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력을 잃어버린 사데 교회
주제설교 / 일곱 교회 5
계 3:1-6
2021년 1월 3일 주일예배 설교문
병원에 가면 다양한 환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환자들 가운데 가장 안타깝고 힘든 환자는 혼수 상태에 빠져 아무런 의식이 없는 환자일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코마 상태입니다. 코마 상태로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몇 십 년씩을 살아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가장 긴 코마 상태였다가 깬 사람은 27년 동안 코마 상태였다가 깨어난 사람이라고 합니다. 코마 상태의 사람은 욕창이 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몸을 돌려주어야 하고, 음식도 튜브로 섭취를 해야 합니다. 살아 있다고 하기에도 죽었다 하기에도 애매한 환자입니다.
그런데 교회 가운데도 영적 코마 상태에 있는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가 바로 사데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사데 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b] …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명목상으로만 살아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교회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영적으로 볼 땐 죽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존재해야 하는 목적을 성취할 수 없는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 코마 상태에 있는, 생명력이 사라진 교회입니다. 영적 생명력을 잃어버린 교회는 어떻게 되나요?
1. 온전한 행위를 할 수 없습니다.
[2c] …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예수님이 사데 교회에는 온전한 행위가 아무 것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온전한’이라는 단어는 원래 물컵 가운데 물이 가득 채워진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즉, 충만한 것입니다. 무엇이 교회가 충만한 상태일까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온전함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상태인 것입니다. 한 존재 안에 예수님의 모습, 예수님의 성품, 예수님의 마음이 가득차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 행위를 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충만한 상태, 온전한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고, 헌신된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이런 행동을 할지 모르지만 본질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가식적이고 교만한 행동일 뿐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헌신하며 헌금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열심을 내지만 자신의 이름을 내기 위한 열심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온전한 것은 자신의 욕망과 뜻은 내려놓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만을 위해 반응하는 것입니다.
사데 교회는 왜 예수님의 모습은 다 사라지고 종교적인 모습과 자기 의를 위한 결과만이 나타났을까요?
[3a]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
그들이 복음에서 떠났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처음 시작했을 때는, 복음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삶을 살며 하나님의 은혜를 의존하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복음의 본질이 흐려진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끊임없이 우리 안에 있는 종교성과 자기 열심과 싸워나가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구원을 받으며 우리는 철저히 죄인이며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마음이 우리에게 계속적으로 요구되는 것입니다.
바퀴벌레가 아무리 노력하여 최선의 것을 만들어도 인간을 기쁘게 할 수 없듯이,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영, 성령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반응하며 순종할 때만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결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의 죄성을 인정하고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은혜를 붙드는 절대적인 겸손입니다.
대부분 예수를 처음 믿을 땐, 내가 죄인이며 예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겸손이 있습니다. 그런데, 점점 시간이 갈수록 예수보다 다른 것이 더 필요한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가 아닌 다른 것들만 필요한 상태가 될 때, 사데 교회처럼 영적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예수가 점점 더 필요한 상태가 되어 가시나요? 예수가 필요하지 않고 다른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된다면 영적 생명력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지 모릅니다.
또한 사데 교회는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사회 문화적인 요인이 있었습니다. 모든 교회는 그 교회가 위치한 시대나 사회의 영향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데라는 도시는 기원전 7세기에는 아주 부요하고 잘 나가는 도시였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강에 사금이 흘렀고 금광과 은광이 발달되어 세계 최초로 금화와 은화를 만들었던 곳입니다. 염색업이 발달하여 옷감을 수출하는 수출업이 발달한 도시였기에 경제적으로 매우 발달한 도시였던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부요해지니 그 결과로 사람들이 부에 대한 열망, 쾌락에 대한 추구가 어떤 도시보다 강했습니다.
또 사데는 투몰로스라는 산 위에 있던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남쪽으로 올라오는 좁은 협곡으로만 사데로 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나라가 사데를 침략하고자 했으나 오랜 시간 동안 딱 두 나라만 침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데 사람들은 이 성 안에 있으면 안전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폐쇄적이며 안정 지향적인 모습이 일반적이 되었습니다.
부요로 말미암아 쾌락을 추구하며, 안정을 추구하는 것이 세속주의적 영향력입니다. 이것이 교회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시대의 영향력이 강력하게 미칠 때 교회 안의 사람들이 복음의 본질에서 떠나갈 때, 성도들도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을 똑같이 추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데 교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국도 경제가 급성장 하였고 안정된 기반과 안정된 미래를 보장할 수 있는 근거를 갖길 열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변화가 나타났을까요? 교회의 생명력을 잃어버린 모습입니다. 한국교회가 더 이상 생명에 대한 열망을 갖지 않고 모든 예배, 모든 반응들이 종교화되고 점점 힘을 잃어가는 것에서 그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전도하며 복음의 길을 걷는 것들도 점차 낯선 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사데 교회처럼 한국교회도 세속주의적인 영향력에 의해 본질을 빼앗기도 있습니다.
[2a] 너는 일깨어 …
이 말씀이 그래도 소망이 있습니다. 죽은 것 같았지만 완전히 죽은 자에게는 일어나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데 교회는 혼수상태인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이 일어나라고 말씀하시면 반응할 수 있는 잠자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엡 5:14)
죽은 자들은 예수를 믿지 않는 세상 사람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조차도 그들과 같이 잠자는 자로 누워있는 것입니다. 그들을 향해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상태를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영적 생명력이 사라지고 있다면, 예수님이 지금 말씀하시는 이 말씀을 듣고 일깨워야 합니다.
[2b] …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이는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계속 그 상태로 있다가는 죽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완성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국에 갈 때까지는 누가 구원받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자동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삶에 끊임없이 나타나고 생명력으로 말미암는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심각한 상황인 것입니다. 이 말씀에 귀 기울이고 죽어가는 것을 일깨워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영적 생명력을 잃어가는 때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영적 생명이 있다면 가장 먼저 복음에 대한 감격과 은혜가 계속됩니다. 계속해서 은혜와 감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연애초기에는 상대방의 목소리를 듣고 싶고 자꾸 만나고 싶습니다. 나중에는 관심이 점점 떨어지고 목소리가 그다지 듣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얼마나 깊고 풍성한가요. 말씀에 대한 사랑이 사라지고 있다면, 이것이 바로 생명력이 사라지고 있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영적 생명력은 세상의 세속주의에 깊이 영향을 받습니다. 세상의 세속주의는 사람들에게 쾌락과 안정을 추구하게 만듭니다. 쾌락이란 재미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감각적인 만족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사랑이 사라지면 그 사랑의 중심에 감각적 만족을 추구하는 경향성이 생기게 됩니다. 흥분시킬만하며 맛있고 재밌는 것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1년 동안 코로나로 인해 외적 활동이 제압을 받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유튜브 시청시간과 넷플릭스 가입자가 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유튜브와 넷플릭스 시청시간이 늘지 않으셨나요? 공짜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여러분이 클릭하는 순간 여러분의 경향성, 좋아하는 모든 것을 파악해서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떠나지 못하도록 계속적으로 흥미 있고 재미있는 것들을 제공하는 AI가 여러분을 빠져나올 수 없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SNS 역시 이와 같습니다. 그 결과 쾌락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은 어떤가요? 쾌락을 추구하여 말씀의 생명력이 떠나가게 만들고 계속해서 인터넷에 매여 있지는 않은가요? 여기서 들어오는 영향력이 사람의 생명력이 점점 짓밟고 다른 사람에 대한 부러움과 비교의식이 늘어나며, 미래에 대한 불안이 커져가게 하며 하나님에 대한 관심은 점점 잃어버리게 만들며 사데 교회처럼 우리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깨어나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2.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할 수 없습니다.
[3b] …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계속 잠자고 있다가는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준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깨워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이 곧 오시기 때문입니다.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살전 5:4)
빛 가운데 있는 자, 예수님과의 관계가 발전하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깨어있는 자들은 하나님이 이 세상 가운데 왕으로 통치하시며 언젠가 오실 것이라는 마음을 갖고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43]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4]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 24:42-44)
준비해야 합니다.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예수님이 정말 어느 때에 오신다면 이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나의 쾌락과 나만을 위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우리 안에 예수님의 오심에 대한 기대가 사라지고 있는 것 아닌가요? 이것이 영적 생명력이 사라지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눈으로 직접 보게 될 성도들이 아마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으로 예수님을 보게 될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간은 금방금방 지나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날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만 바라보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준비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신부로 준비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성경에서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신랑되신 예수님을 신부인 우리를 맞이하러 오시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해 심판주로 예수님께서 오심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마 25:1-5)
고대에는 신부 집에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 와서 신부집에서 잔치를 한 뒤, 신부를 데리고 떠났습니다. 신랑이 멀리서 오니 신부와 들러리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열 처녀는 신부의 들러리입니다. 신랑이 먼 곳에서 오는지 예정 시간보다 늦고 있는 것입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기름을 준비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신랑이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옵니다.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마 25:10)
상식적으로 보면 기름 준비를 안했다고 내쫓는 경우가 어디 있냐고 할 수 있지만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입니다.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은 신랑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인생 내내 신부처럼 준비해야 하는데, 인생 내내 다른 생각과 다른 관심, 다른 쾌락을 추구하며 살다가 예수님과 관계없는 자로 증명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지만 예수님과 관계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이 모든 상황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예수님과 상관없던 자들에게는 어떤 날일까요?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 3:10)
천지개벽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 날’은 구약에서 끊임없이 예언되던 ‘여호와의 날’입니다.
“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 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사 13:9)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들을 멸하시며 무서운 모습으로 임하실 수 있나요? 만약 이렇게 공의롭게 심판하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온전한 하나님이 되실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공의의 하나님에 대해 기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향해 심판하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기대는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를 받은 자들만 심판에서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려야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를 덧입어야 심판대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계 16:15)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지 않은 자들은 수치스럽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충만하지 않다면 재림에 대한 생각, 죽음에 대한 생각이 없기에 이 땅에서의 나의 쾌락을 증진시키는 일에만 관심을 쏟게 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의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불안에 휩싸이게 됩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근거하여 이 땅을 살아가고 있으신가요? 이 세상은 옷처럼 낡아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의존할 수 없는 곳이며, 우리가 의존할 수 있는 분은 영존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약속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만이 이 세상이 코로나로 요동하며 세상이 변화로 인해 요동할지라도 견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점점 여러분의 인생에서 생명력에서 사라지고 있다면, 미래가 두렵고 불안하고 걱정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생명을 얻는 길 가운데 싸워 이기는 자에게는 어떤 약속이 주어져 있나요?
[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점점 잠을 자게 만드는 것들과 싸워야 합니다. 세속화의 영향력으로 눈을 멀게 하고 그리스도의 다시 오실 날을 기대하지 못하게 하는 세상의 현실과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입혀주신 거룩한 옷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심판대에서도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하게 될 것을 바라보며 만족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끝까지 영적 생명력을 잃지 않고 예수를 붙드는 자들 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