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13일 주일예배 설교문/ 허사무엘 선교사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그동안 후원해주시고 기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섬김 덕분에 힘을 내어 지금까지 준비해올 수 있었습니다. 저희는 GBT/SIL 소속으로 언어를 활용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을 하고자 합니다. 그동안 필요한 훈련을 거의 다 받았고요, 지금은 인도네시아 마산족(반유마스) 번역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 출국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여기 있는 동안 우리 하늘사랑교회 성도님들과 함께 교제하며 좋은 시간 보내길 소망합니다.
저를 처음 보시는 분들은 제가 조용한 성격이거나 내향적일 것이다라고 여길 것입니다. 반은 맞고 반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어떻게 접근을 하면 좋을까? 대화를 어떻게 시작해야 자연스럽게 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들을 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오해도 많이 받았습니다. 어쨌든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아름다운 관계도 있고 미묘한 갈등도 있습니다. 다양한 사람이 있기 때문에 기쁘거나 슬프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한 이야기들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관계에서 실패하여 괴로워합니다. 때로는 서로 주고받은 상처로 인하여 몹시 힘들어하고 홀로 고립되어 사는 것을 보게 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의 관계에서 오는 실패는 더 많은 상처를 얻게 되고 예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존 비비어 목사님은 그의 책 <관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마음을 치유하고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자신이 상처받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때로 자존심 때문에 우리는 상처받고 실족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일단 내가 내 상태를 인정하고 나자, 나는 주님을 찾을 수 있었고 주님께서 내 마음을 고칠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었다. 상처는 자신의 결함을 보지 못하게 하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게 한다. 진리가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게 해야 한다. 우리는 가장 힘든 마음의 시험 때문에 더욱 성장하게 된다. 상처에 직면하여 영적 훈련의 과정으로 삼으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관계에서 실패하여 상처를 받았을 때에 인정하고 주님을 향하여 닫힌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진리가 되시니 그분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고 그분의 지시대로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특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신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번역본은 사절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대사라고 하기도 합니다. 다 비슷한 말입니다. 사신은 ‘나라의 명을 받고 외국에 파견되던 신하’를 뜻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명을 받고 이 세상에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신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려운 시대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신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어려운 시대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신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1.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14-15)
14~15절입니다. (고후 5:14-15, 개정)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자기중심적 삶을 사는 거짓 사도들과 고린도 교인들을 책망하며 동시에 자신은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섬기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에 의하면 성도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자기중심적인 삶을 버리고 주님을 위해서 살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도 사도 바울의 책망을 들은 한 사람입니다.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하지만, 전 제가 좋아하고 목표를 삼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해야 했습니다. 전 자기의 특히 언어와 번역에 대한 의가 높았습니다. 그 분야에 대한 관심도 높았고, 결과물에 대한 성취도와 만족도 역시 높았습니다. 번역이 좋아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영어 매뉴얼 번역과 전공서적 번역을 즐겨했습니다. 그때 성경번역을 알게 된 후 그 한 가지 목표만을 향해 달려왔습니다. 더욱 더 열심히 하게 된 것이지요. 결혼하고 나서도 그랬습니다. 이때 실수를 하게 된거죠. 공부한다고 책상 앞에 앉고. 방에서 나오지 않고. 결혼 전과 후는 다른데 제가 너무 저 자신을 위해 살고자 했고 가족들을 힘들게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고전 8장 1절에 보니,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지혜는 하나님의 생각과 지혜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습니다. 우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나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고, 나를 지옥의 권세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아들 예수님을 희생시키시면서 고귀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희생의 사랑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분이 나를 사랑하시어 구원하셨으니 우리는 그분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작년에 저희 가족은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정주행했습니다. 어떤 환자는 뇌사 판정을 받아 여러 장기를 필요한 다른 환자들에게 나눠주기도 하고요, 또 다른 환자는 적합한 장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기도 하고요...정말 애틋한 장면들이 많았습니다. 이와 같이 세상에서도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장기를 나눠주는 일들이 많이 있는데요. 그런 사람은 평생 은인이지 않습니까? 육체의 건강을 위해서 희생한 사람의 행동도 고귀하지만 더 고귀한 것은 예수님의 희생의 사랑입니다. 찬송가 102장의 가사를 보면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아멘.”
그런데 말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해결의 도구들을 찾아 헤맵니다. 자신을 구원해줄 구원자를 찾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 권력, 인맥 등을 그러한 구원자로 여깁니다. 그러한 우상들은 진정한 인간의 구원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를 그것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중독으로 몰아넣으며 오히려 인간을 파괴할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의 진정한 구원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마저도 우리의 도구로 이용합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 분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부적이나 마술램프의 지니로서 하나님을 이용합니다. 그러한 우리의 본성으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한 주인으로 모시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이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위하여 그분 자신을 그저 주셨습니다. 십자가는 그분이 우리를 이용하지 않고 사랑하신다는 가장 큰 증거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도구로 대하지 않으셨고 사랑으로 대하셨음을 진정으로 깨닫게 될 때, 우리도 더 이상 그분을 도구로 이용할 수 없게 됩니다. 그분과 비로소 거래가 아닌 인격적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고후 3:18).
사도 바울은 로마서 14장 8절에서 이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우리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사신으로서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어려운 시대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신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2.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야 합니다(16~17)
16~17절입니다. (고후 5:16-17, 개정)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16절에 보니,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육신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육신적인 것은 왜곡된 인간의 본성을 반영하는 것인데요. 이것은 자기중심적인 아집과 이기적인 태도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실례로 유대인들을 볼까요? 유대인들은 항상 자신들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민족임을 자랑하면서 이방인들과 구분하는 말과 행동을 했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구원자 예수님을 거짓 메시야요, 사회를 혼란시키고 속이는 사람이라고 모함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탄압했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사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큰 자’ 입니다. 바울은 이름대로 그 당시 가장 큰 자가 되었습니다. 유대인이었고, 유대인들이 존경하던 가장 뛰어난 스승이었던 가말리엘의 수제자였고, 그 당시 언어인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동시에 사용하고 있었고, 최강대국이었던 로마의 시민권자였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런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좋은 일에 사용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처럼 예수님을 저주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도 예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아집과 이기적인 태도로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 사울이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이름부터 바꿉니다. 뭐라고요? ‘바울’로 바꿉니다. 바울의 뜻은 ‘작은 자’입니다. 사울은 이름을 바울로 바꾸면서까지 이제는 작은 자로서 자신의 행동에서 오직 예수님만이 나타나기를 소망하면서 살겠다는 굳은 각오를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17절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과거의 육체적인 것들을 자랑하던 것과 예수님을 저주하고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들을 핍박하던 삶을 버리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서 예수님만을 전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설교 초두에 제가 조용한 성격이고 내향적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평가가 저를 단정 짓고 있었습니다. 그래, 내 성격이랑 번역사역이 맞네! 이 길은 주님이 주신 길이야! 그래서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성경번역 사역이 주님이 주신 길임을 알고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가족을 돌아보지 않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방해물로 여기는 실수를 하고 만 것입니다. 지쳐가는 가족들을 보며 뭔가 잘못되고 있음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문제가 발생하면 우리는 일어난 문제에 대해 자신을 성찰하기보다 누군가를 탓합니다. 우리에게 더 쉬운 것은 타인과 하나님을 탓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타인과 하나님께 자신의 잘못을 전가합니다. 자기 성찰이 없으면 잘못을 저지르고 나서도 배우지 못합니다. 잠재적 해결책을 얻지만,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런 예를 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사기 21장을 보면 이스라엘은 성급하게 맹세하고, 동족인 베냐민을 학살했습니다. 자기 성찰이 없었기에, 그들은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악을 제거하려고 또 다른 악을 저지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남을 탓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2-24절입니다. (벧전 2:22-24, 개정) 『[22]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정의와 사랑이 십자가에서 입을 맞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예수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젠더, 인종과 계급을 초월하여 누구라도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받아들여서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은 이전과는 다른 생활 방식과 사고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을 차별하여 사귀던 삶을 버리고 모든 사람을 포용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사용설명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주님의 기쁨이 되는지 성경을 통해 살아가는 원리와 방법을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전세계 15억명의 사람들은 자신의 말로 된 성경전서가 없습니다. 약 7,000개의 전세계 언어 중 9%인 단 673개의 언어만이 성경전서를 가지고 있고 성경 미완역, 미착수 언어는 91%인 약 6,300개입니다. 세계언어조사기관에서는 이 전체 언어 중 머지 않아 2,500여 언어가 사라질 것이라고 합니다. 계속 남아 사용될 4,100여 언어로 성경 번역이 이루어져야 할 상황입니다. 현재 약 2,500개의 다른 언어로 성경번역을 진행하고 있지만 번역된 성경이 전혀 없는 언어는 1,600개(22%)로 완전히 번역된 성경은 아직 없습니다. 이런 성경 번역을 통해 선교를 하고 있는 단체가 있는데 바로 “위클리프 성서 번역회”라는 곳입니다. 이들은 동남아, 남미, 혹은 아프리카 같은 부족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말은 있으나 글이 없는 그들에게 그들의 언어를 만들어주고, 그 언어로 성경을 번역합니다. 위클리프에서 대표로 섬겼던 밥 크레슨이 한 일간지와 인터뷰한 내용을 인용합니다. “자신의 언어로 된 예수의 말씀을 듣는 것은 공동체를 변화시켰습니다. 밤바랭과 카메룬의 지역 주민들은 이웃 마을로 인해 300가정이 전소되었습니다. 이런 황폐한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복수하고 싶었지만, 원수를 사랑하라는 자국 언어로 된 예수님의 말씀은 그 지역 사람들에게 위안과 치유 용서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위클리프는 ‘비전 2025’ 프로젝트를 통해, 2025년까지 전세계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것을 목표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미션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저희 부부 역시 위클리프의 일원으로서 마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마산어로 번역하여 그들이 말씀대로 살게 하는 것을 비전으로 삼고 있습니다. 또한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마산 사람들에게 복음을 더 깊이 알게 하기 위해 준비 중입니다. 저희 부부는 2019년 8월 9일부로 GBT(성경번역선교회)에 정회원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 우리는 마산 프로젝트에 사역자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성경번역과 언어 관련 사역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제 아내는 원스토리, 어린이교육과 상담심리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저희 두 사람을 어떻게 사용하실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마산을 향해 가고자 합니다. 마산을 향한 발걸음을 옮길 때 우리 하늘사랑교회와 함께 하길 소망합니다. 선교는 선교사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교는 선교사, 교회, 그리고 파송단체가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2장 3절에 보니,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사는 사람은 바로 겸손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그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에는 오직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만이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 안에서 반드시 선하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신으로서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어려운 시대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신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3. 화목한 관계를 이뤄야 합니다(18~20)
18~20절입니다. (고후 5:18-20, 개정)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화목하라’는 말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인간은 범죄를 통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었고 그 결과 화목한 관계가 끊어지고 원수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던 두꺼운 담이 무너지고 적대 감정이 해소되었습니다. 이 화해의 관계는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기에 예수님을 보내셨고 그 은총을 인간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런데요, 잘 보세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와 다시 화해하셨는데 18절 끝에 보니, 이제 우리에게 화목하는 직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인간과 화해하시고 화목한 직책을 주셨으니 수평적으로는 이웃과 화목해야 하며 수직적으로는 아직 화목의 은총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저를 소개한다면 홍연희 선교사의 남편이기도 합니다. 저희 부부는 결혼 12년차입니다. 10여년을 함께 살아왔는데 여전히 다른 점들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청소에 관한 점입니다. 저는 청소를 번개처럼 하는 재주가 있습니다. 아주 신속하게 하지만 아내의 성에는 안 차는 분야입니다. 그리하여 청소는 아내의 몫입니다. 아내는 매일매일 청소합니다. 몸이 좀 안 좋아도 청소합니다. 심지어 업소용 청소기를 생일선물로 받고 기뻐한 그녀입니다. 그렇게 매일 청소를 하는 아내의 옆에 있는 제가 청소를 대충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같이 열심히 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제 본성과는 맞지 않지만.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갈 5:22) 성령의 열매를 묵상하게 하시고 성령께서 나의 본성을 뛰어넘는 온유함으로 반응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가족의 평화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로마서 3장 22-24절입니다. (롬 3:22-24, 개정)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엄청나고 값진 용서의 실상을 보고 느낄 때, 우리도 서로 용서가 가능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빚졌는지 아는 것만이,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진 빚을 올바른 관점으로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용서는 용서할 정서적 겸손과 자원을 우리에게 줍니다.
에베소서와 누가복음 말씀을 이어서 보겠습니다. 에베소서 2장 14-18절입니다. (엡 2:14-18, 개정)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누가복음 17장 3~4절입니다. “3.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만일 하루 일곱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관계를 깨뜨리고 상처를 준 것에 대해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나에게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해서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용서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실수합니다. 그런데요. 우리가 내 이웃의 죄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주님도 내 죄를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셨기에 나의 죄를 위해서 기꺼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저희 부부는 결혼 후 1년 뒤에 파송받기로 하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그때는 원망하는 마음도 생기고 낙심도 많이 됐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 하나님께서 하늘사랑교회를 만나게 해주셨고 저희를 품어주셔서 회복케 하셨습니다. 그 후 부산에서 새롭게 외국인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역을 하면서 가졌던 마음은 ‘하나님이 이곳에서 선교를 하라고 하시나보다’ 하는 마음을 갖고 열심히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익숙해지기도하고 이젠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며 하나님은 내가 있는 곳에서, 그곳이 어디든 선교하시길 원하시는구나. 하나님의 마음을 나누길 원하시는 구나하는 마음을 갖게 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 투병하고 있는 가족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데 문득 오직 믿음과 열정으로 대한민국 땅에 복음을 전파한 선교사님들을 떠올리게 하시며 저희 부부에게 다시금 익숙해진 이 땅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처음 선교를 준비하던 때에는 안정적이고 보장된 제도 속에서 선교사후보생이라는 타이틀에 의존했습니다. 그땐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의존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랜 시간 들여 내가 의존했던 모든 것을 깨뜨리고 온전히 세워질 수 있도록 다듬어 오셨습니다. 처음 비전을 주셨던 때부터 우리가 멈춰있던 순간에도 하나님은 한순간도 쉬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미숙했던 만큼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을 갈아엎으시고 다독이고 탈탈털어 오늘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 시간이 아프기도 하고 괴롭기도 했지만, 앞으로도 신실하게 이끄실 주님의 마음은 우리를 너무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임을 알기에 여전히 떨리지만 감사함으로 순종하게 됩니다. 우리의 길은 저 멀리 앞을 내다볼 수는 없지만 한걸음 한걸음 하나님만을 온전히 신뢰하며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기대하며 나아가고 있습니다. 한 걸음을 뗄때마다 이 한걸음이 얼마나 감사한지 경험하는 중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살다보면 미워하게 되고 다투게 됩니다. 그런데요. 그 다툼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다툼을 잘 다스려야 상처를 치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툼이 일어날 때에 예수님으로부터 화목의 직책을 부여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혹시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다툼의 중심에 있었다면 이제는 화목의 중심에 선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있는 가정, 일터, 그리고 교회가 화목으로 넘쳐서 예수님의 사랑이 계속 흐르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신으로서 화목한 관계를 이루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마지막 21절을 보니,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거룩한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이유는 우리가 주님 안에서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의인이 되어서 함께 힘을 모아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해 가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선교의 열매 역시 다른 것이 아니라 적대적 개인들 간에 혹은 집단들 간에 진정한 화해가 일어날 때, 그곳에 복음의 능력은 분명하게 드러나며 하나님은 큰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대로 살지 못하면 우리뿐 아니라 하나님도 욕을 먹고 선교의 문도 전도의 문도 막혀버립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장 21절)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성도들이 세상에서 구별된 삶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세상의 불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한다면 이보다 더 소중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 모두가 감당해야 할 사명입니다.
신앙공동체 내에서도 분쟁이나 오해가 전혀 없이 평화롭게 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과 화평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서로 불신하고 비난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이해하려 하고 원만하게 해결하여 문제 전보다 성숙한 신앙과 우의를 다지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새 계명인 “서로 사랑”을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실천하기 원합니다. 아름다운 교제와 사랑과 나눔, 연합과 하나 됨이 우리 교회의 모습이 되기 원합니다. 오해를 넘어서서 이해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령과 진리의 말씀을 중심으로 성도들이 아름다운 변화의 삶을 온전히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평강을 위해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는 자들이기에, 최선을 다하며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고자(엡 4장 3절) 애써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더욱 풍성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성찬식을 하신 이유는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야로 믿고 있었던 제자들의 생각을 바로 잡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제자들은 유월절 어린양과 같은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할 때에 자신들이 정치적인 자리를 차지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그런 육체적인 생각을 깨뜨리시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 가는 그리스도의 사신이 되라고 성찬식을 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찬식에서 자신의 미래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빵은 내 몸이고, 이 포도주는 나의 흘리는 언약의 피”라고 말입니다. 제자들은 육체적인 생각을 하였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예수님이 메시야 구원자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어야 하며 이미 믿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신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한 내용 중 디모데전서 2장 8절에 보니,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거룩한 하나님을 향하여 영혼의 거룩한 손을 들어 우리 모두를 위해서, 그리고 이 세상을 위해서 기도하기를 권면합니다. 또한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사신이 되어서 그분의 사랑과 겸손으로 화목을 이루어가기를 소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영원히 함께하는 우리 교회와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