서 결국 자신을 위해서 살아 온 사람들, 거짓말로 자신을 포장하며 살다가 결국 실체가 드러나는 사람들, 그러나 이것이 사실 인간의 본질입니다. 정치인들은 자신이 순수하게 여러분을 위해 산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유다민족만 더럽게 우상을 섬기며 욕망하며 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습니다.
[43a] 이스라엘 사람이 유다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는 왕에 대하여 열 몫을 가졌으니 다윗에게 대하여 너희보다 더욱 관계가 있거늘 너희가 어찌 우리를 멸시하여 우리 왕을 모셔 오는 일에 먼저 우리와 의논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나
힘의 논리일 뿐입니다. 열지파인데 왜 한지파인 너희들이 결정했냐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이 많은데, 우리가 다수인데, 왜 우리와 결정하지 않았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많으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수가 적다고 당신의 마음대로 하자고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요? 유다지파는 명확한 명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43b 에서 더 강경하게 이야기합니다.
[43b] 유다 사람의 말이 이스라엘 사람의 말보다 더 강경하였더라
그 덕분에 다음 장에서는 이것이 전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해 인간들이 반응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강하시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와 나의 욕구를 달성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런 욕심이 인간의 본질 안에서 작동하기 시작하면 반드시 싸움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갈등이 벌어지면 교회도 분열합니다. 심지어 예수님께 배운 제자들도 똑같이 반응했었습니다.
“[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막 10:35-37)
제자들은 예수님을 철저하게 자신의 권력욕을 만족시켜줄 왕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과의 초기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3년간 예수님을 함께 모시던 사람들에게 나타난 반응입니다. 야고보와 요한만 나쁜 놈이라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막 10:41)
열 명의 제자가 화를 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데 너희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화를 낸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일등공신이야! 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아마 베드로가 가장 화를 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름도 잘 모르는 제자들도 모두 화를 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생각하는 좌우편은 우리가 원하는 것과 다른 것이었습니다.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막 10:40)
우리는 예수님을 열심히 따라다니면 세상의 영광의 자리에 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안다면 우리는 그 자리에 가고 싶어 하지도 않습니다.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막15:27)
이것이 요한과 야고보가 열망하던 예수님의 좌편 우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그런 자리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욕망의 대상으로 바라봅니다. 이런 마음이 언제 들통 나나요? 문제 앞에 갔을 때, 내가 절박할 때, 나의 기도가 깊어질 때, 기도가 깊어지면 내가 영광스러운 존재가 될 것 같지만 기도가 깊어지면 나의 욕망이 튀어져 나옵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나 스스로도 하나님을 내가 왜 섬기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내 욕망을 드러내며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사실은 예수가 왕이 되실 때 내가 나의 욕망의 영광을 누리고자 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은혜가 임할 때, 예수님이 초대하는 길을 십자가의 죽음의 길일지라도, 또한 바스실래처럼 모든 것을 바쳐도 어떤 영광이 드러나지 않더라도, 나의 인생의 가장 기쁜 순간은 왕과 함께 했으며, 왕이 힘든 순간 그에게 힘이 되었던 것이라고 고백하는 진정한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삶의 마지막이 다가왔을 때,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며 하나님을 진실하게 알아가던 그 순간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순간이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