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30일 주일예배 설교문/ 장우현 목사
히 10:9-11
[9] 너와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 죽음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영한 규례라
[10]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
[11] 또 나 여호와가 모세를 통하여 모든 규례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치리라
여러분들께서는 코타키나발루가 어떤 곳이라고 알고 계시나요? 네, 대부분은 여행지나 신혼 여행지로 알고 계실꺼에요.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저와 신학대학원 동기 목사님이 작년에 코타키나발루 한인교회 담임목사님으로 부임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곳이 선교지라는 개념이 생기게 되더라구요. 그리고 그 분을 통해서 그곳이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가난한 이슬람 교인들이 모여사는 곳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구요, 그 지역 사람들이 체면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민망하게 하는 일을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여행지라고 하는 선입견과 그 나라와 문화에 대한 무지가 그곳과 사람들을 오해하기 쉽게 만드는 것입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 나라와 지역에 대해서도 이런데, 몇 천년 전의 중동 문화권의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어떨까요?
그래서 성경의 여러 개념들은 알기가 쉽지 않고, 저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선입견들에 비추어 보게 되면 성경을 오해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특히나 한국 교회는 거룩의 개념에 대해 큰 오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룩에 대한 오해를 하면요, 저희 노력으로 거룩해지기 위한 율법주의를 만들고, 그렇게 거룩을 얻어서 이 땅에서 복을 누릴 수 있다는 기복주의를 만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큰 은혜를 베풀어주셨지를 잊게 만들고 교회의 존재 목적을 뒤흔드는 큰 문제를 만들게 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고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려드리는 목적을 가진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거룩에 대해서 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밀접한 관계를 맺는 속됨, 부정, 정결에 대해 함께 알아야 합니다.
특히나 오늘 본문에는 거룩과 속됨, 부정과 정함을 분별하는 것을 자손들에게 가르치라는 말씀이 나오기 때문에 저희와 다음 세대에 큰 의미를 알게 해준다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말씀으로 거룩과 속됨, 부정과 정함을 분별하면 어떤 유익이 있나요?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됩니다.
창세기부터 출애굽기 스토리의 핵심을 뽑는다면 인간이 하나님이 임재하시던 에덴동산에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가 출애굽기 마지막 부분에 성막이 세워지며 다시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가까워지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죄가 없던 에덴동산과는 달리 죄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 죄를 용서 받는 특별한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레위기 1장부터 9장까지의 제사제도인데요, 그래서 성막이 세워지는 출애굽기 마지막 부분 이후에 성막에 임재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결국 누가, 어떤 제물로, 어떤 방법으로 제사를 드려야하는지에 대한 복잡한 내용은, 죄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도록 죄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제사 방법이야말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죄인이었던 저희가 하나님께 다시 나아가는 길, 여호와의 길, 은혜의 길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있던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아론의 아들들인 나답과 아비후는 그 은혜에 무관심하고 무지해서 잘못된 방법으로 제사를 지내 여호와의 불이 나와 죽게 되었습니다. 모세와 아론과 같은 그 윗세대들은 애굽과 광야에서 그런 하나님을 경험하고 배웠지만 다음 세대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나답과 아비후 같은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지, 자신이 얼마나 부정한지, 자신이 얼마나 큰 은혜로 정결함을 받고, 거룩히 여김을 받아 제사장이 되었는지를 알지 못해서 그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한 것이죠. 결국 하나님의 이런 은혜 대해 무관심하고 무지하다는 것은 죄와 부정에 대해서도 모른다는 것이고, 그 죄와 부정이 용서 받고 깨끗해지는 정결과 용서에 대해서도 모르고, 각각에 대해 모르는 것 뿐만 아니라 그 관계도 잘 모르고 무관심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건 바로 뒤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말씀으로 거룩과 속됨, 부정과 정함의 분별을 자손들에게 가르치도록 하신 것입니다.
[9] 너와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 죽음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영한 규례라 [10]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 [11] ...모든 규례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치리라
이 분별하라는 핵심 내용을 자손이라는 단어가 앞뒤로 감싸고 있죠. 이게 자손을 가르쳐야하는 핵심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6장에는 자녀에게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고, 손목에 매고, 이마에 붙이고,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붙여 놓으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유대교인들은 지금도 아이 때부터 레위기부터 암송을 시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자녀들에게 말씀을 암송시켜도 큰 의미가 없습니다. 이건 단순히 말씀을 암송하라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통해 거룩과 속됨, 정함과 부정을 분별할 수 있도록 가르쳐서 말씀 속에 담겨 있는 복음의 메시지를 통해 은혜로우신 하나님만을 믿고 경외할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복음의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오늘 본문에는 그 분별함에 앞서서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고 하는 것일까요? 성도들에게 술을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일까요? 성경은 돈과 마찬가지로 술 자체를 죄악된 것으로 규정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독주에 취해서 분별력을 잃고 욕망대로 사는 것은 성령 충만함으로 말씀을 분별하고 순종하며 사 것의 반대되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독주를 마시지 말라는 것은 단순히 술을 마시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거룩과 속됨, 부정과 정함의 분별을 방해 하는 세상적인 생각과 욕망에 취하지 말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저희가 술을 안마신다고 성령이 충만해져서 영적 분별력이 또렷해지나요? 아닙니다. 술 먹지 않아도 세상적인 생각과 욕망에 똘똘 뭉친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도 술을 안먹지만 성령 충만하지 않은 때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세상은 독주와 같은 죄와 욕망에 취해 있습니다. 마치 술에 취하면 인간이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듯이 욕망에 취해 해야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게 됩니다. 지금 칠레의 한 사막에는 옷으로 된 쓰레기 산이 엄청나게 규모가 커지고 있다고 합니다. 거기엔 아직 텍도 떼지 않은 새 옷도 많다고 합니다. 이건 패스트 패션이라고 부르는 패션 산업이 인간의 욕망을 자극한 결과입니다. 사람 각각이 원하는 디자인과 색이 있고 상표가 어디꺼냐, 주머니가 달렸냐 안달렸냐. 재질이 무엇이냐.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지금 유행 하는거냐 안하는거냐에 따라 제대로 된 옷이 옷장에 들어가기도 하고 폐옷함에 들어가기도 합니다. 물론 인간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닮은 모습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아름다움을 넘어 욕망의 끝까지 추구하려들고, 추구하도록 자극하기 때문에 파괴적인 결과를 만드는 것입니다. 입는 것 뿐인가요? 먹는 것 역시도 더 자극적이고 더 고급화된 것을 추구합니다. 식욕을 미화시키는 콘텐츠가 인기를 끌고, 그런 방송인들이 유명세를 탑니다. 집과 차와 삶의 모든 영역이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이런 세상에 눈이 닿고, 촉각이 닿고, 미각과 후각이 닿으면 저희도 모르는 사이에 온 마음과 영혼이 세상적 욕망에 취하게 되서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을 살지 못하고, 살지 말아야 할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레위기에서는 먹는 것, 입는 것, 사는 곳, 태어남과 죽음과 같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거룩과 속됨과 부정과 정함을 분별할 수 있는 장치들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세상과 욕망에 취하지 않을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룩과 속됨 부정과 정함은 각각 어떤 의미이고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을까요? 함께 표를 보며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거룩과 속됨의 분별입니다. 거룩은 하늘에 속하고, 속됨은 땅에 속해서 절대로 섞이지 못하고 닿으면 안되는 것이라는 구분을 해주는 큰 틀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속됨이란 모두가 다 나쁜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세속이라는 의미로 일반적인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의 상태를 아우르는 말입니다. 그래서 속됨의 영어 번역이 일반적인이라는 뜻의 common이에요.
그런데 이 속되다고 표현되는 세상 모든 것은 정한 것과 부정한 것으로 나뉩니다. 부정하다는 것은 죄와 죽음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레위기에서는 나병이나 피부병에 걸리면 부정하다고 여깁니다. 나병이나 피부병이 죄 때문에 걸린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질병이 들어온 것이 죄와 죽음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죽은 동물과 접촉하게 되면 깨끗하던 것이 부정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것은 죽은 동물이 죄악되거나, 죄가 옮겨 오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이 죄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여성이 월경을 하는 것도 부정하다고 합니다. 그것은 여성이나 월경을 죄악시하거나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피를 흘려서 버리는 것이 생명을 잃는 죽음과 관련되어 있고, 결국 죽음은 죄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떤 동물은 먹으면 안되는 부정한 동물이고, 어떤 동물은 먹어도 되는 정한 동물로 나눕니다. 그런데 정말 어떤 동물을 죄악되고 부정하거나 어떤 동물은 죄가 없고 깨끗한 것일까요? 이건 어떤 동물들이 진짜 부정하고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매일 먹는 음식을 통해 부정함과 정함에 대한 경각심을 잊지 않게 하는 제도적 장치인 것입니다.
당시 고대의 위생 상태와 중동의 먼지 바람으로 피부병이 몇 달에 한 번씩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월경은 매 달 있는 일이죠. 그리고 제사를 드리기 위해, 음식으로 먹기 위해 죽은 동물과 몇 주에 한 번은 접촉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음식을 먹는 일은 매일, 하루에도 몇 번은 있는 일이죠. 이렇게 일상적으로 접하는 일에 어떤 형식과 제도를 덧입혀서 주기적으로 죄와 죽음에 대한 경각심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부정함에 대한 율법을 배우고 순종하다보면요 일상 생활을 통해서 인간은 부정하게되지 않을래야 부정하게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우치게 됩니다. 이것을 통해 구원 받은 백성들일지라도 그냥 가만히 하루, 한 주, 한 달, 일 년을 살다보면 삶의 모든 영역이 부정함, 바로 죄악으로 치닫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는 메세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부정한, 죄악된 사람과는 함께 할 수 없고 진노의 불로 태워버리는 심판을 내리실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사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과 함께 하시려는 열망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죄를 깨끗하게 하시는 방법을 주셨는데요, 그것이 바로 부정함을 씻어 정하게 하는 제사입니다. 하나님과 그 뜻에 반역하는 죄는 그에 상응하는 영원한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뤄야만 용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대속제물이 죽고 피를 흘리는 제사제도를 통해 부정함이 깨끗하져 정결해지고, 죄가 용서를 받게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 정결함에 관한 율법은요, 세상에 속한 속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중재자가 필요하고, 하나님을 반역한 죄를 용서 받게 할 수 있는 제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면서요, 저희가 죄를 용서받을 수 있도록 그 중재자와 재물과 방법을 하나님께서 직접 준비해주시는 은혜를 베푸셨고, 그런 하나님께서는 저희를 용서해주시길 열망하시는 은혜로운 분이시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거룩입니다. 거룩은 죄가 없고, 세상과 그 욕망에 절대로 섞이지 않는 상태, 그래서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늘에 속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거룩한 존재는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하나님께서 거룩하다고 여겨주시는 물건이나 사람만 거룩하다고 여김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이 반영된 말씀에 순종해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아갈 때 거룩한 존재로 여김을 받습니다. 결국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이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상태는 정결함인데요, 이 인간이 거룩한 사람,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하늘늘 문을 여시고 이 속된 땅에 내려오셔서 함께 하시고, 세상적 욕망을 따르는 삶에 섞이지 않고 거룩한 삶을 살도록 말씀으로 다스려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결국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배워서 이 부정에서 정함으로, 정함에서 거룩으로 향하는 단계들을 분별함으로 여러가지 영적 유익을 얻었던 것입니다. 첫 번째로 이 세상에 속한 죄인은 세상 사람과 문화와 사고방식에 접촉하며 언제나 죄로 치달을 수 있는 부패한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이 율법을 배우고, 순종하려고 하면 할수록 부정해질 수 밖에 없음을 알게 됩니다. 사실 이것을 아는 것부터가 영적 분별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 태도를 겸손이라고 하죠. 두 번째로 죄로부터 정결해지는 일, 용서 받는 일은 하나님께서 준비해주신 유일한 중재자, 유일한 대속제물, 유일한 방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부터 용서하시길 원하시는 은혜로운 분이심을 알게 됩니다. 세 번째로 세속과 완전히 구별되신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해야만 거룩을 덧입을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순종해야만 거룩해질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친히 장막을 세우시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다스려주시는 은혜로운 분이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바로 이것을 알게 될 때 저희는 겸손과 온유로 말씀에 순종하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저희가 레위기를 읽으면서 와 정말 복잡하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느끼면 느낄수록, 이렇게 해서라도 죄인들을 용서하셔서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알게 되고 거룩한 삶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중재자 예수님께서, 대속제물이 되셔서 십자가의 방법으로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기 때문에 저희는 구약의 이 제도들을 지킬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이 구약에 나타난 거룩과 속됨, 부정과 정결을 분별하는 제도를 통해 가르치고자 했던 본질적인 메시지는 지금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저희는 예수님의 죽음과 말씀을 통해서 저희 스스로는 절대로 구원 받을 수 없고, 죄악으로 치달을 수 밖에 없는 완전히 부패한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드린 단번의 제사를 통해 영원한 정결함을 얻어서 이 죄인들이 영원히 용서를 받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정결해진 저희 몸을 장막을 삼으셔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 성령님이 함께 하심으로 거룩을 덧입혀 주시고, 성령을 통해 말씀으로 다스려주셔서 말씀에 순종하는 거룩한 삶을 사는 성도, 거룩한 무리로 여겨주십니다.
그래서 이 거룩과 속됨, 부정과 정함을 구별하고 알게 되는 것은 곧 복음의 메시지를 아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사 죄인들에게 얼마나 큰 은혜를 베푸셨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종교는 이 세상에 없고, 이런 신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오랜 역사 내내 많은 종교와 신들을 만들었지만 이 기독교와는 모두가 정 반대의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와 하나님을 세상이 나누는 종교의 범주에 넣는 것이 이렇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죄송할 정도입니다. 세상의 종교는 거룩함을 얻기 위해 은혜와 정반대되는 율법주의, 기복주의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중고등 학생 때부터 종교적이고 신비로운 것에 관심을 많이 가졌었습니다. 저는 타로카드로 점을 볼 줄 알구요, 손금과 관상도 볼 줄 압니다. 아마 저의 설교를 오래 들으신 분들은 이미 알고 계실거에요. 제가 중학생 때 친구의 아버지가 점집을 하셨습니다. 그 친구 집에 친구들과 함께 놀러갔는데 친구 아버지가 다 점을 봐주신거에요. 그런데 저의 관상과 사주를 보시더니 점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점을 보는 사람이 될 사람이라고 하면서 핵심 비법이 담긴 책들을 주시고, 경험으로 얻으신 비법들을 저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런데 보통 중학생 남자 아이들이 그런거에 관심 없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걸 토대로 인터넷 검색을 해서 더 열심히 배웠어요. 그래서 학교 친구들 손금이랑 관상을 다 봐줬습니다.
그리고 군대에 가니까 선임들이 다 달려들어서 수백명을 봐주고, 중대장님, 대대장님, 그리고 훈련 나갔을 때 중대장님이 잘보이려고 저를 연대장님께 데려가서 손금이랑 관상을 보게 했어요. 확실히 다르긴 다르더라구요. 제가 지금까지 본 사람들 중에 제일 좋았습니다. 지금쯤이면 장군이 되셨을까요? 지금 제가 이야기를 안해서 사실 성도님들 관상과 손금 제가 다 봐놨습니다. 지나가면서 손만 봐도 알 수 있어요. 제가 이렇게까지 이야기 하니까 되게 손금이랑 관상 보고 싶고 결과를 알고 싶지 않으신가요? 세상의 방법과 욕망이라는 것이 딱 이렇습니다. 조금만 접촉해도 훅 빨려들고, 조금만 맛보려고만 했는데도 나도 모르게 그 안에 흠뻑 취해 있게 되는거에요. 그런데 이런 점을 보는 세상 종교 역시도 내가 복채를 내고, 주술을적 방법을 통해 이 땅에서 누릴 복을 얻고자하는 율법주의와 기복주의로 되어 있어요.
그런데 제가 하나님을 믿고 난 후에는 기독교와 함께 세계 종교를 양분하고 있는 이슬람교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그래서 제 책장에는 이슬람 경전인 꾸란과 이슬람교에 입문하면 배우는 교과서들이 많았습니다. 이슬람교에 대해 조금 배워서 비판하는 사람이 쓴 책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직접 말하는 원전을 통해 알고 싶었거든요. 누가 저희 집에 와서 책장을 보면 이슬람교인으로 착각할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그 책들을 읽어보니 결국 기독교의 특정 부분들을 차용해서 율법주의적인 방법으로 구원을 얻고 쾌락이 가득한 영생을 얻고자하는 강력한 율법주의와 기복주의가 영향력을 미치는 종교라는 사실만 확인하게 됐습니다. 세계 3대 종교 중 하나인데 그래요.
그리고 사실 제가 20살에 대학생이 되었을 때부터는 불교에 관심이 있었어요. 그래서 기숙사 방 책상에 도서관에서 빌린 불교 경전들이 많이 꼽혀 있었습니다. 아니 이제 막 20살 된 핵정학과 대학생이 불교 경전을 왜 읽나요? 그런데 불교를 공부하다보니 현대 불교는 각 나라의 토착신앙과 섞이고, 오랫동안 변질된 불교가 영향을 미치고 있더라구요. 그래서 불교의 창시자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를 알기 위해 원시불교를 공부했습니다. 제가 얼굴 색도 그렇고 외모도 그렇고 이마에 빨간 점만 찍으면 인도 사람 같잖아요.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라고도 불리는 고타마 시타르타는 오랜 수행과 묵상을 통해서 인생은 고난으로 가득한데 그 고난의 원인은 바로 집착, 욕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 집착이라는 욕망을 제거해야만 인간은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에 집착을 제거할 수 있는 수행의 8가지 방법, 팔정도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걸 간단하게 표현한 것이 불교의 기본 교리인 고집멸도에요. 결국 세계 3대 종교 중 하나인 불교도 인간의 수행이라는 방법으로 욕망을 짓누르거나 해방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율법적인데요, 이런 원시불교는 기복주의적인 신앙과 섞인 현대 불교와는 다르게 기복주의적 요소는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믿을만하다고 말씀 드리는건 아닙니다. 이 고타마 싯타르타가 존경받을만한 위인이라는 것은 그 고대에 기복적 신앙을 탈피하고 인간이 고통하는 원인이 욕망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그 욕망의 문제를 해결해주어서 모든 인간의 행복하길 원했다는 점입니다.
고타마 싯타르타 같은 분이 하나님을 믿었으면 정말 좋았을텐데요. 하지만 이 모든 고통, 죄의 원인이 되는 집착이라고도 불리는 욕망은 절대로 어떤 수행을 통해 제거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욕망은 욕망이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주신 욕구라는 순리이기 때문에 제거해야 할 대상도 아니고, 제거되지 않는 기본적인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식욕, 수면욕, 성욕, 자아실현의 욕구와 같은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하며 살도록 만드셨고, 그것을 충분히 충족하고도 남아 넘치는 피조물들을 주셨고, 하나님이 함께하시며 하늘의 것을 공급해 주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생을 얻게 하는 나무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욕구는 세상의 그 어떤 것을 채워 넣어도 채워지지 않는 블랙홀과 같습니다. 이 작은 사람 안에 소우주가 담겨있다고 말하잖아요.
그런데 그 욕구의 블랙홀을 이 땅, 세상을 향해 두면 세상 것들을 제한 없이 빨아들이려고 합니다. 그리고 절대 채워지지 않고, 그래서 만족할 수 없고, 더 많은 것을 나 혼자만 채우려는 욕망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을 벗어난 상태, 바로 죄로 인한 것이죠. 그래서 이 죄인은 자기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대상을 향해 블랙홀의 입구를 놓고 자신과 주변이 파괴되서 더 이상 빨아들이지 못할 때까지 빨아들이려고 하기 때문에, 아무리 말로 가르치고, 그 행동을 아무리 좋은 방법으로 교정하려고 해도 마음이 잘못된 곳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겉으로 보이는 행동을 못하게 하면 마음에 병이 드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게임을 하고 있을 때 밥 먹으라고 하면 오지 않습니다. 밥보다 게임을 좋아하고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그 때 게임을 못하게 억누르고 밥을 먹게 하면요, 아무리 건강한 밥을 당장 먹을 수 있게 하더라도 그 아이의 마음은 불만이 가득해진 채로 게임에 가있습니다. 그런데 게임을 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피자, 치킨, 햄버거, 짜장면 먹으라고 하면 게임기를 던져두고 달려옵니다. 게임보다 더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이 가득하기 때문이에요. 욕망을 억누르는 게 아니라 좋아하고 사랑하고 원하는 대상을 전환시켜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방법이 이와 같아요.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에 집착하고 욕망하며 그 대상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죠. 바로 은혜가 이 블랙홀에 뚜껑을 덮는게 아니라 그 무엇보다도 하늘에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게 해서 이 욕구, 욕망, 원함의 블랙홀이 향하게 해서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하늘의 것들을 빨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블랙홀이 순식간에 거룩으로 가득 차고 넘쳐 흘러서 내 삶 뿐만 아니라 주변 이웃들에게 빛과 소금으로 쏟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욕구의 블랙홀에 거룩한 것을 채울 수 있는 방법은 그 은혜의 방법 밖에는 없다,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이것을 오해했기 때문에 복음과 은혜가 아닌 사람이 만든 종교들과 똑같은 율법주의적이고 기복주의적인 방식으로 거룩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유초등부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이번 여름 성경학교 때 헌금에 대해 가르칠 때도 오늘 말씀과 동일한 원리로 가르치고 있고 가르치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집에서 제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이 원리로 가르치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으로 가르쳐 영적 분별력을 키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요, 오늘 말씀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 말씀을 자손들에게 가르치라고 하셨는데요, 사실 자손은 유치부, 유초등부와 같은 아이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여전히 잘 모르는 저희 모든 세대와 다음 세대 모두를 말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께서 거룩과 속됨, 부정과 정함을 분별할 줄 알게 되셔서 매일같이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닫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큰 은혜를 베푸시는지를 더욱 깊이 알게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