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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자들

    사무엘하 강해 59

    삼하 23:8-39

    2020년 10월 18일 주일예배 설교문

    저희 아버님 댁에 가면 저희 집 족보가 있습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있지만 저희 가족의 이름들 외에 다른 사람들의 이름은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나와 관계있는 사람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에도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족보 다음으로 많은 이름이 나와 있는 사람들인데요. 이 사람들은 성경에서 아주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39] …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들로 말미암아 다윗 왕국이 세워졌습니다. 사무엘하의 주인공은 다윗입니다. 그런데 다윗 혼자서 다윗 왕궁을 세운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된 사람들이 노력한 결과 세워졌습니다. 아마 이들과 이들의 가족들은 이 이름이 기록된 것이 큰 영광일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도 예수님께서 왕이시며 주인공이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된 후에 이렇게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면 이 사람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영광스러울까요?

     

    본문을 통해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데 쓰임 받는지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 나라는 어떤 사람을 통해 세워지나요?

     

    능력을 덧입은 사람을 통해 세워집니다.

     

    [8] … 다그몬 사람 요셉밧세벳이라고도 하고 에센 사람 아디노라고도 하는 자는 군지휘관의 두목이라 그가 단번에 팔백 명을 쳐죽였더라

     

    고대에 기관총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단번에 팔백명을 죽일 수 있을까요? 요셉밧세벳이 군지휘관이었기 때문에 그의 부대가 나가서 싸워 이긴 것을 요셉밧세벳이 팔백명을 죽인 것으로 기록한 것일 것입니다. 한번의 싸움에 팔백명이나 죽이는 전과를 얻었다는 것 또한 아주 큰 승리입니다.

     

    [9] 그 다음은 아호아 사람 도대의 아들 엘르아살이니 … [10] 그가 나가서 손이 피곤하여 그의 손이 칼에 붙기까지 블레셋 사람을 치니라 … 백성들은 돌아와 그의 뒤를 따라가며 노략할 뿐이었더라

     

    엘르아살이라는 또 다른 사람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다른 사람이 도와주지도 않는데, 얼마나 용맹스럽게 싸웠는지 칼이 손에 붙어버렸다고 합니다. 이 말은 칼을 손에 잡고 열심히 싸웠더니 팔이 펴지지 않는 근육경련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놀랍게 승리를 거뒀더니 옆에 있던 사람들이 전리품을 얻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한 사람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11] 그 다음은 하랄 사람 아게의 아들 삼마라 블레셋 사람들이 사기가 올라 거기 녹두나무가 가득한 한쪽 밭에 모이매 백성들은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되 [12] 그는 그 밭 가운데 서서 막아 블레셋 사람들을 친지라 …

     

    전쟁도 분위기입니다. 어느 한 편은 용맹으로 가득 차 있지만 두려움이 있는 사람은 싸우기도 전에 도망을 갑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사기가 올랐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두려워 도망을 갑니다. 그런데 삼마는 블레셋 사람과 혼자 싸워 승리를 거둡니다. 처음부터 이야기했던 이 사람들이 다윗 왕국을 세우는데 가장 큰 용맹을 뽐낸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들을 보며 슈퍼맨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한 개인이 이런 능력이 있을까 생각할 수 있지만, 성경은 10절과 12절에서 반복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0] … 그 날에 여호와께서 크게 이기게 하셨으므로 …

     

    [12] … 여호와께서 큰 구원을 이루시니라

     

    이것은 영적으로 해석하여, 이 모든 상황을 설명한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으로는 사람이 큰 승리를 일으킨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무엘하 22장에서 보았던 다윗의 찬양의 주제입니다.

     

    이들은 우리가 볼 때 특별한 사람이라 놀라운 결과를 얻은 것 같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들과 함께 하신 것입니다. 다윗과 똑같이 연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남들과 달랐던 것은 하나님을 신뢰한 것입니다.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삼상 17:37)

     

    사울과 다윗의 다른 점은 무엇인가요? 다윗은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다윗보다 힘이 더 강했지만 하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이길 수 있다고 고백하지만 실제로 믿음으로 갖지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달랐습니다. 사울처럼 무기를 가지고 싸울 수 없었지만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자신이 믿는 하나님이 바로 눈에 보이는 것보다 강력하고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분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에서 힘이 있고 똑똑한 사람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똑똑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영향력을 끼치겠지만 하나님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사용하시는 사람들은 세상적 힘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무명의 약한 자로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은 믿음을 가진 자를 통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이 연약해도 상관없습니다.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일하실 것을 믿는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묵묵하게 자신이 하는 일을 감당하는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은 약하고 약점이 있지만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을 보고 세상의 사람과 비교하면 늘 낙담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자신이 가진 힘을 더 많이 뽐내고 남을 파괴합니다. 자신의 힘이 강력함을 끊임없이 선전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세상의 힘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 넘어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통치하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여러분도 성경에 기록된 용사들처럼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믿음을 가지는 자 되시길 축원합니다.

     

    2. 헌신된 자들을 통해 세워집니다.

     

    [13] 또 삼십 두목 중 세 사람이 곡식 벨 때에 아둘람 굴에 내려가 다윗에게 나아갔는데 때에 블레셋 사람의 한 무리가 르바임 골짜기에 진 쳤더라

     

    여기 나와 있는 곡식 벨 때는 건기라 비가 내리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블레셋 군대와 이스라엘 군대가 대치하고 싸움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14절에 이런 내용이 등장합니다.

     

    [14] 그 때에 다윗은 산성에 있고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의 요새는 베들레헴에 있는지라

     

    베들레헴은 어떤 곳인가요? 다윗의 고향입니다. 왕이 되었는데 자기 고향이 적에 점령되어 있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그때 다윗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15] 다윗이 소원하여 이르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 하매

     

    명령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지금 너무 목이 말라서 물 한 모금 먹고 싶다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이 어려서부터 마신 물이 적에 점령되어 있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지나요?

     

    [16a]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진영을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

     

    참 무모한 것 아닌가요? 군대를 이끌고 가서 싸운 것이 아니라 단 세 사람이 물을 길러온 것입니다. 이것은 죽기를 각오한 것입니다. 죽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습니다. 남들이 지키고 있는 남의 군대에서 물을 떠 온 것입니다. 생명을 내걸고 이런 일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윗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가요? 사랑한다는 대상을 향해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강렬한 것입니다. 사랑에 빠져 있을 때는 상대방이 무엇인가 먹고 싶다고 하면 어떻게든 사다줍니다. 이런 경험이 있으시죠? 그때 왜 그랬나요?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을 해주고 싶습니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해주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헌신이며, 그것으로 자신도 기쁨을 느낍니다.

     

    이것이 다윗을 기쁘게 하고 싶은 용사들의 마음이었습니다. 다윗이 지금 단순히 목이 마른 것이 아닙니다. 심적 기쁨과 만족을 얻고 싶은 다윗을 위해 한 행동입니다. 이것이 헌신이고 사랑의 태도입니다. 헌신은 사랑에서 말미암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헌신은 지옥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모든 헌신은 깊은 사랑에 근거한 것입니다. 사랑과 헌신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헌금하는 것을 보며 헌금의 액수를 따라 기뻐하실까요? 아닙니다. 사랑에 근거해 예배하고 사랑에 근거해 헌금하고 섬기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은 철저히 사랑에 근거한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에서 가장 강렬하며 모두가 경험하기 바라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주셨습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일시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만족하는 사랑을 경험하는 자리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근거해 우리가 그분을 기쁘게 하기 위해 하는 행동을 기뻐하십니다.

     

    이렇게 생명을 내걸고 떠온 물을 다윗이 어떻게 했나요?

     

    [16b] …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다윗이 정말 목말랐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이 사람들이 떠온 것이 얼마나 가치있는가를 인정한 것입니다.

     

    [17]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나를 위하여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 하고 마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니라 …

     

    이것이 예배입니다. 가장 가치 있는 것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우리 인생 가운데 가장 가치 있는 것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물이 피와 같이 값진 것이기에 자신이 마시지 않고 하나님께 올려드린 것입니다. 왜 이렇게 예배드려야 하는 것일까요? 이 사실을 확인하며 우리 삶의 모든 것이 예배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대부분을 나를 위한 삶을 살아갑니다. 자기 자신을 예배하는 삶을 삽니다. 자기를 예배하는 자들 가운데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음을 부어 넣으시고 그 사랑을 맛본 자만이 하나님께 온전히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백성은 참 기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3명의 용사가 억지로 갔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었을까요? 물을 뜨러 떠밀려 갔다면 어땠을까요? 원망이 들었을 것입니다.

     

    억지로 예배하는 사람들을 저는 많이 봤습니다. 억지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얼굴에서 나타납니다. 자발적 마음으로 말미암는 반응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택한 사람들의 인생 가운데 나타나는 반응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예배의 자리에 참여해야 합니다.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은 목마름이 그칠 수 없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채우고자 살아가지만 그것은 만족을 줄 수 없고 끊임없이 목마르게 합니다. 우리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사는 사람만이 갈증이 채워지며 기쁨과 행복이 무엇인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예배의 자리에 초대하시는 은혜의 손길입니다. 이렇게 예배했던 사람이 신약성경에도 나타납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요 12:3)

     

    이것을 보고 가룟 유다는 가난한 자에게 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비난합니다. 객관적 가치로는 낭비이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막 14:9)

     

    왜 예수님을 향해 향유를 깨트린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이길래 이렇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받기를 원하시는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살아가는데, 자신에게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기뻐하는 예배의 모습을 우리가 배워 행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과 함께 이 여자의 이야기를 가르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복음이란 나만 아는 어둠에 매여 있는 사람에게 예수를 주심으로 말이암아 가장 귀한 것을 주신 하나님께 반응하여 하나님께 가장 귀한 것을 바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았던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된 것입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4)

     

    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기초를 마련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기억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님 나라를 위한 제물로 바친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 예수님을 사랑하여 반응하는 삶의 결과가 나타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통해 기쁨을 받으실 것입니다.

     

    3. 연약한 자들을 통해 세워집니다.

     

    [18] 또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이니 그는 그 세 사람의 우두머리라 그가 그의 창을 들어 삼백 명을 죽이고 세 사람 중에 이름을 얻었으니

     

    이 아비새는 다윗의 조카입니다. 유명한 사람입니다. 물론 용맹도 뛰어나고 전투도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름이 등장할 때마다 다윗 편에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힘만 믿고 행동하여 야단을 맞습니다.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내가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하니” (삼상 26:8)

     

    다윗은 무엇이라 대답하나요?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 (삼상 26:9)

     

    다윗이 사울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적 차원에서 아비새는 생각합니다. 우리 또한 문제의 상황과 사람을 아비새처럼 단번에 해결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과 싸워서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했을 때도 아비새는 이전과 똑같이 반응합니다.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하니” (삼하 16:9)

     

    아비새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칼을 믿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살 때가 많습니다. 내가 살던 방식으로 살려고 합니다. 힘든 상황이 있으면 도망가거나 직면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경향과 상황대로 반응합니다. 기를 쓰고 싸우기도 합니다. 분노하며 비난하며 경쟁합니다. 이것이 다 아비새와 같은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시선을 갖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삼하 16:10)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생에 개입하여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인생 전부를 다윗과 함께했지만 아비새는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다윗과 아비새의 차이는 하나님의 시각을 갖는가 아닌가입니다. 아비새는 왜 하나님의 시각을 갖지 못한 것일까요? 왜냐면, 늘 자신이 칼로 문제를 해결해 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늘 승승장구하고 능력이 많을수록 하나님의 섭리와 시각을 갖기가 힘듭니다. 눈에 보이는 문제를 하나님 앞에 두고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은 문제를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왕으로 세우시겠다는 약속을 주셨지만 삶은 그것과 같지 않을 때, 다윗은 자신이 무덤에 들어가는 사람과 같다고 고백합니다. 다윗은 바로 이 시간을 통해 자신의 무능함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 또 한 사람이 나옵니다. 바로 브나야입니다.

     

    [20] 또 갑스엘 용사의 손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이니 그는 용맹스런 일을 행한 자라 …눈이 올 때에 구덩이에 내려가서 사자 한 마리를 쳐죽였으며

     

    브나야가 행한 일이 용맹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상한 구절입니다. 사자가 구덩이에 빠진 것인데, 이럴 경우 어떻게 죽이면 되나요? 내려가서 사자랑 싸울 것이 아니라 밖에서 활을 쏘거나 돌을 던지면 됩니다. 하지만 브나야는 직접 내려갑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21] 또 장대한 애굽 사람을 죽였는데 그의 손에 창이 있어도 그가 막대기를 가지고 내려가 그 애굽 사람의 손에서 창을 빼앗아 그 창으로 그를 죽였더라

     

    이것도 이상한 일입니다. 창을 가진 사람과 싸울 때, 창을 가지고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브나야는 창이 있었는데도 버리고 막대기를 가지고 싸운 것입니다. 브나야와 같은 사람을 단무지라고 부릅니다. 단순 무식합니다. 지금 내가 얼마나 용맹스러운가를 자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막대기로 거대한 거인과 싸워 이길 수 있음을 과신하는 것입니다. 다윗 왕국에는 이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인간적 생각으로 가득 찬 사람도 있었습니다. 자신의 용맹을 자랑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쓴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어떻게 다윗 왕궁을 세울 수 있었나요? 이들은 어떤 경우에도 다윗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윗보다 강력한 압살롬이 나타났을 때에도 이들은 다윗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다윗 옆에 있었더니 결국 이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고 용맹한 사람으로 이름이 기록된 것입니다.

     

    신약성경에도 이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베드로 역시 인간적 생각으로 예수님께 다가갔다가 야단을 맞은 적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마 14:28)

     

    용맹은 어떤 제자들보다 뛰어납니다.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요 18:10)

     

    참 바보같은 행동입니다. 자기 혼자 칼 들고 있다가 수백 명이 예수님을 잡으러 왔는데, 한 사람의 귀를 베어 버립니다. 훨씬 더 위험한 상황을 만드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힘과 열정만을 믿고 행동합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행동까지 하나요? 죽을지라도 예수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나요?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마 26:75)

     

    예수님께서 일부러 베드로가 이런 상황을 지나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런 일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베드로는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가장 수치스러운 자리에 떨어집니다. 열정은 뛰어났지만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지혜로 보지 못하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다고 하니 막아섭니다. 이 연약한 베드로가 잘한 일이 무엇이죠? 끝까지 예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끝까지 부인했을 때, 예수님은 물끄러미 베드로를 바라보십니다. 내면에서부터 베드로는 통곡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다시 찾아오시자 예수님께 다가가 예수님께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베드로 또한 우리와 같이 연약한 사람입니다. 나의 능력을 믿으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끝까지 예수를 떠나지 않았더니 연약함을 가진 자리에서 초대교회를 세우는 자리로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 역시 영적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예배를 하느냐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에도 인간적 차원에서 살아갈지라도 끝까지 예수께 붙어있어 예수를 더 사랑하고자, 더 예배하고자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세워질 때, 그 나라에 이름이 새겨지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