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21일 주일예배 설교문/ 장우현 목사
요즘은 하나님께 대한 소망이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시대입니다. 주식과 부동산이 인생의 소망이 된 것 처럼 들끓고 있습니다. 아니면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학교와 좋은 직장에 들어가 지위를 바꾸거나 회사에 인생을 갈아 넣어 승진과 연봉 상승과 많은 퇴직금이 소망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주택관련 공기업 문제 가운데 직장인들이 많이 쓰는 익명 게시판에서 '공부 못해서 여기 못들어와놓고 우리 꼬투리만 잡는다. 부러우면 너네도 여기 들어오던가'라는 글이 화제가 됐습니다.그러자 하버드대 출신 의원이 공부 잘하는 사람들이 거기가 그렇게 좋은 곳인줄 알았으면 너는 못들어갔다고 그 글에 일침을 가했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그 익명의 글이 그 공기업 직원의 글이든 아니든지간에 돈과 학벌이 우리 사회의 욕망의 분출구가 되고 있고,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소망과 부러움, 분노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우리 삶의 소망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나요? 그리고 그런 것을 나도 한웅큼 쥐지 못해 낙담과 우울함 가운데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두 부류 모두 그런 것들이 우리의 고통스럽고 지친 삶으로부터 피할 곳이 되어주고 내가 정말로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는 구원이 될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확실히 많은 돈과 땅, 높은 학벌과 지위는 삶의 질을 180도 다르게 해주긴 합니다. 그런 것들은 되돌리지도 못하고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을 누리고, 남에게 꿀리지 않고 살 수 있게 해주는 기회이자 능력이 분명합니다. 인정해야죠. 하지만 또 다른 확실한 사실은 그런 것들이 우리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고, 그런 것들에 인생의 소망을 두고 추구하며 사는 삶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과는 관계가 없는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오미가 하나님만을 의존할 수 있도록하기 위해 나오미가 의존할만한 모든 것을 텅 비게 만드셨던 것처럼 저희 삶의 그런 것들을 텅 비게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텅 비는 일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나는 너를 알지 못한다, 관계가 없다'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만이 우리의 소망이 되신다는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보게 될 룻기 2장에서도 나오미가 자신의 고된 삶 가운데 개입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소망을 갖는 장면이 나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어떻게 개입하시기에 나오미가 구원의 소망을 갖게 되는지 살펴보며 저희가 가져야 할 소망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구원의 소망되심을 알 수 있나요?
1. 완전한 보호를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3a]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룻기 1장에서 나오미는 남편과 아들들을 다 잃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기 위해 룻과 함께 이스라엘로 돌아왔지만 남의 땅을 전전하며 떨어진 이삭을 주워먹고 살게 됐습니다. 특히 나오미가 나이가 많아서 룻 혼자 하루종일 수고해야 둘이 하루를 겨우 먹었을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남자가 받았던 노동의 저주를 여자인 룻이 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룻은 이방여인이었습니다. 당시 이방인은 저주 받은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에 밭 주인이나 일하는 사람들에게 정죄 받고 괴롭힘을 당하는 수치를 겪은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룻과 같이 자녀가 없는 것도 당시엔 저주 받은 것으로 여겨졌고,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대를 잇지 못했다는 질책이 어떤 방식으로든 룻에게 향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룻은 나오미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라는 유명한 신앙고백을 하며 하나님을 선택했지만 여전히 저주 받은 것 같은 상황 가운데 당시 젊은 과부가 감당하기 힘든 고난과 수치와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의 삶도 사실 이와 비슷합니다. 하나님을 믿었다고 해서, 아니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 같은 나를 희생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 같은 선택을 했다고 해서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준다던가, 갑지가 로또를 맞는다던가, 월급이 팍팍 는다던가, 장사가 잘 된다던가, 아무 병이 안걸린다던가, 진로가 팍팍 풀린다던가, 관계가 막 좋아져서 와 이곳이 천국이로구나!가 되질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죄악되고 연약한 모습 때문에 세상의 지탄을 받기도 하고, 직장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기도 하고, 교회와 가족 안에서도 수치스러움을 경험하기도 하고 나 스스로도 내가 부끄럽고 자책감이 들 때도 있습니다. 인생의 무게감과 고난은 저희를 지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이렇게 여전히 저주 받은 자와 같이 살고 있는 저희와 함께 하시며 저희를 그 고난과 수치로부터 지켜주고 계신 것일까요?
그런데 이런 상황 가운데 있던 룻에게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3]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이르른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께서는 이게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것임을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고 계신 것이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룻을 보아스의 집으로 인도하신 것일까요? 첫 번째는 방금 구절에서처럼 친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에 가까운 친족이 어려움에 빠진 친족을 돕도록 해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친족이니까 마땅히 도와야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백성들이 언젠가 당할 수 있는 고난과 수치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에 맞는 율법과 율법에 순종하는 자를 미리 준비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룻을 보아스의 집으로 인도하신 두 번째 이유는 보아스가 유력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룻 2:1b ...유력한 자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더라
성경에서 유력하다는 것은 전쟁에 능한 전사들이나 높은 직위나 재물이 많은 능력 있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실 이 유력함이 자주 쓰이는 곳은 하나님을 묘사할 때입니다. 전쟁에 능하시고, 모든 직위 보다 높으신 왕이시고, 모든 재물의 주인이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전능함으로 무엇을 하시나요?
습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성경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죄와 사망으로 인한 무거운 고난과 수치 아래 있는 백성들을 구원하실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그런 하나님께서 보아스에게 유력함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그 유력함을 하나님께서 준비해두신 율법에 순종해 사용하고자 하는 준비된 자 보아스는 룻에게 이렇게 두 가지를 말합니다.
[8]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9] 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한 가지는 자신의 밭에서만 이삭을 주우라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자신이 거느리는 소년들이 다른 밭 일꾼들처럼 룻이 이방 여인이라고 괴롭히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바로 룻이 감당하기에 너무나 무거웠던 인생의 고난과 수치, 그 저주 받은 것 같은 삶에서 그가 가진 능력으로 보호를 해주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그 전능하심으로 순종하는 구원의 통로를 통해 백성들을 보호를 해주시는 것이죠.
저희가 바로 룻과 나오미가 보여주는 죄와 사망 아래서 저주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죄로 인해서 영원히 하나님 없이 지치고, 피곤하고, 화나고, 상처받고, 병드는 영원한 형벌 같은 삶을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보아스를 준비해 두신 것처럼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해 자신을 죽이시기까지 하심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주신 예수님을 준비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능력은 죄와 사망으로 말미암는 고난과 수치로부터 보호해주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가장 명확하게 나타나는 곳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전서 1장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베던 1:5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하나님께서 말세의 시작 되신 예수님을 예비하셔서 저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희를 보호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희는 보통 하나님의 보호하심이라고 하면 자연재해나 교통사고, 질병과 같은 안좋은 것으로부터 보호해주시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룻과 나오미만 봐도 안좋은 상황 가운데 보호해주시고, 좋은 상황으로 구원해 주시니까요. 하지만 구약 성경의 그런 모습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을 저희가 보고 알고 느낄 수 있도록 보여주는 그림이죠. 그렇기 때문에 오늘 나오미와 룻이 겪었던 고난과 수치와 인생의 무게 역시 죄와 사망으로 인해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져 나타나는 고난과 마귀의 정죄와 수치를 짊어지고 있는 인생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것으로부터 승리하신 예수님의 보호에 들어가게 되면 다른 어떤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저희를 끊을 수 없고 고발, 정죄받아 수치를 얻지 않게 될 것입니다.
롬 8:33, 35 [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것은 성도와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가 끊어지지 않도록 보호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저희가 보호를 받게 되었다고 말씀하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땅을 사는 저희의 삶에 보호받지 못하는 것 같은 일들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구원의 완성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렇게 보호를 받게 된 이야기를 룻이 집에 돌아가 나오미에게 말하자 나오미는 이렇게 반응합니다.
[20] 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니라 하니라
구약성경에서 질병이나 가족의 죽음, 자연재해 같은 어쩔 수 없는 이유로 땅을 팔아서 생존을 유지하게 됐을 때 가까운 친척이 그 땅의 값을 대신 지불하고 되사주는 것을 기업 무름이라고 합니다. 지금 나오미와 룻의 입장에서는 보아스의 보호가 너무나 감사한 것이지만 사실 남의 땅에서 이삭을 줍는 것은 추수 기간에만 한정된 것이고 여전히 그런 삶은 온전한 회복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보아스가 그 유력함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 우리를 보호해 줬다는 소식을 듣자 기업 무름의 율법에도 순종해 우리를 이 고난과 수치로부터 온전히 구원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소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나오미와 룻은 궁극적으로 기업무름을 받어야 고난과 수치로부터 온전한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 역시도 예수님께서 저희를 죄와 사망에서 보호해주셨다는 복된 소식을 들었고, 그것을 믿고 감사하고 있지만 여전히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세상에서 육신을 입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보아스의 보호를 통해 우리가 온전한 구원을 받게 되지 않을까?라는 여전히 의문이 깃든 소망을 갖고 있었지만 저희는 십자가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령의 인치심을 통해 예수님께서 반드시 다시 오셔서 저희를 온전히 구원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구약 백성들이 고대했던 너무나 확실한 소망의 근거인 것입니다. 저희가 이것을 소망의 근거로 확실하게 믿는다면, 세상의 것들이 나의 고난과 수치와 인생의 지침과 무거움으로부터 보호해줄 것이라고 소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처럼 그것의 유무에 휘둘리는 삶을 살지 않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는 이렇게 주일마다 모여서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보호하시고 구원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매주, 그리고 매일같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수치로부터 보호해주셨다는 복된 소식을 기억하고 묵상하고 기도하시며 하나님만이 구원의 소망되심을 확고히 믿으실 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구원의 소망이 되시나요?
2. 풍성한 생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14]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하므로 룻이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으니 그가 볶은 곡식을 주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
일하다가 식사시간이 되자 보아스는 룻을 자신의 식탁으로 초대해 배불리 먹입니다. 어쩌면 룻은 다음날 먹을 도시락을 쌀 여력이 없어서 굶주림 가운데 일을 했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룻과 나오미는 집에서도 충분한 식사를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추수할 때 일부러 곡식단을 흔드는 것도 아니고 조심스럽게 할텐데 이삭을 떨어뜨리면 얼마나 떨어뜨릴까요? 둘 다 충분한 양식이 없어서 굶주림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의 땅 주인은 율법을 따라 이삭을 줍도록 허락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에 보아스가 룻의 배고픔까지 챙겨주는 것은 율법을 뛰어 넘는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15]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그에게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16] 또 그를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에게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
당시 이삭 줍는 사람들이 추수한 곡식단 사이를 다니며 곡식단에 붙어 있는 이삭을 뜯는 경우가 있어서 단 사이에서는 줍지 못하게 했는데 룻은 거기서도 줍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곡식 다발에서 일부러 이삭을 뽑아서 바닥에 뿌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추수하다 떨어진 이삭을 줍게 하라는 율법도 뛰어 넘는 모습입니다. 큰 은혜를 베푸는 것이죠. 이 은혜 아래서 룻은 하루만에 20kg 정도 되는 이삭을 주웠는데요, 알반적으로 여자가 하루종일 쉬지 않고 주워서 이만한 20kg 쌀포대를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룻이 점심을 배불리 먹고 남은 것도 싸가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보아스가 굶주린 룻과 나오미에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풍성한 양식을 베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백성들에게 풍성한 양식을 필요에 따라 공급하시는 것은 생존의 근거가 저희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신명기 8장 3절입니다.
신 8:3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마치 양식이 매일같이 때와 필요에 맞게 공급되어야 먹고 힘을 내서 살 수 있듯이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매일, 매순간 공급되어야 사람이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런데 말씀 없어도 잘 사는 사람 많은데 말씀이 공급되어야 산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요? 여기서 산다는 것은 살아 있어도 죽은 자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 살 때 생명이 있는 자로 살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말씀을 통해 생명을 공급받지 못하고 자기 욕망을 따라 세상과 눈에 보이는 것들을 추구하며, 세상의 방식대로 왕 노릇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명이 없는 사망한 자라고도 말합니다.
요일 3: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자기 욕망을 추구하며 사는 자들은 살아 있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죽은 것처럼 사는 자라는 것입니다. 돈, 땅, 주식, 승진, 좋은 직장, 학벌에 목을 매는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의 생존의 근거가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원하는 만큼 얻기 위해서는 하루종일 그것에만 관심을 갖고 생각과 감정이 요동치기 마련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것, 자기 일, 자기 돈, 자기가 유명해지는 것, 자기가 잘나고 성공하고 똑똑해 보이는 것, 자기 감정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사람들과 관계 맺고 말하고, 심지어 뭔가를 도와주는 목적도 자기를 위할 때가 더 많습니다.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나에게 도움을 되고, 경쟁이 되지 않는 상대하고만 친하게 지내면서 관계에 문제가 없다고 여깁니다. 현대에는 이런 삶을 '개인주의'라고 해서 오히려 미화하는 분위기입니다. 나 혼자 산다! 나 혼자 사니까 자기 먹고 싶을 때에 마음대로 해먹고 하고 싶은거 하고 싶을 때 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나고. 얼마나 좋아보이나요.
그런데 사람은 이런 생명 없는 세상적인 삶 속에 살 때 깊은 공허감과 외로움, 삶에 대한 피로와 중독에 빠지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성도들 역시도 이렇게 죄와 사망으로 말미암은 저주 받은 세상의 영향력을 받고 그것을 쫓게 될 때 깊은 공허를 느끼게 되는데 그것을 영적 굶주림, 영적 갈급이라고 합니다. 이런 영적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서 나오미와 룻에게 공급되었던 양식이 필요합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꼐서 그 갈급함을 채워주실 생명의 양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왜냐하면 바로 이 예수님이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생명의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요일 1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하나님께서는 광야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시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면 바로 이 생명의 양식인 말씀, 예수님을 매일같이 받아 먹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생명이 있는 자로 사는 것이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제 구약에서 예표되었던 예수님을 믿는 저희는 예수님을 기억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풍성한 양식을 먹으며 영적 갈급함으로부터 벗어나 생명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룻이 일을 마치고 나오미에게 돌아왔을 때 보아스가 보호를 해줬다는 소식 뿐만 아니라 이렇게 풍성한 양식을 주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나오미는 룻에게 이 밭에서만 일하라고 조언을 해주었고 룻은 추수가 끝날 때까지 보아스의 밭에 머무르며 이삭을 주웠습니다.
[23] 이에 룻이 보아스의 소녀들에게 가까이 있어서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 그의 시어머니와 함께 거주하니라
두 사람은 다른 곳이 아닌 풍성한 양식이 공급되는 보아스의 밭에 머무를 때에만 추수가 끝날 때까지 기업무름이라는 온전한 구원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고 붙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찌보면 저희가 사는 이 말세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거두시는 추수의 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추수를 끝내실 때까지 저희도 소망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생명의 양식 되시는 예수님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사람은 매일 밥을 먹어야 사는 것처럼, 매일 숨을 쉬어야 사는 것처럼, 매일 물을 마셔야 사는 것처럼 매일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어야 저희의 삶이 끝날 때까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떄까지 하나님만을 소망하는 삶을 붙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인생의 고난과 수치로부터 완전한 보호를 해주시고 영적 갈급함으로부터 풍성한 생명 주시는 예수님만이 구원의 소망되심을 확고히 믿으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