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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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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121일 주일예배 설교문/ 장우현 목사

본문: 에 4:1-8

말씀봉독: 에 4:1-4


[1] 모르드개가 이 모든 일을 알고 자기의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성중에 나가서 대성 통곡하며

[2] 대궐 문 앞까지 이르렀으니 굵은 베 옷을 입은 자는 대궐 문에 들어가지 못함이라

[3] 왕의 명령과 조서가 각 지방에 이르매 유다인이 크게 애통하여 금식하며 울며 부르짖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에 누운 자가 무수하더라

[4] 에스더의 시녀와 내시가 나아와 전하니 왕후가 매우 근심하여 입을 의복을 모르드개에게 보내어 그 굵은 베 옷을 벗기고자 하나 모르드개가 받지 아니하는지라


에스더서는 짧은 책인데도 불구하고 등장인물들이 화를 내는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1장에서는 왕비가 말을 안들었다고 왕이 화가 났습니다. 왕비도 성경에 화가 났다고 표현은 안됐지만, 화가 났으니까 왕의 말인데도 안들었을 것입니다.. 3장에서는 모르드개가 절을 안했다고 하만이 화가 났구요. 7장에서는 하만이 에스더와 그 민족을 죽이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왕이 크게 화가 났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분노하는 모습이 자주 나올 뿐 아니라, 특별히 과도하게 분노하는 모습이 반복해서 나온다는 것은요, 특별한 의도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에스더서의 핵심 주제가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에 그 힌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란 하나님이 보이지 않지만, 저희의 삶의 세밀한 부분까지 개입을 하시며 다스리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섭리도 하나님의 통치, 다스림과 관련된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저희가 기쁘거나 슬프거나, 만족하거나 불만족하게되는 모든 상황들과, 만나고, 헤어지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모든 관계를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이고, 그 과정 가운데 가장 선한 결과인 구원의 완성 위해 개입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날아가는 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그냥 떨어지지 않는다는거에요. 그런데 그 섭리를 믿지지 못할 때 분노가 나구요, 그래서 내가 원하는대로 상황과 관계를 통제하려고 하는데, 생각대로 잘 안되거나 거절 당하거나, 무시를 당했을 때 분노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결국 에스더서 핵심 주제인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에 전면으로 반역하는 모습이 분노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반복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에스더서에는 그 분노를 다스리며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를 받아들이고, 기다리고 순종하는 사람의 모습도 나타납니다. 과연, 이 분노가 들끓는 에스더서 가운데 어디서 그런 모습이 나올까요? 그리고 그렇게 관계를 자꾸 깨뜨리고 불편하게 만드는 나의 분노를 성경적으로 어떻게 다스릴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떻게 분노를 다스릴 수 있나요?

1. 하나님의 섭리를 믿어야 합니다.(1-4)


[1] 모르드개가 이 모든 일을 알고 자기의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성중에 나가서 대성 통곡하며


모르드개는 하나님 백성들이 모두 죽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저희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아 많이 슬픈가보구나. 자기 때문에 민족이 다 죽게 되서 저런가' 하고 모르드개의 겉모습만 보고 지나치기 쉽습니다.


하지만 모르드개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요, 슬프기 전에 왕이나 왕비나 하만과 같이 강한 분노가 일어났을 것 같습니다. 모르드개는 사실 잘못한게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한 것 뿐입니다.


이때 모르드개가 자기만 해코지를 당했다면 다니엘과 세 친구들과 같이 불구덩이 속에 들어가더라도 끝까지 꽂꽂한 모습을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만이 하나님의 백성들 전체를 죽이는, 정말 황당하고 잔혹한 일을 벌인 것입니다.


자기 민족을 전멸시킨다는게요, 저희가 직접 경험해보질 못해서 잘 와닿지 않는데요, 저희 나라도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일본군이 우리 민족을 연구 실험체로 썬던 마루타 사건이나, 자기가 벌인 침략전쟁에서 저희 청년들을 강제징용해서 나뭇가지를 쥐어주고 총알받이를 시킨 일들.


그런 얘기 들으면 저희가 그 시대에 살지 않았는데도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저희도 그런데, 자기 목숨을 내놓을지라도 하나님께 순종했던 모르드개가, 그 하나님의 백성들도 얼마나 귀하게 여겼을까요? 귀하게 여긴 그 마음 만큼이나 하만에게 분노가 들끓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왕이나 하만처럼 분노를 쏟아내거나, 그 감정에 휘둘려서 이웃을 파괴하는 행동을 하지 않고, 대성통곡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대성통곡만 한 것이 아닙니다. 3절입니다.


[3] 왕의 명령과 조서가 각 지방에 이르매 유다인이 크게 애통하여 금식하며 울며 부르짖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에 누운 자가 무수하더라


여기서 금식하고 부르짖었다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이게 보통 일이 아닌 것입니다. 사실 모르드개가 분노하게 되는 핵심 포인트는 모르드개가 자기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겼던 하나님과 그 백성들을 하만이 너무나 하찮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이 울며 기도하는 사람들 앞에서 술마시고 파티까지 했어요.


이건 내가 살아가는 이유이자 내 자존감의 근원을 건드린거에요. 저희도 그런거 있잖아요. 다른건 다 참을 수 있는데, 그걸 건드리면 내가 죽더라도 넌 죽는거야 하는 그런거요. 하만이 모르드개의 그걸 건드린거에요.


그런데 모르드개가 거기서 화를 내는게 아니라 울면서 기도하고 있는거에요. 그런데 여러분들도 잘 아시잖아요. 먼저 운 사람이 지는거라는거.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든 눈물 흘리는 것을 참고 감추면서 분노의 이빨을 갈고 드러내는 것입니다. 지면 그 자존심이 구겨지니까요.


그런데 모르드개는 왜 화를 내지 않고 울며 기도한 것일까요? 눈물 많고 나약한 사람이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에스더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를 확고하게 믿고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를 확고하게 믿으면 왜 분노를 쏟는게 아니라 눈물을 쏟으며 기도하게 될까요?


저희는 내가 어찌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대상에게 버럭 화를 내기 쉽습니다. 하지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는 화를 함부로 못내서 울분이 납니다. 사람이 아니라 어찌할 수 없는 전채지변이나 불치병도 화를 낼 곳이 없어서 울분이 터지는 것입니다. 직장 상사에게 화를 내지 못해서 집에 와서 울분을 터트리잖아요.


그런데 인생의 모든 상황, 새 한마리 조차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저희 인생에 주어지는 모든 상황과 관계 가운데 분노를 함부로 표출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시는건데요? 결국 그건 하나님께 분노를 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걸 보고 단순히 분노가 아니라 죄의 문제라고 하셨습니다. 가인이 하나님이 아니라 아벨에게 분노가 났을 때 하나님은 너를 잡아먹기 위해 문 앞에 엎드려 있는 죄를 다스리라고 하셨거든요. 이 분노가 사람에 대한 감정조절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영적인 문제라는거에요.


감정들은 죄가 아니지만, 거기에 휘둘리다보면 마귀의 영향력 아래 들어가서 하나님이 아닌 내 뜻대로 하게됩니다. 그것이 바로 죄의 다스림을 받는다, 죄에게 잡아먹힌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분노가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분노를 사람이 다스릴 수 없는 것입니다.


저희가 1분에 숨을 몇 번 쉴지는 컨트롤할 수 있지만, 심장을 몇 번 뛰게 할지 컨트롤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내 몸에 있는건데두요. 그래서 감정을 잘 조절해서 화를 안내는 것 같은 사람도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영혼에 쓴뿌리가 점점 자라다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언젠가 더 크게 터지는 폭탄이 됩니다.


사실 심리학에서도 눈물은 분노와 슬픔을 건강하게 해소하는 방법으로 제시합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인사이드 아웃이라는 영화도 '슬픔의 재발견'입니다. 내 기쁨을 위해 슬픔을 무시하거나 억누르는게 아니라 미움, 분노, 상처를 인정하고 눈물을 흘림으로써 진짜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눈물과 기도는 심리학적인 것과 원리와 순서가 다릅니다. 심리학적 방법은 눈물을 흘리며 감정을 잠시 해소하는것 뿐이구요, 그 분노가 나는 근원,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를 믿지 못하는 문제는 해결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화나 드라마에서 울분에 차서 미쳐가는 사람한테 펑펑 울어서 다 쏟아내라고 하는 장면들이 있잖아요. 뭔가 감동적인 것 같고, 그렇게 울어서 분노를 비워낸 것 같지만, 사실 그 분노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을 뿐이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해결된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는 순서가 다릅니다. 눈물을 흘려 분노를 해소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주시길 기도하고, 그 믿음이 성장하게 될수록 분노가 줄어들고 눈물 흘리며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적으로 성장 중에 있는 성도는 화가 나더라도 울며 기도하며 하나님과 씨름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옳으시고, 하나님 뜻이 있다는거 아는데요, 저는 화가 납니다. 짜증이 나구요, 다 뒤집어 엎어버리고 싶습니다. 라고 솔직하게 고백하면서 눈물 흘리며 소리 지르는거에요.


그러면 처음부터 막 분노가 사그라드는게 아니라, 분노의 눈물과, 억울함과 서러움의 눈물과, 이런 상황을 허락하시고,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으시는 것 같은 하나님에 대한 섭섭함의 눈물과... 아무리 가까운 사람일지라도 내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답답함의 눈물이 쏟아집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께 쏟아내면서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예수님과 그 십자가를 다시 기억하게 되면요, 결국 하나님이 옳으시고, 하나님이 저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눈물과 기도로 비워낸 그곳에 은혜가 차오르며, 그 상황과 관계를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하나님이 섭리해주시길 기다리는 순종의 눈물이 흐르게 됩니다. 그래서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그 흘린 눈물 만큼 믿음이 성장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저 자신을 돌아보니까 저는 화가 날 때 눈물을 흘리며 기도한적이 없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됐습니다. 사실 저는 다른 사람들은 별로 슬프지 않은 영화, 드라마, 책을 보면서도 눈물이 잘 나서요, 안 우는 척 하고, 몰래 닦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눈물이 많다고 생각했는데요, 화가 막 들끓을 때도 기도하는데 눈물이 안나는거에요. 이게 평소에 감수성이 많고, 눈물이 많은거랑, 화가 날 때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것은 감정적인 차원과 영적 차원이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사람이 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지 10여년도 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저의 영혼 깊은 것들을 온전히 내어 놓으며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고 싶거든요. 그래야 이웃을 위해서도 진정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될 수가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걸 기도제목으로 놓고 기도하며 묵상을 자주 하다보니까 제가 자라난 환경과 제 성향이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저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무너진 저희 가정을 일으켜야 한다는 큰 책임을 스스로 졌습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저는 모든 어려움을 스스로 이겨내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던거에요. 그래서 엥간한 일들은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 해결하고, 힘들 때 울거나 누구에게 도움을 잘 청하지 않는 성향이 강화가 된 것 같습니다.


아마 그래서 제가 학창시절 때 기독교를 그렇게 싫어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 인생은 자기가 개척해 나가는 것인데, 왜 저렇게 있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신한테 울고불며 저렇게 기도하는거지? 너무 나약해보인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바로 그 교만이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것을 막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감정이 흔들리고, 분노를 막내고, 후회하는 것을 제 스스로가 용납하지 못하게 된거에요. 그런데 사람은 자기 감정을 통제할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분노가 치밀 때 화를 막 표출하는게 아니라 억지로 억누르거나 화를 내는 상황과 관계를 회피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사실 인사이드 아웃 영화를 보면서 엄청 울었어요. 완전히 제 이야기였거든요. 그런데 그게 감정적인 차원의 눈물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지금 당장은 분노를 쏟아내지 않고, 갈등이 일어나지 않는 것 같으니까 착해보이고 좋아보였죠.


하지만 감정이 아니라 영혼에서 흘리는 눈물이 말라가면서, 하나님 앞에 저를 온전히 내어놓는 기도를 할 수 없는 영적으로 막힌 상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게 문제라는 사실을 인식 했다는 것과, 그것을 기도제목으로 10년 째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제가 경험한 하나님은요, 그 좋은 것은 언젠가는 이루어주십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죠. 결국 제가 울며 기도해야할만한, 분노에 가득차는 상황에 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걸 이루시기 위해 그런 악해 보이는 상황을 허용하시며 섭리하실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무서운 기도인거에요.


저는 하나님 처음 믿었을 때부터 말씀 연구하는걸 좋아했는데요, 머리만 커지는게 느껴지는거에요. 그래서 머리로만 알지 않고 가슴으로 알게 해달라는게 핵심 기도제목이었습니다. 결국 제 아내와 결혼생활 10년 하니까 하나님을 마음으로 알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혼생활 가운데 섭리하시며 기도 들어주신거에요.


그러니까.. 이 작은 위원장님의 핵펀치를 맞아도 울며 기도하지 않았는데... 얼마나 더 강력한게 와야 저의 이 메마르고 막힌 영혼이 뚫려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게 될까요?


여러분들의 삶에서도 눈물 흘리며 기도할 일이 없으시다면, 그게 사실 복된 신앙생활은 아닐 수 있습니다. 어쩌면 저처럼 그런 상황을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거나, 울며 기도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의존할 돈, 권력과 빽, 아직은 괜찮은 건강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저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만의 섭리를 믿고 분노를 다스릴 수 있도록 그런 상황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 가운데 울며 기도하시며 비워진 마음 가운데 큰 은혜와 믿음이 가득해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어떻게 분노를 다스릴 수 있나요?

2. 하나님의 진노에 맡겨드립니다.(5-8)


영화를 보면 가족을 잃은 아빠가 분노에 가득차서 범죄조직이나 비밀정부조직을 직접 심판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가끔씩은 엄마가 그러는 경우도 있죠. 그런데 꼭 그런 극단적인 상황이 아닐지라도, 사람들은 보통 화가 나는 일이 생기면 자기가 심판을 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분노는 스스로 심판하고자 하는 숨겨진 영적 욕구를 드러내는 표지판 역할을 합니다. 그렇다면 그런 죄인들의 잘못된 영적 욕구를 어떻게 다스릴 수 있을까요? 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7] 모르드개가 자기가 당한 모든 일과 하만이 유다인을 멸하려고 왕의 금고에 바치기로 한 은의 정확한 액수를 하닥에게 말하고 [8a] 또 유다인을 진멸하라고 수산 궁에서 내린 조서 초본을 하닥에게 주어 에스더에게 보여 알게 하고...


큰 분노가 났을법했던 모르드개가 한껏 울고 기도한 후에 에스더에게 아주 자세한 상황을 보고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스스로 심판할 능력이 없지만, 딸이 왕비니까 그 빽을 믿고 복수를 하려고 다 일러 바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8절 하반절입니다.


[8b] ...또 그에게 부탁하여 왕에게 나아가서 그 앞에서 자기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라 하니


왕에게 이 사실을 자세히 보고하려는 것입니다. 아 그럼 결국 높은 지위를 가진 딸을 이용해서 더 강력한 왕의 권력으로 하만을 찍어 눌러서 심판하려는것 아닌가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저희는 7장에서 왕이 하만에게 진노하는 장면에서 이미 봤습니다. 7장 말씀입니다.


에 7:7-10 [7] 왕이 노하여 일어나서 잔치 자리를 떠나 왕궁 후원으로 들어가니라... [8] 왕이 후원으로부터 잔치 자리에 돌아오니 ...[9b] ...왕이 이르되 하만을 그 나무에 달라 하매 [10]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한 나무에 하만을 다니 왕의 노가 그치니라


여기서 아하수에로 왕의 진노는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의 진노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마귀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투영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과 권력으로 어떤 일이든 해결하던 하만이 지인들이 했던 하나님에 대한 말이 기억나며 '이제는 뒤집지 못하고 죽겠구나'라고 생각하고 왕비에게 매달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르드개는 분노에 차서 세상 권력이라는 인간적인 방법을 의존해 스스로 심판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 대리 통치자를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에 맡기기 위해 모든 세세한 것을 중보자였던 에스더에게 고백한 것입니다. 그게 기도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죄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으로 연결됩니다. 그런데요, 그 하나님을 닮은 사람도 분노라는 감정이 스스로 심판하고자 하는 잘못된 영적 욕구와 연결되기 쉽습니다. 그게 죄입니다. 심판은 저희보다 높으신 왕, 하나님만의 권한이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에 모든 것을 맡긴다는 것은요, 하나님이 반드시 심판해 주실 것임을 믿는다는 것과 같은 말이구요, 그래서 그 믿음이 죄로부터 구원 받는 것의 핵심입니다. 결국 그 믿음이 저희의 분노와 그 근원인 죄를 다스려, 사랑과 용서라는 생명이 가득한 구원의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이 죄인은 그 분노와 심판의 욕구를 스스로 통제해서 그 믿음의 자리에 서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가인이 분노로 아벨을 심판하려 했을 때 하나님이 그 죄를 다스리라고 하신 것은, 가인이 스스로 다스릴 수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거 못한다는 것을 하나님이 저희보다 더 잘 아십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말하셨을까요?


아무리 노력해도 스스로 다스릴 수 없음을 자각하고, 인정하고, 고백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내가 다음부터는 가인처럼 화내지 말고 울면서 기도해야지라고 다짐하고 노력한다고 되는게 아니라 믿음 주시길 간구하고, 인생의 훈련을 통해 그 믿음을 성장시켜주신 결과, 믿음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그게 복음, 기쁜 소식입니다. 그래서 저희가 죄와 분노로부터 온전히 벗어나기 위해서는 복음의 핵심적인 두 기둥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복음의 첫 번째 기둥은 저희를 그 파괴적인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대속의 은혜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 은혜에 진정으로 감사하는만큼 죄를 싫어하는 것을 넘어 혐오하게 됩니다. 나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예수님이 내 죄 때문에 죽으셨는데 어찌 내가 그 죄를 사랑하고 휘둘릴까! 그게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한 신앙이죠.


그런데 그 믿음만큼 중요한 다른 한 기둥이 예수님이 반드시 다시 오셔서 진노의 잔을 부으시며 심판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저희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불의하거나, 개인적으로 피해를 주는 사람들에게 분노가 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한 믿음은 그 분노의 감정을 제거하시거나 참게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것을 믿고 그 날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화나게 한 상대를 사랑하는 수준까지 성장할 수 있게 됩니다. 믿고 소망하고 사랑하고. 그게 재림신앙입니다.


이 세상 너무 더럽고 힘들고 살기 싫으니까 예수님 어서 오시옵소서가 아닌 것입니다. 이 재림에 대한 믿음이 소망을 낳고, 그 소망이 원수 를 사랑하기까지 하는 참사랑을 낳는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그런 사람을 보고 온유하고 겸손한 자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은요,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내 모든 상황과 감정을 세세하게 고백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게 에스더라는 중보자를 통해 왕에게 모든 것을 세세하게 고백했던 모르드개의 모습이었던 것이고,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저 역시도 분노가 많고 스스로 심판하고자 하는 욕구가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린 시절의 성장 과정과 성향 때문에 그게 사람들에게 표출이 잘 안되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분노는 절대로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 같은 경우는 이 분노가 불특정한 대상인 사회와 정치, 경제 시스템을 향했습니다.


저는 가난한 어린 시절로 인해 이 사회의 부조리함과 빈부격차에 대해 강한 분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내가 부자가 되서 내 가정을 회복시키고, 나처럼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거에요.


그러니까 이웃을 돕는다는 그 꿈이 이웃 사랑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내 처지에 대한 연민과 사회에 대한 분노와 정죄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하나님을 믿고 나서야 발견하게 됐습니다. 너네들은 돈도 많으면서 자기를 위해서만 쓰고 이웃 돕기는 생색내기만 하지? 나는 가난하고 힘들었지만 이웃을 돕는다!


그런 감정이 대학생이 되고 나서 더 강력해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행정학과에 들어가게 됐는데요, 정치학과 교수님들이 주로 수업을 이끌어 주시는데, 제가 거기서 두각을 나타낸거에요. 특히 발표수업을 하게 되면 그 분노의 힘으로 상대방의 논리까지 미리 다 파악해서 쏴붙이니까 교수님들이 좋아하셨어요.


겉으로는 화도 안내고 평온해 보이는 학생인데, 정치, 경제, 그리고 사회복지에 관한 이슈만 나오면 완전 상대방을 박살을 냈거든요. 그때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 그 동기 여자애들 세 명이 제 결혼식 때 빨간색 옷을 입고 와서 단체 사진을 찍었어요. 보통 결혼식장에 갈 때 빨간색 옷은 좀 삼가잖아요.


제 아내는 알지도 못하는 애들이 왜 빨간색 옷을 입었는지 지금도 몰라요. 이제 알겠죠. 남자들은 봉고차를 빌려와서 축의금 없이 음식을 쓸어먹고 갔어요. 굳이 올 사람들이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그러고 있을 때 마침 독일에서 공산주의의 창시자인 마르크스 주의로 박사과정을 마친 젊은 교수님이 부임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수업에서 분노의 오로라를 막 뿜어대니까, 저를 제자 삼아주셨어요. 그 교수님이 이끄시는 석박사 학회와 스터디 모임에 저를 데리고 다니시면서 막 소개해 주시고 칭찬해 주셨어요. 마르크스주의는 경제 불평등과 부르주아를 향한 분노와 혁명이라는 노동자 계급의 심판으로 이루어진다고 믿었거든요.


그래서 그 교수님과 했던 대화 중에 기억 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공산주의는 북한이 쳐들어와서 다 갈아엎고 새로 시작하는 수 밖에 없다. 너 그 때 군복 갈아입고 같이 싸울 수 있어? 네. 다 갈아 엎을라면 그래야디요. 농담처럼 대화한거지만 저나 교수님이나 사회에 대한 분노가 가득 차있었던 것입니다.


이 교수님과의 이야기는 길어서 다음 기회에 또 이야기 해야 합니다. 결국 그러다가 제가 그 사이에 하나님을 믿게 됐구요, 이 모든 불평등 역시도 하나님이 허락하셨고, 죄로 인한 결과는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믿게 되니까 신기하게도 그 분노가 사그라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그 분노가 해소되는데 몇 년이 걸렸어요. 그래서 그 믿음을 가진 이후에도 몇 년은요, 성경에 나타나는 공동체적 나눔과 공산주의를 결합한 신앙을 정리하고, 그런 학자들을 찾고 공부하느라 시간 많이 썼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들이 허투로 낭비한 시간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믿음과 신학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더욱 뚜렷하게 알고 아이들에게 가르칠 수 있게 됐거든요. 결국 사람들은 분노를 스스로 통제할 수 없어서 이리저리 표출이 되는데요,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겨드릴 때 해소가 되고 올바로 다스려지게 됩니다.


저 뿐만이 아니라 여러분들도 이 분노로 인해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교회에서나 일이나 관계가 불편해지거나 깨어지거나, 어려움을 겪으신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라고 이 분노의 감정을 허락하신게 아닙니다. 저희 안에 있는 내가 하나님 되고자 하는 죄의 본질을 드러내고, 그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울며 기도하며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라고 허락하신 감정입니다.


그래서 이 분노와 죄를 어떻게 다스릴 수 있나요? 내 노력과 능력으로 다스리는게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다스림을 통해 분노와 짜증의 사람에서 온유하고 겸손한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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