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보게 될 말씀의 앞부분에서는 성도가 행하는 하나님 나라의 일이 나옵니다. 나오미와 룻이 서로의 안식을 위해 하나님의 지혜를 의존해 자기부인을 한 것입니다. 오늘과 다음번에 보시게 될 3장 후반부에는 보아스가 룻과 나오미에게 하는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행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일이란 무엇인지가 나타납니다. 그 일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일이란 무엇인가요?
1. 성도를 두려움과 수치로부터 보호하시는 것입니다.(11, 14)
[11a] 그리고 이제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아스는 룻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룻은 나오미의 기업 무름을 위해 결단을 하고 보아스에게 왔지만 보아스가 자신의 요청을 거절할 수도 있다는 사실과 그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보아스의 거절은 곧 룻과 나오미가 죽기까지 고난 가운데 있게 된다는 것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땅과 그것을 물려줄 자손이 없다는 것은 영원히 하나님 나라에 속하지 못하는 저주를 받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은 죄악된 선택으로 땅과 자손을 잃었고, 그 죄의 결과는 남아있는 룻과 나오미에게 고스란이 영향을 미쳐서 이 두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한다는 믿음의 근간이 없어졌기 때문에 두려움이 생길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은 표면적인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근원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문제의 근원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언제든 상황에 따라 그 두려움이 영혼 깊은 곳에서 뚫고 나와 삶의 전반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룻은 이 때 뿐만 아니라 땡볕 아래에서 일하며 오늘 먹을 것은 주울 수 있을까? 병에 걸려서 일을 못하게 되면 시어머니는 누가 돌보나? 내 인생은 과연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두려워 했을 것입니다.
저희의 삶에도 이런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제 청년들의 취업이 쉽지 않은 것은 기정사실이 됐죠. 하지만 번듯하다고 여겨지는 직장이나 사업체가 있어도 무한 경쟁 사회와 사람과의 관계와, 급변하는 시대에서 살아남아야 된다는 두려움은 그 상황 속에 있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결혼도 늦어지면서 결혼을 쉽게 포기하는 청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겉으로는 '뭐 다들 사는게 힘든데, 다들 비혼으로 사는데' 하면서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아 보이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혼자 감당하기 쉽지 않은 삶 가운데 두려움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이런 자녀들을 보는 부모님들이 더 두려우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해결해 주실 것을 믿고 고백하시지만 이 아들 딸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걱정이 하나도 없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건강에 여러가지 신호가 오고, 주변 동년배나 어르신들엑 생명을 위협하고, 인간다움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병이 찾아오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될 수 있다른 두려움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세상이 아무리 우리를 위협하고 우리를 두렵게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이 있으면 두렵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희도 아담과 하와로부터 말미암는 죄의 영향 때문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며 보호해주신다는 믿음의 근간이 약해지거나 흔들릴 때 두려움이 몰려오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룻에게는 두려움 말고 다른 문제가 있었습니다.
[14] 룻이 새벽까지 그의 발치에 누웠다가 사람이 서로 알아보기 어려울 때에 일어났으니 보아스가 말하기를 여인이 타작 마당에 들어온 것을 사람이 알지 못하여야 할 것이라 하였음이라
룻에게 아무리 좋은 의도가 있었더라도 여자가 타작마당에 들어온 일은 사회적으로 금지된 일이었고, 율법을 어긴 것과 동일선상의 죄로 여겨졌기 때문에 사람들의 비난과 정죄와 죄의 형벌로 인한 수치를 피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죄로 인한 정죄와 그 수치심을 갖는다는 것은 율법에 온전히 순종하는 거룩한 보아스의 아내가 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죄는 동전의 양면처럼 두려움 뿐만 아니라 수치를 갖게 합니다. 아담과 하와나, 상대방과 세상만 죄악된 것이 아니라 나도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선하게 살고자 애쓰더라도 죄악된 세상과 사람으로 인해 두려운 가운데 흔들리거나 위축되면 화내고, 남을 욕하고, 거짓말하고, 남을 이용하려고만 하게 되면서 자신의 사랑 없고 이기적인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저희는 세상과 사람만이 아니라, 부끄러워서 하나님 얼굴 보기도 두려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에스라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라 9:6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수치로 인해 하나님께 얼굴을 들지 못한다는 것은 예배당에 와서 앉아있어도 쉽게 마음의 문이 열리지 않고, 사실 예배도, 기도도, 말씀 읽기도 꺼려지고 무미건조해지는 것입니다. 아니 가정과 사회에서 그렇게 이기적이고 욕망대로 살고 있는데 어떻게 나를 구원해주셨다고 감사하고, 어떻게 손을 들고 찬양할 수 있나요? 어떻게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사랑하십쇼! 이렇게 사십쇼! 하고 설교를 할 수 있나요? 이런 내가 어떻게 예수님의 아내가 될 자격이 있다고 하나요?
사실 많은 중고등 학생들이 이 수치심 때문에 하나님 앞에 제대로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친구나 형제자매들과 싸우고, 미워하고, 저주하고, 공부 안하고 게임만 하고, 사춘기에 접어들며 부모님과 싸우고, 성적으로도 성숙해 가면서 수년간 이런 문제들이 해소되지 않고 누적이 됩니다. 그러면 해결되지 않은 수치심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게 찬양할 수 없고, 나를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을 인정지 못하고 믿지 못하니까 감사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죄로 말미암은 두려움과 수치의 문제를 안고 있는 저희에게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요? 보아스가 룻과 나오미에게 행한 일에 답이 있습니다.
[11b]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기업을 물러주는 일과, 자손을 낳아주는 일을 모두 행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룻과 나오미가 두려움과 수치를 가지게 된 근본적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 행해주겠다고 말하는 보아스는 왜 갑자기 룻이 현숙한 여자라는 것을 백성들이 다 안다는 말을 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현숙한이라는 단어는 보아스가 유력한 남자라고 소개될 때 사용된 유력함과 같은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남자에게 쓰일 때에는 하나님 나라의 전쟁을 수행하고 그 나라를 다스릴 능력과 용기가 있는 자라는 의미로 사용됐습니다. 이 단어가 여자에게 쓰일 때에는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고 선한 결과를 내는데 탁월한 여자라는 의미로 사용됐습니다. 결국 보아스가 유력하고 룻이 현숙하다는 말은 그 남자에 어울리는 그 여자라는 뜻입니다. 모든 백성들과 보아스가 이제 룻이 자식도 없는 이방인 과부가 아니라, 보아스와 동일 선상에서 함께하는 부부가 될 자격이 있음을 인정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아버지와 딸과 같은 관계가 아니라 부부로써 더 깊은 사랑과 더 가까운 관계로 함께하며 두려움의 근원을 해결하고, 그 두려운 세상으로부터 더 완전하게 보호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아스는 율법을 어기고 타작마당에 들어와 수치 앞에 선 룻에게도 이렇게 반복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13a]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13c] ...아침까지 누워 있을지니라 하는지라
자신이 룻과 함께하며 밤의 장막으로 덮어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아스도 오해를 받아 명예가 훼손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룻이 자신의 아내될 자격이 있는 자이기 때문에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룻의 수치심을 덮어주는 사랑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죄로 인한 인생의 두려움과 수치는 사람이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의 값을 치루시고, 저희를 의롭다고 여겨주시고 예수님의 아내가 될 자격을 회복시켜 주셔서 함께해 주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일을 행하는 보아스가 예수님의 모형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보아스의 모습과 같이 저희의 문제를 직접 해결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 43:1b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사 54:4a, 5a [4b] ...네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5a] 이는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시라...
보아스가 룻의 두려움과 수치의 그 근원을 잘 알고 해결해 주었던 것처럼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두려움과 수치를 가진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잘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아스가 자신을 희생해 나오미의 기업을 물러주고, 룻의 수치를 덮어주고, 남편이 되어 함께하며 두려움과 수치로부터 보호해 준 것 처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죄의 문제를 해결하심으로 우리의 남편이 되시고 성령으로 함께 해주심으로 우리를 두려움과 수치로부터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두려움과 수치를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를 보호해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일인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시고, 굳게 믿게 될 때 저희는 세상과 사람과 질병과 죽음의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지고 수치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졌던 관계가 회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일이란 무엇인가요?
2. 성도와의 친밀감을 회복하시는 것입니다.(12-13)
[12] 참으로 나는 기업을 무를 자이나 기업 무를 자로서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으니 [13]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보아스는 자신이 기업을 물러주고자 했지만 기업 무름에 대한 율법은 혈연적으로 가장 가까운 친척에게 우선적으로 책임을 지우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이 기업을 물러준다면 그것을 따르는게 좋다고 말합니다. 사실 가까운 친척은 룻과 나오미에 대해 보아스만큼 함께하지 못했고, 그래서 잘 알지 못하고, 그래서 사랑으로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룻과 나오미나, 룻기를 읽는 모든 사람들은 보아스가 기업을 물러주길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모든 사람이 그것을 원할지라도 보아스가 기업을 물러주는 것 보다 하나님의 뜻인 율법을 따라 기업을 물러주는 것이 옳기 때문에 보아스가 그게 좋다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13b]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리라...
하지만 그 사람이 기업 무름을 원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맹세코 자신이 기쁘게 그 책임을 이행하겠다고 말합니다. 사실 누구보다도 보아스 자신이 기업 무름을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렇다면 도대체 이 기업 무름이라는 것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일까요? 저희가 기업 무름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먼저 기업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보통은 성경에 나타나는 이 기업을 하나님께서 주신 땅이라고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성경은 땅 뿐만 아니라 땅에서 나는 산물들과 율법과 자식까지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업이라고 합니다.
시 105:44 여러 나라의 땅을 그들에게 주시며 민족들이 수고한 것을 소유로 가지게 하셨으니
가나안을 처음 정복할 때 하나님께서는 땅 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들이 수고하며 농사지은 소산물들도 소유로 갖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소유'가 기업과 같은 단어입니다. 기업은 하나님이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소유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기업이라는 것이 단순히 땅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소유물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신 33:4 모세가 우리에게 율법을 명령하였으니 곧 야곱의 총회의 기업이로다
야곱의 총회라는 것은 야곱의 후손인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하는데요, 율법이 백성들의 기업으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적 생명의 기반으로 땅과 소산물을 소유하게 하셨을 뿐 아니라 영적 생명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저희의 소유로 주신 것입니다.
시 127:3a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여기서 여호와의 기업이라는 말은 여호와께서 주신 기업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이나 율법을 자식을 통해 대대로 물려줄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식을 기업으로 주신다는 것은 땅과 율법을 영원한 유산으로 소유하게 해주시겠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모든 기업은 원래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의 기업이 되신다고까지 말합니다.
애 3:24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런데요, 놀랍게도 이렇게 저희가 하나님을 기업으로 소유하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도 저희를 기업으로 소유하신다고 말합니다.
시 33:12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았다는 것이 하나님을 나의 기업으로 소유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백성들은 하나님의 기업, 하나님의 소유로 선택된 자들이라고 말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과 백성이 서로를 소유한다는 것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잘 드러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레 26:12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
결국 저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땅에 속해서 살고, 하나님께서 때에 따라 공급해주시는 물질들에 의존해 살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고, 말씀으로 다스려 주시는 것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기업으로 소유한 삶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저희를 소유하심으로 우리의 아버지 되시고, 우리의 남편이 되시고, 우리의 주인 되시는 서로를 소유한 깊은 소속감, 깊은 친밀감을 갖는 관계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를 아버지와 자녀들, 남편과 아내라는 친밀한 관계로 자주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깊고 친밀한 관계는 하나님과 백성 간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시는 땅은 백성들이 공평하게 나눠서 소유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들은 그냥 각자 땅에서 각자 살아가는 개개인들이나 지파 이기주의 집단이 아니라 연합된 하나의 나라로서 친밀감을 누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국 하나님과 백성, 백성과 백성이 서로 소유하고, 서로 안에 거하며, 친밀감과 연합을 누리게 하시기 위해 기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기업을 사람은 왜 잃게 되었나요? 바로 죄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땅인 에덴동산을 잃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써 하나님의 율법을 잃어버렸습니다. 게다가 이런 부모로부터 죄를 물려 받은 가인으로 인해 아벨이라는 자식도 잃었습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의 깊고 친밀한 관계가 깨졌고, 인간들 서로 간에도 죄 때문에 친밀한 관계가 다 깨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런 죄인 되었을 때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그 죄값을 치르시고 저희의 기업을 물러주셔서, 하나님과 그 백성들의 그 깊은 친밀감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룻기에서 보아스가 해주는 기업 무름 역시도 룻과 나오미가 엘리멜렉의 죄로 인해 잃어버렸던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회복시켜주는 일입니다. 엘리멜렉의 역시도 죄된 선택으로 땅과 자손뿐만 아니라 율법도 잃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돌이키기 위해 흉년을 주셨는데 그것을 피해 땅을 떠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다스림, 율법을 떠났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업 무름이 핵심 주제인 룻기에서 룻과 보아스가 함께하며 친밀감이 회복되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룻을 처음 만났을 때 이름을 물어봤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땅에 머물게 하고, 함께 식사를 하고, 함께 밤을 새우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으며 룻과의 친밀감을 회복합니다. 그리고 이런 친밀감의 회복은 보아스가 룻을 부르는 호칭의 변화에서 나타납니다.
[5] 보아스가 이르되...이는 누구의 소녀냐... [8]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11b]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처음에 보아스에게 룻은 그저 소녀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보아스의 밭에 머물러 함께 식사를 하며 딸처럼 여기게 되었고, 떄가 되자 결국은 자신의 아내로서 자격을 갖춘 현숙한 여인으로 대우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룻기에 나타나는 기업 무름 역시 그저 잃어버린 땅을 다시 찾아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과 백성들, 백성들과 백성들 간의 친밀감의 회복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보아스의 모습은 예수님을 모형하는 것이고, 예수님은 예수님과 성도들이 친밀감을 회복하고 그것을 영원히 누리게 해주신 것입니다.
사실 오늘 첫 번째 대지에서 살펴봤듯이 기업을 물러주는 것과 자손을 낳아주는 것과, 결혼을 통해 영원히 함께하는 것은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두려움과 수치심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업 무름이라는 것이 친밀감의 회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려움과 수치심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친밀감이 회복되어야 해결되는 것입니다. 저희가 여전히 세상을 두려워하고, 수치심으로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의 친밀감이 온전히 회복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려움과 수치심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인정하게 되셨다면, 그 친밀감을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행하시는 예수님께 나아와야 되구요, 그 친밀감을 회복하는 도구인 말씀과 기도의 자리에 나아와야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께서 오늘 말씀을 통해 이렇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통해 하나님과의 친밀감이 회복되고 두려움과 수치로부터 보호를 받아 참 평안과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