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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

    주제설교 / 일곱 교회 1

    계 2:1-7

    2020년 11월 22일 주일예배 설교문

    요한계시록 2-3장에는 당시의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내는 예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소아시아에는 7개의 교회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 일곱 교회는 지상의 모든 교회를 의미합니다. 일곱이란 하나님의 완전수로 일곱 교회는 하나님의 모든 교회를 의미합니다. 천상의 교회는 완전하며 어떠한 시험이나 핍박에서도 자유롭지만 지상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나오는 다양한 교회를 통해 우리의 모습, 우리 교회의 모습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첫 번째로 보기 원하는 교회는 에베소 교회입니다. 에베소라는 지역은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가장 많은 사람이 살고 있던 도시로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에베소가 소아시아와 로마를 연결하는 중요한 항구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에베소를 통해 로마에 물자가 통용되었고 항구도시여서 많은 상업이 발달하여, 사람들이 많이 모여살고 있었습니다. 또한 에베소로부터 다른 도시로 가는 연결망이 발달하여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그렇기에 다른 도시보다 부요했으며 미신도 많이 발달하였습니다. 특징적으로 마술사들 점쟁이들이 아예 공개적으로 영업하였습니다. 도시에는 공식적으로 아르테미스라는 풍요와 쾌락의 여신을 섬기는 큰 신전이 있었습니다. 이 신전은 로마에 ‘판테온’이라는 모든 신들을 모시는 신전보다 4배 정도 컸습니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수 천명의 사제와 여사제가 있었는데, 이 신전에 가서 신에게 제사를 드렸을 뿐 아니라 사제들과 성관계를 함으로서 창녀촌을 운영하였습니다. 이 미신에 빠져 있고 쾌락에 빠진 에베소는 미국의 뉴욕과 흡사할 것입니다.

     

    이 가운데 에베소 교회가 세워졌고 이 교회에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심으로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계십니다. 일곱 교회에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마다 오늘 1절처럼 특정한 모습으로 계시됩니다.

     

    [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여기 있는 모습은 예수님의 성품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적 그림입니다. 예수님이 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를 왔다 갔다 하십니다. 일곱 별은 ‘교회’를 상징합니다. 별처럼 어두운 세상에 빛을 발하는 존재가 교회인 것입니다. 일곱 금 촛대 역시 어두움에 빛을 비추는 역할을 합니다. 즉, 교회가 어두운 세상에 빛을 발하는 별, 촛대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통치하시는 분으로 나타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어둡고 세상이 부패하고 타락했지만 예수님이 이렇게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주관하심으로 세상에 빛을 발하실 것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세상에 비출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할까요?

    1.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2a]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

     

    예수님은 우리의 삶 가운데 나타나는 모든 모습을 다 알고 계십니다. 행위는 우리 삶의 결과입니다. 개인의 삶의 결과물인 것입니다. 교회의 경우 사역적 열매일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수고하고 애쓰는지를 다 아십니다. 수고는 힘든 일임에도 불구하고 목적이 있기에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수고로운 일들을 할 때가 많습니다. 교회가 그 일을 위해 애쓰고 노력하는 일들을 ‘수고’라고 합니다. 인내라는 단어는 단순히 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소망이 있기에 견뎌내는 ‘힘’을 의미합니다. 유혹과 핍박이 가득한 세상 속에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이 있기에 낙심하지 않고 견디는 것입니다.

     

    교회가 사역적 열매를 맺고 어려운 일이지만 충성하며 하는 것, 재림신앙으로 가득차 낙심치 않는 교회나 개인은 밖으로도 보여 집니다. 그래서 이것이 열매입니다. 건강한 교회라면 이런 모습을 보여주며 결과를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열매에는 원인이 필요합니다. 열매가 나타나기 위한 근원적 동기가 중요합니다. 3절에는 근원적 동기가 나옵니다.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앞에서 나타난 행위는 게으르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입니다. 게으르지 않게 애쓸 때 나타나는 결과인 것입니다. 우리는 사명을 감당해나갈 때, 게으름이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충성할 때, 이런 열매와 사역적 결과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수고는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견딘 것의 결과입니다. 어떤 일을 할 때, 힘들지만 하게 되나요? 우리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삶을 살아가야 할 굉장한 목적입니다. 이 목적을 잃으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나의 이름을 위해 교회 안에서 행동한다면 그것은 큰 문제를 일으킵니다. 내 뜻이 이루어져야 하고, 다른 사람이 내 이름을 중요하고 가치 있게 인정해주어야 하는 무서운 욕망은 갈등과 분열, 파괴를 야기합니다. 성도에게 필요한 근원적 동기는 예수님의 이름이 나타나는가입니다. 또한 교회의 모든 선택의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인내라는 열매는 참음의 결과입니다. 어떻게 참을 수 있나요? 하나님에 대한 소망 때문에 모든 것을 견뎌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변 사람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교만 중에 가장 큰 교만입니다. 인생은 내 맘대로, 내 힘대로 어떤 사람과 대상을 조정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인정해 나가며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해 나가는 것이 겸손입니다. 세상은 부조리하며 주변의 사람과 환경은 악하고 문제가 많지만 내 분노로 누군가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신뢰하는 자의 당당함과 인내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내적으로 이렇게 게으르지 않고 맡겨진 일에 충성하며 예수 이름으로 우리가 견디고 소망 가운데 인내하는 것이 교회에게 꼭 필요한 태도입니다. 이런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결과적인 열매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2. 교회는 영적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2b] …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예수님이 악한 자들이라고 말하시는 무리가 누군가를 죽이고 사기를 치고 악인이라고 생각하는 무리가 아닙니다. 이 악한 자들이라고 말씀하시는 대상은 사도가 아닌데, 자신을 사도라고 가장하는 무리입니다. 초대교회에는 예수님께서 사도로 임명하신 사람이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 예수님의 역할을 대신하여 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사도입니다. 지금은 더 이상 사도가 필요 없습니다. 교회가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사람들 중에는 자신들이 사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왜 이렇게 주장하였을까요? 남들이 가지지 못한 영적 권위를 가진 척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교회 내에 스스로 자신이 특별한 영적 권위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무리가 아주 많습니다. 심지어 이들은 자기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사도의 직분을 받았다고 이야기하며 신사도 운동이라는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이런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왜 이들에게 빠지는 것일까요? 이런 사람들이 주장하는 능력이 신유와 예언이기 때문입니다. 신유와 예언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열망하는 것이며 또한 인간의 나약함을 보여주는 요소입니다. 사람 중에 병 안 걸리고 살 수 있는 사람 없습니다. 반드시 연약함 가운데 처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무엇을 하나요? 치유 받고 싶습니다. 기도 한 번에 단번에 해결 받고자 하는 일을 열망합니다. 또한 사람들은 바로 다음의 일을 알 수 없어 힘들어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그렇기에 예언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이런 사람들의 근원적 한계를 이용해 예언을 하며 사람들을 노예로 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병을 낫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 부정하지 않습니다. 저 역시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갈수록 기도해도 병이 안 낫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려운 환경 속에 있지만 그 과정을 통해 예수를 의존하며 왕처럼 살고자 하는 욕구를 깨트리기 원하십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큰 믿음입니다. 믿음이 성장했다는 것은 간절하게 바랐던 것이 주어지지 않아도 그것을 받아들이며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의 미래에 대해 알려주시지 않나요? 하나님은 우리가 이 불안하고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께서 나를 통치하시는 주인이라는 사실을 믿고 한 걸음 한 걸음 예수 따라 살아가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 보단 거짓 선지자를 따라가고자 하는 무리가 많기 때문에 한국 교회가 휘청거리며 문제가 생기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를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미신을 섬기는 수준으로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가 열매를 나타내지 못하는 이유는 이러한 수준에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들을 ‘니골라당’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니골라’라는 이름은 백성을 망하게 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당 이름이 백성을 망하게 하는 당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이 누굴까요? 자기들이 영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유혹해 사람들이 간절히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자들입니다. ‘니골라’는 히브리어 ‘발람’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발람이 무슨 일을 했을까요? 발람은 이방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강력하게 임해 저주는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저주를 하지 못하니 재물을 얻게 되지 못하니 발람이 발락에게 이스라엘을 타락시킬 방법을 말합니다.

     

    “[1]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2] 그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3]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민 25:1-3)

     

    발람이 내놓은 꾀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에 매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됩니다. 어떻게 꾀었나요? 예배를 드린다고 해놓고 쾌락을 얻게 한 것입니다. 바알과 아세라 숭배의 핵심은 쾌락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나의 풍요와 쾌락을 열망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한국의 사람들 모두 쾌락에 열광하는데, 그 모습과 똑같은 것입니다. 한국의 바알은 부동산이며 비트코인이며 주식인 것입니다. 여기서 내 풍요가 얻어지고 좋은 쾌락을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에 홀려 자신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인생 목표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더 많은 부자가 되는 것에 목표를 두는 것입니다. 이것이 괜찮은 것이라고 유혹하며 사람들을 꾀는 무리가 있는데, 이들이 니골라당입니다.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고자 한다면 이런 거짓에서 벗어나 우리가 약하고 우리가 미래를 알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말미암아 거짓과 잘못된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를 얻고 바른 영적 분별력을 갖고 온전히 서야 할 것입니다.

     

    3. 교회는 말씀에 대한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성경에서 우리를 향해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하시는 이 말씀을 듣고 안 찔리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의 처음 사랑은 무엇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감정적 사랑이 아닙니다. 여기서의 처음 사랑은 에베소 교회에 복음이 처음 전파되었을 때의 모습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9] … 바울이 …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10]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행 19:9-10)

     

    다른 교회가 어떻게 개척되었는지는 잘 나오지 않지만 에베소 교회만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2년이나 두란노 서원에서 말씀을 전합니다. 이 부분을 기록한 다른 사본에는 바울이 매일 5시간씩 2년 동안 가르쳤다는 구체적인 시간이 나옵니다. 300일만 하루 5시간 가르쳤다고 해도 1년이면 1,500시간입니다. 제가 지난 7년 시간 말씀을 전한 시간이 고작 몇 백 시간밖에 되지 않습니다. 1년 동안 전해지는 말씀은 백 시간 정도 되지 않습니다. 에베소 교회에 말씀이 쏟아졌더니 어떤 결과가 일어났을까요?

     

    “[18]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19]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20]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행 19:18-20)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자복하며 예수께 나옵니다. 마술을 행하던 자들도 마술 책을 태우며 나옵니다. 지금 시세로 수십억이 되는 책을 불태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또한 계속해서 전파되었습니다. 말씀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를 주변에 전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첫 사랑의 증거입니다.

     

    물론 저희 교회에 첫 사랑의 증거가 많이 나타났으면 좋겠지만 드물게나마 은혜의 증거가 나타났기에 제가 용기와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전 7년간 사역을 하며 가장 기뻤던 것이 이사가 아닙니다. 이사 역시 물론 기쁜 일이었지만 훨씬 더 큰 기쁨은 바로 여러분이 말씀을 듣다가 죄로 생각하지 못한 것을 죄로 깨닫게 되는 변화입니다. 이 변화를 볼 때, 저는 정말 행복합니다. 두 번째로 기쁜 것은 인생의 성공의 가치를 ‘돈’에 두었던 사람들이 더 나은 곳에 가치를 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가치를 두는 모습을 보는 것이 제 목회에 큰 기쁨을 주는 모습입니다. 복음의 영향력이 확산되고 있음이 저에게는 가장 큰 기쁨입니다. 묵상의 숲을 통해 하나님이 그 일을 하고 계시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사방에 있는 목회자들이 복음을 듣고 거기서 배워 자신들의 목회지에서 가르치며 복음의 영향력을 퍼트리고 있다면 미약하나마 에베소 교회에서 벌어졌던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의 가장 큰 기쁨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본질을 계속해서 가져야 합니다. 앞으로 10년 후에는 더 많은 분들이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 하나님 앞에 죄임을 깨닫게 되길 소망합니다. 이 땅에서 성공하는 것이 예수로 살아가는 것임을 깨닫게 되는 자들이 많아지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위해 모여 있는 교회입니다. 여기서 떨어진다면 회개하고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촛대라는 것은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는 역할입니다. 교회가 어두운 곳에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촛대가 비춘다고 온 세상이 밝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촛대가 있는 곳을 통해 그 자리를 비추시며 무엇이 바른 것인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지상교회가 하는 일이 세상을 다 변하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 전에 어두움이 표준이 아니라 예수 이름을 위해 살아가는 것을 열망하는 것이 표준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반응하게 될 때, 어떤 약속이 기다리고 있나요?

     

    [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영원한 영생을 축복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영생인가요?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던 자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 허락되는 것입니다. 눈물 흘리지 않고 고통 없는 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복입니다. 이렇게 살아가기를 소망하는 성도들 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