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1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4]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6]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버크셔 헤서웨이라는 미국 투자회사의 CEO는 워렌 버핏으로, 경제를 잘 모르는 분도 이름은 들어봤을 유명한 분입니다. 현재 93세로 개인 재산이 약 160조 원 정도인데, 세계의 많은 다른 부자들과는 달리 이 분은 오직 투자만으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 분을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서 2022년까지 일 년에 한 번씩 워렌 버핏과 식사를 할 수 있는 식사권을 경매에 붙였습니다. 이제는 나이가 많으시니까 2022년이 마지막이었는데 이 마지막 식사권이 약 1,900만 달러, 한국 돈으로 260억 원에 팔렸습니다.
물론 이 돈은 워렌 버핏이 갖는 것은 아니고 어느 기관에 기부가 되기는 합니다만 한 두 시간 식사를 같이 하는데 260억을 낸다는 것이 이해가 되시나요? 그런데 투자계에서는 이 분을 만나 놀라운 노하우를 듣는 것이 그만큼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경쟁하다가 이렇게 큰 액수까지 올랐던 것입니다.
누군가 영웅적이고 존경할 만한 사람을 간절히 만나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요즘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 중 55%는 K-pop 때문에 온다고 합니다. 한국에 온다고 해서 자기가 좋아하는 스타를 만나는 건 아니지만 그 사람이 살았던 동네도 가보고 그 사람이 사진 찍었던 곳도 가면서 그 사람과 같은 곳에 있다는 것을 느끼고 싶어서 방문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하는 마음입니다. 어떤 대상을 너무 흠모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와 만나고 싶고 그와 관계된 모든 것에 참여하고 싶은 것이 예배자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귀하고 소중한 분이라면 그 하나님을 만나 그 분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보고 싶은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그와 만나주시는 것을 성경적으로는 ‘임재’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장벽은 너무 커서 우리가 먼저 다가갈 수는 없습니다. 임재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은 성령으로, 말씀으로 찾아오셔서 만나주십니다. 그렇다면 예배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어떻게 되나요?
예배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어떻게 되나요?
1.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목도합니다. vv.1-4
첫 번째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목도합니다. 1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1a]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
이사야는 웃시야가 통치하던 52년의 긴 기간 내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분열된 이후 유다는 어려움에 처하고 이방에게 침공당하고 나라를 빼앗겼는데 웃시야 시대에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기 시작했습니다. 땅도 회복하고 외국과 협약을 맺고 심지어 조공도 받으며 나라가 번성하기 시작해서 웃시야 시대는 유다의 제2의 황금기였습니다.
그런데 나라가 부유해지고 삶이 안정되자 영적 부패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사야가 ‘너희가 계속 우상숭배하면 결국 심판을 당할 것이다’라고 선포했던 이유입니다. 백성 뿐 아니라 웃시야 자신도 말년엔 교만하여져서, 제사장만 할 수 있는 분향을 직접 하겠다고 나서다 결국 문둥병이 나서 시달리다 죽습니다. 번성하던 이스라엘이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전까지는 강력한 나라가 없었는데 웃시야 말년에 앗수르가 점점 강성해지면서 팔레스타인 모든 지역이 풍전등화에 처한 바로 그 때에 웃시야가 죽은 것입니다. 지금 이사야는 어떤 마음일까요? 사실 심판을 선포해 왔지만 웃시야의 강력한 통치와 번성 아래에서는 요원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웃시야가 죽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이때 이사야가 가졌던 마음이 아마 예배자의 마음일 것입니다.
사람은 환경에 너무나 깊이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환경이 안정되고 풍요하면 마음도 느슨해지고 쾌락을 추구하게 되고 간절한 마음이 사라집니다. 돌아보면 우리가 매순간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고 말씀에 갈급했던 때는 다 상황이 어렵고 불안할 때입니다.
지금 이사야가 ‘하나님, 나라가 망하게 되었고 큰일 났는데 어떻게 하나요? 사람들은 죄악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세상은 더럽고 부패한데 어떻게 하나요’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임재하신 것입니다. 1절 하반절을 보시면
[1b] …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하나님이 임재하신다고 해서 이사야처럼 실제로 무엇을 보는 일은 잘 없습니다. 구약에서 임재나 예언이 환상이나 체험으로 임한 이유는 성경 말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가 본 환상은 무엇인가요? 구약의 그림은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보좌는 하나님의 통치를 상징으로, 보좌가 높다는 것은 하나님이 강력한 권세로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의미입니다. 성전에 왜 옷자락이 가득한가요? 고대에 옷은 굉장히 귀한 것으로 긴 옷은 위엄과 영광을 상징했습니다. 사람들은 권세와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 긴 옷을 입었는데 하나님의 옷은 긴 정도가 아니라 성전에 가득할 만큼 권세와 위엄이 한이 없으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선지자였지만 여전히 눈에 보이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죄악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그 결과로 나라가 심판당해 멸망당할 것이었기에 이사야 안에도 두려움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그런 이사야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이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이시며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이 강력함을 보게 하셨습니다.
우리 또한 세상을 살아가며 세상에 영향을 받습니다. 옛날에는 정보가 지금처럼 빠르지 않았기 때문에 한 사건이 미치는 영향이 지역에 국한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 곳에서 전쟁이 나면 유가가 오르고, 주식은 폭락하고, 세상이 하나로 움직입니다. 전쟁 같은 큰 사건이 아니어도 인간의 본질상 우리는 주변 상황과 사람에 매여 불안과 불만 속에 살아갑니다. 영적인 눈을 떠서 하나님의 통치를 보지 못하면 두려움에 매여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적으로 이것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자칭 예언자라는 사람들이 종종 남한이 죄를 많이 짓고 부패해서 하나님이 북한으로 남한을 심판하신다고 예언하기도 합니다. 십여 년 전에 데이빗 오어라는 아프리카 사람도 미사일이 날아다니고 군함이 침몰하고 서울이 불바다가 되는 것을 봤다고 예언했는데 그 때 마침 천안함 사건이 있어서 떠받들어졌던 일이 있었습니다.
몇 년 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여자의 말을 몇몇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 교인들이 해외로 도피한 일이 있었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미국으로, 미국 생활비를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네팔로 갔습니다. 한국이 전쟁으로 초토화되면 돌아오려고 임시로 나갔는데 한 달, 두 달, 일 년을 기다려도 전쟁이 나지 않자 주섬주섬 다들 돌아왔다고 합니다.
예수를 믿는데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니까 무엇이 두려운가요? 내가 세상에서 잘 살아야 하는데, 전쟁 등의 두려운 일이 일어나면 내 기반이 다 사라질까봐 비이성적인 판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쟁이 날지 안 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전쟁이 나건 아니건 하나님 백성이 믿어야 될 근원은 하나님이 온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면 인생 내내 요동합니다. 우리에겐 늘 얼마나 두렵고 불안한 일이 많나요? 주변에 죄에 사로잡혀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사람이 얼마나 많나요? 그런데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믿게 된 사람은 이 모든 두려움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또 무엇을 보았나요? 2절을 보시면
[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천사라는 단어를 들으면 우리는 날아다니는 존재를 연상하게 되지만, 헬라어 앙겔로스는 ‘소식을 전하는 사람,’ 영어로는 ‘메신저’입니다. 한글로는 ‘하늘에 있는 메신저’라고 해서 ‘천사’라고 번역했지만 천사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혹은 우리 상황을 하나님께 알리는 중간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천사에도 종류가 있고 그 중 한 무리가 ‘스랍’인데 이것은 한글로 그냥 발음을 옮긴 것이고 영어로는 seraph, 복수로는 seraphim입니다. 스랍은 하나님 주변에서 보좌하는 천사들로 날개가 여섯이라고 합니다. 사실 천사에게 날개가 없을 수도 혹은 여러 개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맡은 역할에 따라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너무나 찬란해서 천사라도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두 날개로 얼굴을 가렸고, 날아다니는데 필요한 두 날개, 그리고 마지막 두 날개로는 존재의 가장 부끄러운 부분인 발을 가리고 있습니다.
천사는 인간처럼 부정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찬란하고 대단해서 천사마저도 자기의 부끄러움을 가리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천사들의 제일 중요한 역할은 3절에 나오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사야가 두려움을 이기고 복음과 심판의 메시지를 계속 선포하려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천사들은 하나님이 죄를 해결하시는 거룩하신 분이심을 선포합니다. 천사들의 선포대로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거룩을 닮아 거룩한 존재가 되도록 지금도 우리 죄를 해결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고통하는 많은 문제들은 결국 인간의 욕심과 죄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예수로 일하고 계십니다. 온 세상에 그 하나님의 통치가 임할 것이라는 선포입니다. 이것을 믿어야 우리가 사람 때문에 낙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사람을 우리 힘으로는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의 강력함과 맞서 싸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이 온 세상에 하나님이 어떠신 분이신가를 보여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온 세상을 덮는 영광입니다. 영광은 하나님이 어떠신 분이신지 드러나는 것인데, 그것이 너무 아름답고 찬란해서 그것을 영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영광이 가장 놀랍게 드러난 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 긍휼, 공의, 신실로 하나님이 뜻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에게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가장 영광스러운 것이고, 그래서 천사들이 이것을 노래하는 것이며, 이사야에게도 이것을 믿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또한 우리도 이것을 믿으라고 이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살다 보면 세상은 절대 변할 것 같지 않고 악의 힘은 너무 강력한 것 같아서 위축하고 두려운 일이 많습니다. 그 때마다 눈을 들어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하심을 보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눈으로 직접 볼 수는 없지만 말씀으로 가르쳐주신 것을 우리가 성령 가운데 받아들일 때 우리는 세상에 더 이상 흔들리지 아니하고 말씀을 믿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천사들의 노래가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4절을 보시면
[4]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소리가 얼마나 장엄하고 강력한지 문지방이 흔들립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장막과 같은 연기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이 얼마나 대단하고 아름다우신 분이신지를 보여줍니다. 저도 이사야처럼 이런 것을 보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하늘이 열리거나 천사들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임재가 무엇이라고 말씀드렸나요? 하나님이 성령으로 오셔서 말씀으로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깨달아 이전에 믿지 못하던 것들을 믿게 되는 과정입니다. 이런 정의라면 제 인생에 하나님의 임재를 많이 경험했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임재를 가장 처음 경험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입니다. 당시 저한테는 학교와 시험이 너무 중요했는데 시험을 망치자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고 위축되고 절망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울 만큼 사소한 일이지만 그런 아이에게까지 찾아오시는 하나님이 참 감사합니다. 그 날 처음으로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신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써있고 노래도 늘 불렀었는데 그때만큼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감동에 사로잡혀서 집에 있는 모든 메모지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라고 써서 방을 도배하고 모든 책과 공책에도 지워지지 않는 펜으로 썼습니다. 그때의 경험 이후 한참 시간이 흘렀습니다.
환경에만 의존하고 살던 저를 또 찾아오셨던 순간이 제가 24살 때였습니다. 아버지 사업이 망하고 15만 원짜리 월세 방에 쫓겨나 제 미래가 사라진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몸도 가누지 못하고 휴학하고 누워 있던 저에게 하나님이 또 찾아오셔서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알았고, 내가 태중에 너를 구별하여 열방 중에 선지자로 불렀노라’라고 예레미야 1장 5절 말씀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과거의 순간들을 기억나게 하시며 그때마다 내가 너를 인도하고 이끌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때까지 제 시야는 내가 시험을 잘 보는 것, 내 미래가 견고한 것에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한 번 두 번 임재하실 때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너무 감사하고 하나님이 누구신가 점점 배워나가면서 저의 시야가 넓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로부터 교회와 한국과 북한으로 넓어졌습니다. 제가 처음 북한을 위해 기도했을 때 경험했던 하나님의 임재를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이전에 북한은 저와 관계없는 나라였고 특별한 사람들만 북한을 위해 선교하고 기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밤에 기도하는데 갑자기 하나님이 북한에 있는 성도들을 얼마나 불쌍히 여기고 계신지가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저들 때문에 울고 계시구나, 하나님이 저들을 외면하고 계신 것이 아니구나, 그 사실이 사무치듯이 찾아와서 제가 ‘하나님, 저를 갈아서 휴전선에 뿌리신 뒤 남북 통일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런 기도를 했나 싶지만, 그 마음이 느껴지는 순간에는 달리 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 미국에서 어느 날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한국 교회의 상황을 보여 주셨습니다. ‘교회의 참된 터는 우리 주 예수라’ 찬양을 부르는데 갑자기 한국 교회의 터가 예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교회에 모였지만 예수가 없다니 너무 가슴이 아파서 정말 밤새도록 울며 한국교회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런 기도를 하면 처음에는 절망으로 시작합니다. 교회가 이렇게 많은데 사람들은 예수를 안 믿고 북한은 망가져서 고통하는데 왜 하나님이 당장 개입하시지 않을까? 그런데 기도하면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통치하고 계신다. 하나님이 죄를 해결하신다. 하나님이 나 같은 자도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데 하나님이 북한도 사랑하시며 남한의 교회도 반드시 회복시키고 은혜를 베푸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만약 제가 하나님의 임재와 말씀을 통해 요동하는 근원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면 저는 여전히 상황 때문에 고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제 시야를 넓혀주셨습니다. 변하지 않은 것 같은 상황, 악화되는 것 같은 상황,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며 해결하시리라는 믿음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결과입니다. 여러분도 요동하고 계신가요? 세상을 보면 두렵고 가까운 사람이 죄 가운데 매여 있는 것이 답답하신가요? 포기하고 싶으신가요? 여러분 자신의 노력은 내려놓으셔야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사실은 믿으셔야 됩니다.
안 믿어지면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저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해주세요. 말씀이 상황을 뛰어넘는 능력을 경험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하나님이 어떠신 분이신가를 알게 하심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이 온 세상을 통치하심을 깨닫게 해 주실 것입니다.
예배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어떻게 되나요?
2. 자신의 부정함을 고백하고 죄 사함을 받습니다. vv.5-7
두 번째로 예배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어떻게 되나요? 자신의 부정함을 고백하고 죄사함을 받습니다. 5절 말씀입니다.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험하면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 깨닫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입술이 부정하다라고 하나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 안에 있는 더러운 것이 입술을 통해 나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입술이 부정한다는 것은 본질 전체가 부정하다는 것입니다. 죄로 오염됐고 추하고 아름다운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이사야는 더러운 백성들을 향해 죄를 회개하라고 계속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서니까 자신도 너무 더러운 존재라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했더니 무슨 일이 벌어지나요? 6절과 7절입니다.
[6]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숯은 정화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하늘에서 진짜 숯이 날아와 입에 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죄를 고백하는 자에게 용서의 은혜를 베푸신다는 그림입니다. 이것이 예배하는 자가 경험하는 은혜입니다. 우리도 우리가 죄인인지 머리로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머리로 아는 것과 진짜 하나님의 임재로 죄를 영혼에서부터 받아들이는 것은 강력한 차이를 가져옵니다. 대표적인 모습이 바로 바리새인과 바로 세리입니다. 누가복음 18장 10절에서 12절을 보시면
눅 18:10-12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머리로만 죄를 인식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자기 의와 우월감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죄의 결과입니다. 바리새인이 왜 ‘세리 같지 않다’고 얘기하나요? 자기 의는 자신을 남과 비교해서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즉 바리새인은 자기 자신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마저 자기 의를 증명해주는 우상으로 사용할 뿐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예배의 태도가 없다면, 지금도 누군가와 자신을 비교하고 있을 것입니다. 나보다 기도 적게 하는 사람, 큐티 열심히 못 하는 사람, 말씀 잘 모르는 사람. 예배를 드리면서도 다른 사람보다 내가 나은 점을 찾고 있는 사람은 셀프 워십을 하는 사람입니다. 참 예배자는 어떤 반응을 하는지 누가복음 18장 13절과 14절에 나옵니다.
눅 18:13-14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
실제로 세리는 나쁜 인간입니다. 성경에서 세리를 의롭다고 하니까 우리도 세리를 좋게 보고 있지만, 조금 종교생활 못하고, 교회 안 나오는 정도가 아니라, 동족의 돈을 빼앗아서 로마에게 바치는 매국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종교적인 사람인데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배신한 마귀의 자식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누군가 죽여도 당연하다고 여겨질 인간입니다.
본인도 알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미움을 받고 하나님 앞에도 나갈 수 없는 죄인이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생존을 위해 매국노라도 되어서 먹고 살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런 자를 하나님 불쌍히 여기시고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예배자의 마음입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의 경험을 하지 못하면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이 머리에서 마음으로 내려가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 삶에 끊임없이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는 늘 관계 속에 살아갑니다. 그런데 사랑의 눈이 아닌 판단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제가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젊어서 저는 아침에 일어나면 30분 단위로 출력해 놓은 시간표에 하루 스케줄을 적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매일 그렇게 살 수 있나요? 못 살면 자책하고 다시 계획을 세웁니다. 그런데 성실하게 살려고 하니까 뭐가 생길까요?
제 주변에 성실하지 않은 인간들이 보입니다. 성실하지도 않으면서 잘난 척 하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미움과 분노가 생기고 하나님이 그 인간을 심판하셨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습니다. 제가 목사가 되고 나서도 여전히 정죄와 미움이 가득 차 있었는데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제가 성실함으로 남을 판단하던 것을 하나님이 낱낱이 들추어내셨습니다.
미국에서 목사님들이 성경을 가르쳐 달라고 찾아오기 시작했는데 한 학기를 해 보니 모두 불성실해서 다 내쫓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영어로 공부하며 숙제하며 외부에서 일하며 영어 안 되는 가족을 대표해서 일을 처리하며, 추가 성경공부의 숙제를 할 시간이 없는 유학생들이었는데 저는 그래도 성실한 사람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수제자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다 발견했습니다. 앞 집 사는 전도사님과 얘기를 하게 되었는데 매일 새벽 기도를 하고 도서관이 문을 닫을 때까지 공부를 한다고 해서 성경공부를 하지 않겠냐고 시험 삼아 문제를 냈는데 꼼꼼하게 문제를 다 풀어 와서 제가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은 사랑이 너무 넘쳐서 한 번 안아보자고 해서 안아주기까지 했습니다.
몇 주를 열심히 하다 학기 중에 갑자기 한국에 다녀온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다리는 동안도 빨리 가르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다음 주, 그 다음 주, 몇 달 째 소식이 없었습니다. 저는 궁금해서 수소문하고 싶었지만 싸이월드도 폐쇄하고, 이메일도 반송되고, 집도 비어있고, 학교 사무실에 알아보니 학교를 그만두었다고 했습니다.
그 전도사님 아내의 오빠도 같은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그 분도 몇 달 동안 못 만나다 어느 날 멀리서 보고 붙잡았는데, 들어 보니 그토록 성실했던 전도사님이 집에서 아내를 얼마나 폭행했는지 임신한 아내를 야구방망이로 때려서 유산이 되자 한국으로 도망을 갔고 미국에서 이혼하고 여동생은 상처를 입고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성실하고 자기 틀이 강했기 때문에 조금만 마음에 안 들면 무섭게 폭력적으로 돌변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성실하다는 잣대 하나로 사이코패스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그 사실이 부끄럽고 고통스럽고 죽을 것 같아서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하나님이 임재하셨습니다.
그렇게 성실을 내세우며 목사들 불성실하다고 정죄하던 종교인의 본질이 얼마나 더러운지를 보여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전도사님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제가 눈물을 쏟으며 회개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이런 존재입니다. 제가 남보다 조금 성경 보고 기도한다고 다른 목사들 우습게 보았는데 결국 사이코패스를 사랑하게 되었네요. 다시는 이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회개의 결과로 성경 공부를 모든 사람들에게 오픈했습니다. 딱 한 명만 제대로 키우려고 시작했던 성경 공부가 나중에 7~80명씩 숙제 안 하고 와서 듣기만 하고 자료 달라고 하면 자료 내어주면서 시작했던 성경 공부가 20년째 이어지고 있습니다. 제가 성실을 기준으로 가지고 있다면 지금 묵상의 숲도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 오시는 분들도 안 성실하게 살다가 지금 와서 어떻게 하지를 못해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 성실한 분들도 판단하지 않고 여전히 사랑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저에게 찾아오십니다.
지난 주에 본문으로 만든 ‘주께서 높은 보좌에 앉으셨는데’ 1시간 연속 찬양을 틀어놓고 설교를 준비할 때였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천사가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오시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시면 기억이 나기 시작합니다. 제가 너무너무 더럽고 추하고 악한 존재였는데 하나님이 그때마다 저를 버리지 않고 가까이 오셨던 순간들이 기억나기 시작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대학교 1학년 때, 휴학했을 때, 이전 교회에서 섬길 때, 미국에서 머리 아플 때, 그때마다 하나님이 찾아오셨던 순간들이 기억나면서 한 단어가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비루’한 나에게 찾아오시다니. ‘비루’는 더러울 비, 더러울 루입니다. 더럽고 더럽다. 창자가 끊어지듯 울면서 깨달은 것은 ‘하나님은 날 여전히 버리시지 않았다. 더럽고 더러운 자에게 아직도 찾아오시고 은혜를 베푸셔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신다’였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계신가요? 그 임재로 인해 여러분이 어떤 자인지 깨닫고 은혜에 감동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계신가요? 기도하셔야 됩니다. ‘하나님, 하나님을 예배하기 원합니다. 저를 만나주세요. 제가 어떤 존재인지 깨닫게 해주시고 제 더러움을 예수의 보혈로 제거하사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드러내는 자로 사용해 주세요’ 기도하실 때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놀라운 영광을 보이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낼 자로 여러분을 사용하여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