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사랑교회

  • 교회소식

  • 설교영상

  • 자료실

  • 오시는길

  • Blog

  • More

    하늘사랑교회

    © COPYRIGHTS 2018 HNSRCHURCH ALL RIGHTS RESERVED

    모순이 가득한 서머나 교회

    주제설교 / 일곱 교회 2

    계 2:8:11

    2020년 12월 6일 주일예배 설교문

    중국 한비자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초나라의 한 상인이 무기를 팔기 위해 선전을 합니다. 사람들에게 창을 보여주며 어떤 방패도 뚫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얼마 후, 방패를 팔며 어떠한 창도 막을 수 있는 방패라고 이야기합니다. 상인의 선전을 본 사람이 그 사람에게 묻습니다. 창과 방패를 겨루어보라고 말하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고, 여기에서 나온 한자성어가 ‘모순’입니다. 모순이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공부 잘하는 바보, 뜨거운 아이스크림 등이 모순적인 표현입니다.

     

    영적으로는 이런 말도 되지 않는 상황들이 자주 벌어집니다. 교회, 성도의 삶 가운데는 일반적인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서머나교회가 이런 모순이 가득했던 교회입니다. 서머나 교회를 통해 교회 안에 있는 모순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교회는 어떤 모순을 가지고 있나요?

     

    1. 환난 중에 구원입니다.

     

    [9a] 내가 네 환난 ... 을 알거니와

     

    예수님께서는 서머나 교회의 모든 상황을 알고 계십니다.

     

    [9c]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이들이 당했던 환난의 실체는 유대인들의 비방과 고소입니다. 단순히 욕하는 것이 아니라 서머나교회를 고발하며 로마에 고소하여, 서머나 교회의 지도자였던 폴리갑은 유대인들의 고소로 인해 화형을 당하였습니다. 비방이 아주 심각했습니다. 한 교회의 지도자를 죽음에 몰아넣은 비방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다고 말씀하시며, 고발하는 자들의 실체가 무엇인지도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유대인이지만, 사탄의 회당임을 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상황을 알고 계시다면, 조치를 취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닐까요? 이 유대인들을 다 깨뜨리셔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셔야 하는 것 아닐까요? 하나님은 그저 알고만 계시며 방치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마귀가 있다면 마귀의 역사를 막아주셔서 역사해달라고 우리는 기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 알아, 사탄이 너희를 공격하는거야'라고 말만 하시면 얼마나 답답한 일일까요. 그런데 환난이 성도의 삶에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때로는 방치하시는 것 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환난을 왜 싫어하나요? 환난이 유익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유익한 환난이라는 단어는 애초에 모순적입니다. 환난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우리의 것을 앗아갑니다. 환난을 당하면 왜 같이 아파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 고통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모든 것을 알면서도 허용하실 때는 이 환란이 성도의 삶에 유익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환난이라는 단어는 '슬립시스'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 단어는 곡식을 탈곡해 쌀로 만드는 과정인 '탈곡'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쌀은 원래 볍씨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볍씨는 우리가 먹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밥을 먹을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탈곡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환난의 목적입니다.

     

    우리는 원래 아름다운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육신이라는 죄의 경향성을 타고납니다. 외부의 악한 영향력을 받으면 더 악해지겠지만 아이가 태어나서 순수하고 악한 존재로 태어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겉모습은 천사의 모습을 가지고 태어나더라도 얼마나 악한지 우리는 압니다. 아기가 매일 울면서 엄마가 힘들텐데 하는 아기는 없습니다. 그런데 3~ 5세 넘어가면서 자기 주장을 시작하면 우리는 이기성의 실체를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성인이 되어서 어린아이처럼 이기성을 노골적으로 표출하면서 살지는 못하지만 이기성이라는 악을 가진 채로 모든 편리성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선택하며 관계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만드시는 옛사람은 하나님의 본질, 죄가 없는 거룩한 본질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교회 열심히 다니면 점점 나아져서 옛사람이 새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곡식 껍데기처럼 벗겨져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옛사람이 너무 강력해서 새 사람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이용하시는 것이 환난입니다.

     

    환난은 외적인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을 통해 그 본질에 틈이 가고 무너져내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 4:16-5:1)

     

    환난에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환난는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이 임하는데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라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그런 사람들이 더 위험합니다. 힘들 때 힘들다고 이야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휴식의 시간도 가지고 도움도 받고 하는 사람들은 그 과정을 지나가는데, 이를 잘 하지 못하면 암이 걸리거나 우울증에 걸리게 됩니다. 우리는 겉사람이 깨어지는 것을 걱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적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겉사람이 깨어지고 속사람이 새로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속사람이 훨씬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를 이뤄가신다고 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잠시 왔다 가는 존재입니다. 80년, 100년은 영원의 관점에서 아주 잠깐입니다. 영원한 가치를 우리 안에 만들어내시고자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육체를 태어나더라도, 이는 장막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영어로 보면 텐트입니다. 1천 만원 짜리 텐트가 있다고 부러운가요? 텐트는 일시적으로 잠깐 있는 것입니다. 텐트를 즐기는 사람은 텐트 안에 티비 달아놓고 가구 가져다 놓는 사람은 없습니다. 집에서 즐기지 못하는 것을 간단하게 즐기는 것입니다. 인생은 텐트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우리는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언젠가 우리를 부르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접고 갈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환란을 주시는 목적은 명확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환란이 없어지게 하셔서 도우실 수도 있지만 이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순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의 대표자가 다윗입니다.

     

    “[10] 그 이튿날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 그가 집 안에서 정신 없이 떠들어대므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그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11]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사울이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의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 (삼상 18:10-11)

     

    악령이면 악령이지 여호와가 부리시는 악령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이 완전히 통제하는 악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악령이 사울이 다윗을 죽이게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누가 시작하셨나요? 하나님이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지 않으셨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행하셨을까요? 이런 과정이 없었다면 다윗은 내면에 사울이 있는 왕으로, 다른 왕들과 동일하게 살아갔을 것입니다. 다윗 안에 있는 사울을 없애는 방법으로 하나님은 영적 개입으로 사울을 이용해 다윗 안의 사울을 없애 가시는 것입니다. 만약 성도들이 살면서 어려움이 없었다면 심각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크고 작은 환란을 지나가는 이유가 거룩한 은혜의 자리로 이끄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2. 궁핍 중의 부요입니다.

     

    [9a] 내가 네 ... 궁핍을 알거니와

     

    서머나교회는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어찌 보면 한국교회의 대부분의 모습입니다. 한국교회의 60%이상은 30명 이하의 작은 교회입니다. 대부분의 교회는 작습니다. 교회가 크면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있고, 목회자는 하나님의 큰 능력을 받은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에 자랑할만한 숫자와 재정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서머나교회를 향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9b]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모순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멋져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상황을 뛰어넘는 영적 부요입니다.

     

    “[9]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10]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11]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약 1:9-11)

     

    이 땅에서는 경제적인 부요가 판단의 큰 기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치는 영원성입니다. 부요하냐, 가난하냐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부요로 자신의 가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영원의 가치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눈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난한 자만 예ㅃ하시고 부요한 사람만 사랑하시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마음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물질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모두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가난을 통해 하나님을 찾게 되는 본질을 얻게 되면 놀라운 하나님의 부요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볼 수 있는 것이 지혜라고 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세상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지혜입니다. 이 눈을 지니게 되면 하나님이 주신 부요로 말미암아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재산이나 능력을 가지고 남과 비교하며 질투의 이유가 되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는데 부요한 것을 보면서 나는 왜 부요하지 않은지 하나님을 원망하며 하나님마저도 왜곡시키지 않습니까? 교회 안에서도 아프지도 않고 부요하고 자녀들도 좋은 대학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신만 사랑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이 주지 못하는 풍요를 주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약 2:5)

     

    이 땅에서의 가난이라는 것이 바로 '믿음'을 얻게 하는 도구가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물질적 가난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에 설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대학생 때 마을버스비 500원을 아끼기 위해 걸어 다녀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하나님이면 믿고 싶지 않다고 생각을 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이를 통해서 얼마나 놀라운 것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었다면 그렇게 힘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까지의 가르침은 사업이 실패하고 잘 안되면 하나님이 징계하시는 것이니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불편한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여기서 벗어나게 해주실까요? 그 시절 집 밖의 사람 키 반밖에 되지 않는 화장실에 갔었어야 했습니다. 겨울에 완전히 얼어붙은 화장실에, 물을 부으면 그 위에 얼어붙어서 더 높은 얼음이 쌓이는 화장실에 쭈그려 앉는 것은 너무 힘들었습니다. 화장실이 집 안에 있는 곳에 이사가게 해달라고 7년을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을 통해 이런 환경에서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전에, 돈이 주는 안정을 나의 하나님처럼 신뢰하는 것을 깨뜨려 나가게 해주셨습니다. 물론 그 이후 집안에 있는 화장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매일 기쁠까요? 그저 기억만 있을 뿐입니다.

     

    환경은 지나갑니다. 그러나 환경보다 돈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더 크다는 것은 나의 영혼에 새겨져 있습니다. 이 과정을 지나지 않았다면 돈이 주는 유익을 쫓았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우리가 교회를 통해 선교사님과 가난한 교회에 돈을 흘려보내는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과정을 통해 영적 부요와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가난이 때로는 하나님의 축복이 흘러가는 통로임을 말입니다. 궁핍이 꼭 경제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능력의 궁핍도 경험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뤄지지 않는 결핍 말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 배워야 합니다.

     

    3. 고난 중의 시험입니다.

     

    [10a]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환난이 또 임한다고 합니다. 다른 교회들은 이렇게 심각한 환난이 임한 교회들이 없었습니다. 힘들다 해도 이렇게 힘든 교회들은 없었습니다. 너무 힘들고 너무 가난했습니다. 그런데 환난이 더 임한다고 합니다.

     

    [10b]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마귀가 시험할 것이라는 것을 알려만 주고 막지는 않으십니다. 10일동안 옥에 갇혀 나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10일이 아닙니다. 이는 완전한 믿음의 고백이 드러나는 기간입니다. 다니엘과 친구들이 채소만 먹었던 10일 말입니다. 그러나 이 기간은 죽임을 당할 수 있는 기간입니다.

     

    [10c]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심지어 어떤 성도들은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때까지도 충성하라고 하십니다.

     

    [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예수님의 각 교회에 자신에 대한 소개글은 교회의 상황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죽고 살아나신 분이라고 본인을 소개하시나요? 서머나교회의 성도들 중 일부는 죽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시험도 적은 것 같습니다. 시험을 통해 약한 믿음이 증명되니까 시험을 적게 주십니다. 그런데 믿음이 더 큰 사람은 하나님은 더 큰 시험을 주십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가치가 어떻게 드러나는지 보여주게 하십니다. 손양원 목사가 그런 사람입니다. 공산당 중 손양원 목사의 아들을 죽인 두 사람을 양아들을 삼습니다. 이런 시험을 거치고 나서 6.25가 벌어진 후 공산당이 손양원 목사를 잡아가서 죽입니다. 그러면 인생은 평탄하게 살았나요? 애양원이라는 나환자촌에 가서 가장 기피하던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가장 비참하게 죽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 고난을 받으면 어떻게 되나요?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코로나가 도래하자 30% 정도 되는 성도들은 공식적으로 교회를 나가도 되지 않아서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시험이 오면 본질이 드러납니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상황입니다. 한국교회에 시험은 필요합니다.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요 15:2)

     

    이 구절에는 오해가 될만한 번역이 있습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께 붙어만 있으면 열매 맺는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잘라버린다고 합니다. 붙어 있는데 열매를 맺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요? 제거해 버리다는 '아이로'라는 단어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한가지는 잘라 버리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들어 올리다는 뜻입니다.

     

    고대에는 포도나무를 철사 줄을 메어서 할 수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나무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런데 어설프게 묶인 포도가 땅에 뒹굴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러면 농부가 와서 이 나무를 위로 들어 올려 놓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들어 올려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미 열매 맺는 가지가 있다고 하면, 그 나무는 전지를 해줍니다. 과일 농사를 맺는 사람은 불필요한 가지를 제거하는 전지작업을 합니다. 우리가 봤을 때에는 열매 맺지 못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때에 개입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더 많은 환난과 고난을 통해 본질만 남기기 위해 더 많이 개입해 오십니다. 그리고 그 결과 온전함이라는 결과가 주어집니다.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약 1:2-4)

     

    시험을 많이 거쳐 불필요한 것이 제거된, 온전한 인내를 지닌 사람만이 온전한 성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그저 참는 것이 아닙니다. 욥이 이런 것을 경험하는 사람입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약 5:11)

     

    고난이 임할 때 생각이 드는 것은 나쁜 하나님 아닌가? 나만 사랑 안하시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지만 이것은 마귀가 주는 생각입니다. 환난은 이 세상의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모순된 축복인 것입니다.

     

    [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더 큰 면류관, 더 높은 자리가 아니라 똑같은 구원의 은혜를 주십니다. 둘째 사망이 그것입니다. 첫째 사망은 육신의 죽음이며, 둘째 사망은 영원한 멸망이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계 21:8)

     

    이 땅에서 남보다 더 많은 고난을 겪고, 더 고생했다고 해서 더 큰 복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고난을 겪은 사람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서 온전히 기뻐하게 됩니다. 이 땅에서 서머나 교회같이 영적 모순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믿음을 드러내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