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에 대한 승리
사무엘하 강해 56
삼하 22:38-43
2020년 9월 20일 주일예배 설교문
다윗은 평생 동안 전쟁을 한 전쟁의 용사입니다. 다윗은 왕이 된 이후에 다윗 주변에 있는 나라들과 전쟁을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그들을 ‘원수’라고 말합니다. ‘원수’란 하나님의 백성을 계속해서 공격하고 두렵게 하고 고통과 절망에 휩싸이게 한 주변 나라를 의미합니다. 다윗이 왕이 되자, 주변 나라와 전쟁을 하여 승리합니다. 어떻게 다윗이 싸웠으며 어떤 승리를 얻었는가가 사무엘하 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가장 처음 싸워 이긴 상대는 블레셋입니다.
“그 후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을 쳐서 항복을 받고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메덱암마를 빼앗으니라” (삼하 8:1)
다윗이 블레셋 사람과 싸워 항복을 얻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면 블레셋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크게 고통했기 때문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농사의 소산물을 뺏고 이스라엘보다 월등한 무기로 압제하였습니다. 또 이스라엘 땅에 자신들의 기지를 세웠습니다. 또한 블레셋 사람들은 거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거인을 물리치고 블레셋 사람에게 항복을 받은 후에 블레셋의 가장 중요한 도시 가드, ‘메덱암마’를 정복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블레셋은 어떤 존재로 표현하나요?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의 이름은 골리앗이요 …” (삼상 17:4)
거인과 같은 존재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되었나요?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며” (삼상 17:24)
블레셋은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하고 두렵게 하는 세상의 거대하고 강한 세력을 의미합니다. 블레셋이 성경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게 하는 적입니다. 세상은 성도로 하여금 두렵게 하여 하나님께 의존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백성을 위협하고 두렵게 하던 세력을 정복함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더 이상 두려움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싸워 이긴 적은 모압입니다.
“다윗이 또 모압을 쳐서 … 모압 사람들이 다윗의 종들이 되어 조공을 드리니라”(삼하 8:2)
모압은 이스라엘 동쪽에 위치한 나라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어떤 영향력을 미쳤나요?
“[1]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2] 그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3]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 (민 25:1-3)
세상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줍니다. 모압에는 아세라 숭배가 가득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는 부부관계인데, 신에게 제사 드린다는 명목으로 신전에 여사제와 예배 참여한 남자들이 집단 성관계를 맺었습니다. 이를 보고 바알과 아세라가 비를 내린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모습을 보고 유혹을 받아 하나님께 속해야 할 자들이 바알에게 속해 우상 숭배하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모압은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을 세상 쾌락으로 유혹하는 존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끊임없이 세상의 힘에 유혹을 받습니다. 돈을 더 많이 벌고 싶은 마음, 캠핑카를 사고 싶은 마음, 여유로운 삶, 주식이 올라 대박을 얻는 등의 유혹을 받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들을 부러워하고 유혹받아서 세상 사람처럼 살려고 하는 순간에 우상숭배라는 비참한 영적노예가 되어 비참함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세 번째 싸워 이긴 적은 아람과 소바입니다.
“다메섹의 아람 사람들이 소바 왕 하닷에셀을 도우러 온지라 다윗이 아람 사람 이만 이천 명을 죽이고” (삼하 8:5)
다윗이 북쪽에 있던 소바와 싸워 이겼습니다. 이들과 연합했던 아람 사람들이 함께 연합군이 되어 쳐들어옵니다. 다윗은 이들과 싸워서 승리합니다. 성도를 유혹하는 적이 하나만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다 영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성도의 원수는 ‘마귀’, ‘죄악’, ‘세상’ 그리고 ‘죽음’입니다. 이들이 연합하여 성도를 유혹하고 무너뜨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 (엡 2:2)
이 세상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성도를 유혹하는 것입니다. 이 배후에는 마귀가 있습니다. 결국 마귀가 만들어 내는 영향력이 사람들의 삶의 방식, 문화가 된 것입니다. ‘너도 이 정도는 살아야 행복할 수 있어.’라고 말하는 거짓말의 근원의 배후가 마귀인 것입니다. 마귀적 영향력은 이 세상의 것을 대표하는 영향력을 만들어 내고 이것들도 연합하여 성도들을 유혹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가 되면 성도를 공격했던 연합한 모든 것이 예수님의 권세 앞에 엎드러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지고” (계 19:20)
성도가 세상에서 성도로 온전히 살아가는 게 왜 이렇게 어려운 것일까요? 성도의 원수가 되는 것들이 성도를 두렵게 하고, 쾌락으로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하나님만 바라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온전히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었더니 어떤 일이 일어났나요? 그 전까지 사방의 적들로 끊임없이 고통 하다가 이제야 자유를 얻게 됩니다. 이것은 성도를 유혹하고 두렵게 하는 원수들로부터 예수님이 어떻게 성도를 자유롭게 하시는지를 보여주는 모형입니다. 예수를 왕으로 믿고 예수를 섬기는 자는 원수로부터 자유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원수들과 어떻게 싸우시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원수들을 전멸시키기까지 싸우십니다.
[38] 내가 내 원수를 뒤쫓아 멸하였사오며 그들을 무찌르기 전에는 돌이키지 아니하였나이다
다윗은 전쟁을 할 때, 대충 싸우지 않았고 전멸시키기 까지 싸웠습니다.
[39] 내가 그들을 무찔러 전멸시켰더니 그들이 내 발 아래에 엎드러지고 능히 일어나지 못하였나이다
다윗 너무 잔인한 것 아닐까요? 왜 이런 것일까요? 완전한 승리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이들이 일부와 싸워 이겼다면 돌아가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했을 것입니다. 일시적 승리를 얻은 것같이 기뻐하지만 완전한 승리를 얻지 못하면 다시 공격을 당하게 됩니다. 이렇게 공격을 받은 원수의 나라가 자신들의 신을 부르며 구원을 요구하지만 얻지 못합니다.
[42] 그들이 도움을 구해도 구원할 자가 없었고 여호와께 부르짖어도 대답하지 아니하셨나이다
자신들의 신을 향해 외치지만 구원을 못 받자 하나님을 찾기까지 하지만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43] 내가 그들을 땅의 티끌 같이 부스러뜨리고 거리의 진흙 같이 밟아 헤쳤나이다
얼마나 완벽한 승리를 이루었는지, 먼지처럼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다윗이 왜 이렇게 완전한 승리를 한 것일까요? 앞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완전하게 승리하실 것을 미리 보여주고자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이 원수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얻으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
예수님이 우리를 위협하는 세상을 이기셨다는 것을 믿는 자마다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평안은 언제 주어질까요? 서로 사이좋게 지내면 평안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평안은 강력한 힘으로 온전한 질서를 유지할 때만 얻을 수 있습니다. 힘이 없으면 평화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모든 군대가 사라지면 평화로울까요? 당장에 더 강한 적에 사로잡혀 멸망당하여 고통당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강력한 힘도 이보다 더 강력한 힘이 통치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에게 절대로 평화가 찾아올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가 평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을 말하는데, 특이하게 ‘성도’가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도가 예수님의 통치를 받을 때, ‘환난’이 특별한 목적으로 허락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리와 그 통치 안에서 성도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환난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볼 때, 이상하다 생각하는 ‘환난’도 하나님께서 질서 안에서 허용하심으로 그 과정을 통해 우리가 온전해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백신이 그와 같습니다. 백신은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막기 위해 철저히 통제된 바이러스의 일부를 몸속에 주입하는 것입니다. 무력화된 바이러스로 인해 몸이 저항력을 갖도록 만드는 것이 백신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을 통치한다고 하는데, 세상이 여전히 성도를 고통하게 만드는 것은 환난이 믿음 있는 자를 파멸시킬 수는 없지만 이 과정을 통해 예수님이 통치하시는 구나, 세상으로 말미암아 망하지 않겠구나를 믿게 되는 반전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제 인생에도 여러 환난이 있었습니다. 외적으로 내적으로 환난을 경험하였습니다. 환난 속에서 저의 예민함은 엄청난 고통을 경험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 상황에서는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왜 어려운 일을 막아주시지 않나 생각했지만 그 과정을 통해 다른 사람은 깨닫지 못했던 복음의 비밀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더 신뢰하게 된 것입니다. 예전보다 더 성숙해진 자리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환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환난 가운데 목적과 뜻을 가지고 계시구나를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돌아보면 그 환난을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지만, 그 환난이 없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궁극적으로 무엇을 무력화하셨나요?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골 2: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은 ‘영적 권세’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영향을 미치며 사람들의 영혼을 좌지우지하는 영향력입니다. 끊임없는 욕심 가운데 아무리 많이 가져도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경쟁하며 중독 가운데 살아가게 하는 원흉입니다.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죄로 인해 관계가 깨지지만 그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영적 영향력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십자가로 승리하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 믿는 자는 자유롭습니다. 예수 믿지 않은 자는 돈이 최고라고 생각하며 살지만, 늘 두려움 속에 살게 됩니다. 높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점쟁이가 하는 말에 안도감을 얻는 비참한 모습 말입니다.
마귀의 권세가 깨어지고 이젠 예수님이 온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궁극적으로 또 무엇에 승리를 얻으셨나요?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2)
이제 성도에게는 자유가 주어진 것입니다. 죄가 우리의 영혼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죄가 우리 안에서 왕 노릇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가 가져오는 영원한 죽음에서 자유를 얻게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영적으로 믿음 가운데 예수가 주신 놀라운 능력을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의지하게 하시는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우리는 세상의 힘이 눈에 보일 때, 예수의 통치보다 강해보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과정 가운데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며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도록 인도해 나가십니다. 우리 안에 진짜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 어떤 일이 이루어질지에 대한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일시적인 환난과 혼란, 의심에도 우리는 약속을 믿으며 한 걸음 한 걸음 예수님이 완성하실 놀라운 계획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약속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어떻게 세상을 통치하실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5]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계 19:15-16)
예수님께서 반드시 만왕의 왕, 만주의 왕이 되셔서 이 땅에 임하실 것입니다. 온 세상에 “예수님이 진짜 주인이고 진짜 통치자야”라는 외침이 나타날 것입니다. 지금은 성도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며 세상이 파괴와 멸망으로 사로잡히게 만드는 마귀의 세력은 이렇게 될 것입니다.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계 20:10)
마귀의 세력은 일시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두려워 보이는 마귀의 세력을 잠시 허용하셔서 하나님이 어떤 목적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마귀도 피조물입니다. 마귀는 제한된 시간 동안 사용되는 존재입니다. 성도의 온전한 구원의 과정 가운데 사용되는 존재며, 목적을 이룬 후에는 심판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를 고통하게 하는 사망 역시 영원한 멸망의 자리에 가게 됩니다.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계 20:14)
이 땅을 살아가면서 죽음이 주는 불안에 빠지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 외로움과 고통 가운데 시달리게 되기는 하지만, 성도에게 다시는 죽음의 고통이 없는 영원한 나라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원수들과 어떻게 싸우시나요?
2. 하나님의 능력으로 싸우십니다.
[40] 이는 주께서 내게 전쟁하게 하려고 능력으로 내게 띠 띠우사 일어나 나를 치는 자를 내게 굴복하게 하셨사오며
다윗이 탁월한 전략가라 전쟁만 하면 승리한 것이 아닙니다. 다윗과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전쟁을 한 것입니다. 원수들을 두렵게 하신 것입니다.
[41] 주께서 또 내 원수들이 등을 내게로 향하게 하시고 내게 나를 미워하는 자를 끊어 버리게 하셨음이니이다
다윗의 고백을 통해 결국 싸움이라는 것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싸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영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사람과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아니면 절대 싸움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마귀, 죄, 죽음과 싸우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과 어떻게 싸우시는지 다윗을 통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싸우셨나요?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행 10:38)
예수님 또한 하나님이신데, 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함께 하셔서 이 모든 싸움을 싸우셨다고 말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구체적으로 성경에 나타납니다.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 4:18-19)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들이 삶에서 나타나야 할 모습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영적 가난 가운데 끊임없이 갈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무엇으로 영적 갈급함을 채울 수 있을지를 고민합니다. 인간은 영적 갈급함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권능으로 우리의 영적 갈망을 채우고자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동일하게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갈 때, 경험케 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포로 되었나요? 끊임없이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인간들의 멈출 수 없는 포로 된 모습이 있습니다. 사랑해야 하는 것을 알지만 사랑하지 못하는 인생의 모습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눈이 멀어 하늘의 것을 보지 못하고 당장의 것들에 눈을 빼앗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으로 이들을 자유케 하시는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강한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동일한 은혜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요일 4:13)
인간은 신비한 존재입니다. 짐승에게는 불가한 천사도 불가한 특별한 존재인 것입니다. 무엇이 특별한가요? 흙으로 만든 인간 안에 하나님의 영, 성령이 임할 수 있게 하십니다. 인간이 하나님처럼 된다니요! 얼마나 멋진가요!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흙과 같은 인간 안에 보석같은 예수님이 오셔서 함께 하심으로 예수님과 같은 가치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으로 성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를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가장 보람을 느낄 수 있는 때가 언제입니까? 아무리 재미있는 것을 혼자해도, 욕망을 채우려고 해도 허무해집니다. 왜냐면 인간은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의 속성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인간에게 참 행복을 주는지를 모른다면 허무한 삶만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와 능력을 맛보게 되어 있습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 ” (요일 5:4)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원수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약속하신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때, 갈등과 고민, 미움과 질투에 매여 살아가는 우리와 같은 존재를 회복과 치유, 은혜의 존재로 사용하시며 이 땅에서 승리를 맛보며 살아갈 수 있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과 함께 하기를 소망하심으로 이 땅에서 놀라운 승리를 맛보는 성도들 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