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아에 대한 예언
사무엘하 강해 58
삼하 23:1-7
2020년 10월 11일 주일예배 설교문
[1a]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다윗은 이 부분이 자신의 마지막 말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사실 다음 장에도 다윗의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은 다윗이 유언처럼 가장 중요한 말을 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곳에서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을 이렇게 부르신 목적을 잘 기록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이 바로 예수님, 메시아의 삶을 모형하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목동 같은 천한 사람을 삼으셨는지, 왜 자신을 마음에 합한 자라고 말씀하셨는지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윗처럼 살고 싶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합한 자라고 칭함을 받고 싶지만 다윗이 이렇게 은혜를 받은 이유는 메시아를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더 편애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메시아를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메시아를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이야기하면서도 왜 이새의 아들임을 이야기 하는 것일까요? 이새는 사실 무명의 사람입니다. 아무런 영향력이 없었습니다. 무명의 가문에서 무명의 아들로 태어난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는 바로 예수님이 무명의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 땅의 메시아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 말씀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기록한 말씀이라고 합니다.
[2]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성경에서 성령이 임해서 말하는 사람을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다윗은 선지자적, 왕적, 제사장적 모형으로 모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다윗을 선지자라고까지 불렀습니다.
“그(다윗)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행 2:30)
다윗에게 성령으로 임하여 하나님을 말씀을 하게 하셔서 앞으로 오실 메시아가 어떤 분인지 알게 해주신 것입니다. 메시아는 어떤 분이신가요?
1. 찬양의 대상이 되는 분입니다.
[1b] 높이 세워진 자,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가 말하노라
다윗은 자기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순간 하나님이 성령으로 임하셔서 마치 다윗에게 보이는 모습을 메시아의 모습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무명 중의 무명이었습니다. 사무엘이 다윗의 아들 이새를 찾아갔을 때, 다윗은 그 아들 중에도 들지 못해서 사무엘에게 보여주는 아들 중에서도 빠집니다. 이새에게는 일곱 명의 멋진 아들들이 있었고, 다윗은 그 안에도 들지 못했었습니다.
“또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 (삼상 16:11)
다윗은 아무런 영향력이 없는 존재였습니다. 형들 뒤치닥거리나 하던 존재였습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은 그 인근 땅을 모두 제패하고 다스리는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그러자 다윗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삼하 7:18)
다윗은 꿈도 꾼 적이 없습니다. 목동으로 살다가 목동으로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벗어날 가능성을 전혀 가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몇 십 년이 흐른 후에 왕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내가 무엇이기에 나를 이렇게 이끄십니까? 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성경은 메시아를 보여주기 위해 이렇게 했습니다.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7-8)
예수님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것조차 낮아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시고, 마구간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멋지다는 모습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랬다가 예수님이 십자가라는 낮아짐의 가장 깊은 곳을 통과한 후에 어떤 영광을 누렸나요?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 2:9-10)
예수님이 어떤 존재, 어떤 대상보다 가장 높아지셨다고 하십니다. 가장 낮아진 자리에서 가장 높은 자리로 높여지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다윗은 성령으로 기름 부었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 (삼상 16:13)
왕과 제사장은 기름으로 부음을 받습니다. 이는 상징입니다. 이들이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이 역할을 맡게 될 것임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또한 모형입니다. 한 사람을 통해 진짜 우리를 통치할 분, 진짜 우리를 이끄실 분이 누구신가를 성경이 한 인물에게 나타난 상황을 통해 보여준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행 10:38)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기름을 부으셔서 다윗이 모형적으로 했던 진짜 역할입니다.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를 구원하고 자유하게 한 모든 일을 행하셨다고 이야기 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은 이스라엘에서 노래를 잘 하는 자라는 표현을 합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노래로 칭송받는 자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다윗을 통해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이 다윗을 칭송했습니다. 사실 사울도 그래서 다윗을 미워했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결국 찬양과 높임의 대상이 될 것임을 드러내고자 다윗을 통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결국 찬양할 분, 높여야 할 분은 예수님 뿐입니다.
젊은이들이 계속 일확천금을 쫒아갑니다. 우리 인생에서 로또가 당첨된다고 구원이 나타날까요? 우리가 가지고 있던 주식이 올라서 많은 부를 누리면 내 인생에서 진짜 기쁨과 행복을 맛볼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 한 분만이 우리의 기쁨이 되시는 것을 고백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이를 고백하는 사람들이 결국 모입니다.
“[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계 7:9-10)
이 찬양을 하는 사람은 구원의 감격에 사로잡힌 사람들입니다. 성도들은 이 땅에서 이것을 경험하기를 열망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절정에 이르는 순간을 우리는 반드시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메시아가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가장 낮은 자로 오셔서 가장 높아지신 분,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신 분, 찬양과 높임의 유일한 분이십니다. 다윗은 예수님을 만나보지 못했지만, 예수님을 높였는데, 이미 예수님을 만나본 우리는 예수님을 높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2. 공의로운 통치로 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3]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다윗은 자신이 공의롭게 다스렸다고 합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공의로운 통치란 하나님의 기준으로 다스린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것에서 통치가 나타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다윗이 공의롭고 온전한 통치를 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이 그를 모형으로 삼으신 후에 이런 공의로운 통치가 나타나면 어떻게 되는지 알려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라” (렘 33:15)
공의로운 통치가 왜 중요한 것일까요? 불의한 자가 통치하면 모든 사람들이 고통 받기 때문입니다. 강자는 보호받고 약자는 고통 받는다면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누구나 온전한 법 앞에서, 동등하게 다스려져야 합니다. 공의가 없어지면 힘 있는 자들이 모든 유익을 힘 있는 자들이 가져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사회를 정의롭고 공의롭게 만들겠다고 하지만 이기적인 목적으로 모든 행동들을 하는 위정자들을 볼 때 얼마나 이율배반적인가요. 공산주의는 모든 사람이 평등한 세상을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세상에서 가장 불평등한 사회가 만들어졌습니다. 인간의 이기심을 제도나 권력이나 힘으로 억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힘을 가지면 가질수록 이기심은 인간을 파괴하고 자신의 이익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메시아가 오시면 그렇게 되지 않는다. 예수님이 오시면 온전하게 통치하십니다. 메시아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을 모두 공의와 정의로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제 곧 모든 세상을 다스릴 날이 올 것입니다. 모든 악인들이 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다스림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 많이 기도하고 정성을 다하면 우리에게 혜택을 더 주지 않으십니다. 누구를 더 똑똑하게, 더 부자가 되게 만들지 않으십니다. 각 사람을 정의롭고 공의롭게 통치하셔서 각 사람이 믿음을 더 발현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불평등은 우리의 욕망의 관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바라보지 않으십니다. 모든 것은 풀처럼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은 영원성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불타서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4] 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두 가지 빛의 이야기가 나오는 구절입니다. 구름 없는 아침에 돋는 해가 비추는 해와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둠을 물러가게 하는 빛처럼 메시아의 통치가 나타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풀이 자라는데 언제 풀이 자라나요? 풀이 돋아날 때 이를 돕는 그 따뜻한 빛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둠을 쫒아내고 생명을 돋게 하는 빛을 이야기 합니다. 어둠은 혼돈, 죄악 등을 이야기 합니다. 반면 빛은 하나님의 통치, 영광 등을 상징합니다. 빛이 비출 때, 드러나는 생명의 기운, 이를 사가랴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78] …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눅 1:78-79)
우리는 어둠 가운데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돋는 해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자신을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 8:12)
빛을 받지 못한 자들은 아직도 어둠의 영향력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두려움들이 결국 어둠에서 나오는 것 아닌가요. 미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질투 등 모두 어둠의 영향력 아닌가요. 우리 안에서 예수님의 빛이 나와서 그 빛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고백하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다윗은 광야에서 얼마나 많은 두려움을 경험했을까요? 그 때 다윗은 무덤에 들어가는 자 같다고 했습니다. 죽은 자 같다고 했습니다. 사는 것 보다 죽는 게 더 낫지 않겠냐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비방하고 훼방할 때 억울함과 분노, 그 골짝에서 자신에게 빛을 비춰주셨을 때를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5a]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같지 아니하냐 …
내 인생 가운데 빛이 비춰서, 내 가문이 회복된 것이 이렇지 않냐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 가운데 이런 고백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삶 가운데 놀라운 빛을 비추신 것을 고백하는 것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 (빌 3:17)
성도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고 이야기 합니다. 자신이 완벽하기 때문에 본받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 안에 어둠을 쫒아낸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과 힘을 보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고백했던 놀라운 빛이 무엇인가요? 무명에서 유명해지는 것, 가난한 자가 왕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생명의 복을 예수님은 알려주셨습니다.
바로, 영원성입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권력이 있고 부자여도 영원의 관점에도 순간에 불과합니다. 역사상 가장 부자인 사람도 다 무덤에 들어가 있습니다. 빌게이츠가 부자였다고 하지만 지금의 부를 과거로 환산하면 록펠러는 빌게이츠보다 몇 십 배 더 부자였다고 합니다. 그런 그도 무덤에 들어가 있습니다.
바울이 이야기 한 힘이 어떤 식으로 나타나나요?
“[11] …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 4:11-12)
이 세상에 영향을 받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견고한 사람이 되었다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내가 이렇게 즐겁게 산다, 돈이 많다고 끊임없이 서로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부러운가요? 그러면 부러운 만큼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반감되면서 우리는 불행해집니다. 이미 주신 것이 족했는데, 풍요한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을 볼 때 마다, 이미 나에게 주어진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지며 불행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스스로 찾아 나섭니다.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으로 부러워하며 살아갑니다.
우리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온전한 복을 누리지 못하면 가장 적절한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과정의 하나님을 믿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다스리시는데, 하나님 외에 것을 추구하며 다스리심을 믿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요?
[5b] …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하게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
결국 하나님의 언약이 자신의 모든 것을 이뤄내는 것을 다윗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악인들에게 심판을 내리는 분입니다.
[6a] 그러나 사악한 자는 다 내버려질 가시나무 같으니 …
만약 악한 자들이 심판을 받지 않는다면 얼마나 억울할까요? 광야의 가시나무의 가시는 굉장히 큽니다. 가시가 10-20센치 됩니다. 오로지 땔감으로만 쓸 수 있습니다.
[6b] …이는 손으로 잡을 수 없음이로다
그런데 이마저도 손으로 잡을 수가 없습니다. 쇠로 잡아서 끌어다 버려야 합니다.
[7a] 그것들을 만지는 자는 철과 창자루를 가져야 하리니 …
그리고 이것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시2:9)
죄인들, 예수님 앞에 무릎 꿇지 않는 자들, 이들을 철장으로 다 부숴버리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불타 심판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7b] … 그것들이 당장에 불살리리로다 하니라
하나님은 왜 지금 심판하지 않으시는 것일까요?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마 13:40)
우리는 완전한가요? 예수를 믿지만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설 수 있는가요? 우리는 다 같은 죄인인데 죄인임을 인정하는 죄인일 뿐입니다.
“[20]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지고 [21]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들의 살로 배불리더라” (계 19:20-21)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마지막 심판에 대한 말씀은 어떤 시각으로 살아야 할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종말신앙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현재에 어떻게 하면 더 편안하고 쾌락과 이익을 누리는지 애쓰며 살아가게 됩니다. 쾌락은 현재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쾌락이 지속되는 경우가 있나요?
어제 100만원짜리 식사가 오늘 기쁜가요? 1년 전 1천만원짜리 크루즈가 아직도 기쁜가요? 쾌락은 순간입니다. 그래서 쾌락을 추구하는 인생은 더 강력한 쾌락을 찾아 나섭니다. 더 좋은 것을 사고, 더 행복한 것을 찾아 몸부림치는데 더 공허합니다. 이것이 마지막 종말을 향한 시각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종말이 올 거야, 반드시 심판이 있을거야 라고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온전히 메시아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진정한 자유를 얻고 오직 예수님만을 높이는 성도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