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 18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대범 목사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모세는 이집트인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히브리 사람을 구하려다가 도리어 동족에게 고발을 당해 졸지에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장장 40년이라는 시간동안 양치는 목자의 신분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 긴 시간동안 하나님은 모세를 만나주시거나 어떤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모세는 아무런 기별이 없으신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기대를 반복하며 망연자실한 상태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모세와 같이 나름 선한 의도를 가지고 비전을 이루기 위해 애쓰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일을 만나 절망적 상황을 마주하게 됩니다. 절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보지만 마치 나를 잊으신 듯 아무런 반응이 없으신 하나님을 보며 원망과 기대를 반복하다 제 풀에 꺾여 더 이상 아무런 소망이 없다 고백하는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깊은 절망 가운데 있는 성도에게 은혜 베푸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망 가운데 있는 성도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시나요?
1. 친히 찾아오십니다.
[1]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광야에는 풀이 적었기 때문에 모세는 양들에게 먹일 풀을 찾아 서쪽으로 이동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렇게 이동하다가 호렙산이라는 곳에 다다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발걸음을 호렙산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모세를 호렙산으로 인도하고 계신 것일까요?
성경에서 호렙산은 중요한 장소입니다. ‘호렙산’ 다른 이름은 ‘시내산’으로 주로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장소입니다. 출애굽기 19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처음 진을 친 장소로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신 장소이기도하고, 왕상 19장에서 엘리야가 아합과 이세벨의 공격을 피해 숨어 지낼 때, 그를 만나 주신 장소이기도 합니다. 본 구절에서 ‘호렙산’을 ‘하나님의 산’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산은 주로 하나님의 권세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반면 ‘호렙’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메마른, 황폐한 땅’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호렙산을 하나님의 산이라 칭하는 것은 모순적인 표현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호렙산’을 ‘하나님의 산’이라 지칭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져 메마르고 황폐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하나님 백성들을 하나님이 친히 돌보시고 다스리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모세의 미디안 광야에서의 40년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모세에게 있어 이 시간은 공허함과 불안함 속에서 깊은 절망을 경험한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오랜 시간 하나님께 자신의 처지에 대해 호소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속히 자신의 인생에 개입해 오셔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심으로 상황을 원점으로 돌려주시길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1년이 흐르고 10년이 흐르고 40년이 흘러도 묵묵부답이었던 하나님에 대하여 더 이상의 원망도 기대도 없이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외로이 양을 치고 있는 모세를 친히 찾아오십니다.
[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사실 떨기나무에 불이 붙는 일은 광야의 기후적 특성상 자연 발화로 인해 종종 있는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가지가 앙상한 떨기나무에 불이 붙으면 금세 연소되어 불이 꺼지기 마련인데 불이 꺼지지도 않고, 떨기나무도 그대로 있었기 때문에 모세는 이 일을 기이하게 여겨 그 앞으로 가까이 다가갑니다.
[3]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볼 품 없이 마르고 가지가 앙상한 떨기나무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하여 양치기 신세가 된 모세의 모습과 애굽의 노예 신세로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에 불로 임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을 친히 찾아오셔서 떨기나무와 같이 볼 품 없고, 소망 없이 살아가는 하나님 백성을 구원하실 것에 대한 예언적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호렙산과 떨기나무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메마르고 황폐하며, 볼 품 없이 말라서 뜨거운 햇볕에 쉽게 연소되어 버릴 것만 같은 연약한 존재인 우리의 모습 말입니다.
저는 내 인생을 보며 메마른 광야에 덩그러니 서 있는 떨기나무와 같은 인생같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저는 목회자로 살아가면서도 불투명한 미래를 늘 염려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지금은 제가 하늘사랑교회에서 훈련받으며 맡겨주신 사역을 감당하고 있지만, 이후의 행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어디로 인도하실지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가 많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저의 계획과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물 흐르는 듯 순탄하게 흘러왔지만, 저는 과연 어느 때에 선교를 나갈 수 있으며, 만약 하나님의 뜻이 한국 교회 있다면 훗날 교회를 개척은 할 수 있을지, 사역에 대한 고민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맡겨주신 가정을 말씀위에 잘 세우고 맡겨주신 세 자녀를 믿음으로 잘 양육할 수 있을지 등의 염려로 밤을 지새우기도 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앞길을 친히 인도해주실 것이라는 분명한 믿음이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미래에 대한 두려운 마음을 품고 살아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고민 속에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 상태로 시간이 흘러가지는 듯 보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시기 위해 우리의 발걸음을 만남의 장소로 인도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은 모세를 만나시기 위해 치밀한 계획 가운데 그의 발걸음을 인도하시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4a]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은 모세의 이목을 끌기 위해 기이한 상황을 연출하고 계신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오랜 침묵으로 인해 자신을 인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기이한 현상에 홀리듯 하나님이 부르신 자리로 이끌려 나왔지만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계획하심 가운데 세심하게 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기치 못한 상황 가운데 우리를 찾아와 주십니다. 당시 상황에서는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아채지 못할 때가 많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시기 위해 언제나 우리에게 집중하고 계시며, 하나님의 세심한 계획하심 가운데 우리를 만남의 장소로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모세를 찾아오시지만 정작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립니다.
[6b]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모세가 얼굴을 가리는 행위는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허물 많은 인간이 취하게 되는 본능적인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을 온전히 마주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9,10)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부르실 때 왜 두려워 숨었던 것일까요? 사단의 말대로 눈이 밝아진 그들은 불완전한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을 때는 완전한 모습이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이후에 자신들의 본 모습을 발견하게 되어 두려움을 느낀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죄인 된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분이심을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21)
하나님을 피하여 숨어버린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은 외면하시거나 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하여 짐승의 피를 대신 흘리게 하심으로 그들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가죽옷을 입혀주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그들의 죄와 허물을 덮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와의 관계회복을 얼마나 열망하고 계신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과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해 결단하신 일이 바로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 가운데 보내주신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이 땅 가운데 육신의 몸을 입고 수치와 고통을 다 감수하시고 우리를 친히 찾아와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지성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저 우리 죄악의 무게를 실감하는 만큼 이해하고 그 만큼의 사랑을 가늠하는 수준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깊은 절망 가운데 빠졌을 때, 우리의 호소에 응답이 없으신 것만 같은 하나님에 대하여 원망하며 분노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우리를 향한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또한 언제나 우리를 만나기 위해 가장 적합한 때를 기다리십니다.
우리에게 아무런 소망이 없다고 느끼는 그 자리는 사실 하나님께서 개입해 오시기에 가장 적합한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 외에 의존의 대상이 없다는 진실 된 고백의 자리에서 비로소 하나님을 만날 기회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혹시 지금 절망 가운데 아무런 소망이 없다고 고백하는 자리에 홀로 외로이 서 있다면 이제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오셔서 내 인생에 개입해 오실 가장 적합한 타이밍이라 생각해도 좋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절망 가운데 있는 분들이 있다면 은혜 베푸실 하나님을 만날 소망을 가지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절망 가운데 있는 성도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시나요?
2. 사명을 주십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노예로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방치하신다고 오해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모세가 애굽을 떠나올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약 400년을 그 땅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단 한 순간도 잊지 않으셨다 말씀하십니다.
[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하나님은 고통당하는 하나님 백성들을 지켜보고 계셨으며, 신음하는 백성들의 소리를 귀담아 듣고 계셨고, 그들의 모든 형편을 다 알고 계셨다 말씀하고 계십니다.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하나님은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 모세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십니다.
[8a]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과거 모세는 자신이 가진 힘으로 동족을 구원해 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집트의 왕족으로서 언젠가는 자신이 가진 권세로 동족을 노예의 신분으로부터 해방시켜 하나님 백성 공동체를 이루리라는 부푼 꿈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가진 세상의 권세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로 하나님 방법에 따라 하나님 나라를 이루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애굽인들의 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심으로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내실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약속의 땅은 어떤 땅인가요?
[8b]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크고 아름답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즉 가나안 땅을 가리켜 말씀 하십니다. 하지만 그 땅에는 지금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이 살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가나안을 대표하는 일곱 족속입니다. 성경에서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되어야 할 죄악이 가득한 세상을 모형합니다. 그래서 훗날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취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거주하던 모든 족속을 멸하라 명령하신 것입니다. 가나안의 일곱 족속은 인간 안에 있는 죄를 모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일곱 족속을 진멸하는 일은 하나님 백성 안에 있는 모든 죄악이 제거되어 온전한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때 약속의 땅을 얻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모든 죄악이 제거되어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를 받을 때,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 임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땅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일을 위해 선행되어야 할 일은 우리의 모든 주권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반대로 우리의 능력과 노력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될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곤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편에서 거창한 비전을 세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 아래 있는 백성들을 통해 뜻하신 바를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모세 역시 40여년의 시간동안 자신에게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셔서 중대한 사명을 맡기십니다.
[9]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과거 모세는 동족을 구하는 일에 열정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정작 모세를 통해 하나님 백성들을 애굽의 손에서 구원해내시겠다 말씀하시는데 모세는 매우 소극적인 태도로 반응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 3:11)
과거 자신이 이집트 왕자의 신분이었을 당시 기세가 등등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자신의 실체를 깨닫게 된 모세는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모세가 행할 일에 대한 매뉴얼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빠져나갈 구멍을 찾기 급급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출 4:10)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대단한 일을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에 불타올라 스스로 하나님의 일을 위해 헌신할 준비가 되었다 여길 때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무런 사명을 맡기시지 않는 일을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고, 인생에서 자신의 밑바닥을 경험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자리에서 내가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사명을 맡기십니다. 저는 언제나 열정이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성도들 가운데 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이 베드로와 같은 사람이라 생각할 것입니다. 만약 백 명의 베드로가 있다면 저는 그 중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베드로 중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워낙 열정이 넘쳐서 목회의 길에 들어서기 전부터 이미 목회자 이상의 열정을 가지고 전도도 많이 하고, 하나님 일에 관하여서는 월요일부터 주일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사역에 매진했습니다. 이 한 목숨 바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거름이 되리라 생각했었던 제가 막상 목회자에 길에 들어서기 직전에 깊은 갈등에 빠졌습니다.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첫 번째는 제 주변에 많은 목회자들이 극한 경제적인 어려움에 허덕이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저의 밑바닥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대한 지식도 재능도 없고, 가진 것이라고 열정밖에 없는 내가 열정 하나만으로 목회자가 될 수 있을까? 라는 질문 앞에 저의 열정도 찬물에 담군 달궈진 쇠처럼 순식간에 식어진 채 자신감이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섬기던 교회로부터 청소년 사역을 제안 받고 결정하기 직전에 이스라엘로 약 2주간 사역을 떠났습니다. 개인적으로 병고침, 축귀, 예언과 같은 은사주의 사역을 극도로 꺼리며 경계했는데 세계 각국에서 모인 사람들이 대부분 은사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습니다. 예배 시간만 되면 다들 방언으로 기도하고, 그 옆에서 방언을 통변하고, 항상 모임 마무리에는 예언 기도로 끝을 맺었습니다. 그 자리에 모인 무리가 예외 없이 예언 기도를 받는 분위기 속에서 반 강압적으로 기도를 한 번 받았습니다. 그런데 기도해주시는 목사님이 마치 제 마음을 다 알듯 기도를 해주어서 매우 감짝 놀랐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너를 목회자로 불렀다.’ ‘왜 두려워 하느냐?’ 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궁금해졌습니다. 정말 나를 부르신 것이 맞다면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같은 말씀하시겠지 라는 생각이 들어 여러 명의 사람들에게 예언 기도를 받아 보았습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놀랍게도 기도해주는 분들마다 같은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혹시 다른 사람들에게도 같은 내용으로 기도해주는 건 아닌지 싶어 다른 사람 기도하는 내용을 들어보았지만 같은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반신반의한 마음으로 애매한 마음을 가지고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쿰란이 발견된 유적지에서 아무 생각 없이 야외 벤치에 앉아있었는데 그 무리 중 한 여 목사님께서 내게 오시더니 내 등을 쓰다듬으며 조용히 기도를 해주셨습니다. 몇 분을 조용히 기도하시더니 하나님 말씀을 대언이라도 하듯 ‘사랑하는 아들아, 왜 아직도 의심하니? 내가 너를 목회자로 불렀다. 두려워말고 따라 오거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순간에 복받치는 감정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제가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그래서 은사주의 사역은 성령의 역사라는 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제 설교에서 이 예화만 여러분 기억에 남게 될까 심히 염려가 됩니다. 저는 지금껏 예언 기도에 대한 깊은 믿음을 가지고 그것을 사모해본 적은 없습니다. 지금도 은사주의 사역에 대해 여전히 비판적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만큼은 믿음이 연약한 나에게 성령께서 그들의 입술을 통해 음성을 들려주셨던 것 같다는 확신이 듭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에서 돌아와 바로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사역을 시작한 후에 정말 많이 실수하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여기까지 왔지만, 저의 연약함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때마다 나에게 지혜와 용기와 능력을 주셔서 사역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물론 지금도 저는 그 때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여전히 마음에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저와 같이 무지하고 부족한 사람을 통해 무슨 선한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저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고백하는 자리에서 때마다 저에게 지혜와 용기와 능력을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을 위한 사명을 일깨워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사명을 주시는 방법도 사명의 내용도 다양하겠지만, 확실한 공통점은 나의 힘과 능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 고백하는 자리에서 우리에게 사명을 허락하시며, 모든 상황 가운데 지혜와 용기와 능력을 주심으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방법은 이와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모세의 이야기가 그러하듯 하나님은 스스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시지만, 연약한 가운데 있는 성도에게 사명을 주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가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이뤄 가시는 십자가의 방법입니다.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3,24)
예수님은 가지신 힘과 권세로 세상을 굴복시키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 가운데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성육신 하셔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심으로 섬김과 희생을 통해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시고 그 뜻을 온전히 이루심으로 이 땅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시작하셨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주 나 자신의 모습을 보며 의기소침하며 절망 가운데 머물지만 하나님은 그 상황 가운데 우리를 친히 찾아오셔서 사명을 주시고 우리를 통해 십자가의 방법으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가십니다. 혹시 지금 절망 가운데 아무것도 의지할 것이 없는 상태로 고통 가운데 계신 성도가 있다면 우리를 친히 찾아오셔서 사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