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27일 주일 설교문/ 장우현 목사
저는 지난 번 설교 때까지 룻기를 강해하고 있었습니다. 너무 오래되서 기억이 잘 안나시죠? 그런데 오늘이 일곱번째 시간으로 마지막 시간이 됐습니다.
4장의 중심부에는 보아스의 구원과 통치로 회복된 공동체가 찬양하고 축복하면서 복이 가득한 모습이 그려집니다. 사실 그래서 4장 1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전체는 나오미 뿐만 아니라 텅 비었던 공동체에 복이 가득 채워진 모습이 나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교회 공동체가 그렇게 복된 이유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며 길었던 룻기 강해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교회가 복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1. 찬양하는 증인이기 때문입니다.(9-12)
보아스는 당시에 마을의 일들을 다스리던 성 문 위에 첫 번째 기업 무를 자와 백성 전체를 대표하는 장로 10명을 모아서 기업 무름을 하고, 룻과 결혼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장로들과 앞에 모여서 구경하던 백성들을 그 두 가지 사실에 대한 증인으로 세웁니다. 9절과 10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9] 보아스가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고 [10]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맞이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그 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함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
나오미의 기업을 물러주는 일과 이방 여인 룻과 결혼하는 일은 간단한 일도, 작은 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법정에서 문재를 해결하고, 모든 백성들을 증인으로 세운 것입니다.
그런데요, 보통 법정에서는 자기 이익, 자기 무죄, 자기 승리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 증인을 세우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그렇게 큰 희생을 감당하고도 자기 변호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형제들이 우리 공동체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증인을 세운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백성들과 장로들이 이렇게 답했습니다.
[11a]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나니...
결국 방금 읽은 세 구절 속에 증인이라는 말이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나오미와 룻은 어찌보면 공동체의 별 것 아니게 여겨질 수 있는 과부들이고, 죽으면 어느덧 잊혀버릴 수 있는 사람들 일 수도 있었지만 공동체 전체가 룻과 나오미의 일에 증인이 되는 일이 매우 중요한 일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이 마을을 다스리며 직접 큰 희생을 감당한 보아스가 다른 어떤 일보다도 이런 일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증인을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찌보면 보아스가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나오미와 룻이 괴로워하며 돌아오던 때 성 문 위에서 유심히 지켜봤을 것이고, 마을을 돌아보다가 고생스럽게 일하던 룻을 먼저 보고 와서 룻을 돌봐줬을지 모릅니다.
사실 이렇게 작고 연약한 과부들까지도 확실하게 돌보며 사랑과 정의로 다스리는 보아스가 마을에 있다는 것이 마을의 복이구요, 이것은 보아스를 세우신 하나님의 복이 모든 백성에게 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보아스는 죄로 인해 복을 잃고 저주 가운데 빠져서,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 같이 땅 없이 방황하는 죄인에게 하나님 나라의 땅을 되찾아 복되게 해주실 메시야 예수님을 모형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15절에는 보아스와 같은 예수님의 사역을 보여줍니다.
히 9:15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죄에서 속량하셨다는 것이 바로 죄의 값을 대신 지불하셨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을 통해 저희들이 잃어버렸던 영원한 기업,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얻게 하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예수님께서는 저희를 그 일의 증인으로 세워주셨습니다.
눅 24:46-49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저희는 예수님께서 저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셨다는 사실과, 그리고 그 죄를 용서하게 하는 회개의 기회가 온 땅의 죄인들에게 미친다는 사실의 증인으로 세움 받았습니다.
저희가 증인으로 세움을 받고, 증인의 사명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증거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오늘 보아스와 예수님이 똑같이 말하듯이 모든 죄인들과, 모든 하나님 백성들이 이 사실을 믿고 회개해서 구원 받아 하나님 나라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저희가 증인으로 세움 받았다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어찌보면 보아스와 예수님의 말 속에는 내가 이런 좋은 일을 했으니 내 증인이 되라!는 의미보다 나의 일을 통해 백성들이 끊어지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확증하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위해 증인이 되라는 것이 더 강조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증인된 장로들과 백성들은 이런 반응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1b]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네가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하시기를 원하며 [12] 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네게 상속자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장로들과 백성들이 자신들을 위해 희생하고, 자신들을 구원하는 증인으로 세워준 것에 감사하기 때문에 보아스를 열렬히 축복을 하는 것입니다.
만일 보아스가 자기를 위한 이기적인 목적으로 이런 일들을 했다면 증인들이 이렇게 함께 기뻐하며 보아스를 축복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먼저 룻이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와 같게 해달라고 합니다.
라헬과 레아는 열 두 지파 이스라엘 민족의 근원이 된 열 두 명의 아들을 낳은 야곱의 아내들입니다.
룻이 이렇게 많은 백성들을 가진 민족이 될 수 있게 해준 이스라엘의 어머니들처럼 되서 보아스가 많은 생명의 근원처럼 되길 축복하는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그렇게 되서 유력하고 그 이름이 유명해지길 축복하고 있고, 다말이 유다에게 낳은 베레스와 같게 해달라고 축복합니다.
유다 역시도 나오미와 룻과 같이 자녀들이 다 죽어서 이스라엘에서 끊어질 위기에 처했었는데 며느리 다말의 지혜로 베레스를 낳아 유다 족속이 하나님 나라에서 끊어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결국 지금 증인들이 보아스를 축복하는 내용은 단순히 보아스가 그런 복을 누렸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보아스가 그 복을 소유한 자의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에 그 복을 가진 자의 결과는 반드시 그렇게 생명의 근원이 되고, 이름이 온 세상에 유명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축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아스가 시켜서 억지로 증인의 역할을 하는게 아니라 보아스가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고 사랑하고, 정의로 다스려주는 것에 대한 기쁨과 감사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구원자를 찬양하는 증인의 모습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저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저희도 예수님께서 사실 감당하지 않으셔도 됐을 희생을 통해 저희를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이 정말로 감사하고, 그것을 통해 우리가 참된 생명, 복을 얻었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예수님을 온 마음을 다해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가 예수님을 찬양하는 모습은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증거하는 가장 강력한 증인의 모습입니다.
어떤 사람이 '너 그 음식점 가봤어? 거기 진짜 맛있어!, 야, 너 그 회사 제품 써봤어? 그거 진짜 좋아!'라고 입이 닳도록 칭찬을 한다면, 아 저거 진짜 좋나보다 생각이 들껍니다.
그리고 인터넷을 봤더니 수천개의 칭찬하는 리뷰가 달리고, 별점이 막 5점 만점에 4.9점, 5점 그러면 아 이거 진짜 맛있고 좋나보다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고, 그 음식을 맛보러 가보게 되고, 나도 그 음식과 음식점을 칭찬하고 진짜진짜 맛있으면 저도 리뷰를 달게 됩니다.
제가 사실 리뷰같은거 잘 안다는 사람인데, 너무 맛있어서 로그인하는 귀찮음을 무릅쓰고 이렇게 리뷰를 답니다. 여기 진짜 맛있어요. 라구요.
맛집이나 좋은 제품들의 리뷰를 보면요 이 사람들이 정말 이 음식을 맛있어 하는구나라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직접 가서 먹어보면 정말 거의 다 맛있어요. 그 리뷰를 단 사람들은 그 가게를 칭찬해야 되니까 당위성을 가지고 억지로 칭찬한게 아니에요.
저희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가 예수님을 통해 받은 복에 대해 얼마나 감사하고, 귀하게 여기는지는 저희가 평소에 사람들에게 얼마나 예수님을 칭찬하는지, 찬양하는지로 드러나게 되고 그 모습이 예수님과 그 구원의 결과를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 역시도 오늘 말씀을 통해 찬양하는 증인이 되어야겠다는 큰 도전이 됐습니다. 최근에 저희 온 가족이 코로나에 확진됐습니다. 무증상인 분들도 많다고 하는데 몸이 꽤 아팠고, 2주가 넘은 지금까지도 몸이 좋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코로나 때문에 몸은 힘들었지만 오히려 얻은 것이 있었습니다. 이런 질병이 계속 유행하게 되면 저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언제 죽을지 모르니 말씀을 더 잘 증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사실 믿은지 10년이 조금 넘어서 여전히 말씀을 잘 몰라서 좀 더 제대로 공부하고 제대로 알고 하자는 생각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아프면서 60대, 70대 연세가 있으신 분들에게는 복음을 더 알아갈 시간이 많지 않고, 제가 언제까지 더 준비될 때까지 시간을 미루면 안되겠다는 경각심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오늘 말씀을 준비하게 됐는데요, 하나님께서 저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해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성경을 바르게 공부하고 복음을 아는 것도 중요한 것이지만, 제가 하나님께 진짜 구원을 받았고, 그것이 기쁘고 복되다면 그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으로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고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저를 더욱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구원의 일을 하고 계시고, 그 일들이 하나님과의 경험으로, 간증으로 남습니다.
저희는 오늘도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나의 연약함, 무지함, 죄악을 드러내시고 회개하게 하시며 구원하셔서 나를 더 복되게 하셨음을 찬양하고 간증함으로 증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기쁘고 감사한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이웃에게 그 소식을 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진짜 맛집에 가본 사람이 주변 사람들에게 그 집 맛있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 보셨나요.
그래서 예수님을 찬양하는 증인이야말로 복을 소유한 참된 증인이구요, 그 증거를 통해 교회가 복된 공동체라는 것이 온 세상에 드러나게 되구요, 그걸 가능하게 해주신 예수님이 복의 근원이요, 생명의 근원이요, 죄를 용서해주시는 구원자라는 사실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께서 저희를 십자가에서 구원해주신 예수님을 찬양하고, 오늘도 매일매일 저희를 죄 가운데서 거룩함으로 구원해주시는 성령님을 찬양하며 교회가 구원 받았음을 증거하는 복된 교회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복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2. 축복하는 통치자이기 때문입니다.(9-12)
보아스와 룻은 결국 결혼을 했고, 하나님께서 룻을 임신하게 해주셔서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보통 아이를 낳으면 아기의 이름을 부모가 지어주거나 웃어른이 지어주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특이하게 이웃 여인들이 아이의 이름을 지어줍니다.
[17a]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이 이웃 여인들이 누구이길래 이렇게 중요한 아기의 이름을 지어준 것일까요? 이 여인들이 누구인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이 이웃 여인들은 룻기 1장에서도 나왔습니다.
1:19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나오미가 남편과 자식들을 잃고 베들레헴에 돌아왔을 때 온 성읍이 떠들며 나오미의 이름을 불러줬습니다. 그런데 저희 한글 성경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지만, 히브리어 원어로 보면 이 온 성읍 사람들이 여성형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단어들에는 뒷부분이 변하면서 성별이 표현되거든요. 사실 이것은 성 문 위의 장로들이 온 백성들을 대표하듯이 이 여인들도 온 성읍 백성들을 대표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온 백성들을 남자 장로들과 이웃 여인들로 대표해서 표현을 한 것이죠.
그런데 이 여성들은 나오미가 처음 돌아왔을 때에 나오미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줬던 사람들인데요, 나오미 이름의 의미는 '기쁨'입니다. 와~! 저게 누구야! 기쁨이가 돌아왔다! 라고 떠들썩하게 환대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나오미는 내 이름을 나오미라고, 기쁨이라고 부르지 마라. 하나님께서 나를 징벌하셔서 나를 너무나 괴롭게 하셨으니 내 이름을 쓰다라는 의미의 마라라고 불러달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나오미의 인생이 괴롭게 된 것은 맞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오미를 징벌하셔서 괴롭게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나오미가 사사시대의 영향을 받은 남편 엘리멜렉과 아들들의 죄악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참된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고난을 허용하셨던 것 뿐입니다.
하지만 그런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 수 없었던 나오미는 하나님을 오해하고, 자신의 이름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런데요, 이 때 이 여인들은 그런 나오미에게 아무런 말도 해주질 않고 기다렸습니다.
아직 나오미가 고난을 주신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나오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14a]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나오미의 이름의 뜻이 기쁨이잖아요. 그런데 이 기쁨은 다른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기쁨입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그런 이름의 정체성을 갖고 있었음에도 하나님을 찬송하지 못하고 불평을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보아스를 통해 구원을 얻고 자식을 얻음으로 이제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이유도 알고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고난으로 인해 하나님을 불평하던 입술이 이제 다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게 영적 눈이 열리게 된 것이죠. 그래서 이웃 여인들은 여기서 다시 나오미의 이름을 불러주며 그 이름대로 하나님을 찬송할 것을 권면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구원의 일을 해주실 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권면하고, 위로하고, 가르치며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의 역할을 부여받았습니다.
창 1: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드셔서 피조물들을 다스리도록 하셨고, 바로 피조물들에 이름을 지어주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과 피조물들이 올바른 관계 안에서 올바른 모습으로 살 수 있도록 통치하는 모습이 나타난 것입니다.
고대에 이름은 그 사람의 삶의 이유, 삶의 목표, 그리고 이웃 사람과의 관계를 설정해주는 정체성과 같은 것이었고,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지, 아니면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야곱이 하나님의 뜻에 어느정도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을 때 아브라함과 이스라엘로 이름을 바꾸어 주시는 모습으로 이들이 세상의 통치 아래 있는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역시도 이런 하나님의 통치권을 위임 받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죄가 들어오면서 그 통치권을 사단에게 빼앗기게 되면서 사단이 공중 권세를 잡은 자가 된 것입니다.
룻기의 처음 시작에서 베들레헴에 흉년이 일어나고, 엘리멜렉이 가족들을 데리고 공동체를 떠나가고, 이방 여인들과 결혼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통해 마귀에게 통치권을 빼앗겨 죄의 노예된 모습과 그 결과들을 보여줬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베들레헴 공동체는 하나님의 은혜로 보아스가 복된 통치를 하게 되서 공동체의 정체성이 회복되고, 흉년이 그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온 백성들을 대표하는 이 여인들이 나오미의 이름을 불러주며 환대하고, 그 이름대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다스리는 통치자의 역할이 회복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이 여인들이 나오미의 이름을 통해 통치권을 행사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표하기 때문에 보아스와 룻이 나은 아이의 이름을 지어줬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는 것을 통해서는 어떤 통치가 일어날까요?
오벳의 히브리어 뜻은 '섬기는 종'입니다. 아이의 이름을 섬기는 종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14절과 15절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14b]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15a]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바로 오벳이 보아스가 나오미에게 물러준 기업을 이어갈 자이고, 하나님 나라에서 생명이 끊기는 것을 막아 회복시켜준 자이고, 룻을 대신해 나오미의 노년을 봉양해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어떻게 이제 막 태어난 아이에게 할머니를 봉양할 노동력으로 치부해서 이름까지 그렇게 지어버리는 것일까요?
제가 제 아이들을 넷이나 낳으면서 너는 내 팔다리를 주물러줄 아이니까 장 팔다리, 너는 나 늙었을 때 밥 떠먹여줄 아이니까 장밥떠, 너는 운전해주고 다녀야 되니까 장기사, 너는 의사가 되서 나 아픈 곳 치료해줘야 되니까 장의사라고 지으면 아동 학대죠.
네, 이웃 여인들이 오벳을 아동학대 하는 것이 아니겠죠. 상징적인 그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구원자의 모형입니다. 룻은 이웃을 위해 희생하는 참된 교회의 모습을 모형합니다. 남편 예수님과 참된 교회의 연합을 통해 낳아 생명을 얻고 확장된 참된 교회들의 정체성이 바로 연약한 이웃에게 생명을 회복해주고, 이웃이 생명을 이어갈 수 있도록 봉양하며 섬기는 종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보아스의 모습이기도 했고, 예수님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창조주이심에도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이웃을 사랑하시듯이, 그 형상과 모양을 닮은 하나님의 백성들 역시도 그런 모습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온 세상을 섬김으로 다스리는 것은 복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이 여인들은 오벳의 이름을 지어준 후에 오벳을 축복하는데요, 축복의 내용이 바로 생명의 회복자, 노년의 봉양자, 기업 무를 자입니다. 그러면서 이 오벳 역시도 이스라엘 중에 유명해지기를 축복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축복이라는 것은 원하는대로 잘 되게 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과 함께하고, 하나님의 뜻이 인생가운데 이루어져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가 되게 해달라는 것이 축복입니다.
결국 상대방에게 '섬김의 종'이 되라고 하고, 섬김의 종이 될 수 있도록 권면하고, 말씀으로 가르쳐서 다스리는 것은 상대방을 저주하서아 나를 섬기게 할 도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축복하는 일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표하는 이웃 여인들이 보아스로 말미암아 축복하는 통치자로 회복되어서 나오미와 오벳을 복된 삶을 살길 축복하고 다스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계보를 따라 다윗이 나와 보아스와 같이 희생과 섬김을 통해 정의와 공의로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게 되고, 그 계보를 따라 섬김의 왕 예수님이 오셨구요, 그 예수님을 따르는 섬기는 교회가 회복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룻기 마지막에 다윗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나오는 것이고, 마태복음에서 다윗에서 예수님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나오는 것입니다.
사실은 오늘 말씀에서 교회를 모형하는 장로들과 여인들도 죽은 엘리멜렉과 그 아들들과 다를바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공동체에 하나님의 저주인 흉년이 임했던 것입니다.
엘리멜렉만이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이방 땅으로 도망간 사람이 아니라 이 장로들과 여인들도 몸은 이스라엘에 있었을지라도 마음은 똑같았습니다.
엘리멜렉은 구원받기 전의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대표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보아스를 통해 나오미와 룻이 구원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그 공동체 전체가 회복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모습은 죄인되었다고 회복된 바로 지금 저희 교회의 복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오랜 기간 동안의 룻기 강해가 오늘로 마쳐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저희의 죄를 깎아내셔서 죄를 비워내시고, 생명을 채워주시며 증인과 통치자의 역할을 회복시켜주시는 구원자라는 것이 룻기 전체의 주제입니다.
저희는 룻기에서 나오미와 룻만 보느라 공동체 전체가 증인과 통치자로 회복된 모습을 놓쳐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통해서 지금은 교회 역시도 예수님을 통해 이미 증인과 통치자의 정체성이 회복된 복을 누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복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송축하며 이웃에게 그 복을 빌어주는 축복의 통로가 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