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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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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강해 03 2.19-25 메시아의 사역

2026년 9월 20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9] 그 성읍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우리 주인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위치는 좋으나 물이 나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20] 엘리사가 이르되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내게로 가져오라 하매 곧 가져온지라

[21] 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에 던지며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부터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 하셨느니라 하니

[22] 그 물이 엘리사가 한 말과 같이 고쳐져서 오늘에 이르렀더라

[23]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그가 길에서 올라갈 때에 작은 아이들이 성읍에서 나와 그를 조롱하여 이르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24] 엘리사가 뒤로 돌이켜 그들을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곰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의 사십이 명을 찢었더라

     

본문에는 놀라운 기적 하나와 충격적인 사건 하나가 나옵니다. 오염되어 마실 수 없던 물에 소금을 던지자 물이 회복되어 생수가 된 기적과 벧엘의 아이들이 엘리사에게 “대머리여, 올라가라”라고 조롱하자 엘리사가 그들을 저주하여 암곰 두 마리가 사십이 명을 죽인 사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본문을 근거로 하나님이 비이성적이고 분노를 통제하지 못하는 신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을 자세히 살피지 않고 수박 겉핥기식으로 읽은 뒤 선입견으로 성경을 해석하면 엉뚱한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엘리야와 엘리사는 메시아께서 하실 일을 보여 주는 모형입니다. 실체인 예수님께서 오셔서 행하실 일의 그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구원하기 위해 이런 일을 행할 것이다.”라고 여러 사람과 상황을 통해 미리 보여 주셨습니다. 나중에 실체가 오면 그분을 알아보고 따르라고 보여 주신 것입니다. 본문의 두 가지 사건도 메시아 예수님께서 행하실 일을 미리 그림으로 보여 준 것입니다.

     

메시야는 어떤 사역을 하시나요?

1.죽은 땅을 고쳐 열매 맺도록 하십니다. vv.19-22

     

그렇다면 메시아는 어떤 사역을 하시나요? 죽은 땅을 고쳐 열매 맺게 하십니다. 19절입니다.

     

[19] 그 성읍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우리 주인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위치는 좋으나 물이 나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이 성읍은 여리고로 종려나무의 성읍이라고도 불렸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통로에 있어서 사람들도 많이 모이는 번성하고 좋은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물이 오염되었던 것인데 아무리 도시가 좋아도 물이 없으면 사람이 살 수 없습니다.

     

현대 과학이 밝혀낸 바에 의하면 여리고 주변의 땅 깊은 흙에는 방사능 물질이 섞여 있다고 합니다. 당시에도 방사능에 오염된 흙이 샘물로 흘러가 곡식이 열매를 맺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곡식만이 아니라 사람이나 짐승도 유산이나 건강이상 등 이상한 일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겉으로는 풍요로운 성읍이었지만 속으로는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겉은 화려하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성읍은 무엇을 비유하나요? 인간입니다. 우리도 멀쩡한 척 하지만 실체를 파고들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모습이 대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과 섬김의 열매를 기대하시지만 이런 열매들은 우리 안에 없습니다.

     

인간은 본래 이기적인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에 자기 욕망에서 벗어난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가까운 관계에서 항상 문제를 일으킵니다. 가까운 관계는 사랑과 희생 없이 유지될 수 없습니다. 부부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 전에 그 사람을 좋아했던 그 이유로 힘들어집니다. 활달해서 좋아했는데 결혼해보니 그 활달함 때문에 집에 붙어있지를 않아서 힘들고, 차분해서 좋아했는데 결혼해보니 차분하다 못해 우울해해서 옆에 있기가 힘이 듭니다. 좋아하는 감정만으로는 관계가 유지될 수 없습니다. 자녀와도 동료와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것이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인간의 본질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리고 사람들은 엘리사에게 찾아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도움을 요청하는 겸손한 태도를 보십시오. 아직 엘리사가 어떤 권능도 보이지 않았는데도 이들은 엘리사를 엘리야의 직계 후계자로 인정하고 도움을 요청합니다. 엘리사가 20절에 어떤 처방을 내리나요?

     

[20] 엘리사가 이르되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내게로 가져오라 하매 곧 가져온지라

     

새 그릇은 정결함,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는 힘을 보여 줍니다. 정결함 가운데 부패를 방지하는 힘이 작용해야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을 보여 주는 그림입니다. 소금 자체가 방사능 물질을 없애는 것은 아니지만 엘리사는 소금을 물에 넣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21절입니다.

     

[21] 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에 던지며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부터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 하셨느니라 하니

     

말씀으로 선포했더니 22절에 치유가 일어납니다.

     

[22] 그 물이 엘리사가 한 말과 같이 고쳐져서 오늘에 이르렀더라

     

‘오늘’은 이 사건이 일어난 몇백년 후인 열왕기하가 기록된 시기입니다. 여리고 사람들이 몇백년 동안 좋은 물을 마셨다면, 이 기적이 일어난지 3천년이 지난 요즘은 어떨까요?

     

여리고로 성지 순례를 가면 ‘엘리사의 샘’이라는 곳에서 아직도 맑은 물이 흘러나옵니다. 그곳에는 ‘아인 에스 술탄’이라는 이름도 있지만 ‘엘리사가 기적을 행한 곳’이라는 안내판도 붙어 있고 ‘엘리사의 샘’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물의 근원적인 본질이 바뀐 것입니다.

     

성경은 중요한 사건을 보여 줄 때 한 번만 보여 주지 않습니다. 비슷한 구원의 그림을 여러 차례 보여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면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를 종용합니다. 먹지 못할 물이 먹기 좋은 물로 바뀐 유사한 일이 또 언제 있었나요? 마라의 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 들어섰습니다. 음식은 없어도 몇 살 수 있지만 물은 3일만 못 마셔도 죽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처한 상황이 출애굽기 15장 23절에

     

출 15: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마라’라는 말 자체가 ‘쓰다’라는 뜻입니다. 이 물도 오염되어 있었는지 마실 수 없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광야에서 늘 했던 대로 원망하고 불평을 쏟아냅니다. 이어 24절과 25절입니다.

     

출 15:24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

     

쓴 물이 마실 수 있는 단물로 바뀌었습니다. ‘마라’는 성경에서 인생의 고통을 표현합니다. 내 욕망이 채워지지 않고 원하는 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쓰게 느껴집니다. 건강하고 싶은데 아프면 고통스럽고 돈이 많고 싶은데 돈이 없으면 그것이 고통입니다. 원함이 채워지지 않을 때의 고통을 ‘쓰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마라’가 사람 이름으로도 등장합니다. 룻기 1장 20절을 보겠습니다.

     

룻 1: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나오미는 ‘기쁨’이라는 뜻인데 살다 보니 인생이 너무 써서 자기 이름을 ‘고통’으로 바꾸고 싶을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고통의 원인은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베들레헴에 흉년이 닥쳤을 때 부자인 자신이 이곳에 계속 살다가는 사람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어야 하고 그러면 자기 풍요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해서 재산을 다 챙겨 모압으로 이사한 것입니다.

     

당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기업을 떠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작은 마을의 흉년에 자기 재산을 나누는 것이 싫어서 도망을 갔는데 그 곳에서 남편과 두 아들이 죽었습니다. 그런 뒤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고통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우리는 고통을 피할 수 없습니다. 주어진 지식, 능력, 건강, 돈을 욕망대로 통제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고통 가운데 살다가 답을 구하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 주변에 있던 마리아들처럼 말입니다. 신약성경의 ‘마리아’라는 이름은 구약성경의 ‘마라’와 같습니다. 마라라는 히브리어 이름을 헬라어로 표현하면 마리아가 됩니다. 요한복음 19장 25절을 보겠습니다.

     

요 19: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 마리아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님의 어머니는 ‘마리아’입니다. 그 옆에 이모가 있습니다. 언니가 마리아이니 동생은 마리아는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기록되지 않습니다. 이어서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등장합니다. 여자 네 명 가운데 세 명이 마리아입니다. 마리아가 흔한 이름이어서일까요? 물론 다른 이름의 사람들이 있었겠지만 성경이 일부러 이렇게 기록한 것입니다.

     

이 마리아들은 인생의 고통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보십시오.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 아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남자와 관계하지 않았는데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났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며 사람들을 이끌고 다녔는데 지금 발가벗겨진 채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 가고 있습니다. 아마 심장이 모두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특별히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그를 지배하여 인생을 포기했던 여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귀신들을 쫓아 주셔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예수님은 참 구원자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 가고 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마리아들의 인생이 바로 우리의 인생이기에 이들이 우리를 대표하여 예수님 옆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힘으로는 인생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약해지고 관계가 늘어날수록 책임감과 부담을 느낍니다. 내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많습니다.

     

이 고통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나요? 십자가의 예수님을 통해서만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셔서 자신이 누구신지를 우리에게 확실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출애굽기에서 마실 수 없었던 마라의 샘물, 나오미처럼 인생의 고통을 짊어진 우리, 십자가 곁에 서 있던 마리아들이 모두 무엇을 보여 주나요? 우리는 고통 가운데서 아름답운 것을 잉태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고통과 쓰라림과 상처로 가득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착각하며 인생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실패할 때마다 나오미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벌주셔서 내가 이렇게 되었다.”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우리의 본질 자체가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본질입니다. 이것이 죄의 결과입니다.

     

왜 고통스러운가요? 우리 속에 멈추지 않는 욕망으로 인해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가끔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합니다. 주로 변곡점이 되는 대학입시나 결혼을 앞두고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대학도 결혼도 답이 되지 않습니다. 생명력이 없기 때문에 계속해서 목마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오염된 땅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혼돈하고 공허한 땅이라고 부릅니다. 황량한 광야, 영적으로 불임이라고도 표현합니다. 원래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이 희생하고 사랑하셨듯 우리도 열매를 풍성히 나누라고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와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기에 예수님은 우리의 본질을 다시 바꾸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4장에서 생수를 주시는 것입니다. 13절입니다.

     

요 4: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왜 목마른가요? 공허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모두 끊임없는 욕망으로 자동차를 바꾸고, 취미를 바꾸고, 가방을 바꾸고, 집을 바꾸지만 늘 목이 마릅니다. 이 여인은 물건을 넘어 남편을 다섯 명이 바꾼 여인에게 예수님이 찾아가십니다. “그 목마름은 절대로 사람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대신 14절에 무엇을 약속하셨나요?

     

요 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 샘물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주시는 성령입니다. 메마르고 죽어 버린 땅에 성령의 생수가 흘러야 우리는 목마름에서 자유를 얻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노력으로는 맺을 수 없는 놀라운 열매를 성경은 성령의 열매라고 부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 23절입니다.

     

갈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 열매들은 모두 관계의 열매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맺히는 열매입니다. 사랑은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의 사랑에 목을 매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야 목마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희락은 상황과 관계없이 우리 영혼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가득 채워져 만족하고 기뻐하는 영적인 충만함이며, 화평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다스리시는 강력한 권세로 말미암아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견고하게 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런 내적인 열매가 자연스럽게 맺히면 우리 인생에 놀라운 변화가 나타납니다.

     

오래 참음, 자비, 양선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맺히는 열매입니다. 인생에서 경험하는 대부분의 고통은 사람 때문이기에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열매입니다. 오래 참음은 단순히 견디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실 것을 받아들이고, 상대방이 성장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마음입니다. 사람은 말로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변화시키십니다. 그것을 믿고 그 사람이 성장할 때까지 끝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자비는 상대방이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긍휼한 마음으로 사랑을 부어 주는 것이고 양선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선입니다. 결국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열매들입니다.

     

충성, 온유, 절제는 자신과의 관계를 위한 열매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옛사람이 계속 우리를 지배하기에 우리는 자신과의 관계가 깨져있습니다. 내면의 어떤 힘이 우리를 악한 자리로 끌고 가기 때문입니다.

     

충성은 어디에 충성한다는 의미라기보다 말을 통제하는 것, 말한 대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입니다. 온유는 분노를 통제하는 능력을 이야기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내 인생과 다른 사람과 환경 가운데 가지고 계신 계획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입니다. 절제는 쾌락을 다스리는 힘입니다.

     

지금 이 열매를 맺고 계시다면 여러분의 인생은 너무나 행복하고 풍요로우며 기쁠 것입니다. 지금 열매가 없어서 고통받고 계신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 저는 여리고처럼 열매를 맺지 못하는 황폐한 땅입니다. 생명을 주시는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셔서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이 열매가 완성되는 하나님 나라가 요한계시록 22장에 나옵니다.

     

계 22:1-2 [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천국에 가면 강이 흐르고 열매가 많은 나무가 있을 장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우리가 열매를 맺어 서로에게 풍요로움을 주고, 서로를 치유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말씀은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땅이라는 것을 인정하며 살고 계신가요? 이것을 인정해야 예수 그리스도만이 여러분을 치유하여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그분께 간구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인생 가운데 어떤 열매가 없어서 고통받고 계신가요? 자기 쾌락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절제의 열매가 필요합니다. 누군가를 너무나 미워하면서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어리숙하고 성장하지 않으며 바보 같을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오래 참음의 열매를 간구해야 합니다. 미래가 불안하고 두려워서 고통받고 있다면 하나님께 화평의 열매를 간구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자기 힘으로 통제할 수 없을 때, 하나님께서는 마라와 같은 인생이 풍요로운 생명으로 말미암아 열매를 맺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열매 맺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메시야는 어떤 사역을 하시나요?

2. 우상 숭배자들을 심판을 하십니다. vv.23-25

     

두 번째로 메시아께서는 어떤 사역을 하시나요? 우상 숭배자들을 심판하십니다. 23절입니다.

     

[23]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그가 길에서 올라갈 때에 작은 아이들이 성읍에서 나와 그를 조롱하여 이르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물론 머리카락이 없는 것을 놀리는 것은 모욕적이고 나쁜 일이지만 아이들이 엘리사를 놀리자 엘리사가 저주합니다. 24절입니다.

     

[24] 엘리사가 뒤로 돌이켜 그들을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곰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의 사십이 명을 찢었더라

     

만약 요즘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해외 토픽감입니다. 이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지 않으면 깊은 오해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엘리사는 어디로 가고 있었나요? 벧엘입니다. 벧엘은 북이스라엘에서 우상 숭배의 중심지였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여로보암이 벧엘에 금송아지 신상과 성전을 만든 뒤 제사장까지 세워 놓고 와서 절하라고 했습니다. 열왕기상 12장 32절입니다.

     

왕상 12:32 … 벧엘에서 그와 같이 행하여 그가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그가 지은 산당의 제사장을 벧엘에서 세웠더라

     

여로보암은 벧엘과 단이라는 북쪽과 남쪽의 두 곳에 우상 숭배의 중심지를 세웠습니다. 그렇다면 이 일은 동네에서 놀던 아이들이 우연히 지나가는 엘리사를 놀린 것이 아닙니다. 사십이 명이나 죽었다는 것은 그보다 몇 배 많은 사람이 있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라는 번역이 오해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이 단어 ‘우네아림’은 사실 30대까지의 결혼하지 않은 젊은이들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들은 유초등부 아이들이 아니라 젊은이 집단 수십명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모여 있었습니다.

     

“대머리여, 올라가라.”는 도대체 어디로 올라가라는 뜻인가요? 하늘입니다. 엘리야처럼 올라가라는 것입니다. 즉 “너는 벧엘에 올라오지 말고 엘리야처럼 하늘로 올라가라. 벧엘은 우상을 섬기는 곳이고 우리는 우상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우상을 사랑한다.”

     

즉 이들은 순진한 동네 아이들이 아니라 벧엘 성전에서 우상을 열렬하게 숭배하던 젊은이들 무리였습니다. 엘리사가 오면 우상을 섬기던 그곳에 여호와 신앙이 다시 세워질까 봐 극렬하게 반대하며 오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반대하고 하나님의 권세를 거부하며 우상 숭배에서 떠나기를 원하지 않았던 자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것입니다. 이 똑같은 일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셨을 때 나타났습니다. 마태복음 27장 39-40절입니다.

     

마 27:39-40 [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 이르되 …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지나가던 사람들뿐 아니라 제사장들과 옆에 매달린 강도들까지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모욕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매달려 이들로부터 엄청난 비난과 욕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엘리사처럼 심판하셨다면 모두 죽는 것 아닌가요? 그렇게 하실 수도 있었지만 예수님은 이런 자들조차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7절은 무엇이라고 말씀하나요?

     

요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모두 심판하셨다면 우리도 모두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지금은 예수님의 이름을 믿지 않는 것 자체가 심판입니다. 요한복음 3장 18절입니다.

     

요 3: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물론 심판이 지금 당장 임하지는 않습니다. 지금은 은혜의 기간이며 심판의 유예 기간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것은 예수님의 초림이고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지금 은혜의 기간이 주어져 있습니다. 심판이 유예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이름을 믿지 않으면 마지막 심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구약에서부터 계속 보여 주십니다. “심판이 곧 다가오고 있다.” 이 심판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임합니다. 계시록 19장 11절입니다.

     

계 19: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예수님께서 반드시 백마를 타고 오셔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누구를요? 믿지 않는 자들과 우상 숭배자들을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하나님 나라에서 임하는 최후의 심판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계시록 21장 8절입니다.

     

계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은혜의 기간에 마지막 일을 미리 알려 주심으로써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구원받으라고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우리 안에도 다 벧엘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벧엘에는 무엇이 있나요?

     

여러분의 벧엘까지 하나님께 맡겨 드림으로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을 통치하시기를 정말로 열망하고 계신가요? 아니면 “예수님께서 이것만은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지 않으시면 좋겠다. 이것은 내게 너무나 소중해서 끝까지 가져 갈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영역은 없으신가요?

     

이 은혜의 기간에 여러분의 벧엘 안에 있는 모든 더러운 우상을 내려놓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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