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강해 57 행 28.11-28 하나님이 허락하신 육적 제약의 목적
2025년 8월 24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23]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24]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25]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이르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26]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27]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28]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
멜리데 섬에 표류했던 바울 일행은 그곳에서 석 달이나 겨울을 지냅니다. 1절 말씀을 보시면
[11] 석 달 후에 그 섬에서 과동한 알렉산드리아 배를 우리가 타고 떠나니 …
‘과동’은 겨울을 지냈다는 뜻입니다. 겨울 동안 배가 움직일 수 없으니 2월경까지 머물다가 드디어 출항을 한 것입니다. 이곳저곳을 들렀다 드디어 로마에 가게 됩니다. 16절입니다.
[16]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은 자기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로마에 갔지만 바울은 죄수의 신분이었습니다. 아직 가이사로부터 재판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미결수였고,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죄수들과는 달리 쇠사슬에 매이긴 했지만 집에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정도의 자유를 허락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얼마든지 자유인의 몸으로 복음을 전할 수도 있을 텐데 왜 사슬에 매인 죄인으로서 육적인 제약을 받은 채로 로마에 가게 되었을까요?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육적 제약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육적 제약의 목적은 무엇인가요?
1. 육적 제약이 영적 소망을 가둘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vv.17-20
첫 번째로 육적 제약이 영적 소망을 가둘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17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17a]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모인 후에 이르되 …
어느 지역이나 유대인들이 있는 곳에는 회당이 만들어졌고, 또한 유대인 지도자들인 장로들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로마에는 100만 명 정도가 살았는데 유대인이 3만에서 5만 명 정도 되었다고 하니, 아마 여러 곳에 회당이 있었을 것이고 또 장로들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 장로들을 초청하여 무슨 이야기를 했나요? 17절 하반절입니다.
[17b] …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규모를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어준 바 되었으니
지금처럼 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바울이 왜 잡혀 왔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영향력 있는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죄인으로 와서 가이사에게 호소해 재판을 앞두고 있다는 이야기에 몰려온 이들에게 바울은 자신의 상황을 어떻게 설명하나요? 18절입니다.
[18]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놓으려 하였으나
바울이 죄인이라는 선입견이 있으면 무슨 얘기를 해도 듣지 않을 테니까, 자신이 법적으로 무죄하며 갇힐 이유가 없다고 먼저 설명한 후 19절에서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19]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 못하여 가이사에게 호소함이요 내 민족을 송사하려는 것이 아니로라
로마인의 법정에서는 무죄를 받았지만 유대인들이 바울의 죄를 주장하니 자신이 어쩔 수 없이 가이사의 최종 권위에 의해 무죄를 받고자 로마 법정에 호소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설명 뒤에 바울이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20절 말씀입니다.
[20] 이러하므로 …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즉 이스라엘의 소망을 생각하면 자기가 매인 것은 아무런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소망이 무엇이길래 죄인의 신분조차 괜찮다는 것일까요? 이스라엘의 소망에 대해서는 이미 바울이 사도행전에서 여러 차례 이야기를 했습니다. 24장 15절을 보시면
24:15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바울이 최종적으로 바라보는 소망은 자기가 옥에서 자유롭게 되거나 건강해지는 것이 아닌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었습니다. 그 날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날입니다. 의인의 부활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둘째 부활이고, 악인의 부활은 영원한 심판으로 가는 결과인데, 이 두 가지는 하나입니다.
악인이 완전한 심판을 받지 않으면 구원의 완성이 아닙니다. 구원이 완성되었는데 악인들이 여전히 살아서 죄를 확산한다면 이것이 어떻게 완전한 구원일까요? 그래서 구원과 심판은 동시에 일어나야 합니다. 성경은 이 부활을 계시록 20장 6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계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첫째 부활은 예수님을 믿어서 죽은 자처럼 살던 우리가 새로운 영적 생명을 가진 새 사람이 태어난 것을 말하고, 둘째 사망은 마지막 심판이 임함으로 하나님과 완전히 단절된 죽음을 말합니다.
성도는 그 심판대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하게 될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자리에서 둘째 부활을 얻는 것입니다. 성도는 천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합니다. 천년은 장구한 세월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첫째 부활의 새로운 생명을 얻은 하나님 백성들은 세상 가운데 예수와 함께 통치하는 놀라운 왕권을 행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입니다. 지금 바울도 쇠사슬에 매여 있지만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권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어떤 왕권인가요? 자기가 희생하고 섬겨서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왕권입니다. 바울은 육적 쇠사슬에 매인 제약된 상황이 이스라엘의 소망을 위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를 절대 가둘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며 영적 소망의 힘입니다.
모든 사람은 육적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약과 한계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지만 각자 유전과 환경의 제약 안에 태어나게 됩니다. 저 역시도 어렸을 때부터 늘 약하고 작고 예민하게 태어나서 고통했습니다. 그러나 그 한계가 저를 무너뜨리고 실패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인생에 주어진 한계와 제약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다면 그것은 축복입니다.
자신의 제약을 극복하며 잘 살다가도 가족의 제약 때문에 힘들어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 제자 중에도 연애 때부터 잘 맞지 않았지만 결혼한 경우가 있는데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배우자가 마치 움직이지 않는 팔다리처럼 나를 얽어매는 것 같다’고 표현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제자에게 ‘인간은 모두 자기 유익을 위해서 결혼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환경을 주셔서 사랑을 배우고 희생을 배우며 예수님처럼 변하게 하신다’고 메일을 썼던 기억이 납니다. 여전히 힘든 날들이지만 그래도 배우자를 용납해가며 잘 살고 있습니다.
이번 주에 90세 된 할머니가 자녀 둘한테 살해당하신 기사가 났습니다. 수백 억대 자산가이신 할머니가 자녀 3명에게 각각 100억을 남기셨고, 자주 와서 들여다보던 막내한테 돈을 조금 더 주셨더니 첫째와 둘째가 엄마를 폭행해서 죽인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드러내지는 않아도 우리는 주변 사람이 내게 유익이 되길 원합니다. 인간은 모두 무서운 죄를 감추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버거운 쇠사슬을 허락하십니다. 우리를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라 육적 제약을 뛰어넘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경험케 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든 면에서 완벽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열심히 행동했지만 글은 하나도 남기지 않은 엘리야도 있고 글은 많이 썼지만 기적을 행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는 이사야도 있습니다. 기질에 따라 한 쪽으로 치우쳤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 66권 중 13권을 썼고 바울이 아니었으면 기독교가 세워지지 못했다고 할 정도로 바울은 초대교회의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아무도 전하지 않던 곳에 복음을 전하고 유대인들이 죽이고자 할 정도의 반대를 무릅쓰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강력한 능력도 주셨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모든 면에서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누구보다 심한 육체적 제약도 허락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7절 보시면
고후 12:7-9 [7] …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구체적으로는 쓰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간질이나 안과 질환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가시’는 생선 가시 정도가 아니라 헬라어 원어로는 쇠꼬챙입니다. 몸속에 누군가 꼬챙이를 찔러 박아놓은 것같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온 존재가 고통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8절입니다.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세 번’은 히브리어 관용구로 ‘정말 간절히’라는 뜻입니다. 고통이 사역에 얼마나 방해가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치료해 준다는 약속이 아닌,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사용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시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지금 모자란 것을 온전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만, 하나님은 지금 바울에게, 그 상태 그대로가 내가 계획한 바라고 말씀하셨고 바울은 기쁨으로 그 말씀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 능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약한 곳에 하나님이 능력을 부으셔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 한계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렸던 바울이 고린도후서 12장 11절에서 무엇을 고백하나요?
고후 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실패하고 돈 없고 병들고 모욕을 당하고 모든 것이 다 막혀 있는 상황, 그 약한 때가 가장 강한 때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바로 약함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능력, 소망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인생입니다.
하나님이 때로는 우리가 약함 가운데 무엇이 참 소망이며 참 능력인지를 믿고 받아들이기 원하십니다. 저도 제 지독한 약함이 아니었다면 아마 기도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했을 것입니다. 제 육신적 연약함은 어릴 때부터 최근까지도 저를 쫓아다닌 족쇄였습니다.
어려서부터 경기를 자주 해서 초등학교 때 여러 번 쓰러졌습니다. 한번은 학교에서 기절했던 것도 모르고 양호실에서 깨어난 것만 기억나는데 엄마가 제 옆에서 울고 계시다 제가 깨자 업고 소아과로 뛰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 후로도 인생 내내 여러 증상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20대 때 서른까지 살지 못하겠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어찌어찌 살고 결혼까지 했는데 그 약함은 미국에서도 계속됐습니다. 한 번씩 두통이 시작되는데 아무 예후 증상이 없다가도 갑자기 뇌가 분리된 다음에 뇌가 머리 벽을 치듯이 아프면서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었습니다.
미국이라 병원을 갈 생각조차 못 했고 두통이 너무 심한 날은 선 채로 엉엉 울었습니다. 마귀가 내 머릿속에서 나를 괴롭히나, 바울도 이런 쇠꼬챙이를 경험했나, 하는 생각들을 하면서 두통이 올 때마다 한 시간이건 3일이건 두통이 떠날 때까지 기도하곤 했습니다.
1년쯤 지난 뒤에야 우연한 기회로 혈압 때문임을 알게 되었는데 수치가 높지는 않은데도 예민해서 그런 증상을 느꼈고 혈압약을 먹고 좋아지긴 했습니다. 그런데 두통이 사라지지는 않았고 최근까지도 고통할 때가 있습니다. 저의 육체의 가시입니다.
인생마다 하나님이 주신 약점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이 고통을 제거해 달라고 울부짖었는데 하나님이 그 과정을 통해 깨닫게 하신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해결이 안 되는 약점은 하나님이 그것들을 안고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를 하나님 앞에 기억하여 그때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도록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수단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라도 교만하게 될 때마다 여러분을 옥죄는 제약이 있으신가요? 여러분을 불편하게 하고 힘들게 하고 때로는 그것 때문에 인생을 온전하게 살지 못할 것 같은 약점과 연약함이 있으신가요? 하나님 나라의 소망과 능력으로 그 약점을 넉넉히 이기는 은혜를 경험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육적 제약의 목적은 무엇인가요?
2. 영적으로 매인 자들의 완악함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vv.21-28
두 번째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육적 제약의 목적은 무엇인가요? 영적으로 매인 자들의 완악함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23절 말씀입니다.
[23]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참 감사하게도 바울이 돌아다니지 않아도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아주신 것입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복음을 전했는데 사람들이 반응이 두 가지로 갈립니다. 24절입니다.
[24]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누가 더 많았을까요? 제 생각에는 믿는 사람은 아주 소수였고 대부분 믿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25절부터 27절에 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25]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26]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27]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얼마나 듣지 않는지, 귀가 둔하게 되고 눈을 감은, 저주 받은 귀머거리와 맹인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상태의 근원적 모습이 무엇인가요? 본문에 나온 ‘완악함’은 가장 무서운 영적 저주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으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고 눈이 열리고 귀가 열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고 남들이 알지 못하는 것들을 듣게 됩니다. 이 놀라운 복음의 말씀을 아침부터 밤까지 선포했는데도 그들은 눈을 닫고 귀를 닫은 완악한 상태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쇠사슬에 매였지만 누구보다 자유로운 상태였습니다.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자유인가요? 자유란 인간이 원래 만들어진 본질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속에 살도록 만들어진 물고기가 물을 나오면 죽게 될 뿐이고, 물고기는 물속에서 가장 자유로운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가장 자유로울 때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 그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는 상태입니다. 하나님과 대화하고,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만 예배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며, 세상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인생이 가장 자유로운 상태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쇠사슬에 매었지만 지금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영광에 사로잡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가장 자유로운 인생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를 찾아온 사람들은 다 자유인처럼 왔지만 영적으로 매여 있는 상태였습니다. 복음을 듣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는 완악함에 매였던 그들에게 바울이 무엇이라고 선포하나요? 28절 말씀입니다.
[28]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 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
로마라는 이방 땅에 살고 있는 동족에게 목청이 터져라 외쳤는데 받아들이지 않자 이제 이방인에게 전하겠다고 다시 결심합니다. 육적으로는 자유롭게 살아가지만 영적으로 매인 자들의 비참한 모습입니다. 세상에는 육적으로 자유로운 인생이 얼마나 많이 있나요? 그러나 육적 자유만 가지고 영적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면 너무나 비참한 인생입니다.
제가 대학교를 들어가서 제일 먼저 배운 것이 화염병 만드는 법이었습니다. 전날 마신 소주병에 천을 넣고 신나와 휘발류를 넣는 법을 배웠습니다. 자유가 없던 시대였습니다. 하루 세 끼 챙겨먹지 못하는 가정이 많았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반대급부로 이제 외적으로 너무 풍요해지자 영적 관심이 다 사라졌습니다.
20년 전 대학생들 10명 중 7명이 종교에 관심이 있었다면 요즘은 2명 정도만 관심이 있다고 합니다. 너무 풍요해져서 진짜 가치 있는 것, 진짜 중요한 것을 소홀히 여기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육적 풍요, 경제적 풍요로 인해 여러분도 더 고급지고 더 좋은 것을 누리는 것이 어느새 인생의 목표가 되었다면 우리도 유대인들처럼 눈이 멀고 귀가 멀게 된 것인지 모릅니다. 기도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저를 긍휼히 여기시고 제 어두워진 눈을 열어 주시옵소서. 막힌 귀를 여셔서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선명하게 듣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하나님이 주신 목적,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고 예수 믿는 사람처럼 살며 온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사랑을 드러내는 인생 되게 해 주시옵소서’ 기도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한 사람으로 인해, 여러분을 만나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과 은혜와 사랑을 경험할 때 여러분의 인생은 가치가 있는 것이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자주 잊습니다. 세상적 풍요가 영적인 풍요를 앗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으로는 죄수였지만 영적으로는 누구보다 자유로웠던 바울처럼, 우리에게도 인생의 제약이 있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영적 자유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