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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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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009 고난 07 계 7.13-17 큰 고난을 통과한 자들

2025년 11월 2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3]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6]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요한계시록에 대해서는 수많은 오해가 있습니다. 계시록의 환란을 보며 미래가 무섭고 참혹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계시록에 대해 자세히 알려고 하기보다 무서운 책이라고 기피하거나, 이런 무서운 일들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해당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부 기독교인들은 이 땅에 심판이 있기 전에 자신들만 휴거되어 하늘 잔치를 벌이고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남아서 고생을 하다가 그제야 예수를 믿게 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 근거 없는 이야기를 목사님들이 받아들이고 설교하고 가르쳤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믿는 자들은 하늘에 올라가서 해를 당하지 않고 모든 환란이 끝난 뒤 이 땅에 내려온다는 주장은 사실 미국의 어떤 방송 설교자가 쓴 소설의 내용입니다. 신학적 근거도 없는 이 소설을 한국 교회에서는 마치 성경적이며 미래에 벌어질 사실인 것처럼 믿게 되면서 오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미래에 벌어질 무서운 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역사 내내 벌어지는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이며, 2천 년 전에도 환란을 지나는 성도들에게 위로가 되었고 지금 환란을 지나는 우리에게도 소망이 되는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은 그림과 숫자를 통한 상징입니다. 본문 7장은 특별히 영적 실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6장에서는 일곱 인이 나오는데, 완전함을 뜻하는 일곱이라는 숫자 또한 특별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완전하게 심판하시는 과정에서 세상 사람과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다른 삶을 살아가는지를 보여줍니다. 세상에 임하는 기근, 질병, 전쟁, 지진에서 예수 믿는 사람만 살아날 수 있나요? 아닙니다. 역사 내내 이 땅에 벌어진 이런 재앙을 계시록은 일곱인이라고 표현하며, 세상의 심판은 점점 심해집니다. 요한계시록 8장에는 나팔 심판이 나옵니다.


6장에서는 지엽적이고 일시적이었던 환란이 8장에서는 전 지구적으로 확장됩니다. 우주의 질서가 흔들리며 모든 사람이 고통합니다. 예수를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경험하게 되는 세상의 환란을 이야기하는 6장과 8장 사이의 7장은 무엇을 이야기하나요? 바로 하나님 백성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현실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이면에 숨은 영적 이야기를 그림으로 보여줌으로 하나님 백성이 세상에서 환란을 당할 수 있지만 그 영적 실체와 본질을 기억하여 힘을 내라고 우리를 위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자들의 이야기임을 요한계시록 7장 4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4]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인침’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았다는 뜻입니다. 14만 4천은 아까 말씀드렸듯 의미가 있는 수입니다. 계시록에서 12는 하나님 백성을 상징합니다. 사실 구약 이스라엘 지파는 12가 아니라 요셉의 아들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각각의 지파로 계산하여 13개인데도, 하나님 백성의 이야기를 보여주기 위해 계속 12라고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 중 누가 빠지나요? 레위 지파가 빠집니다. 레위는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이유로 땅을 받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백성이 원래 살아가야 하는 모습, 표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레위는 땅 대신 12지파가 내는 십일조로 살아가야 합니다.


레위 지파처럼 하나님만 섬겨야 하는데 이 땅에서는 생존을 위해 땅을 가꾸고 살아가야 하니까, 레위 지파는 모형으로 하나님 백성이 어떻게 하나님만 섬기며 살지를 보여주고, 나머지 열둘은 하나님 백성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식으로 우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수많은 무리 중 12명을 제자로 택하셔서 하나님 백성을 이야기하셨습니다.


12가 왜 하나님 백성을 가리키나요? 성경에서 3은 하나님의 숫자이고, 4는 동서남북 온 세상을 의미합니다. 이 둘을 곱한 12가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구약의 12지파, 신약의 12제자처럼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불러 모으신다는 것입니다.


12에 12를 곱하면 144이고 여기에 1,000을 곱한 값이 14만 4천입니다. 천은 무한을 의미하는데 하나님의 백성의 숫자가 무한하다는 의미로 그 수를 14만 4천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이 어느 집단이 주장하는 것처럼 문자적인 수가 아닙니다. 7장 9절은 이 숫자를 이렇게 다르게 표현합니다.


[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나라, 족속, 백성, 방언은 같은 의미를 네 번 반복한 것입니다. 동서남북 빠지는 곳 없이, 흰 옷 곧 정결하게 되어, 승리의 상징인 종려나무를 들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과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이들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환란과 어려움을 지나가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승리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7장 13절은 이들이 누구인가 더 자세히 가르쳐주기 위해 질문합니다.


[13]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요한이 14절에서 무엇이라고 답을 합니까?


[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영적 실체는 시간을 초월합니다. 지금 우리들은 이 땅에서 환란을 지나가고 있고 2천 년간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환란을 지나갔습니다. 인생이 너무 힘들다고 느끼고 견디기 힘든 과정은 무엇과 관련이 있나요? 어린 양의 피에 옷을 빨아 희게 하는 과정과 관련 있습니다.


우리가 왜 환란을 지나야 하나요? 예수 믿으면 문제도 없고 병도 안 걸리고 성공해야하는 것 아닌가요?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이 땅에서 당하는 환란은 심판입니다. 환란이라는 말 자체가 ‘탈곡’입니다. 우리는 볍씨가 있는 채로 밥을 먹을 수 없습니다. 껍데기를 다 까야 먹을 수 있는 것이 나옵니다. 우리 역시 이 모습 그대로는 하나님 나라에 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욕심과 두려움으로 서로 미워하고 욕하고 용서하지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여기가 끝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천국에 가려면 죄의 영향력을 받는 옛 사람이 제거되고 깎여야 하는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셨기에 환란을 통해 껍데기처럼 너덜너덜한 옛 사람은 죽임을 당하지만 이 과정이 반복될수록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를 의존하는 믿음이 더 선명하여지고 또한 예수의 구원을 찬양하는 자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란과 예수의 피로 정결케 되는 일이 서로 깊이 연관된 것입니다. 환난을 통해 옛 사람을 벗어버릴수록 우리는 더 예수를 의존하게 되고, 죄의 영향력에서 벗어날수록 예수 그리스도로만을 찬양하는 온전하고 아름다운 성도의 모습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환란 당한다는 사실이 아직 억울하신가요? 아닙니다. 정결하게 된 하나님 백성에게는 놀라운 미래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큰 고난을 통과한 자들은 어떻게 되나요?


큰 고난을 통과한 자들은 어떻게 되나요?

1. 항상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v.15


첫 번째로 항상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15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15a]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


환란을 통과했더니 그들이 갑자기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습니다. 계시록에서 하나님의 보좌는 35번 나옵니다. 왕이 위엄 있게 앉아 있는 자리도 계시록은 그림 교훈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왕의 자리에 앉아 온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에게는 믿기 힘든 일입니다. 세상은 마치 마귀와 돈과 힘 있는 자가 다스리는 것 같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받았던 성도들 역시 도미티안이라는 악한 폭군에 의해 십자가에 매달려 죽고, 나무에 매달려 불에 타 죽고, 시체와 묶여서 구더기가 몸에 들어가 죽었습니다. 그런 성도들에게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준 것입니다.


‘세상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보좌에서 통치하신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진짜 고통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통치하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다 마음에 진짜 중요하다고 믿는 것들이 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실제로 돈이 세상과 나를 통치한다고 믿고 권력을 가져서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권력이 자신을 통치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자신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시지 않으면 우리는 죄의 영향력 아래에서 욕망과 두려움의 노예로 살아가게 됩니다. 세상이 좋다고 말하는 것들을 받아들이며 거기에 사로잡히는 순간에 나도 그런 삶을 살고 싶은 욕망과 혹은 그렇게 되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이 우리를 고통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러나 결혼이든 직장이든 내가 선택한 것 때문에 고통스러운 경우가 얼마나 많은 가요? 결국 두려움과 욕망에 사로잡히면 이 땅에서 절대로 고통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비단 기독교의 이야기가 아니고, 불교도 인간의 고통에 대해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결국 욕심이 원인이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욕심을 벗어나고자 3천 번씩 절하고 새벽 3시에 불공드리는 등 엄청난 수련을 해야 됩니다. 그러나 욕망은 마음에 있기 때문에 그 어떤 행위로도 욕망을 씻어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무서운 죄악을 영적으로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의 피로 우리를 자유케 하심으로 죄가 지배하던 곳에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자리로 우리를 옮겨놓으신 것입니다.


문제는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죄가 아직도 영향을 미치고, 예수를 믿었다고 바로 죄에서 벗어나 완벽하게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계속 이중적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경험하나요?


‘하나님의 통치가 아니면 우리는 얼마나 노예되어 살아가는가! 하나님 저를 다스려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통치하셔야 이 고통에서 자유로워져서 행복과 축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보좌에 앉아 통치하시는 하나님 앞에 설 날을 제가 기다립니다’ 고백하며 완전히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저도 평생 내가 통치하는 삶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불행한지를 경험하며 하나씩 하나씩 인생의 영역을 하나님께 맡겨드려 왔습니다. 아직도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욕망이 튀어나오지만 이제는 그 때마다 그것이 얼마나 부끄럽고 추한 것인가를 빨리 깨닫고 빨리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이제 좀 성화 되었나 싶으면 또 한 번씩 튀어나오곤 합니다.


요즘 두 번째 고3인 자녀를 지켜보며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첫째 때에는 그 아이가 예수를 믿느냐 안 믿느냐가 너무 중요했어서 대학을 어디 가느냐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아이와 관계가 상할까봐 고등학교 3년 동안 성적도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방 청소하다가 성적표를 보고 심장이 놀란 적은 있지만 일언반구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한동대를 알게 되어서 기도하다 아이에게 슬쩍 말을 꺼냈습니다. 집을 떠나는 것에 대한 로망도 있었고, 시험 삼아 갔던 한동 캠프에서 외향적인 친구들을 만나서 계속 연락하며 대학에서 만나자고 서로 독려하는 등 모든 것이 잘 맞아가다 마침 기적적으로 붙었습니다.


가 보니 한동대는 죄짓기가 힘든 구조입니다. 학교가 시내에서 많이 떨어진 외진 곳에 있어서 한 번 술 먹으러 나갈 래도 여러 명을 모아서 택시 불러서 나가야 되고, 교내 음주 흡연이 불가능합니다. 주위에서 권하는 것이라고는 북한 중보 특별 주간 스텝, 토요 예배 반주자, 외국인 친구 섬기기 이런 일들입니다.


실제 지난 3년 동안 신앙이 엄청 자랐습니다. 워낙 백지에서 시작했더니 요즘은 설교 노트도 보내고, 주위에서 들었던 말이 신학적으로 건강한지도 묻고, 힘들면 기도해 달라고 하는 것이 참 감사합니다. 아무튼 첫째 때는 고3인 줄 모르고 지났다가 이제 둘째 차례가 왔습니다.


사실 둘째 성적에도 저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기도한다고 좋은 학교 가는 것도 아니고, 좋은 학교 갔다 해도 고민이 없는 것도 아니고 해서 아들도 한동대를 보낼까 했는데 한동에도 부모 강요로 왔다가 신앙을 잃어버리는 학생들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 말마저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관심이 없던 차에 9월에 학부모 진학 상담을 가야 하는데 아내가 선약이 있어서 제가 가게 되어서 전날 아들을 불러서 수시와 정시 차이부터 대략의 틀을 배웠습니다. 그 날 3년치 성적을 띄워놓고 어느 학교를 갈 수 있다고 얘기를 30분 정도 듣자 그림이 그려졌습니다.


제가 지식욕이 있어서 그 때부터 입시 관련된 정보들을 찾아 들었더니 한 달 만에 입시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지식으로 끝나야 되는데 성적 나오는 거 분석하고 엑셀로 만들고 학교별 리스트 만들고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다 보니 제 안에 욕심과 두려움이 커져갔습니다.


지금보다 조금 더 맞으면 어딜 가겠다는 욕심과, 정시에서 미끄러지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과 싸우며 아침저녁으로 널뛰기를 하다가 며칠 전에는 드디어 꿈을 꿨습니다. 수능이 끝나고 성적을 봤는데 제가 안정권이라고 생각했던 최상보다 하나 더 맞은 점수를 맞은 꿈을 꾼 것입니다.


그날 회개했습니다. 유튜브 콘텐츠에 상담하는 엄마들의 불안함이 전해지고, 전문가들이 겁 주는 이야기에 흔들리고, 그래서 아들이 밤에 오면 조언이랍시고 마킹 밀리지 않게 조심해라, 검산 잘 해라 하며 불안을 전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제 인생을 인도하시고 큰아이 인생을 인도하신 것처럼 학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한 것인데 제가 회개합니다.’ 기도했습니다. 진짜 감사한 것은 대학이 아닙니다. 어떤 과정을 지나던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인생으로 살아가는 것이 복인데 그 본질을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여정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마치 나무 같은 존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뿌리가 없기에 열매와 이파리에 올인합니다. 얼마나 화려한가 높은가 멋있는가 그리고 그게 없으면 절망합니다. 그러나 나무는 겨울이면 시들게 됩니다. 계절이 안 맞으면 열매가 없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본질은 뿌리는 오직 여호와로 말미암은 삶입니다. 잎사귀가 없어도 괜찮고 열매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뿌리만 하나님에게 견고하게 근거를 두고 있다면 시절을 쫓아 과실을 맺고 때가 되면 푸른 잎사귀를 보여줄 수 있는 생명의 능력을 입어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통치자이심을 고백한 사람만이 무엇을 할 수 있나요? 15절 중반절을 보시면


[15b] …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


‘섬기다’는 serve이고 그 명사형인 service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이 물 떠다 드리고 청소하는 섬김이 아닙니다. 예배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고백하고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그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인생을 살고자 아무리 애써도 행복과 만족이 없다는 것을 경험하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맞습니다 하나님. 하나님만이 왕이시고 하나님만이 통치하실 때 나는 가장 행복합니다’라고 고백하는 자리에 서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하게 될 일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진짜 경험하기 위해서 우리는 내 욕심이 나를 다스리는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어떤 결말을 주셔도 그것이 감사와 찬양의 이유가 됩니다.


큰 고난을 통과한 자들은 어떻게 되나요?

2. 완전한 공급과 보호를 받게 됩니다. vv.15c-17


두 번째로 큰 고난을 통과한 자들은 어떻게 되나요? 완전한 공급과 보호를 받게 됩니다. 15절 하반절을 보겠습니다.


[15c] …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장막’은 구약 성경의 어떤 그림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 33장 7절과 9절 보시면


출 33:7, 9 [7]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 회막이라 이름하니 [9]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장막’은 ‘함께 거하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표현하는 단어로, 구약에서는 장막을 회막, 즉 회중이 모여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라고도 불렀습니다. 즉 하나님이 장막을 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영원히 함께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그림이 성전으로도 나옵니다. 역대하 7장 1절부터 3절을 보시면


대하 7:1-3 [1]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매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서 그 번제물과 제물들을 사르고 여호와의 영광이 그 성전에 가득하니 [2]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므로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전으로 능히 들어가지 못하였고 [3] 이스라엘 모든 자손은 불이 내리는 것과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위에 있는 것을 보고 돌을 깐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이르되 선하시도다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니라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보이시자 그 영광이 너무 찬란해서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할 정도였던 이 성전이 바로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증거였습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물리적인 성전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입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거하시매’가 구약 성경의 ‘장막을 치매’와 같은 단어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시매’라고 번역할 수 없으니까 ‘거하시매’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셔서 함께하는 곳이 장막이고 성전이고 예수입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나요? 성전에 하나님이 오실 때 영광이 가득했듯,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님도 떠나셨고 이제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요?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따르면 우리가 성전이 되었습니다.


고전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서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문제가 무엇인가요? 이 땅에 살면 우리 안에 있는 육신이 너무 강력하기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경험하기가 너무 힘이 듭니다.


이 땅에서는 결핍으로 인해 고통합니다. 부족한 것도 많고 원하는 것도 많고 질병, 사고, 재난 등 방비해야 할 것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어떤가요? 16절을 보시면


[16]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


절대 결핍이 없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완벽하게 모든 것을 공급하시기 때문에 목마름도 배고픔도 없는 축복이 주어집니다. 또한 16절 하반절은 뭐라고 하나요?


[16b] …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지나며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을 보호하시고 그들과 함께하셨습니다. 바로 이 미래가 하나님 나라에서 약속되어 있습니다. 광야 모티브에 더해 예수님을 또 무엇으로 묘사하나요? 목자입니다. 17절 상반절입니다.


[17a]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


우리는 이 땅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이 필요한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길을 보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천국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목자 예수님이 항상 함께 계시며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생명수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이것은 결국 시편 23편에 나오는 다윗의 고백, 우리가 이 땅에서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고백입니다. 23편 1절부터 4절을 보시면


시 23:1-2, 4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이 땅에서는 결핍 때문에 고통하고, 두려움 때문에 마비되지만 하늘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시편 23편처럼 ‘하나님 맞습니다. 제게 부족한 게 많은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으로 내 인생이 채워져서 만족합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벌벌 떨었지만 목자 예수님이 제 인생을 이끄시니 제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나님 은혜가 크십니다’라고 고백하게 되실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17절 하반절에 또 무엇이 약속되었나요?


[17b] …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이 땅에서 우리는 한계와 불안과 공포로 울 수밖에 없지만 우리에게는 어떤 미래가 약속되어 있나요? 이것으로 끝이 아니고 예수님이 목자가 되셔서 눈물을 닦아주시며 영원한 안식과 풍요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날을 기대하며 현재의 고난을 믿음으로 이겨내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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