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으로 견고한 빌라델비아 교회
주제설교 / 일곱 교회 6
계 3:7-13
2021년 1월 10일 주일예배 설교문
세상에는 일본처럼 지진이 많은 나라가 있습니다. 일본에는 지난 20년 동안만 보더라도 진도 6 이상의 건물이 무너질만한 지진이 80건 넘게 일어났습니다. 그 중 가장 큰 지진이 진도 9 이상이었던 동인도 대지진입니다. 쓰나미가 해안을 휩쓸었고 후쿠시마 원전도 파괴되었습니다. 이 지진 후 몇 개월간 만 이천 번이 넘는 여진이 있었습니다. 2만 명 이상이 죽었고 50만 명 이상이 고향을 떠나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이런 지진을 겪은 사람들은 오랜 시간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됩니다. 7년 후인 2018년에 지진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설문조사를 했더니, 3분의 2이상이 트라우마를 경험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40%의 사람은 잠을 이루지 못했고 42%의 사람들은 우울증과 불안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여전히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많은 사람들이 놓인 것입니다. 이것이 삶의 기반이 흔들린 사람이 겪는 내적 불안의 모습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 역시 일본처럼 지진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A.D 17년과 23년에는 도시 전체가 파괴될 정도의 지진으로 말미암아 도시가 마비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교통의 요지이지만 지진으로 인해 도시가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불안한 환경,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영향을 받게 됩니다. 교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적, 문화적, 지리적 환경이 빌라델비아 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빌라델비아 교회는 그 어떤 교회보다 건강하고 견고한 교회로 예수님의 칭찬만을 받습니다. 어떻게 빌라델비아 교회는 칭찬을 받는 교회가 된 것일까요? 어떤 교회가 영적으로 견고한 교회일까요?
1. 예수님의 통치를 믿고 배반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7] …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예수님이 자신을 소개하면서 다윗의 열쇠를 가진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절대적 권위를 가진 열쇠를 가진 것입니다. 이 열쇠는 바로 구약의 이스라엘의 모든 국고의 출납을 담당하는 재정의 권한을 가진 열쇠입니다.
“[20] 그 날에 내가 힐기야의 아들 내 종 엘리아김을 불러 [22] 내가 또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사 22:20, 22)
하나님은 셉나라는 사람이 가지고 있던 국고를 관리하던 권한을 빼앗아 엘리아김에게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셉나는 이기적 욕심으로 인해 자기 일만 돌보다가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서 쫓아내시고 엘리아김에게 맡기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아김 역시 이 자리에서 끝까지 있지 못합니다.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약속을 하십니다. 내가 앞으로 메시야를 보내어 영원한 다윗의 열쇠로 나라의 국고를 담당하며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며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행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다는 것은 우리 인생을 책임지시고 통치하시며 모든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는 분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인생은 예수님의 공급과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막으시면 어떤 인간도 막힌 문을 열 수가 없고, 예수님이 열어 주셔야 길이 열리고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라에 필요한 모든 국고를 담당하던 열쇠처럼 예수님이 우리 인생에 권한을 가지고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8a]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열거나 닫는 열쇠를 가지고 계신데, 빌라델비아 교회에게는 문을 완전히 열어놓으셨습니다. 문을 통해 무엇이 주어지나요? 요한계시록에서의 열린 문은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들어오며 성도가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갈 수 있는 성도와 하나님 사이를 연결하는 통로입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계 4:1)
요한은 열린 문을 통해 교회 시대 가운데 하나님이 어떻게 교회를 돌보시고 마귀가 교회를 무너뜨리려 해도 하나님이 어떤 은혜를 베푸시는지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에 열린 문을 열고 계신다는 것은 교회가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며, 그들이 간구하는 모든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예수님은 어떤 칭찬을 하시나요?
[8b] …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작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규모가 작고 성도가 많지 않고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교회였음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지킨 것을 칭찬받습니다. 진리 위에 견고하게 서 있는지를 테스트 받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종류의 말씀 가운데 견고한가를 테스트를 받았던 것일까요? 예수님은 다윗의 열쇠를 가지고 필요를 공급하다고 말씀하시는데, 현실은 작은 능력을 가진 교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다윗의 열쇠를 가지고 성도의 인생의 문을 활짝 열고 은혜를 베푼 모습일까요? 진리 위에 견고하게 서지 못하면 세상과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게 됩니다. 작은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있음을 믿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세상이 크다고 말하는 권력, 돈, 외모, 지위를 가지고 있어야 멋지고 좋은 것이라 세상은 평가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 6:20)
가난한 것은 작은 것, 불편한 것, 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가난한 것이 복되다고 말합니다. 가난한 것이 하나님 나라를 얻을 수 있는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가난으로 말미암는 가난한 성도의 마음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기 때문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눅 4:18)
마음이 가난했더니, 예수님이 전하시는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준비가 된 것입니다. 교만은 자신의 능력이 크다고 생각되어 자기가 하나님인 마냥 자신이 정하고 생각한 것이 바른 길임을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때로는 성도에게 작은 능력만을 주시고 작은 능력으로 인해 세상에서는 연약하고 부끄럽지만 그 자리에서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더 큰 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또 빌라델비아 교회는 예수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름은 정체성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끊임없이 정체성에 대한 위협을 받았습니다. 로마에 충성할 것인지 아닐 것인지를 공격받은 것입니다.
[9]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
이들은 기독교인들에 대한 질투와 미움으로 말미암아 계속해서 빌라델비아 교인들을 괴롭힌 것입니다. 이 때, 얼마나 큰 유혹을 받았을까요? 누구를 섬기는가, 누구에게 충성하는가를 끊임없이 질문 받는데, 예수를 부인하고 로마 황제를 섬깁니다라는 대답을 해야지만 살 수 있는 그 자리에서 이들은 자신의 신앙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로마 시대만 이렇게 기독교인이 핍박을 받았나요? 역사 내내 마귀의 공격과 유혹은 비슷한 패턴으로 계속 반복됩니다. 마귀가 백만 가지 다양한 기법으로 성도를 공격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약하면 두 가지입니다. 때로는 마음의 욕망을 자극하는 방식, 아니면 성도들을 두렵게 만들어 하나님을 버리게 만들고 예수의 이름을 배반하게 만드는 핍박입니다.
한국 기독교가 이 두 가지 유혹이 동시적으로 나타나는 상황입니다. 지금 현실이 그렇습니다. 예수 믿는 게 점점 어려워집니다. 너무 유혹이 많아져서 그렇습니다. 예수보다 더 힘이 세 보이고 좋아 보이는 것들이 세상에 너무 많습니다. 예수님이 내 인생의 미래를 바꿔 즐겁게 만들어 줄 수 없어 보이게 합니다. 돈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되게 합니다.
한국의 기독교가 유혹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점점 핍박의 상황으로까지 만들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단이 등장해 기독교와 이단을 구분하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가 이상하고 괴팍한 집단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광신자들이라는 세상의 시선이 있으며 스스로 목사라고 주장하지만 목사가 아닌 전광훈과 같은 정치 세력화된 기독교 집단으로 인해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인이라고 하면 이상한 반 사회적 집단에 속한 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집단이나 목회자와 같은 정치 세력화된 사람들을 통해서만 인식이 나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 전 일어난 정인이 사건과 관련해서도 사탄은 기독교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정인이를 학대한 양부모가 목사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기독교 교육기관인 한동대학교를 나왔습니다. 두 사람이 아이를 입양해 무섭게 학대하여 죽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다 이렇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이 상황이 예수의 이름을 붙드는지 아닌지의 시험대일 수 있습니다. 남들이 볼 때, 부러워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만 하나님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온전히 붙들고 예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믿었더니 어떤 결과가 발생하나요?
[9]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하나님도 사탄이라고 부르시던 무리 가운데의 몇이 예수 이름을 붙들던 빌라델비아 교회의 성도에게 무릎을 꿇고 복종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성도들을 핍박했던 바울 사도가 회심하여 돌아오게 된 것이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
2. 시험의 때에 소망의 말씀을 지키는 교회입니다.
[10a]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
여기서 나의 인내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인내의 모범입니다. 휘포모네라는 인내라는 단어는 ‘소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통스러운데 단순히 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참는 것입니다. 고통의 과정 가운데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모든 것을 돌이키시며 바르게 하실 것을 믿는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께 소망을 둔 자에게 미래에 대한 약속을 주십니다.
[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지는데 기둥이 되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영원히 서 있는 기둥이 되며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기록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이름이 새겨지는 기둥인 것입니다. 기둥의 견고함을 보장한 것입니다. 왜 이런 약속을 하신 것일까요? 빌라델비아 교회의 상황이 불안한 상황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왜 부자가 되고 싶은 것일까요? 미래에 문제가 생기면 자신이 가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 사람들은 개인적으로도 힘들었지만 언제 지진이 일어나 고통받게 될지도 모르는 세상 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약속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삶은 다릅니다. 빌라델비아 사람들은 집을 지을 때, 엄청나게 커다랗게 기둥을 세웠습니다. 빌라델비아에서 발견된 건축물을 보면 다른 지역에서 발견된 기둥보다 두께가 서너 배가 컸습니다. 하지만 이런 노력도 예상 외의 상황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또한 빌라델비아에는 로마 전역에 확산시킨 극도의 쾌락을 보여주는 디오니소스 숭배 문화가 퍼져갔습니다. 디오니소스 축제를 통해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광란의 밤을 보내며 쾌락을 즐긴 것입니다. 사람은 내면이 불안할수록 불안을 잊게 만들 극도의 쾌락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한국의 상황과 똑같습니다. 사람들은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사회 환경이 예측할 수 없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1-2년 사이에 얼마나 많은 환경과 상황들이 벌어졌나요? 이 상황들이 인간의 기본적 삶의 근원인 주거가 보장되지 않는 상황으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집값이 2-3배 오르고 있습니다. 영혼을 끌어모아 빚을 내 집을 사고 있습니다. 이것을 영어로 ‘panic buying’, 공포에 질려서 산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것일까요?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끌을 해도 한 평 땅도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한 쾌락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마약을 하는 사람을 신문에서 보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한국의 현실입니다. 수십만 명의 마약 중독자들만 문제가 되는 것일까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쾌락에 중독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알콜 중독, 성 중독, 니코틴 중독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것에 중독되어 살아갈 수 있냐고 묻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은 중독되어 살고 있습니다. 탄수화물 중독, 일중독, 쇼핑 중독, 카페인 중독 등 새로운 중독에 빠집니다. 인터넷 중독과 스마트폰 중독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하는 중독입니다. 문제는 중독은 점점 교묘해지고 사람들의 일상을 파괴하는 자리로 이끌어갑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들고 그리스도를 붙잡아 말씀으로 깨닫지 못하면 내적 불안으로 말미암아 안정을 추구하며 안정이 깨어지면 인생 전체가 끝날 것처럼 살게 됩니다.
[10b] …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먼 미래에 시험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이 시험의 때입니다. 사람들이 지금 시험을 당하고 있습니다. 시험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본질이 얼마나 쾌락에 중독되어 있으며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몸부림을 치고 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시험을 이기지 못하면 어떤 교회처럼 교회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성도라는 이름으로 불리움을 받고 있는데 명맥상 교회, 성도인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평생 자신의 안정을 위해 몸부림치는 인생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와 관계없는 존재인냥 스스로를 속여 가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근원적 불안에서 벗어나게 하는 그분의 약속을 믿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 사람과 똑같은 자리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약속이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지나요?
[11]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인생에서 싸움을 마친 자들에게 면류관이 약속된 것입니다. 세상의 쾌락에 몰두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붙들며 예수의 인내의 말씀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근원에서부터 예수로 말미암는 견고함을 가진 자리에 설 때, 승리의 면류관으로 하나님이 우리 인생 가운데 우리가 싸웠던 싸움의 결과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보여주실 것입니다. 인생 가운데의 모든 싸움을 인내로 승리하는 성도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