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24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3]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5]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성탄절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요? 바로 구주 예수님을 경배하는 일입니다. 본문의 동방박사들도 예수님께 경배하고자 수천 킬로 떨어진 곳에서 알지도 못하는 아기를 찾아왔습니다. 요즘 같이 비행기가 있는 세상이 아니니 아마 몇 개월이 걸렸을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이들은 별의 계시를 보고 긴 여정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아무도 예수님을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왕으로 태어나신 예수님을 죽이고자 한 사람도 있었고 대부분은 예수님을 무시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경배하는 데 엄청난 방해물들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경배의 방해물들은 무엇인가요?
참된 경배의 방해물들은 무엇인가요??
1.스스로 왕되고자 하는 죄성입니다. vv.1-3, 7-8
첫 번째로 스스로 왕 되고자 하는 죄성입니다. 1절과 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동방 박사들은 아마도 고대의 바벨론, 현재의 이라크 지역에서 왔으리라고 추측을 합니다. 이들은 수천 년 동안 하늘의 별들을 보고 세상의 원리들을 파악하는, 점성술과 천문학에 발달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천체에 신비한 일이 벌어지자 이들은 그것이 어떤 사건을 지시하시는 것이고 왕의 탄생을 예측할 수 있다고 생각해 멀리서부터 예물을 가지고 찾아온 것입니다.
동방 박사들을 인도하던 별이 어느 순간 사라지자 이들은 그 나라의 왕이 있는 곳에 가보면 당연히 왕자가 태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3절에 문제가 생깁니다.
[3]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소동’은 여러 가지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상황에 대해서는 ‘요동하다, 흔들리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는데,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불안하다, 두려워하다’로 해석됩니다. 즉 헤롯은 두려워서 불안한 채로 흔들렸다는 것입니다. 헤롯이 불안해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헤롯은 이스라엘 왕 중 누구보다 왕위에 대한 집착이 강렬했습니다. 여섯 명의 아내 중 헤롯은 미리암을 가장 사랑했는데 그가 자신을 반역해 아들들을 왕으로 세울까 봐 죽여버립니다. 사랑하는 사람한테 당하는 배신이 가장 힘들 것이기에 가장 사랑하니까 죽였습니다. 또한 미리암과의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도 죽여버립니다. 그들이 왕이 될 가능성이 제일 높았기 때문입니다. 또 이들이 반역을 꾀하도록 사주했을 것이라 의심되는 장모까지 죽여버립니다.
헤롯은 나이가 들어 어차피 누군가에게 왕위를 물려주어야 되자 아들 중 안티파트를 황세자로 세웁니다. 그런데 몇 년 동안 황세자로 세워서 왕위 수업을 하다 보니까 자기가 살아있을 때 반역을 볼까봐 두려워져서 또 로마의 허락을 받아 이 아들도 죽여버립니다. 그런 헤롯이 유대인의 왕이 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어땠을까요?
게다가 헤롯만이 아닌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도 소동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어떻게 오실지, 어떤 메시아가 오실지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나 기대감이 없었습니다.
당시에도 메시아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너무 있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나타나 자신이 메시아라고 주장했고, 적게는 수천, 많게는 수십 만이 그들을 따랐던 경우도 있습니다. 세례 요한에게도 많은 사람이 당신이 메시아입니까라고 묻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전혀 기대감이 없었기 때문에 유대에 왕이 태어났다는 말에 깜짝 놀라 소동한 것입니다. 자기를 대신할 왕이 태어났다는 말에 헤롯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7절과 8절입니다.
[7]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8]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여러 번 반복되는 말이 무엇인가요? ‘자세히’입니다. 자세히 알아야 그를 죽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렇게 자세히 상황을 들은 뒤에 어떤 일을 하나요? 16절을 보시면
[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학자들이 한 2년 전에 별이 나타났다고 했더니 날짜를 세어 두 살 아래 아이들을 다 죽여버린 것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 대한 마땅한 반응이 경배인데, 자신이 경배 받고자 하는 욕망이 큰 자는 절대로 예수를 경배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경배가 무엇인가요?
‘무릎을 굽혀 온전히 절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상대방에 대한 복종이며 상대방을 최고로 높이는 행위입니다. 경배 즉 예배의 영어 단어는 worship입니다. 이것은 ‘worth’ 가치라는 단어와 ‘ship’ 자격이라는 단어의 합성어로 즉 내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대상에 대해 보이는 반응입니다.
우리가 왜 매주 시간을 내어 모여 예배하나요? 삼위일체 하나님이 무엇보다 가치 있는 분이시며 우리의 존중과 높임의 대상이 되심을 우리가 고백하는 자리가 바로 예배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드리는 공적 예배에는 익숙하지만 자기 인생에서 예수를 가장 높은 자리에 올려드리는 삶의 예배에는 너무나 익숙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삶에서 고민하는 많은 일들은 내가 경배 받고 높아지고 왕이 되고 싶은데서 기인할 때가 많습니다. 왕이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최고의 자리에 올려드린다면 아마 지금 우리가 힘들어하는 많은 일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 땅에서 우리가 느끼는 좌절감과 열등감의 근원에는 내가 왕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헤롯만 왕이 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선악과를 따먹은 우리 모두가 왕처럼 살고 싶어 합니다. 이 근원적 마음이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는 성탄에 한 번 찬양하는 것으로는 예수님을 진짜 경배할 수 없습니다. 내가 높아지고 싶은데 좌절되어 화가 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경배하는 인생 될 수 있도록 개입하여 은혜를 달라고 기도하심으로 참된 경배를 가로막는 방해물인 왕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부터 자유케 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참된 경배의 방해물들은 무엇인가요??
2. 왕의 정체를 오해하는 영적 무지입니다. vv.4-5, 11-12
두 번째로 참된 경배의 방해물들은 무엇인가요? 왕의 정체를 오해하는 영적 무지입니다. 4절 말씀입니다.
[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헤롯은 유대의 왕으로 유대의 풍습과 종교에 익숙했고, 유대인의 왕으로 오시는 특별한 분이 그리스도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성경 내내 약속된 메시아의 탄생에 대한 예언이 이루어질 것 같아서 물어본 것입니다. 게다 답을 한 사람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5절과 6절을 보시면
[5]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바로 답이 나옵니다. 지금처럼 성경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고대 대제사장이나 서기관은 성경의 많은 부분을 암송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을 알고 얘기했고 동방 박사들은 그 얘기를 듣고 베들레헴으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예루살렘 사람들은 따라가지 않습니다.
이 작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존재가 우리 왕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비천하고 약하고 가난한 모습으로 보내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구약 성경은 이미 예수님이 어떤 모습으로 오실지 이사야 53장 2절과 3절에 예언하고 있습니다.
사 53:2-3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한자어가 많아서 어렵지만 쉬운 말로, 메시야는 광야의 풀떼기처럼 초라하고 볼품없는 모습, 또 고난과 고통을 너무 겪어서 귀한 사람이라고 볼 수 없이 찌그러지고 망가진 모습으로 온다는 것입니다. 만왕의 왕이며 만주의 주가 왜 이렇게 초라하고 약한 모습으로 오시나요?
세상은 힘을 이용해 자신을 하나님처럼, 왕처럼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힘인 돈과 지위와 능력을 구세주로 기대합니다. 돈이 많고 권력이 많은 것이 무조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의 갈망은 멈추지 않습니다. 항상 강한 구원자를 기대합니다. 그러니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은 약한 메시아를 기대하지 않았고 하나님은 일부러 메시아를 그런 모습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그것을 상관하지 않은 동방 박사들은 바로 찾아갑니다. 11절입니다.
[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지금은 예수님이 태어나신지 시간이 좀 지나서 마구간에서 집으로 옮겼던 것 같지만 원래는 어디에 태어나셨나요? 누가복음 2장 7절을 보시면
눅 2: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크리스마스 엽서 등에 보면 양이나 말들도 예수님을 경배하듯이 들여다보는 경건하고 낭만적인 그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소, 말, 돼지 키우는 곳에 가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냄새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견딜 수 없는 악취입니다. 게다 동물들이 먹다 남긴 음식 찌꺼기가 묻어 있는 구유에는 아마 일반 사람은 손도 대기 싫을 만큼 더러울 것입니다.
하늘의 왕께서 왜 이렇게 비참하고 가난하고 연약한 모습으로 오셨나요? 이것이 바로 예수가 오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스스로 죄인이라고 인식을 못하는가 하면 죄가 우리를 움직여가기 때문입니다. 더 높아지고 싶어서 자꾸 힘을 열망하는 방식으로 표출됩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키가 컸다면, 영어를 더 잘했다면, 더 똑똑했다면, 더 돈이 많았다면이라는 마음이 우리 안에 가득합니다. 이런 마음이 죄가 만드는 결과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 축복하기보다 시기합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닌 이기적 욕망에서 나오는 무서운 죄성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진짜 이유는 세상의 힘이 아닌 하나님만이 왕이며 주인이심을 인정하고 경배하는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 예수님을 무엇이라고 부르나요?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죄에서 자유케 된 자가 가장 먼저 보이는 반응이 하나님만 진짜 예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돈, 능력, 학력을 예배했습니다. 그런데 죄에서 구원받으면 이제 예수만 예배하는 자로 변화됩니다. 그것이 진정한 축복이며 안식입니다. 예수님만 높이게 되면 지금 나에게 허락하신 큰 은혜로 감사와 영광을 돌릴 수 있는데 우리는 다른 것을 의존하고 다른 것을 높이기 때문에 자주 불행해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창세기 3장 5절에 이렇게 얘기합니다.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우리는 선과 악을 ‘내게 유익이 되는가’로 판단합니다. 나를 더 강하고 행복한 자로 만들어주는 것은 선, 나를 약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죄악의 근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실 때만 약한 자로 오신 것이 아니라 돌아가실 때도 약한 자로 돌아가셨습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가르기 위해서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입니다.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는 일반적인 눈으로는 이해가 안 가는 방법입니다.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러 이 땅에 오셨는데 어떻게 비참한 처형 도구에 매달려 죽으실 수 있나요? 어떤 사람들에겐 그것이 믿음의 대상이 되어서 구원을 받는데 믿음이 없는 자에게는 미련할 뿐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로 구원을 받고 계시다면 경배의 대상이 바뀌어야 합니다. 내가 부자가 되고 강해지고 멋져질 때 할렐루야를 외쳤다면 그것은 하나님 찬양이 아니라 자기 찬양입니다. 수능을 못 보았던, 사업에 실패했던, 승진 기회에서 낙방을 했던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것이 진짜 경배입니다. 세상 사람은 절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은 하늘사랑교회의 10번째 성탄절 예배입니다. 2014년 3월에 집에서 예배드리고 5월 마지막 주에 사당동에서 첫 예배를 드린 6개월 뒤에 성탄 예배를 드린지 십 년입니다. 집에서 몇 주 예배를 드리다 예배장소를 찾아보기 시작한 뒤 2주 만에 기적적으로 후원을 받아서 사당동에 장소를 마련하게 된, 그 은혜가 너무 커서 그때부터 저희는 돈을 떼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찾아보니 첫 해 6개월에 외부로 후원한 금액이 3천만 원이 넘었습니다. 그 은혜로 다음 해에도 어느 개척 교회에 절기 헌금 전액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기도하는데 제 마음에 천만 원을 보내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광고를 했습니다. 헌금이 적으면 교회 재정으로 보태서 천만 원을 헌금하자고 했더니 예배 후에 몇몇 성도분들이 개척교회가 어떻게 다른 개척교회에게 천만 원을 헌금하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개척교회이기 때문에 돈을 모아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 몇몇 분들 때문에 제가 마음이 눌리기 시작해서 밤새 잠을 못 자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9시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습니다.
부산의 한 교회인데 어제 당회에서 하늘사랑교회에게 천만 원을 헌금하기로 결정했다는 전화였습니다. 갓 개척한 교회에서 목사님들 성경 공부 가르친다는 얘기를 듣고 담임 목사님이 감동하셨다는 말과 함께 그 날 천만 원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교회 단톡방에 천만 원이 들어왔으니 여러분이 얼마를 헌금하셔도 천만 원 줄 수 있게 되었다고 올렸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헌금이 1,300만 원 나온 것입니다. 그때부터 시작되어 매년 절기 헌금을 전액 흘려보내고 선교사님들도 후원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사하면서 위기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정말 은혜를 많이 베푸셨습니다. 어제 합산해 보았더니 지난 10년간 내보낸 돈이 거의 7억에 육박했습니다. 물론 그 7억 원은 저희에게 지금 남은 빚과 같습니다.
외부로 하나도 안 줬으면 지금 빚이 없을 것 아니냐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꽉 움켜쥐었다면 빚이 두 배였을 것입니다. 세상의 이치대로라면 움켜쥐고, 잘 모아서, 빚 갚고, 더 좋은 데로 이사 가고 거대해져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교회에 이제까지 주신 은혜는 흘려보내는 은혜로, 하나님이 이 교회도 축복하시고 또 주변도 축복하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올해도 저희가 성탄에 아프리카 난민들과 이주민들을 섬기는 나그네 교회에 후원합니다. 올해 개척해서 아프리카 분이 20명 정도 모였기에 재정이 어렵습니다. 또 지난 10년간 저희가 후원해 왔던 우석윤 선교사님도 모로코 지진으로 선교관이 무너지고 우물을 뚫지 못해 물을 마시지 못하고 계십니다. 매번 그랬듯 하나님이 감동 주시는 분들을 통해 올해도 이 두 곳에 큰 일을 하실 것입니다. 액수와 관계없습니다. 하나님이 필요한 만큼 채워주십니다.
여러분에게 주신 형편대로 함께 모아, 우리는 세상의 힘을 따라가는 자들이 아니라 진정한 경배를 배워가는 자들임을 드러내고 기뻐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