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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원의 찬양을 부를 때

    사무엘하 강해 52

    삼하 22:1-7

    2020년 8월 16일 주일예배 설교문

    이 장은 현대의 부록과 같습니다. 이 시에서 다윗은 자신의 인생 전체에서 경험한 은혜를 노래합니다. 이 시는 히브리어로 보면 365개의 단어로 되어있습니다. 우연치고는 의미가 있습니다. 성도들이 매일매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노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편 18편에도 같은 시가 나옵니다. 성경은 왜 이 같은 시를 시편과 사무엘하에 기록할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을까요? 다윗이 이 시를 적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1]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원수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으로 여호와께 아뢰어

     

    다윗과 같이 우리의 인생에서도 원수의 손에서 우리가 구원받을 때가 있고, 그럴 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만들어진 목적이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사 43:21)

     

    우리는 언제 구원의 찬양을 부르게 되나요?

    1. 원수들로부터 구원을 얻을 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2] …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위하여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 [3a] 내가 피할 나의 반석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그에게 피할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 (삼하 22:2-3a)

     

    다윗은 9개나 되는 다른 이미지로 하나님을 묘사합니다. 인생 가운데 그가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을 이렇게 다양하게 묘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묘사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깊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떠신 분이시다 라는 고백의 내용이 없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피상적인 것입니다. 다윗이 이야기하는 이미지들은 자신이 직접 경험한 은혜들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로 이 말씀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25]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찾으러 온 것을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아뢰매 이에 다윗이 바위로 내려가 마온 황무지에 있더니 사울이 듣고 마온 황무지로 다윗을 따라가서는 [26] 사울이 산 이쪽으로 가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산 저쪽으로 가며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급히 피하려 하였으니 이는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고 잡으려 함이었더라” (삼상 23:25-26)

     

    사울은 다윗을 수년 동안 쫒아 다녔습니다. 많은 정보원으로부터 정보를 얻은 후 산으로 다윗을 잡으러 갔습니다. 이스라엘의 산은 한국의 산과 달라서 이쪽에서 서서 저쪽이 가까이 보이더라도 아주 깊은 골짝기가 산 사이에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산에서 경험한 구원의 경험으로 하나님을 반석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구원의 뿔이라고 고백합니다. 황소가 가진 적극적인 뿔이고 직접 무찌를 수 있는 뿔입니다. 하나님이 어떨 때는 적극적으로, 어떨 때는 소극적으로 구원을 베푸신 것입니다.

     

    왜 이런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했던 것일까요?

     

    [3b] … 나를 폭력에서 구원하셨도다

    [4b] …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받으리로다

     

    이 말씀처럼 다윗의 원수는 다윗에게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사울은 직접 다윗을 죽이기 위해 몸부림을 쳤습니다. 군대를 이끌고 와서 죽이려고도 했지만, 어떨 때는 직접 자신의 손에 있는 창으로 죽이려 했습니다.

     

    “[10] 그 이튿날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 그가 집 안에서 정신 없이 떠들어대므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그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11]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사울이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의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 (삼상 18:10-11)

     

    다윗은 사울을 하프를 타며 도와주고 있는데 사울은 그런 다윗에게 창을 던지고 또 던졌습니다. 또한 혼자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다 이야기해서 다윗을 죽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사울이 그의 아들 요나단과 그의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 말하였더니 …” (삼상 19:1)

     

    다윗은 이런 과정 가운데 구원을 경험하며 하나님을 노래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윗처럼 누군가가 나를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죽이려고 합니까? 그러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당장 경찰에 신고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법적 제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사울과 같은 죽음의 위협이 없기 때문에 사울과 같은 찬양을 할 수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삶에는 수많은 위협이 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했던 이유는 아래와 같습니다.

     

    “[7]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8]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9]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삼상 18:7-9)

     

    사울은 엄청나게 화가 납니다. 사람이 심하게 화가 날 때 이유는 자신이 강렬하게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할 때 화가 나는 것입니다. 자신이 만만으로 칭송받고 싶은 이유입니다. 자신이 이미 왕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강력한 권력을 인정 받았지만 길거리 여성들이 다윗을 찬양하자 자신이 더 찬양을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람 모두가 가진 욕망입니다. 모든 사람이 나를 알아주고 모든 사람이 나를 찬양해주는 욕망 말입니다. 또한 두려움입니다. 다윗이 자신의 나라를 결국 빼앗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말입니다.

     

    사울은 정신이 이상한 악마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단지 모든 인간에게 있는 욕망과 두려움을 보여주는 화신과 같은 존재입니다. 이 모습을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도 언제 화가 나나요? 우리가 어떤 것을 원하는데, 다른 사람이 더 많이 가지고 있을 때 화가 납니다. 우리 또한 사울처럼 욕망과 두려움이 가득합니다.

     

    사울은 과거에 있던 어떤 나쁜 인간이 아니라 사울적 속성으로 드러나는 인간의 보편적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옛사람은 폭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원하는 것이 강렬합니다. 원하는 것이 이뤄지지 않으면 화를 내고 폭력을 행사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합니다. 사람들마다 폭력성을 드러내는 방법이 다릅니다. 여성들은 보통 짜증을 내거나 삐지거나 바가지를 긁는 식으로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러는 이유는 자신의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함입니다. 남자들은 분노를 한번에 폭발하는 식으로 폭력성을 드러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는데 어떤 사람을 통해 그것을 이루지 못하면 반드시 폭력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화를 내야하는데 내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교수 밑에서 일하는 연구원이 교수의 갑질에 직접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그럴 때 자신을 공격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럴 때, 우울증이 나타납니다.

     

    인간은 반드시 폭력성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관계를 파괴합니다. 사랑하기 위해 결혼하고 아이를 낳더라도 상대방 때문에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면 다양한 방식으로 이를 드러냅니다. 만약 폭력성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결혼생활은 행복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아무리 좋은 사람을 만나도 결혼생활이 어려운 것일까요?

     

    사람은 타인에게 자신의 욕망과 두려움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나의 욕망과 두려움을 해결도 못하는데 다른 사람의 욕망과 두려움까지도 해결해 줄 수 있을까요? 그럼 왜 결혼 전에는 이런 것을 참는 것일까요? 이것도 결혼을 욕망하기 때문입니다. 결혼이라는 안정감 있는 관계로 가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나면 이런 욕망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우리를 서로 공격하는 것은 밖의 마귀가 아니라 자신 안의 폭력성입니다. 계속해서 남을 미워하고 정죄하며 어떻게든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고 싶은 욕망 말입니다. 이것이 성화되지 않은 연약한 사람들만의 문제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가장 깊은 성화의 단계로 가며 예수를 본받으라고 이야기한 바울도 깊은 고민을 했던 흔적이 있습니다.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롬 7:18-19)

     

    우리가 매일 타인을 깨뜨리고 상처주고 싶은가요? 아닙니다. 우리 안에도 타인을 돕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속에 더 강력한 힘으로 타인을 깨뜨리길 원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사도가 이것 때문에 고통했습니다. 그리고 그 갈등의 고백이 나옵니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2-24)

     

    하나님 뜻대로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강력한 힘으로 나를 지배해서 사랑의 말보다는 “너 왜 이렇게 해?” “너를 사랑으로 용서할게”라는 말 보다는 “너를 끝까지 미워할게”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래서 24절에 아래와 같이 고백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4)

     

    너무 지치고 힘들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가장 큰 싸움은 밖에 있는 마귀와의 싸움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가장 큰 공격, 우리에게 가장 큰 구원이 필요한 순간은 우리 안에 있는 사울이 뿜어내는 강력한 악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으로부터 구원해내시는 구원의 은혜를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옛사람의 폭력을 경험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요? 우리 안에 있는 옛사람의 영향력도 힘이 드는데, 이를 자극하는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더더욱 힘들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나도 사울 너도 사울인 곳에 살게 하시는 이유는, 다른 사람의 사울을 통해서 우리 안의 사울이 드러나도록 하게 하기 위하심입니다. 우리는 사울 없이는 다윗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통해서 우리를 더 다윗에 가까운 자로 만들어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내 인생에서 사울이라고 생각하는 그 존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임재를 누릴 수 있고, 다윗과 같은 자가 되도록 만들어져가는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4]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우리가 기도를 하면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은 다 패망하고 나는 잘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내 안의 사울이 죽어가고 내 안에 하나님의 모습이 만들어져가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리에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과정을 통해 결국 다윗이 노래했던 것처럼 하나님이 나의 찬양이시며 나의 구원자가 되신다고 노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죽음의 두려움에서 구원을 얻을 때입니다.

     

    [5] 사망의 물결이 나를 에우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6] 스올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여기 나와 있는 모든 표현들은 다 같은 말입니다. 죽음의 공포가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가 밤에 잠이나 잘 수 있었을까요? 수천 명의 특공대가 다니며 자신의 생명을 죽이려 쫒아 다닙니다. 사람이 아무리 강력해도 이런 두려움과 죽음의 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두려움에서 다윗을 구원하셨는데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첫 번째로는 말씀으로 그를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15] 다윗이 사울이 자기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나온 것을 보았으므로 그가 십 광야 수풀에 있었더니 [16]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17]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하니라” (삼상 23:15-17)

     

    다윗은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광야에서 있는데 사울이 쫒아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때 요나단이 다윗을 위로하고 두려움을 벗어나게 돕습니다. 죽음 자체라기보다 죽음의 공포가 우리를 파괴합니다. 암에 걸린 것 보다 암에 걸렸다는 공포가 우리를 파괴하도록 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공포 앞에서 이를 이겨내도록 하나님이 힘을 주십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만을 벗어나도록 도움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의 근원이 하나님이 우리를 신뢰하시기에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의 생명의 주관자가 되시는 것을 경험하도록 하십니다.

     

    두 번째로 때로는 상황으로 개입하십니다. 한 사람의 구원을 완성하시고자 수많은 상황으로 개입하십니다.

     

    “[26] 사울이 산 이쪽으로 가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산 저쪽으로 가며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급히 피하려 하였으니 이는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고 잡으려 함이었더라 [27] 전령이 사울에게 와서 이르되 급히 오소서 블레셋 사람들이 땅을 침노하나이다 [28] 이에 사울이 다윗 뒤쫓기를 그치고 돌아와 블레셋 사람들을 치러 갔으므로 그 곳을 셀라하마느곳이라 칭하니라” (삼상 23:26-28)

     

    산으로 도망하긴 했습니다. 그래서 잠깐 숨을 쉬었지만, 숨바꼭질처럼 도망하다가 수천 명이 산을 둘러싸면 결국 포위당해서 잡힐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의 개입이 있었습니다.

     

    “전령이 사울에게 와서 이르되 급히 오소서 블레셋 사람들이 땅을 침노하나이다” (삼상 23:27)

     

    하나님이 개입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개입하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를 하나님의 개입이라고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에 사울이 다윗 뒤쫓기를 그치고 돌아와 블레셋 사람들을 치러 갔으므로 그 곳을 셀라하마느곳이라 칭하니라” (삼상 23:28)

     

    셀라하마느곳은 분리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있었음을 경험할 때,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아주 가끔 하나님은 신비하고 놀랍게 개입하시기도 하십니다.

     

    세 번째로 기적과 같은 개입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다윗은 놀랄만한 기적을 경험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좀 신기한 경험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라면 이것일 것입니다.

     

    “[2] 사울이 일어나 십 광야에서 다윗을 찾으려고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과 함께 십 광야로 내려가서 [7] 다윗과 아비새가 밤에 그 백성에게 나아가 본즉 사울이 진영 가운데 누워 자고 창은 머리 곁 땅에 꽂혀 있고 아브넬과 백성들은 그를 둘러 누웠는지라” (삼상 26:2,7)

     

    다윗을 쫓던 3,000명이 모두 잠이 들었던 순간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나마 기적과 같은 상황이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불침번도 없이 3,000명이 한꺼번에 잠이 들었다니 말입니다. 다윗은 불이 갈라지는 것을 보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지 못했습니다. 갑자기 천사들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신비하고 놀라운 개입은 없지만 하나님이 그 때 개입하지 않으셨다면 어찌할 뻔했나하는 순간들이 삶 도처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찬양할 수 있습니다.

     

    [7]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우리의 두려움의 근원인 죽음은 우리의 죄의 결과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 (롬 6:23)

     

    죄는 무서운 절망과 좌절을 가져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약속을 하시나요?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 15:17-20)

     

    예수님이 부활을 첫 열매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일 4:18)

     

    사랑을 받아들인 자는 다시는 두려움을 경험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받아들인 자는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인생 내내 안정을 추구했지만 안정이라는 것이 송두리째 부서져 가는 것을 경험해왔습니다. 인생가운데 어떤 것도 생각한대로 가게 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과거를 되돌아보니까 그 과정에서 하나님이 구원을 행하셨다는 것을 고백하지, 살아가는 순간에는 숨이 막히는 불안과 두려움을 경험하며 살아갔던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나의 두려움을 몰아내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나의 가장 좋은 것을 드리고 싶은 순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붙들어 모든 것이 의미가 있었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붙들었던 순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고 하나님을 믿게 하시고 하나님을 믿을 수밖에 없게 하셔서 나의 하나님이시며 나의 찬양이시고 나의 피난처이시라는 것을 진심으로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의 인생에도 원수들의 폭력으로부터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며 하나님을 진심으로 찬양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