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25살까지 불신자였고, 기독교를 정말 싫어했기 때문에 저의 초중고 죽마고우들은 모두 불신자입니다. 그런데 그 친구들 다 남자들인데요, 종종 전화통화를 하면 한 시간 반, 두시간씩 통화를 합니다. 남자들끼리인데요. 그리고 통화가 끝날 때는 못다한 중요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제가 그렇게 통화를 하는 이유는요, 그들의 고된 인생사와 관계의 어려움들을 들어주고 공감해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들어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렇게 전화를 하는거에요. 그런데 제가 그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이유는, 마지막에 결국 상대방이 나를 그렇게 힘들게 해도 우리가 사랑해야 되지 않겠냐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 불신자 친구들은요 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야되지 않겠냐고 말하면 내가 왜 그렇게까지 사랑을 해야 하느냐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사실 제가 할 말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사랑해야 할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들은 세상이 조언해주는 합리적인 기준 안에서 상대방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배려합니다. 물론 그게 나쁜 것은 아닙니다. 내 마음의 그릇이 준비되지 않았는데 항상 나만 배려하고 나만 희생하며 살다간 회복할 수 없는 마음의 병을 얻게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세상 기준이 그 합리성을 넘어선 성경적인 사랑과 용서를 가로막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세상의 기준과 틀을 깨고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제가 그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이 불신자들과 비슷한 이야기를 듣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예수님이 아니다.' '내가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야 하느냐?' 결국 그 말은요, '내가 왜 그 사람에게 그렇게까지 오래 참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모든걸 덮어주고, 그 사람을 믿고 소망해줘야 하느냐?'라고 말을 하는것과 같습니다. 결국 왜 내가 그 예수님과 같은 수준, 그 기준까지 사랑해야 하느냐는 말인 것이죠. 사실 그런 대답 앞에서도 제가 어떤 말을 해주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이렇게 설교하고 있지만 저도 그렇게 예수님 같이 사랑 못하거든요. 그럼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는 그 답이 어느정도 나와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께서도 항상 고민하는 부분이실꺼에요. 우리는 어느 수준까지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가? 어느 기준에 맞춰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거룩한 삶의 기준은 무엇인가요? 제사장으로서 산제물로 섬기는 것입니다.
성도의 거룩한 삶의 기준은 무엇인가요?
제사장으로서 산제물로 섬기는 것입니다.
레 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은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들 중에 하나입니다. 이 거룩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성경에 1000번 가까이 나오는데요, 특히나 성도, 성전, 성물, 성별과 같은 단에 이 '성'이라는 단어도 모두 히브리어로는 같은 거룩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엄청 많이 나오는거죠. 그런데 이렇게 많이 나와도 거룩의 개념이 성경에서 명확하게 설명된 곳이 없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쉽지 않으니까 한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역사적으로 오랜기간 오해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세가지 핵심적인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야 하구요, 그 답을 찾기 위해서는 이 본문이 등장한 맥락과 성경을 훑어봐야됩니다. 먼저 첫 번째로 던져야 할 질문은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입니다. 먼저 이 구절에서 저희에게 명확하게 주어진 단서는 거룩이라는 히브리어 단어의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구별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과 구별된 것일까요? 레위기에서 정함의 반대는 부정함입니다. 깨끗함과 깨끗하지 않음이라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거룩의 반대는 세속입니다. 그러니까 거룩은 세속과 구별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요, 세속은 일반적인 이 세상을 말하지만, 하나님이 없으면 죄로 치달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죄가 만연한 세상으로 치부됩니다. 그래서 거룩이란 죄와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죄가 없는 상태라는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이 죄가 없는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에 대해서도 오해가 많았습니다. 성경은 교통법규를 잘 지키고, 도둑질이나 살인을 하지 않고, 도덕적으로 고결하게 살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고문을 받고, 생명을 바치고, 아이를 키우기 위해 인생을 다 바쳐 헌신한 부모님이라고 해서 죄인이 아니라고 하지 않습니다.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분들과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사신 분들을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죄인이라고 표현하는게 참 마음이 어려운 포인트인 것이죠.
그렇다면 거룩하다, 세상과 구별되어 죄가 없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저희는 거룩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지만 거룩은 하나님만 가지신 속성이라 저희는 그냥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마치 한 분이신데 세 위격을 가지셨다는 삼위일체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나온 맥락 속에서 거룩을 이해할 수 있는 힌트가 있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은 11장에서 어떤 동물이 부정하고 정한지를 정해주시는 음식법 본문 가운데 갑자기 등장합니다. 그 이유는 이 레위기의 율법들이 정말로 어떤 동물이 부정하고 죄가 있다거나, 정하고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가지신 거룩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가르치기 위한 교육적인 장치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매일 접하는 동물이나 음식을 통해 부정과 정결, 거룩에 대해 경각심을 가져서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고, 우리도 그렇게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레위기에 나오는 동물이나 물건들은 공통되는 특징이 있는데요, 하나님께서 한 번 정하시면 영원히 부정하거나, 정결하거나,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죄인들처럼 정결해졌다가, 거룩함게 여겨졌다가 죄 때문에 다시 부정해지고 그러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독특한 특징은요, 하나님이나 성도와 같이 인격체가 아닌 비인격체인 물건에 대해서 거룩하다는 표현을 한다는 점입니다. 거룩이라고 하면 인격적 존재가 도덕적으로 완전해서 죄가 없는 상태로 생각하기 쉬운데요, 물건에 대해 거룩이라는 말을 씀으로써 인격체와 비인격체를 모두 아우를 수 있는 더 본질적인 거룩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전 안에 있던 성물, 바로 거룩한 기물인 등잔대와 떡 12개를 통해 거룩이란 무엇인지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등잔대는 일반적인 상황, 바로 세속에서는 집에서 불을 밝히거나, 장식으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성전 안은 두꺼운 천으로 몇 겹을 덮어놔서 완전히 어둡거든요? 그래서 이 등잔이 깊은 어둠 가운데 빛을 밝히는 모습을 통해서 빛이신 하나님께서 어둠을 밝히시는 분이시다, 바로 빛이라는 하나님의 본질과, 어둠을 밝히시려는 뜻을 가지셨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 등잔대를 인격적으로 표현한다면 그렇게 하나님의 본질과 뜻을 드러내는 목적을 위해 섬긴다고 표현할 수 있고, 자신을 헌신한다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등잔대 앞에는 떡이 12개가 놓여져 있습니다. 이 떡 12개는 이스라엘 12지파,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징합니다. 등잔대는 이 떡들을 잘 비출 수 있도록 놓여져 있습니다. 결국 이 등잔대의 빛이 깊은 어둠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비춰 어둠에서 건져내고 있는 그림 언어인 것입니다. 신기하죠? 이 성전과 기물들에 대해서는 벌써 초등부 친구들과는 함께 배웠는데요, 나중에 시간이 되면 함께 나눠보겠습니다. 성전과 성물들이 이렇게 세상의 물건을 통해 하늘의 것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지혜와 관련이 있거든요.
그런데요, 이 등잔대는 집에서 붉을 밝히거나, 박물관에서 교육용으로 전시되거나, 집을 꾸미는 것과 같이 일상적인 세속의 영역에서 사용된다고 해서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등잔대는 그렇게 사용되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성전의 등잔대와 떡은요, 한 번 하나님을 드러내는 목적으로 만들어져 세속과 구별되면요 망가지고, 부서지고, 떡이 식어서 못쓰게 될 때까지 하나님의 본질과 뜻을 드러내는 일에만 헌신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등잔대는 인간이 아니라서 죄를 짓지 않기 때문에 부서져서 그 생명이 다 할 때까지 창조된 목적대로 하나님만을 섬기니까 영원히 거룩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옛날에 선비들이 왕에 대한 충절시를 쓸 때 사군자나 소나무를 같이 그렸잖아요. 변덕스러운 인간과 달리 사시사철 변하지 않는 그 물건들을 통해 영원히 변치 않는 충절을 표현한것입니다. 성경에서 이 거룩한 물건도 같은 이치입니다.여기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아마 선비들은 변덕스러운 인간보다 백자 청자같은 물건이나 식물이 낫다고 생각했을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변덕스러운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이 물건과 동물을 통해 인간을 거룩하게 만들고자 하신다는 사실이죠.
결국 이 내용을 정리해보면요, 거룩이란 세상적이고, 일상적인 삶의 모습이 꼭 부정하거나 죄악되지 않더라도 이렇게 세상 맛 좀 보면서 사는게 어때?라고 하지 않고, 세속적으로 사용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과 뜻을 드러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기 위한 목적만을 위해 그 수명이 다할 때까지 온전히 헌신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피조물의 창조 목적, 목표를 벗어난 것이 거룩과 반대인 죄라는 개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이 거룩의 개념을 가지고 하나님이 '내가 거룩하니'라는 말씀의 의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죄에 빠진 백성들을 자신이 죽기까지 반드시 구원하시려는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게 바로 어둠 가운데 있던 이 등잔이 성령을 의미하는 기름을 태워서, 자신을 태워서 백성들을 의미하는 떡을 빛으로 비추시는 모습이죠. 하나님은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해 백성들에게 본질인 사랑을 쏟아부으시되 독생자가 십자가에서 몸이 망가지고 부서질 때까지 헌신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저희가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라고 표현할 때 그 안에 담겨 있는 진짜 의미인 것입니다. 이 더럽고 추악해 자기 밖에 모르고 욕망만 추구하며 어둠에 속해버려 창조의 목적을 벗어나버린 저희를 위해 죽기까지 헌신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사랑이 증명된 자리이고, 하나님의 진리가 등잔대처럼 밝게 빛나는 자리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자리이고, 모든 피조물이 찬양하는 자리인 것입니다.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고, 하나님만 가지신 이 거룩이라는 개념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이 사랑과 헌신이라는 개념과 연관지어 봐야 하는 것입니다.
저희가 두 번째 해결해야 하는 질문은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거룩하게 될 수 있는가?입니다. 지금 잠시 이 세상을 쥐락펴락하고 있는 것 같은 마귀는 '세상을 이정도 즐기는건 괜찮아. 하나님 말이 맞지만 100% 그렇게 살 수는 없잖아.'라고 백성들을 속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하나님께 거룩하게 헌신된 백성들을 세속의 용도로 바꿔 이 세속에 묶어 거룩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고, 삐끗하면 부정함으로 이끄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죄의 영향력을 가진 백성들은 오직 하나님만 섬기지 못하고 마귀의 이런 유혹에 쉽게 넘어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개입하시지 않으면 계속 부정하게 될 수 밖에 없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할 수가 없게 되고 그 가운데에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구원 받은 과정이 딱 그 모습이에요. 저는 스물 다섯살 때 하나님을 믿게 됐는데요, 제가 스스로 하나님을 믿고 싶은 생각은 0.1%도 없었고, 오히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광신도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여러 종교에 관심이 있었고, 각 종교들을 존중하고 인정하고 있다보니 성경의 하나님만 신이라고 주장하는 기독교를 대단히 편협하고 교만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랬던 저에게 하나님께서 인격적으로 찾아오셔서 정말 제 의지와 생각과는 상관 없이 강권적으로 믿게 되면서 제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저를 위해 예수님이 어떤 희생을 치루셨는지 알게되면서 일주일을 울며 기도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처음부터 구원에 있어서 나는 하나도 할 수 있는게 없고 하나님만이 주권적으로 구원하신다는 복음이 좀 더 명확하게 가슴 속에 심겼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신학교를 다니며 하늘사랑교회 말고 다른 교회에서 처음 초등부 사역을 시작했는데요, 매주 초등부 15분 설교를 하는데 자꾸만 율법적인 설교를 하게 되는거에요. 얘들아 말씀 잘 들었지? 그러니까 착하게 살아야 돼. 거짓말 하면 안돼. 친구들과 싸우면 안돼. 그러면 예수님이 좋아하실까? 슬퍼하실꺼야. 설교를 하면서도 저를 구원하신 하나님, 제가 믿는 복음과 전혀 다른거에요. 그래서 신학교에서 정말 학교 수업과 과제들 하나도 안하고 도서관에서 일주일동안 매일 밤새도록 10권 20권씩 책을 읽어가면서 초등부 15분 설교 한 편을 준비하다가 과부하가 걸려서 아내와 싸우고 집을 나가고, 신학교를 휴학하고, 사역을 중도에 그만두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 저 교회 전전하던 중에 하늘사랑교회를 오게 됐는데 김일승 목사님 설교를 처음 딱 듣고 바로 이게 내가 찾던 복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목사님이 같이 사역하자고 제안을 하셨고, 저는 근 10년 가까이 복음을 배우고 조금씩 복음의 관점으로 설교할 수 있게 된 것이었죠. 사실 목사님과 저는 성향이 극 반대인데도 제가 전적으로 목사님을 따를 수 있었던 큰 이유는, 목사님이 좋은 분이시기도 하지만, 목사님의 복음이 진짜 복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요, 진짜 내 노력과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말씀을 통해 깨닫고 참되게 믿기 위해서는 저처럼 매일 말씀만 연구하는 목회자도 최소 10년이 걸리는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멀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단편적으로 읽으면 누구나 율법적 기복적으로 해석하고 설교할 수 밖에 없고, 내 노력으로 거룩함을 추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매일 성경을 연구하는 목회자도 그런데, 성도님들 역시도 그 유혹과 거짓에 빠져들기 쉬운 것입니다. 그것 역시도 마귀의 속임수에 빠져서 하나님과 멀어지고 죄악된 길로 빠져드는 길인거에요.
저희는 저희가 아무리 스스로 성경을 열심히 읽고 도덕적으로 바른 삶을 살려고 해도 저희의 힘과 노력으로는 절대로 거룩한 자로 여김 받을 수 없고 거룩한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명령은요, 저희가 도달해야 할 목적과 방향성을 지시하는 것일 뿐, 실제로 그 명령을 수행하시고 결과를 은혜로 주시는 분은 이 죄인을 거룩하게 하실 능력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것을 모른다면, 저희는 예수님의 보혈이라는 그 귀한 희생을 통해 구원을 얻었음에도 스스로의 능력으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었다고 믿었던 바리새인들처럼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난 내가 노력해서 쟤네들보다는 거룩한 모습으로 살고 있어. 난 세상 것을 추구하지 않아. 너희는 뭐야? 라고 교만해지면서 상대에게 상처를 주게 됩니다. 아니면 내가 설정한 기준에 내 노력과 능력이 미치지 못하면 자꾸 넘어지고, 지쳐서, 스스로 신앙생활에서 주눅들고 상처받아 하나님을 멀리하게 됩니다. 난 성도가 아니야. 난 안돼. 그러면서요. 저희 같은 죄인들이 거룩해지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정말 믿으면요, 저희 가운데 거룩해져가는 열매가 맺혀지게 된다면 이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분명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고백하며 겸손하게 감사할 수 있는 것이구요, 그렇게 살지 못할 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나를 자책하는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통회하는 마음으로 다시 돌아가 지혜와 힘과 능력을 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세 번째 질문을 해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우리는 어느 수준까지 거룩해져야 하는가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성도들 가운데는 내가 예수님이 아니다, 왜 나에게 그런 사랑과 용서를 요구하느냐?라고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입니다. 일단 저희는 예수님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을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대속제물로 희생하시는 대제사장이십니다.그런데 우리는 모든 백성들을 대속하는 대속제물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희는 그것을 수행할 죄와 흠이 없는 어린양도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저희에게 예수님께서 지셨던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저희를 산제물로 드리는 영적 예배를 드리라고 말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과 산제물이 되라는 두 말씀은 같은 말씀입니다. 바로 저희에게 주어진 각자의 삶 가운데 이웃을 사랑하고 예수님께 인도하기 위해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짊어지며, 나를 산제물로 헌신하는 제사장이 되라는 말인 것입니다. 제사장의 역할이란 등잔대와 똑같아요. 등잔대가 하나님의 본질과 뜻을 드러내서 이 땅의 사람들에게 하늘의 것을 보여주며 연결시켜 주잖아요? 제사장도 그 용도로 사용되는 존재입니다. 하늘의 사랑을 보여줘서 하나님과 이웃을 연결하는 존재. 저희가 그렇게 세속을 즐기는데 사용되려는 욕망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본질과 뜻을 드러내기 위해 산제물로 헌신하는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할 때 불신자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무엇인가를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할 때는요, 그 정말 엄청나게 대단한 업적을 내거나, 높고 귀한 사람에게 하는 반응입니다. 마라톤 대회에서 정말 영광스럽겠다고 여겨질 수 있는 사람은 1등에서 3등정도까지입니다.영화제 시상식에서 1등정도 하는 상을 받아야 '이 영광을 누구누구에게 돌리겠습니다'라고 말할 자격이 있습니다. 참가상을 받았는데 영광스럽다고 말하기는 힘듭니다.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이유는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시고, 오래 참으시고, 희생하시는 그 놀라운 사랑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그런 사랑을 하신 하나님을 보고 기이한 일을 행하신 분이라고 표현합니다. 구원받을 자격 없는 피조물을 위해 창조주가 희생해서 구원을 하신다? 기이한 일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으실만한 거룩의 기준은 바로 그렇게 불신자를 하나님 앞으로 돌려세우는 기이한 사랑, 기적같은 사랑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의 거룩한 삶을 통해 이웃이 하나님을 믿고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게 되려면, 저희 역시도 기이한 사랑을 하는 기준에 부합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손양원 목사님은 그 기이한 사랑의 대표자이십니다. 오죽하면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별명이 있으시겠어요. 손양원 목사님은 자신을 희생해 한센병, 그러니까 문둥병 환자들을 돌보시며 목회를 하셨습니다. 일제 치하에서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고생을 하셨어요. 그러던 중 해방되서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이념 논쟁이 뜨거워 졌을 때 촉망받던 두 아들이 예수쟁이라는 이유로 북한 청년에 의해 총살당해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북한 청년이 나중에 체포되서 사형을 받게 되는 것을 알고 손양원 목사님은 직접 찾아가서 용서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자신의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엄청난 사랑이죠. 많은 분들이 이 이야기를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뒷이야기를 아는 분들은 많지 않으실꺼에요. 이후에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북한군이 한센병을 돌보고 계시던 손양원 목사님을 마찬가지로 예수쟁이라는 이유로 총살 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그런데 놀라운 일이 여기서 생깁니다. 바로 손양원 목사님의 장례식 때 그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씨가 장례를 주도하는 상주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이야 장례식 절차가 까다롭지 않지만 손양원 목사님 시절만 해도 아주 까다로웠습니다. 보통 장남이 상주가 되는데요 장남이 장남 역할을 못하면 가족들이 상주로 여기지 않았고, 상주로 세우지 않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당시에는 장례가 나면 전국에서 온 가족이 모였거든요. 그런데 손양원 목사님이 총살 당해 돌아가실 때 안재선씨에게 너가 내 장례식 때 상주가 되어달라고 말을 하고 돌아가셨을까요? 아닙니다. 결국 안재선씨가 손양원 목사님의 상주가 되었다는 것은 모든 가족들이 안재선씨를 장남으로 인정했다는 것이구요, 그것은 손양원 목사님 뿐만 아니라 모든 가족이 안재선씨가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을 죽인것을 용서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에겐 두 아들이지만, 누군가에겐 사랑하는 오빠이고, 누군가에겐 너무나 아끼던 손자들이고, 누군가에겐 듬직한 조카일 수 있는데, 모두가 용서했다는 의미에요. 안재선씨가 손양원 목사님의 장례식 때 상주복을 입고 있는 사진이 손양원 목사님 기념관에 딱 붙어있습니다. 저희는 그걸 아, 그렇구나 하고 그냥 지나칠 수 있지만, 그것이 바로 기이한 사랑의 증거입니다.
그리고 손양원 목사님은 그 양아들 안재선씨가 목사가 되길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안재선씨는 신학교를 들어갔지만 결국 포기하고 나왔어요. 나 같은 사람은 목회를 할 자격이 없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그 마음이 충분히 공감이 됩니다. 저도 그런 생각 할 때가 많거든요. 나같은게 무슨 목사를. 그런 안재선씨는 결혼해서 두 아들을 두었는데요, 그 두 아들들은 안재선씨가 손양원 목사를 죽인 범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 중 안경선씨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손양원 목사님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를 보러가게 되었고, 그 영화를 보고 눈이 퉁퉁 붓도록 눈물을 흘리면서 나도 목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안재선씨가 후두암으로 돌아가실 때 모든 사실을 털어 놓으셨데요. 그 때서야 안경선씨는 자신의 아버지가 영화에서 봤떤 손양원 목사님을 죽인 범인이었고, 손양원 목사님이 그 아버지가 총살 당할 뻔 했을 때 용서해주시고, 양아들로 삼아주시고, 그 가족들은 자신의 아버지를 상주로 삼아줬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안재선씨는 아들 안경선씨에게 유언으로 내가 못이룬 목사가 되라고 하셨고, 목사가 되셔서 손양원 목사님 기념관장으로 섬기시다가 아프리카 브룬다에 한센병 환자를 돌보는 선교사가 되셨습니다.
안재선씨는 물론이고 그 아들 안경선 목사님 역시 손양원 목사님이 용서하시지 않았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만 한게 아니라 이재선씨를 양아들로 삼으셔서 교회 울타리 안에서 키우셨기 때문에 이재선씨도 신앙을 가지셨고, 그 아들도 목사가 되서 손양원 목사님이 하시던 한센병 사역을 이어서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바로 손양원 목사님의 이런 기이한 사랑, 제사장으로써 자신을 산제물로 헌신하는 거룩한 삶을 통해 이웃이 하나님께 돌아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게 하는 모습. 이것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라는 말씀이 이루어진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손양원 목사님만 특별히 더 사랑하셔서 특별한 은혜를 더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저희 모두에게 예수님과 십자가라는 동일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손양원 목사님과 나는 달라, 나는 예수님이 아니야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과 같은 삶을 살 수 있을 정도의 동일한 은혜를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살지 못하거나, 아니면 그렇게 살지 못할 때 통회하는 것이 아니라 떳떳하게 나는 예수님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사실 저희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의 답을 찾기 위해 세 가지 질문을 하고 성경의 여러 곳의 내용을 함께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답은 아주아주 가까운 곳에 이미 있었습니다.
레 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결국 이 말씀이 지금까지 살펴봤던 거룩하신 하나님의 내용입니다. 아직 죄인된 백성들을 위해 친히 제사장이 되셔서 자신을 헌신하심으로 저희의 하나님이 되어주시겠다는 본질과 뜻을 보여주시고 이루시는 하나님. 세상의 어떤 신도 이런 사랑을 하는 신이 없고 하나님만 유일하시기 때문에 세속과 구별된 거룩하신 하나님이신 것이구요, 우리 역시도 그런 기이하고 놀라운 사랑을 받았다면 하나님과 같이 불신자와 하나님을 연결해주는 제사장으로써 자신을 산제물로 헌신하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성도 여러분들께서 오늘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저희는 어떻게 거룩하게 될 수 있는지, 저희는 어떤 수준까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다시 한 번 기억하시고, 그 거룩한 삶을 통해 기이한 사랑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실 수 있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