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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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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강해 27 20.17-29 하늘 법정에서 벌어지는 일

2026년 8월 16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27]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니더라

[28]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29]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그가 내 앞에서 겸비하므로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는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

     

살면서 재판 과정을 직관하는 분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법정에 대해 아는 대부분은 드라마나 영화의 장면들입니다. 법정은 판결에 따라 한 사람의 미래가 달라지는 일이기에 분위기가 엄중하고 진지합니다. 특히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사형 선고를 앞두고 있다면, 그것을 벗어나려는 절박함과 죄를 물어 사형을 언도하려는 긴장감이 치열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도 법정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재판장으로 자주 묘사하고 성경의 여러 사건은 하늘 법정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형적으로 보여 주는데 본문 또한 그러한 모형입니다. 그렇다면 하늘 법정에서 벌어지는 일은 무엇인가요?

     

하늘 법정에서 벌어지는 일은 무엇인가요?

1.죄인에 대한 기소와 선고입니다. vv.17-24

     

죄인에 대한 기소와 선고입니다. 기소는 증거들을 가지고 한 사람에게 죄가 있음을 재판장 앞에서 고발하는 것입니다. 선고는 재판장이 판결의 결과를 선포함으로 죄에 합당한 벌을 내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18절에서 엘리야에게 기소하는 역할을 맡기어 아합에게 보내십니다.

     

[18] 너는 일어나 내려가서 사마리아에 있는 이스라엘의 아합 왕을 만나라 그가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러 그리로 내려갔나니

     

아합은 이세벨의 계략으로 나봇이 죽임을 당하자 꾀병을 떨치고 일어나 포도원을 차지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무서운가요?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 별장 앞에 있는 포도원도 가지고 싶어서 몸져누웠다가 결국 주인을 죽인 뒤 그것마저 차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셨고 엘리야를 보내 아합을 기소하게 하십니다. 19절 상반절입니다.

     

[19a] 너는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고 하셨다 …

     

죽이고 빼앗은 것은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 이런 눈에 보이는 범죄는 세상 법정에서도 기소될 것입니다. 살인죄와 강탈죄가 합쳐졌다면 세상 법정에서도 아주 높은 형량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범죄의 무서운 점은 권력을 가진 자가 하나님의 법을 이용해 나봇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세상 법정에서는 최고 권력자가 저지른 이런 종류의 죄는 기소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죄를 저지르면 법을 바꾸어서라도 자신은 감옥에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법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하고 삼권 분립이 명확하게 이루어져야 하는데, 법관과 검사까지도 권력 앞에 떨며 제대로 기소하지 못합니다.

     

민주 사회에서도 제대로 기소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왕이 절대 권력을 가진 곳에서 누가 아합을 기소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합의 악한 ‘행위’만 기소하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 법정에서는 억울하게 판결받아 고통받다가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혹은 악한 죄를 저질렀는데도 죄에 합당한 벌을 받지 않아 사람들을 공분하게 하는 경우도 있고 엄청나게 비싼 변호사를 고용해서 죄를 축소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 법정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한 사람을 죽이고 그의 것을 빼앗은 아합 왕은 세상 법정에서는 기소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하늘 법정에 세우셨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이 아니라 아합이 왜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악행의 영적 동기까지 밝히십니다.

     

이것은 세상에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검사가 아무리 뛰어나도 마음의 동기까지 밝히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행위만으로 짐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행의 동기를 아십니다. 그래서 20절 하반절에 겉으로 드러난 살인과 강탈만이 아닌 탐욕에 아합이 팔렸음을 말씀하십니다.

     

[20b] … 네가 네 자신을 팔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누구에게 팔았을까요? 탐욕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지배하는 무서운 탐욕의 힘을 종종 인격적으로 묘사합니다. 왜냐하면 탐욕이 한 사람을 지배하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한 사람을 지배하면 평소에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완전히 다른 행동을 하게 됩니다. 마치 술에 취한 것과 같이, 그 사람이지만 그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이상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죄가 없고 탐욕만이 나쁜가요? “네가 네 자신을 팔았다”라는 것은 판 사람에게 주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세워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은 받은 것에 감사하고 기뻐하지 않고,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열망하다가 결국 선을 넘습니다. 그 책임은 자신을 팔아 버린 당사자에게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25절에

     

[25] ... 그를 그의 아내 이세벨이 충동하였음이라

     

충동질한 이세벨이 나쁜가요? 이세벨만 없었다면 아합은 선하게 살았을까요? 충동질에 넘어간 사람이 죄인입니다. 탐욕이 없다면 충동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약을 권하는 유혹에 넘어간 사람은 이미 마음에 쾌락에 대한 탐욕이 있었기 때문에 넘어간 것입니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누가 마약을 하라고 유혹한다고 해서 넘어가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인간을 유혹하는 많은 것이 있고, 그것에 넘어가는 사람도 넘어가지 않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은 모두 탐욕의 힘에 달려 있습니다. 물론 유혹하는 사람도 나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을 더 기쁘게 할 것을 열망하던 사람 마음에 이미 탐심이 있던 것입니다. 또 다른 원인은 무엇인가요? 26절에 보면 우상에게 복종하게 됩니다.

     

[26] 그가 ... 우상에게 복종하여 심히 가증하게 행하였더라

     

하나님은 우리 행위만을 보시지 않고 영적인 배후를 보십니다. 사람들이 왜 우상에게 복종하나요? 탐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욕망을 이루어 주시지 않으니 인간은 자기 욕망을 만족시켜 줄 가짜 우상을 의존합니다. 문제는 우상을 의존하는 순간, 그 우상의 힘이 그 사람을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이 영적인 반전이 무서운 것입니다.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그 열망이 커지면 결국 돈이 그 사람의 우상이 되고 나중에는 돈의 힘이 그 사람을 지배하여 돈이 주인이 됩니다. 우상이 우리를 지배하는 순간, 그것은 하나님께 가증한 행위가 됩니다. 여러 분 말씀드렸듯이 ‘가증’은 악취가 너무 심해서 냄새를 맡을 수도 없을 정도로 더러운 것을 표현합니다.

     

인간이 돈, 권력, 사람 같은 더럽고 추한 것의 힘에 사로잡혀,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하며 사는 모습이 바로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합을 꿰뚫어 보고 계십니다. 탐욕으로죄의 종이 되었고, 탐욕으로 충동질에 넘어갔으며, 우상의 지배를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욕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은 것을 열망합니다. 건강, 지성, 믿음, 가족, 이 많은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고 우리는 남들과 비교하며 없는 것을 원합니다. 안정적인 환경이나 권력 혹은 쾌락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시며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그 선을 넘으면 그 힘이 너를 지배하여 너는 노예가 될 것이다. 너의 인생은 파괴될 것이다.”라고 본문의 아합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것은 결과가 무엇인가요? 단순히 살인죄와 강탈죄가 아닌 그 동기에는 탐욕의 노예가 되고 우상의 종이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졌기에, 그 결과는 사형입니다. 19절 하반절에 하나님의 선고가 내려집니다.

     

[19b] …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개가 피를 핥는다는 것은 죽은 뒤에 제대로 장사를 지내지 못하고 길에 버려졌다는 것입니다. 요즘 시대에도 죽은 분에 대한 예의를 갖추어 장사를 잘 지내려고 하지만 장례 절차가 조금 미비하다고 해도 크게 영향을 받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고대인들은 장사를 지내지 못하면 그 영혼이 안식하지 못하고 수치스럽고 비참하게 떠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세벨뿐만 아니라 아합에게 속한 모든 자가 어떻게 되나요? 21절입니다.

     

[21] … 네게 속한 남자는 이스라엘 가운데에 매인 자나 놓인 자를 다 멸할 것이요

     

아합과 관계된 모든 사람이 죽임을 당하고 23절에 이세벨에 대한 심판도 내려집니다.

     

[23] 이세벨에게 대하여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개들이 이스르엘 성읍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지라

     

아합은 실제적인 죄를 저질렀습니다. 남을 죽이고 빼앗았고 동기를 살펴보니 죄에 팔렸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아합은 죽을 만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조금 덜 잘못한 사람은 하늘의 법정에서 징역 5년, 징역 3년과 같은 방식을 선고 받을까요?

     

아닙니다. 하늘 법정에는 딱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사형 선고 아니면 선고 면제입니다. “나는 그렇게 큰 잘못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성경은 로마서 6장 23절에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죄라는 영적인 힘 때문에 욕심을 내고, 그 욕심 때문에 온전한 사랑의 상태로 살아가지 못하면 모두 사망에 이릅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15장 56절에

     

고전 15:56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죄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기준을 이미 다 세워 놓으셨습니다. 율법이 무엇인가요? “모든” 율법을 “항상” 지켜야만 백 점입니다. 구십구 점도 빵점 처리됩니다. 율법을 단 한 번이라도 여기면 죄로 인해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이 성경 전체의 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율법이라는 기준을 주셨습니다.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는 상태가 ‘의’이고, 의롭다는 것은 죄와 반대, 즉 완벽하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사랑의 상태입니다. 말하든 행동하든 생각하든, 모든 것이 사랑으로부터 나오려면 죄가 하나도 없는 거룩한 상태인 것입니다. 즉 의, 사랑, 거룩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어떠한가요? 율법이라는 기준으로 보면, 우리는 하나님이 명령대로 사랑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욕심은 죄를 낳고, 죄가 있으면 불의하고, 불의는 사망을 가져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주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잘못이 크지 않습니다. 동생과 조금 싸우고, 초등학교 때 지우개 하나를 훔친 것 정도입니다.” 그러나 단 한 번이든, 어렸을 때 한 일이든, 아무리 작은 죄라도 그것이 욕심에서 나왔기 때문에 사망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사망은 이 땅에서 육체가 죽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에서 분리된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의롭게 만드려고 하실까요? 의로운 상태가 되어야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이라도 불의하면, 의로우신 하나님이 우리를 불태워 버리십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생명은 오래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즉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어 연합한 상태입니다.

이 생명과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처럼 의롭고 거룩하고 사랑의 상태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선을 우리 힘으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욕심의 결과는 악행인데, 그 동기는 욕심으로 인해 죄가 지배하여 불의한 상태가 된 것입니다. 죄가 지배하면 결국 우상을 섬기게 되고 자신의 욕망을 이루어 줄 무언가를 찾게 됩니다.

     

본문은 아합만 죽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우리도 우상을 섬기고, 죄를 짓고, 악행을 하며 가증스러운 삶을 살다가 불의한 존재로 평가받아 하나님과 분리될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아합을 향한 기소와 선고가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우리가 죄인이 아니라고 착각할까봐 하나님은 열 번째 계명을 통해 선명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탐내지 말라. 남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거나 질투하지 않은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을까요? 인간은 어린 아이때부터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남보다 더 많이 가지고 싶고 더 좋은 것을 누리고 싶은 열망으로 움직입니다.

     

우리가 사망 선고를 받을 수밖에 없는 자임을 정말 아신다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소망은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 완전한 재판장이시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동기를 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완벽한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통치에 우리 인생을 맡긴다면 예수님처럼, 이 땅에서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하늘 재판정에서는 절대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완벽한 재판장이라고 믿고 있다면 코람데오의 삶을 살아가셔야 합니다.

     

‘데오’는 하나님이고 ‘코람’은 그 앞에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고 계시는 것처럼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동기와 행동을 보고 계신다면 지금 멈추어야 할 일이 무엇인가요?

     

하늘 법정에서 벌어지는 일은 무엇인가요?

2. 회개한 자에 대한 선고 유예입니다. vv.27-29

     

하지만 하늘 법정에서는 기소와 선고만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또 한 가지 일이 벌어집니다. 바로 회개한 자에 대한 선고 유예입니다. 선고가 내려지면 집행되어야 하는데 예외적으로 죄인이 초범이거나 크게 뉘우치고 있으면 선고 유예가 내려집니다. 이것은 법정에서는 집행 유예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 “징역 3년에 처한다. 단,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한다.”는 뜻은 3년의 형벌을 받아야 할 나쁜 짓을 했지만, 많이 뉘우치고 있고 피해가 보상되었기에 바로 집행하지 않고 5년의 유예로 주어 그 안에 범죄를 또 저지르지 않으면 감옥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형 선고가 내려진 상황에서 아합이 27절에 예상하지 못한 반응을 보입니다.

     

[27]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니더라

     

성경이 왜 이 일을 기록했을까요? “아합도 회개하는데 너희는 어떻느냐?” 즉, 우리들을 향해 회개를 촉구하는 질문입니다. “옷을 찢는다”는 것은 사실 마음을 찢고 싶을 정도로 통탄하지만 마음을 찢을 수는 없으니 옷을 찢음으로 마음의 통회함을 표현한 것입니다.

     

꺼끌꺼끌하고 투박한 “굵은 베”는 슬픔을 나타내며 낮아짐을 상징합니다. “금식하며 굵은 베 위에 눕는” 것은 육체적인 고난을 스스로 감수하는 것입니다. 밥도 많이 먹고 비단이 깔린 침대에 눕던 아합이 고통스러운 환경으로 자신을 몰아넣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풀이 죽어 다니는 것”은 겸비함의 표현입니다. 물론 이것은 진실한 회개는 아니었고 당장 죽을까봐 두려워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22절입니다.

     

[22] 또 네 집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처럼 되게 하고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처럼 되게 하리니 …

     

아합은 이전 왕들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아사의 집이 멸망당한 것은 아합이 왕이 되기 십여 년 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16장 11절입니다.

     

왕상 16:11 시므리가 왕이 되어 왕위에 오를 때에 바아사의 온 집안 사람들을 죽이되 남자는 그의 친족이든지 그의 친구든지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아합의 아버지 오므리는 이 사건이 있은 지 며칠 뒤에 왕이 되었고 젊은 아합은 그들이 얼마나 비참하게 죽었는지 다 보았습니다. 바아사와 친구였다는 이유만으로도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엘리야가 이야기한 것이 그대로 성취된다는 사실을 이미 여러 차례 경험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17장 1절에

     

왕상 17:1 …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

     

엘리야의 말대로 3년 반 동안 비와 이슬이 내리지 않아 사람들이 굶어 죽어 가는 고통을 겪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아합은 극심한 불안 상태에 있었습니다. 20절 상반절에

     

[20a] 아합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 대적자여 네가 나를 찾았느냐 …

     

이 원수야 하며 엘리야를 향해 원망하는 분노의 근원에는 엄청난 불안감이 있습니다. 자기가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나뿐 아니라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이 비참하게 죽게 되는구나.” 이런 상황이므로 심판의 선고가 내려지자 무서워서 견디지 못하고 겸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것도 보셨다는 것입니다. 28절과 29절 상반절입니다.

     

[28]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29a]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

     

그리고는 29절 하반절에서 선고 유예를 내리십니다.

     

[29b] … 그가 내 앞에서 겸비하므로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는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

     

“아합의 시대에는 벌을 내리지 않는” 유예가 선고됩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가 잘못해도 유예받고 다음 세대에 집행되나요?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유예가 아닌 선고 무효가 선포되었습니다. 골로새서 2장 13, 14절입니다.

     

골 2:13-14 [13] …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14]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우리의 죄를 다 사하셔서 선고가 무효가 되었습니다. 인간 법정에서 선고 무효가 벌어지는 경우는 기소 자체가 처음부터 잘못된 증거에 의해 조작된 경우 같은 아주 희귀한 경우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십자가로 우리의 죄를 사하셨고 대신 생명의 성령의 법을 주셨습니다.

     

롬 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아까 얘기했듯 인간은 율법의 선을 넘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행위는 항상 악하고 영적인 동기는 죄와 우상의 힘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결국 욕심 때문에 동기가 늘 악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그 어떤 좋은 일을 해도 하나님이 “잘했다”라고 하실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선을 넘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주셨습니다.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영생으로 넘어가는 자를 하나님이 “의롭다고 칭하십니다.” 이것이 칭의입니다. 존재 자체가 의로워진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불의한데 그 위에 다른 것을 덮어 버리신 것입니다.

     

덮은 것만 보시겠다고 정하신 것입니다. 한 존재가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 나오면 하나님께서는 그 존재를 예수 안에 있는 존재로 보시고, 예수님의 의를 그에게 전가해 주신 것입니다.이렇게 의를 전가받은 자에게 주어지는 법이 성령으로 말미암는 생명의 법입니다.

     

사망과 생명, 율법과 십자가의 두 길이 갈라졌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내가 그렇게 큰 죄를 저질렀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동기까지 보시며 말씀하십니다. “욕심으로 인해 네가 죄와 우상에게 팔렸기 때문에 너희의 모든 행위가 악행이다. 그러므로 율법에 의해 사형이다.” 이런 선고가 내려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동시에 십자가의 길이 주어져 있습니다.

     

“하나님, 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십자가에서 제 죄를 사하시고, 저에게 생명의 법을 적용하셔서 생명을 주시옵소서.” 이렇게 간구하는 자는 율법의 무서운 조항을 넘어 의롭게 되어,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생명의 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 하늘 법정의 이야기가 성경의 마지막인 요한계시록에도 나옵니다. 계시록 20장 12절입니다.

     

계 20:12 ...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이 보좌가 바로 하늘 법정입니다. 그곳에는 책들이 있습니다. 한 책은 생명책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행위를 따라 기록된 책들입니다. 이 땅에서 하는 모든 행위가 다 기록되어 있고 인간은 기록된 자기 행위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모두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집니다. 그런데 유일한 살 길이 무엇인가요?

     

십자가의 길을 건너간 자들은 행위 책보다 더 높은 상위 법인 생명의 법에 따라 심판받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행위를 했더라도 그 죄를 용서받고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복음의 그림입니다. 성경은 아합을 통해 죄는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하지만 십자가로 하나님의 공의가 은혜와 긍휼로 주어졌습니다.

     

“아합과 같은 놈도 회개하여 선고 유예를 받았는데, 이토록 큰 은혜를 받은 너희는 회개함으로 영원한 생명을 누려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생명의 길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예수의 보혈로 인해 죄에서 벗어나고, 파괴적인 욕망에서 자유를 얻어 영생을 누리게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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