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강해 20 18-1-15 성도가 세상에서 갈등하는 이유
2026년 6월 7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 많은 날이 지나고 제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2] 엘리야가 아합에게 보이려고 가니 그 때에 사마리아에 기근이 심하였더라
[3] 아합이 왕궁 맡은 자 오바댜를 불렀으니 이 오바댜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
[4]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가지고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더라
예수를 믿어도 세상에서 갈등을 경험하는데 그때마다 우리는 의문을 가집니다. 내가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는데, 왜 이렇게 사는 게 힘들까? 그러나 성경은 예수를 믿으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더 많은 갈등이 있다고 말합니다. 즉 세상에서 경험하는 갈등은 어쩌면 여러분이 성도라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성도가 세상에서 갈등 정도가 아니라 심지어 환란을 당한다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갈등은 개인 안의 내면적인 고민이지만 환란은 외부의 압박까지 가해지는 심각한 상황입니다. 이런 정도의 환란은 아니어도 하나님 백성이라면 세상에서 갈등하고 고민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하다고 생각해야 갈등에서 회피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아주 심각한 갈등을 경험한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바댜 이름 뜻은 '하나님의 종'인데 실제로 세상에서는 하나님 믿는 사람들을 박해했던 아합의 신하로 살며 필연적으로 갈등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12절에 오바댜는 스스로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12] … 당신의 종은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
이것은 요즘의 표현으로 “모태 신앙으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개인의 주관적 생각만이 아니라 성경의 평가이기도 합니다. 3절입니다.
[3] … 이 오바댜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여호와 신앙을 가장 박해하는 아합 밑에서 충성되어 살아가려니 매일 갈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 성도가 세상에서 갈등하는 이유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왜 갈등하나요?
1.세상 사람과 성도의 길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vv.1-6
성도는 세상에서 왜 갈등하나요? 첫 번째로 세상 사람과 성도의 길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본문 1절에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명령을 하십니다.
[1] 많은 날이 지나고 제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하나님이 당시 사람들이 풍요를 좌우한다고 믿어 섬기던 바알에 대한 심판이자 우상숭배자들에 대한 심판으로 가뭄을 주셨습니다. 비가 없이는 살 수 없는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고통했을 것입니다. 3절입니다.
[3] 아합이 왕궁 맡은 자 오바댜를 불렀으니 이 오바댜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
기록에 의하면 아합이 소유한 말이 얼마나 많았는지 북방에서 말을 빌려달라고 하자 쉽게 2천 마리를 빌려 주었다고 합니다. 고대의 말은 지금의 군용차와 같습니다. 차를 2천 대씩 빌려줄 재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합은 말과 노새가 굶어 죽는 위기 앞에 오바댜를 불러 상의했습니다.
그러나 오바댜가 하나님을 경외할수록 점점 문제가 생깁니다. 아합과 이세벨과 여호와 신앙을 박해하며 심지어는 선지자들을 죽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충성된 신하였다면 왕과 왕비의 명령에 따라 선지자들을 죽였어야 하는데 오바댜는 반대의 일을 합니다. 4절을 보시면
[4]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가지고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더라
아마 오바댜도 재력이 있고 권력이 있으니까 이렇게 큰 인원을 숨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앞장에서 사르밧 과부가 본인 먹을 음식도 없어서 굶어 죽으려고 했듯이 일반 사람들은 매우 가난했을 상황에서 100명이나 되는 선지자들을 굴에 숨겨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었습니다.
만약 걸리면 지위, 재산, 심지어 가족의 생명까지 빼앗길 수 있음에도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기회라고 생각해 세상의 중심에서 하나님 뜻을 행한 것은 엄청난 신앙의 싸움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엘리야처럼 혁명의 사람, 하나님 나라를 위해 불꽃처럼 사는 사람도 있고 또 오바댜처럼 은밀하고 조용히 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목사가 될 수 없고 모든 사람이 다 같은 열정을 가질 수 없지만 하나님의 부르심대로 각자 자리에서 섬기는 것입니다.
오뱌다는 하나님께만 충성된 자가 아니라 아합에게도 큰 신뢰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아합은 지금 심각한 상황을 논하고 문제를 해결하고자 오바댜를 부릅니다. 5절을 보시면
[5] 아합이 오바댜에게 이르되 이 땅의 모든 물 근원과 모든 내로 가자 혹시 꼴을 얻으리라 그리하면 말과 노새를 살리리니 짐승을 다 잃지 않게 되리라 하고
이 한 구절로 아합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오바댜는 자기 생명과 안위보다도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걱정하고 보호하고 있는데 아합의 유일한 관심은 말과 노새입니다. 이는 고대의 재산이자 군사력으로써 아합은 본인 외에 관심이 없습니다.
아합은 결국 자기 힘을 과시하고 유지하려는 인간의 자기중심적 욕망을 바로 대표적으로 보여줍니다. 세상 사람은 다 자기에게만 관심이 있습니다. 나와 내 가족, 내 명예, 내 힘, 이것이 세상의 길이자 바알의 길, 멸망의 길입니다. 이들이 찾아 헤매는 것은 꼴입니다. 말과 노새가 아사하면 안 되니까 꼴을 찾아 일시적으로 해결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꼴을 찾는다고 해도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일시적 해결책은 인간의 근원적 문제의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진짜 문제는 이 가뭄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임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말고 다른 것을 의존하여 자기를 부요케 한 행위에 대한 회개없이 꼴만 얻는다고 본질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세상 사람의 대표인 아합과 오바댜가 반대로 가는 것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6] 두 사람이 두루 다닐 땅을 나누어 아합은 홀로 이 길로 가고 오바댜는 홀로 저 길로 가니라
‘홀로’라고 번역된 단어는 ‘혼자’라는 뜻도 있지만 ‘따로’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왕이 혼자 나왔을 리는 없고 수행원이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단순히 ‘나눠서 찾아보자’해서 갈라진 것 같지만, 이 둘의 길이 전혀 다름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던 오바댜는 자기를 희생하여 다른 사람을 살리는 길을 선택했고, 세상 사람의 중심인 아합은 사람들이 다 죽어도 자기 재산을 지키려는 선택을 했습니다. 이 길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나요?
오바댜는 가뭄을 끝낼 수 있는 엘리야를 만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 돈, 사랑 등의 영역에 가뭄이 찾아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1차적으로는 해결 방법을 찾아 헤매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갈림길에서 우리가 생수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을 찾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이 두 길의 이야기가 바로 시편 1편 1절에 나옵니다.
시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이 구절은 시편을 여는 구절이면서 동시에 시편 150편 전체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복 있는 자’는 단수이고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은 복수입니다. 복된 삶은 외로운 싸움이고 좁은 길이라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 욕망을 충족하길 원합니다.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은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악은 내면에 죄가 겉으로 표출되는 양식이고 영혼이 죄로 가득 차 있으면 결국 악한 행동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단순히 나쁜 행동이 아닙니다. 죄의 근원은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하여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서려고 하는 것이 죄의 본질이며 교만이고, 그 교만의 끝은 공허입니다. 공허한 영혼을 욕망으로 채우고자 하는 모든 몸부림이 죄악입니다.
성경이 특별히 세상 사람들은 꾀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누구나 마음의 생각에 따라 결정을 내립니다. 하나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세상 사람은 욕망의 소리를 듣고 그것을 따라갑니다. 어떤 생각을 받아들이는가 이 시작점이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 생각과 내 욕망의 길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선 다른 길을 제시하십니다. 지금 바르게 하나님 말씀을 듣고 있다면 사실은 불편해야 됩니다. 하나님 말씀은 내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 세상의 방법이 아니라고 끊임없이 재단하십니다.
인간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나보다 약한 사람을 놀리고, 남이 좋은 것을 가졌으면 때려서라도 빼앗아 나의 유익을 취하고자 합니다. 어른이 되면 그런 행동이 사라지는 것 같지만 사실 표현이 교묘해질 뿐이지 본질은 여전히 같습니다. 부부 사이에도 왜 갈등이 있나요? 교묘히 서로를 짓밟고 파괴하고 내 말을 듣게 하려다 보니 싸움이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 노릇하기가 쉽지 않다 보니 가장 가까운 사람을 지배하고 파괴하고 도구로 쓰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죄성의 본질입니다. 시대가 흐르고 상황이 바뀌어도 사람들이 좋아하는 길은 늘 똑같습니다. 높아지고 부자 되고 "네 마음대로" 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이 욕망의 길이며 파괴의 길이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말을 듣고 살아가시나요?
꾀는 두 번째 단계에서 방법으로 바뀝니다.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를 통해 습관이 형성되고, 그것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복 있는 자, 하나님의 백성은 희생하고 섬기기를 선택합니다. 옆 사람한테 져야 하고 포기하면서 내어주는 것은 본성과 반대되니까 힘든 것입니다.
세상들은 이익이 된다면 남의 것을 착취하고, 내 원하는 대로 상대방을 바꾸기 위해 통제합니다. 이 세상 사람의 길을 계속 가다 보면 습관이 되고, 나중에는 그 자리에 아예 서게 됩니다. 소속이 바뀌는 것입니다. 복 있는 자는 의인들의 소속, 세상 사람은 악인들의 소속. 시편 1편에서는 이 소속을 ‘회중’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이 둘 사이를 왔다 갔다 하고 있습니다.
우리 욕망의 소리가 지금 얼마나 고함을 지르고 있나요? "네 원하는 대로 살아, 왜 네가 희생해야 돼? 왜 네가 져야 돼?" 성경은 이것이 아합과 바알과 세상 사람과 악인과 죄인과 교만한 자와 멸망의 길이라고 명확히 말씀하시지만 우리 본성은 그 소리를 좋아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의인의 길은 재미없고 힘들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은 명확합니다. 복 있는 자는 이웃 사랑의 희생과 섬김을 하게 되고, 세상 사람은 자기중심적 욕망을 실현하며 삽니다.
우리가 볼 때 세상 사람들은 잘 사는 것 같지만 실제 그런 사람들은 극소수입니다. 마귀가 그냥 말로만 꼬시나요? 광고판처럼 예시 삼을 사람들을 심어 놓고 강력한 힘과 영광을 줍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고 "저 길이 좋은 것 같아" 광고판을 보며 따라가도록 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 결국은 시냇가의 심기운 나무와 바람에 나는 겨입니다. 이 둘의 차이는 생명력의 유무입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바람이 불어도 흔들림이 없고, 상황에 관계없이 생명의 결과물인 열매를 만들어냅니다. 열매는 왜 열리나요? 주변 사람들이 먹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생명이 있다면 주변 사람들이 그 열매를 누리고 있어야 합니다. "낙담했다가 집사님이 기도해 주셔서 회복됐어요. 권사님, 제가 고통할 때 이야기 들어주셔서 힘을 얻었어요. 아빠, 내가 흔들릴 때 나를 붙들어줘서 내가 타락하지 않고 지나갈 수 있었어" 이런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어야 합니다.
바람에 나는 겨는 어떤가요? 바람이 불면 하늘 꼭대기까지 올라갑니다. 어제까지 알지 못했던 사람이 알고리즘을 타고 큰 인기를 누립니다. 하지만 또 바람처럼 사라집니다. 물론 세상에는 바람을 잘 읽는 사람도 있고 그들을 추종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런 바람은 언제 꺼질지 모릅니다. 바람이 없으면 겨는 쓰레기처럼 땅을 굴러다닙니다.
아합 왕도 모든 것을 가졌었지만 우리는 그를 ‘역사상 북이스라엘을 가장 타락시킨 악한 왕’으로 기억합니다. 생명이 없었기 때문에 그걸로 끝난 것입니다. 우리는 완벽한 시냇가에 심은 나무로 살 수는 없습니다.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을 때도 있지만, 세상의 바람은 매일 우리를 뒤흔듭니다. 하지만 "네 원하는 대로 살아, 왜 네가 져야 돼? 왜 네가 희생해야 돼?" 이런 생각 끝에는 어떤 결국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 끝없는 갈등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순종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왜 갈등하나요?
2. 믿음을 약화시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vv.7-15
두 번째로 성도는 세상에서 왜 갈등하나요? 믿음을 약화시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오바댜가 결국 엘리야를 만납니다. 7절입니다.
[7] 오바댜가 길에 있을 때에 엘리야가 그를 만난지라 그가 알아보고 엎드려 말하되 내 주 엘리야여 당신이시니이까
오바댜는 아합의 명령으로 전국을 다니며 엘리야를 찾았습니다. 방방곡곡을 다닐 때는 없다가 이제 나타난 것입니다. 그때 엘리야가 뭐라고 합니까? 8절입니다.
[8] 그가 그에게 대답하되 그러하다 가서 네 주에게 말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하나님이 아합에게 가라고 하셨기 때문에 엘리야도 3년 반 만에 나타났습니다. 설마 이세벨의 고향에 숨어 있을 줄 몰라서 못 잡았지, 아마 중간에 잡았다면 바로 죽였을 것입니다. 아합이 나라의 종교를 바꾸면서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하면 비가 많이 와서 우리 부자 된다"고 선전했는데, 엘리야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선포한 후 온 나라가 다 죽게 생겼으니 엘리야는 지금 원흉인 상태입니다. 그런데 오바댜가 뭐라고 하나요?
[9] 이르되 내가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 당신이 당신의 종을 아합의 손에 넘겨 죽이게 하려 하시나이까
3년 반 동안 못 찾았다가 이제야 "엘리야 여기 있습니다" 하면 "너 그동안 거짓말했구나" 아합이 화낼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람 오바댜도 내면에는 깊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체입니다. 예수 잘 믿으면 두려움이 사라지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두려움은 인간이 느끼는 가장 강렬한 감정이고, 이 두려움은 사실 욕망에서 옵니다. 살고 싶은 욕망이 없으면 죽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두려움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이것이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를 방해하고 하나님 명령에 불순종하게 만드는 영적인 방해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엘리야가 "나 왔다고 아합에게 얘기해" 말해도 반복하여 반문합니다. 12절 보시면,
[12] …내가 가서 아합에게 말하였다가 그가 당신을 찾지 못하면 내가 죽임을 당하리이다…
14절입니다.
[14] 이제 당신의 말씀이 가서 네 주에게 말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하시니 그리하면 그가 나를 죽이리이다
오바댜가 마음이 좁거나 소심해서 "나 죽을 것 같아요 못해요 못해요" 이야기했나요? 지금 얼마나 심각한 두려움이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상황인지를 표현하기 위해 길게 써놓은 것입니다. 오바댜가 원래 두려움이 많아서가 아니라 두려움을 가지게 된 이유가 13절에 있습니다.
[13]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일 때에 …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을 계속 보는 것입니다. 쉽고 깔끔하게 죽였을까요? 얼마나 비참하고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을까요? 죽음을 계속 목도하며 심리적으로 고통하고 눌린 상태입니다. 눈에 보이는 죽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지금 섬기는 아합이 어떠합니까? 감정적으로 오락가락 요동하는 인간입니다.
[10] … 내 주께서 사람을 보내어 당신을 찾지 아니한 족속이나 나라가 없었는데 그들이 말하기를 엘리야가 없다 하면 그 나라와 그 족속으로 당신을 보지 못하였다는 맹세를 하게 하였거늘
아합이 얼마나 재촉하고 힘들게 했는지 지역마다 가서 맹세하게 시켰고, 그래서 지난 3년 그렇게 맹세했는데 지금 와서 엘리야가 있다고 하면 화내서 죽일 것이 뻔한 상황인 것입니다. 아합과 이세벨이 얼마나 공포스럽게 정치를 하고 사람들을 괴롭히고 오바댜를 코너에 몰아넣었는지를 성경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두려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우리는 두렵고, 고통하고, 미래를 알지 못하면 불안하고,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알아도 본질은 여전합니다. 그런데 오바댜가 두려워한 진짜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12절을 보시면
[12] 내가 당신을 떠나간 후에 여호와의 영이 내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당신을 이끌어 가시리니 …
물론 세상도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도대체 어떻게 일하시는지 모를 때가 너무 많이 있습니다. 제 인생에서도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고통할 때마다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계신 것은 알겠는데, 도대체 왜 이렇게 일하시는지, 왜 나는 늘 아픈지, 왜 늘 돈이 없게 만드시는지, 왜 길을 막으시고 수치스럽게 만드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는 늘 명확한 답을 원하고, 기한이나 방법을 원합니다. 저도 고통을 견뎌내려고 100일 기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100일 동안 10시간씩 기도하면 점점 믿음이 커지는 착각도 들면서 끝날짜가 다가올수록 더 열성적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나 100일을 채웠다고 문제가 해결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 100일 후에 더 박살나고 더 고통스럽다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때를 알려주시는 대신 하나님이 계획하고 이끌어가십니다. 방법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가 선택한다면 쉽고 편안하고 힘들지 않은 방법을 택하겠지만 하나님이 예측 불가능한 것들을 보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혼란스럽습니다.
결혼 당시에 결혼이 이렇게 힘들 줄 아셨던 분 계신가요? 알았으면 다들 결혼을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결혼을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예측할 수 없던 관계와 상황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만들어가십니다. 죽을까 봐 두려워하던 오바댜가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엘리야의 15절 말씀 때문입니다.
[15] 엘리야가 이르되 내가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오늘 아합에게 보이리라
엘리야는 두 가지 선언을 합니다. 첫 번째는 ‘내가 섬기는’으로, 영어로는 "before whom I stand"라고 해서 내가 하나님 앞에 섰다는 신전의식(神前意識)입니다. 마음에 두려움이 점점 커지면 아합과 이세벨이 크게 보이고 하나님은 예측 불가능한 분으로 멀게 느껴집니다. 그때 필요한 것이 "하나님이 내 앞에, 내가 그분 앞에 있다"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그 앞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백성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영원히 함께 계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2:1과 같이 항상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말씀을 계속 받아들여야 합니다.
두 번째로 엘리야는 ‘만군의 여호와’를 불렀습니다. 이것은 특별한 이름으로 만군, 'the Lord of heavenly armies,'는 하늘에 있는 군대들의 여호와라는 뜻입니다. 즉 하늘의 군대를 통솔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강력하심을 이 구절에 표현한 것입니다.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세상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영어로는 두려움과 경외가 'fear'로 같은 단어이지만 한글 성경은 경외라고 번역합니다. 하나님을 그냥 무서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그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만군의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을 알 뿐 아니라 그분이 나를 사랑하심을 믿음으로 그분을 사랑하며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입니다.
두려워한다고 부끄러워하거나 낙심하고 포기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금 걸어가는 길이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힘들어도 하나님이 여러분을 버리신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오바댜와 같은 갈등을 경험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길이 맞나? 잘 가고 있나? 잘 하고 있나? 이 때 하나님은 "이 갈등을 통해 너의 죄를 발견하고 나를 의존하며 나를 두려워하고 있다면 이 길이 맞는 거야"라고 말씀하십니다. 갈등 속에 있을 때 좁은 길을 선택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리에 서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