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29일 주일예배 설교문/ 장우현 목사
[1] 그 후에 아하수에로 왕의 노가 그치매 와스디와 그가 행한 일과 그에 대하여 내린 조서를 생각하거늘
[2] 왕의 측근 신하들이 아뢰되 왕은 왕을 위하여 아리따운 처녀들을 구하게 하시되ㅌ
[3] 전국 각 지방에 관리를 명령하여 아리따운 처녀를 다 도성 수산으로 모아 후궁으로 들여 궁녀를 주관하는 내시 헤개의 손에 맡겨 그 몸을 정결하게 하는 물품을 주게 하시고
[4] 왕의 눈에 아름다운 처녀를 와스디 대신 왕후로 삼으소서 하니 왕이 그 말을 좋게 여겨 그대로 행하니라
계획은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방법이나 시간을 미리 생각해서 나의 뜻을 정해놓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 계획이라는 단어가 생각, 뜻이라고도 사용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은 저희의 구원 목적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이뤄지길 원하시는 것과 같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란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에는 아하수에로 왕과 측근 신하들이 어떤 계획을 논하고 실행하는 모습이 나오는데요, 거기에는 그들의 목적이 은밀하게 숨어 있습니다. 그런데요 세상 사람들이 자기 목적을 위한 계획을 원하는대로 형통하게 이루는 것 같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실현하시는 섭리가 비밀스럽게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구원 계획은 무엇인가요?
1. 하나님의 자녀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1장에서 왕은 아내를 자랑해 영광을 얻으려다가 오히려 큰 수치를 당했습니다. 그러자 큰 분노가 일어나서 그 수치를 왕후에게 뒤집어 씌웠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후회가 된 것 같습니다.
[1] 그 후에 아하수에로 왕의 노가 그치매 와스디와 그가 행한 일과 그에 대하여 내린 조서를 생각하거늘
그런데 왕은 왕후에게 한 잘못을 후회하지는 않고 사람들에게 자랑할만하고, 쾌락을 만족시켜주던 예쁜 왕비를 성급히 내친게 후회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왕이 원하는게 무엇인지 고민하는 측근 신하들이 후회하는 왕을 위해 이런 계획을 내놓았기 때문입니다.
[2] 왕의 측근 신하들이 아뢰되 왕은 왕을 위하여 아리따운 처녀들을 구하게 하시되 [3] 전국 각 지방에 관리를 명령하여 아리따운 처녀를 다 도성 수산으로 모아 후궁으로 들여 궁녀를 주관하는 내시 헤개의 손에 맡겨 그 몸을 정결하게 하는 물품을 주게 하시고 [4] 왕의 눈에 아름다운 처녀를 와스디 대신 왕후로 삼으소서 하니 왕이 그 말을 좋게 여겨 그대로 행하니라
전국의 백성들의 딸들을 모아 깨끗히 씻기고, 향기가 나게 해서 왕의 쾌락을 채우고, 또 제일 아름다운 여자를 왕후로 뽑아서 내가 그런 여자를 소유할 능력이 있다고 자랑해 영광을 얻으라는거에요. 결국 왕이 1장에서 원했던 자기 영광을 드러낼 뿐 아니라, 쾌락까지 충족시킬 목적을 위해 자신들이 지켜줘야 할 백성들의 딸들을 이런 욕망의 희생양으로 삼는 계획을 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왕 노릇하며 살아가는 모든 죄인들의 욕망을 위한 인생 목적과 계획, 매일 뭘 생각하고 사는지를 드러내주는 장면입니다.
창 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여기서 계획이 악하다는 것은요, 왕과 신하들과 같이 인생의 목적이 자기 욕망을 채우는데 매몰되어 있고, 그 목적을 위해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가 깨질지라도 자기가 원하는 계획대로 이루려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요, 이 왕처럼 원초적인 쾌락을 위해 대놓고 이웃을 희생물로 삼는 사람도 있지만, 어렸을 때부터 가졌던 꿈을 위해, 가지고 싶었던 것을 사기 위해, 가고 싶던 곳을 가거나, 먹고 싶던 것을 먹기 위해서라는, 소박해 보이지만 눈에 보이는 육신의 삶의 목적에 매몰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요, 자기 꿈이 없는 사람도 많은데 어린 시절부터 철들어서 꿈이 있고, 그 목적을 위해 내 앞날을 계획하는 일, 얼마나 멋지고 대견한가요? 그리고 그런 자녀들의 꿈을 이루어줄 목적으로 어려운 형편 가운데 평생 자신을 희생할 뜻을 가지고 삶을 계획해오신 부모님들, 불신자라고 해서 그 목적과 계획도 무조건 악한 것일까요? 그리고 인도주의적인 목적으로 봉사하기 위해 밤낮 계획하고 헌신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교회 다니는 사람들보다 더 선해 보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 모든 계획이 악하다고 하실까요? 아무리 선해 보이는 목적을 위해 고상한 계획을 세울지라도 하나님 없이 내가 보기에 좋아보이는 목적을 위해, 내 능력과 방법과, 내가 정한 때에 이뤄낼 수 있다고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 죄이고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를 올바른 목적을 향한 과녁을 벗어난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악한 계획의 반대인 선한 계획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감사하기 때문에, 내 능력이 아니라 은혜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 되는 것, 그것이 구원이거든요. 그 목적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방법과 때가 담긴 계획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악한 계획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그 선한 구원 계획을 실현하시기 위해 개입을 해오시는데요, 그것을 섭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도 악한 계획 속에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비밀스럽게 감추어져 있습니다.
[8] 왕의 조서와 명령이 반포되매 처녀들이 도성 수산에 많이 모여 헤개의 수하에 나아갈 때에 에스더도 왕궁으로 이끌려 가서 궁녀를 주관하는 헤개의 수하에 속하니
전국의 처녀들이 모이면서 에스더도 이끌려갑니다. 악한 계획이 순탄하게 진행되면서 하나님 자녀가 무력하게 욕망의 희생양으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이 게 왕후가 되서 성공하는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은 19절을 통해 더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19] 처녀들을 다시 모을 때에는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았더라
에스더를 이미 왕후로 뽑은 후에도 처녀들을 다시 모으는 것입니다. 왕후를 새로 뽑는다는 명목 아래 끊없는 쾌락을 위한 목적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악한 계획은 형통하게 진행됩니다.
[12] 처녀마다 차례대로 아하수에로 왕에게 나아가기 전에 여자에 대하여 정한 규례대로 열두 달 동안을 행하되 여섯 달은 몰약 기름을 쓰고 여섯 달은 향품과 여자에게 쓰는 다른 물품을 써서 몸을 정결하게 하는 기한을 마치며
몰약과 향품은 당시 최고급 재료들인데요, 왕의 쾌락을 위해 열 두 달 동안이나 바르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 욕망을 추구하는데 부족함이 없고, 더 잘되고, 고급스럽게 사는 것입니다. 이제 에스더가 희생 될 때가 다가오는데,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서 섭리하고 계신 것일까요?
그런데요, 저희도 살다보면 하나님이 저희 삶에 섭리를 하시는지 애매할 때가 있습니다. 세상은 세상 방법대로 잘만 굴러가면서 나날히 발전하는 것 같고, 사람들은 자기 원하는대로, 욕심대로 살아도 당장 심판 받지 않고 오히려 삶이 형통하게 잘 풀리는 것 같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예수님 믿는다고 배려하고, 나누고, 섬기고, 용서하며 살면, 누가 알아 주는 것도 아니고, 내 몸만 고단해지고, 인생이 불안해질 뿐이지 하나님이 어려움을 해결해주셔서 형통하게 해주시지 않는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에스더와 함께 나오는 어떤 물건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섭리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몰약과 향품입니다. 몰약과 향품은 당시 장례할 때, 그 죽음의 냄새를 덮어 사랑하는 고인의 존엄을 지켜주고 애도하는데에도 쓰였습니다. 그래서 에스더가 몰약과 향품을 바르는 모습은요, 백성들을 구원할 목적을 위한 계획으로 사랑하는 자녀 에스더를 희생제물로 준비하기 위해 하나님이 섭리하시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믿기지 않으실까봐 에스더의 상황과 비슷한 창세기의 요셉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을 죽일 계획을 했습니다. 그 계획의 목적은 아버지 사랑을 독차지 하던 요셉을 죽여 공평하게 사랑받기 위함 입니다. 부모님에게 공평하게 사랑받는 것을 욕망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뜻을 어기며 그 목적을 이루려는 것은 아무리 목적이 선할지라도 욕망의 경계선을 넘은 악한 계획입니다. 그런데 그 악한 계획은 막힘없이 진행이 돼서 요셉이 구덩이 속에 들어갔습니다. 도대체 이때 하나님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요?
그런데요, 요셉이 죽을뻔한 그 때에 형제들은 갑자기 계획을 수정해 마침 그 때 지나가던 상인들에게 팔게 됩니다. 바로 이 때 하나님께서 형들의 마음에 죽이기까지는 하지 않는 은혜를 베풀수 있도록 개입해오신거에요. 그런데 동생에게 미안하다하며 집으로 데려가진 못하고 팔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가 부족했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요셉이 희생되는 것이 이 형들을 포함한 모든 하나님 자녀들을 구원하시려는 목적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요셉의 삶을 보고 형통하다고 합니다. 형통은 세상이 보기에 잘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섭리하셔서 구원 계획이 성공적으로 실현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세상의 악한 계획 속에서 요셉이 모형하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나의 옛사람도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게 형통한 삶인 것입니다. 그게 구원이니까요. 그런데 그 때 형제들 곁을 우연히 지나가던 상인들이 누구였나요?
창 37:25 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다가 눈을 들어 본즉 한 무리의 이스마엘 사람들이 길르앗에서 오는데 그 낙타들에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가는지라
성경에는 불필요한 내용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몰약과 향품이 가득 실린 짐칸, 그 관 속에 넣어서 몰약과 향품으로 자식을 잃은 애통함을 애도하며 구원 계획을 이루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 에스더도 같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선한 목적을 이루신다고 하지만 자녀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시고 침묵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몰약과 향품으로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몰약과 향품을 바르는 것만으로 큰 나라의 왕후를 뽑는 나라는 없습니다. 궁중예법과, 그 나라와 주변국의 역사, 정치와 인성도 가르쳐서 미모와 지혜가 가장 뛰어난 사람을 뽑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왜 몰약과 향품을 발라 정결하게 한다는 내용만 있을까요? 이유는 두 가지 입니다.
먼저는 값비싼 향품들로 더 강력한 쾌락을 만족시키려는 그 은밀하게 숨어있는 인생 목적과, 그걸 자기 힘으로 이루려는 악한 계획을 드러내기 위해서 입니다. 사실 이 왕과 신하들, 역사적으로는 정말 뛰어나고 영광스러운 사람들입니다. 함부로 얕잡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런데요, 세상 영광스러운 물질과 업적으로 가리고 있기 때문에 죄가 드러나기 어려운데요, 성경은 칼로 골수를 쪼개듯이 그 부분을 드러내주는 것입니다. 저희도 그렇습니다. 이렇게 보면 다 좋으시고 뛰어나신 분들이에요. 그래서 죄인 같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여러 말 없이 딱 죄를 드러내줍니다.
몰약과 향품으로 정결하게 한다는 내용만 나오는 두 번째 이유는요, 그렇게 드러내신 죄를 죽음이라는 방법으로 정결케하시겠다는 계획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저희는 좋은 샴푸와 화장품으로 육신을 정결하게 하고 향기 나려고 온 인생을 집중하는데요, 하나님은 그런 옛사람이 죽어 죄로부터 정결케 되서 영혼에서 은혜의 향기가 나도록 섭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9절 말씀에 이런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가 요셉의 때와 같이 나타납니다.
[9] 헤개가 이 처녀를 좋게 보고 은혜를 베풀어 몸을 정결하게 할 물품과 일용품을 곧 주며 또 왕궁에서 으레 주는 일곱 궁녀를 주고 에스더와 그 궁녀들을 후궁 아름다운 처소로 옮기더라
형제들이 요셉에게 그런 것처럼 이 내시가 에스더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더 나은 대우를 해주고 있는데요, 여기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섭리를 통해 해게가 '너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믿음의 사람이니까 뒷문으로 도망쳐서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에스더를 희생제물의 대표인 왕후로 못박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왕에게도 이어져서 왕의 사랑을 받으며 왕후로 뽑힙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이 에스더를 예쁘게 해주셔서 미인대회에서 1등했다는 성공 스토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섭리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완악한 상태 그대로 두기도 하시고, 은혜로 부드럽게도 하시면서 자녀를 희생제물이 되는 자리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방박사들이 예수님께 드린 선물 세 개 중에 두 개가 유향과 몰약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저희의 죄를 정결케 하시겠다는 메시지가 담긴 선물입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에서 한 여자가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부었는데요, 예수님이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막 14:8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아들의 장례식을 애통한 마음으로 준비하고 계시고,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희생시킬 계획이 형통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이 동방박사들과 여자의 손을 통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생이 인간의 악한 계획에 휘둘린 것 같고, 하나님은 침묵하신 것 같지만, 오히려 그 십자가의 자리는 구원 목적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선한 계획이자 섭리의 자리였던 것입니다.
저희도 왕과 신하들과 같이, 요셉의 형제들과 같이, 그리고 예수님을 죽인 바리새인과 같이 자기 욕망을 위한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에게 왕노릇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다고 하면서도 내 몸의 편안함과 즐거움과 부와 지위와 자존심을 위한 악한 계획을 이루기 위해 그 소원을 마음에 두고 기도하며 살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저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를 구원하시기 위해 창세 전부터 예수님을 희생할 계획을 준비하셨고, 수천년간 섭리해 오신 결과가 바로 그 복음을 믿고 여기 모인 저와 여러분들인 것입니다.
그런데요, 하나님의 이 계획은 예수님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렇게 저희가 하나님의 비밀스런 계획과 섭리의 은혜를 알게 되면요, 그 감사함으로 구원의 완성을 향한 비밀 계획에 동참하게 됩니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완성될 구원 계획을 위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저희도 산 제물이 되길 원하시는거에요. 여기엔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먼저는, 욕망을 목적으로 살려는 저희의 옛 자아를 죽이고, 희생해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이 죄로부터 죽어 정결하게 되는 구원의 목적이자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산 제물로서 이웃을 섬기는 모습을 통해 먼저 희생제물 되신 예수님의 은혜를 온 세상에 드러냄으로 구원의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유명한 구절 뒤에 산 제물이 되어 죽어서 정결하게 되어 간다는 것이 어떤 사랑과 섬김으로 나타나는지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14]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이게 그냥 들으면 좋은 말인데요, 내가 이렇게 살려고 하면 내가 죽을 것 같은 일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게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라는 것을 믿지를 못하는거에요. 이게 무슨 구원이야! 하면서요.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비밀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비밀을 알고 믿어 은혜가 충만한 성도들만이 나의 옛자아를 죽이고, 이웃을 섬기는 이 계획에 동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는요, 세상 방법과 페이스대로 따라가지 않으면 세상의 희생양으로 짓밟힐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이런 구원 계획을 알아도 양다리 걸치기가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악한 계획 속에 비밀스럽게 숨겨진 하나님의 계획을 영적 눈을 떠서 볼 수 있기를, 더욱 굳세게 믿을 수 있기를 소원하며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동참하는 영광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구원 계획은 무엇인가요?
2. 하나님의 자녀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녀를 보호하는 것은 자녀를 희생하는 것과 동시에 있을 수 없는 모순된 것입니다. 보호라는 것은 희생되지 않도록 지켜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의 딸들을 희생시켰던 측근 신하들은요, 그들을 보호하지 않는 모순 없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2] 왕의 측근 신하들이 아뢰되 왕은 왕을 위하여 아리따운 처녀들을 구하게 하시되
이 구절을 보면 측근 신하들이 왕을 위하여 이 계획을 마련한 것 같지만 1장부터 누구를 위한다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3 그의 모든 지방관과 신하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니...
1:5 ...왕이...귀천간의 백성을 위하여...잔치를 베풀새
1:9 왕후 와스디도...여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니라
2:18 왕이 크게 잔치를 베푸니 이는 에스더를 위한 잔치라
왕과 왕후는 신하들, 백성들, 여인들, 심지어 에스더를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고 하지만 사람들을 모아 자기 영광을 자랑했습니다. 결국 에스더서에서 누구를 위한다는 표현은 선한 목적으로 포장해 자기를 위한 목적으로 살아가는 악한 계획을 가진 사람들을 풍자하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신하들의 계획도 사실 자신들을 위한 것입니다. 왜그럴까요? 이들은 왕의 기색을 살피는 최측근 신하들이기 때문에 와스디를 폐위하는 조언과 결정을 하는데 참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변덕스러운 왕이 후회를 하며 와스디를 다시 불러들이면, 자신들의 지위와 부와 목숨까지도 위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하들은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 자식 같이 보호해야 할 백성들의 자녀들을 욕망의 희생양으로 삼을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모습이 태초부터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최초의 자녀였던 가인은 최초의 살인을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나서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최초의 성을 짓고 자기 아들 에녹의 이름을 붙여 에녹성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자신을 보호할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시니까, 생명과 지위와 부를 보호하기 위해 자기 아들을 도구로 삼았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자기 아들만 그랬을까요? 가인은 그 성을 다스리는 족장으로써 보호해야 할 백성들의 아들들 역시 자신을 보호하는 군대로 삼았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선한 목적으로 포장해서요. 그리고 백성들의 딸들에 대해서는 지금 아하수에로 왕과 그 측근 신하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자녀들을 보호하지 않고, 자기 욕망을 위해 자녀들을 희생시키는 가인의 도시가 번성하고 확장됐을 때 하나님은 인간이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다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도 노아와 홍수와 방주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보여주셨습니다. 홍수가 죄를 정결하게 하는 죽음의 심판을 상징하는데요, 심판에서 살아 남을 수 없는 죄인인 노아를 대신해 그 홍수 속에 잠겨서 희생하며 보호한 방주가 메시아를 보여주거든요.
그렇다면 아무리 구원을 위해서라지만 그렇게 자녀를 희생하는 계획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에스더를 보호하실 수 있으실까요? 그것은 에스더의 양아버지 모르드개의 모습들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10] 에스더가 자기의 민족과 종족을 말하지 아니하니 이는 모르드개가 명령하여 말하지 말라 하였음이라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유다인임을 먼저 밝히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에스더를 왕후로 성공시키기 위해 신앙을 저버린 모습이 아닙니다.
이 왕궁에는 앞으로 큰 위협이 되는 하만 뿐 아니라 하만과 같은 종족의 사람들과 이스라엘의 대적이 되는 다른 민족의 왕족과 귀족도 있던 것 같습니다. 페르시아는 정복한 민족의 왕족과 귀족을 왕궁으로 불러 회유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돌이키면 그 민족 전체를 안정되게 다스릴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들은 유다인인 에스더가 왕후가 되거나, 왕후가 안되더라도 후궁으로 왕궁에 머물게 되는 것도 시기했을 것이구요, 후보를 뽑는 초기 단계에서부터 에스더를 모함해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대적인 마귀는 하나님의 계획을 막으려고 메시야가 준비되는 초기부터 방해를 합니다.
메시야의 모형인 모세 역시도 아기로 태어나고 얼마 안되서 바로왕을 통해 죽이려고 했구요, 요셉 역시도 형제들을 통해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역시도 아기 때 헤롯 대왕을 통해 죽이려 했습니다. 이 유아 살해 위협들은 모두 하나님보다 왕노릇하고자 하는 세상 사람들이 자신이 이미 누리던 기득권을 보호하고자 참된 왕으로 오시는 메시야를 준비조차 되지 못하게 막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모세, 요셉, 예수님 모두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셨죠. 에스더 역시도 준비되는 초기부터 대적의 위협이 있었고, 하나님은 모르드개를 통해 보호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2장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왕의 신하 두 명이 왕을 암살하려는 것을 모르드개가 발견하고 그것을 막았다는 일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은 나중에 모르드개가가 높아지게 되서 하만을 처치한다는 단순히 미래를 위한 포석이 아닙니다. 왕이 죽으면 왕후였던 에스더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이것은 메시아를 죽이려는 초기 계획에 실패한 마귀가 하나님의 계획을 지속적으로 방해하지만, 메시아의 사명을 완수하기까지 하나님께서 보호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세도 그렇게 아기 때 건짐을 받은 이후에도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이끌기까지 애굽 군대와 이방민족과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도 생명과 메시아 직책에 위협을 받았습니다. 요셉도 구덩이에서 빠져 나온 후에도 보디발의 아내에게 죽임 당할 뻔 했고, 감옥에서 평생을 지내다가 죽을뻔했습니다. 예수님도 죽을뻔한 유아기를 지난 후에도 유대인들의 위협에 돌에 맞거나 낭떨어지에 떨어져 죽으실뻔한 적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마귀의 지속적인 공격으로부터 모르드개를 통해 철저하게 보호하고 계신다는 것을 다양한 모습을 통해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요, 하나님께서 이렇게나 보호를 하시지만 1대지에서 본 것처럼 결국 자녀는 희생을 당하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하고 하나님 자녀들을 보호할 수 있을까요? 모르드개가 에스더를 보호한 마지막 모습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7] ...에스더는 부모가 없었으나 용모가 곱고 아리따운 처녀라 그의 부모가 죽은 후에 모르드개가 자기 딸 같이 양육하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라와 성전을 잃고 이 먼 곳으로 유배되어 와서 사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요, 에스더는 부모까지 잃은 고아였습니다. 이런 에스더는 부모님 같은 하나님을 잃어서 고아 같이 의지할 곳 없이 세상의 유혹과 위협 속에 방황하게 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표합니다. 바로 그 에스더를 양아버지 모르드개가 딸과 같이 보호하며 양육해준 것인데요, 하나님 아버지가 저희를 보호하고 양육하시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딸과 같이 양육해주었다는 표현은 단순히 먹이고 입혔다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양육했다는 것인데요, 그것이 15절에 암시되어 있습니다.
[15] ...에스더가 차례대로 왕에게 나아갈 때에 궁녀를 주관하는 내시 헤개가 정한 것 외에는 다른 것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모든 보는 자에게 사랑을 받더라
에스더가 어떻게 다른 여자들보다 사랑스럽게 보였냐면요, 다른 여자들은 경쟁에서 상대를 짓누르고 성공하려는 욕망 때문에 더 예뻐보이려고 정해진 것 외의 것들도 요청을 한거에요. 그런데 그런 옛사람의 욕망을 죽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구원이기 때문에 성경의 모든 내용은 그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말씀으로 양육 받은 에스더는 자기 욕망을 추구하지 않으니까 정해진 규율에 순종했구요, 해게와 왕 뿐만 아니라 에스더를 섬기는 종들도 사랑하고 존중해서 사랑 받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도들을 말씀으로 양육하시고, 말씀 안에 거하게 하셔서 은혜로 보호 해주시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말씀 안에 거한다는 것은 저희가 에스더처럼 죽기까지 말씀에 순종해야 구원을 얻고 보호를 받는다는 율법주의적, 도덕적 의미가 아닙니다. 말씀에 순종하지 못해서 이 페르시아에 유배된 백성들을 대신해 에스더가 말씀에 온전히 순종한 것처럼, 저희를 대신해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안에 거하면 저희가 어떻게 보호를 받게 되나요?
예수님은 구원 계획이 담긴 말씀에 순종하심으로 희생당하셨지만 부활하셨습니다. 그 부활과 영생은 이 세상의 모든 악한 계획과, 모든 고난과 슬픔과 죽음으로부터 지키시는 누구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저희가 말씀이시고, 부활이시며,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고 그 안에 거하면, 어떤 보호를 받는지 그 계획과 뜻을 알려주셨습니다.
요 6:38-39 [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을 믿고 그 구원 계획에 동참해 내 자아가 죽고, 나를 남보다 낮추며 섬기느라 육신과 마음이 너덜너덜 해지고 심지어 육신의 생명을 잃는 순교를 당할지라도, 오히려 그 믿음으로 부활과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녀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녀를 희생하시면서도 보호하신다는 계획의 모순을 해결하기 때문에 죽음과 생명, 십자가와 부활의 역설이라고 하고 지혜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하나님의 이 계획, 너무 잘 알겠는데요, 내가 너무 힘든데 도대체 얼마나 언제까지 죽어야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각자의 믿음의 크기와 그 믿음을 주시는 하나님의 때에 달려 있습니다. 그 때도 저희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정해져 있거든요. 그렇다면 그 믿음을 어떻게 자라가나요? 몇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먼저는 오늘 말씀처럼, 말씀에 비밀스럽게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계획을 듣고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그 비밀을 아는 것이 지혜가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신실하신 섭리를 알게 되면 저희는 그 은혜에 감사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은혜가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은혜가 충만하면 이 땅의 것들에 매인 지옥 같은 삶에서 풀려나, 가난과 고난과, 내가 낮아지는 것과 육신의 죽음까지도 두렵지 않은 믿음이 충만해집니다. 결국 지혜와, 은혜와, 믿음이 충만하다는 것은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바로 생명이고, 성령이 함께하신다는 것이 영생을 얻었다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먼저 성령이 충만하신 분이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나와 이웃의 구원을 위해 자기 십자가를 죽기까지 지며 부활과 영생이라는 복을 이 땅에서도 누리시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지혜와, 은혜와, 믿음이 충만케 되셔서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구원 계획에 동참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