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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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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009 고난 06 렘 33.1-9 고난 중에 알게 되는 은밀한 일

2025년 10월 26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두 번째로 임하니라 이르시되

[2]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눈물의 선지자라고 불리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얼마나 심하게 울었는지는 예레미야 애가에 아주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 1장 16절은


애 1:16 이로 말미암아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 같이 흘러내림이여 …


눈물이 물처럼 쏟아진 것에서 더 나아가 예레미야가 2장 11절에는


애 2:11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


물론 실제로 창자가 끊어지거나 간이 쏟아지지는 않겠지만 심하게 울다 보면 장기가 끊어지고 흘러나올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고 너무 많이 울면 눈이 상해서 시뻘겋게 부어오르기도 합니다. 그가 이렇게 울었던 이유가 예레미야 애가 3장 48절부터 50절까지 나옵니다.


애 3:48-50 [48] 딸 내 백성의 파멸로 말미암아 내 눈에는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49]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50]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실 때까지니라


시냇물처럼 눈물이 흐른 이유는 백성이 멸망당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바벨론은 남유다를 침공해서 오랫동안 포위하다 결국 무너뜨렸습니다. 지금은 한 나라가 전쟁에서 이겼다고 해서 적국의 백성들까지 다 죽이고 포로로 잡아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고대에는 나라가 망하면 나라 자체를 없애버렸습니다.


부녀자들은 강간당하고, 쓸모가 없는 아이들과 노인들은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군대가 죽이지 않더라도 오랫동안 포위당해 제대로 먹지 못하고 굶주려 죽게 됩니다. 젊은이들은 코가 꿰어 노예로 끌려가고 집과 건물이 서 있던 곳들은 허물어져 황폐해 집니다. 예레미야는 이 모든 파괴의 현장을 목격한 것입니다.


또한 예레미야는 개인적으로도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바벨론의 침공 전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죄를 회개하라고 선포했고,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메시지를 전했지만, 말씀을 전할 때마다 사람들은 핍박하고 조롱하고 멸시했습니다. 감옥에 가두고 채찍질 하고 진흙이 가득한 우물에 집어던졌습니다.


이런 삶을 살다가 실제로 바벨론에 의해 남유다가 멸망하자 그제라도 사람들이 예레미야가 맞았다고 인정해 준 것이 아닙니다. 소수의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납치해서 애굽으로 도망을 갔고 그 곳에서도 예레미야가 복음을 전했더니 그를 돌로 찍어 죽였다고 전승에 전해집니다.


평생을 고통 속에 살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감옥에 갇혀 있는 예레미야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감옥에 갇힌 이유는 예레미야 32장 2절부터 3절에 있습니다.


렘 32:2-3 [2] 그 때에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다의 왕의 궁중에 있는 시위대 뜰에 갇혔으니 [3] 이는 그가 예언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성을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차지할 것이며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였던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이유가 너희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자 사람들이 듣기 싫다고 감옥에 가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예레미야에게 임합니다. 1절 말씀입니다.


[1]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두 번째로 임하니라 이르시되


하나님은 이미 이야기를 해 주셨는데 지금 예레미야에게 또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번에는 자신이 누구인가를 2절에서 말씀하십니다.


[2]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을 모르지 않습니다. 선지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 벌어지는 모든 상황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상기시켜주시는 것입니다. 바벨론이 침공해서 남유다를 둘러싸고 멸망시키려고 하는 일조차도 하나님의 손 안에서 있고, 하나님이 이 모든 일에 목적이 있으시며,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는 분입니다. 즉 이 모든 상황은 우연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3절 상반절에 예레미야에게 요구하십니다.


[3a]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


예레미야는 지금 위기 가운데 처해 있습니다. 민족적으로도 나라가 멸망을 앞두고 있고 개인적으로도 감옥에 갇혀서 비참한 결국을 앞둔 고통 속에서 예레미야에게 왜 부르짖으라고 하신 것일까요? 고통 가운데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 속에 부르짖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내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겠다는 태도입니다. 고통이 고통인 이유는 내 생각, 내 뜻, 내 원함을 내려놓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 생각과 다릅니다. 하나님은 역사와 시간을 초월해 모든 세상과 인생을 보시며 하나님이 계획을 가지고 일해 나가시는데 작디 작은 인간은 하나님의 놀랍고 큰 계획을 받아들이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이 닥치면 결국 내 생각을 내려놓아야 그제야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를 우리가 믿고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난의 때에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어떤 약속을 하셨나요? 3절 하반절입니다.


[3b] …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예레미야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죄에 대한 심판이라 목사님들이 거의 설교하지 않는 책입니다. 그 와중에 유일하게 설교 되는 부분이 오늘 본문인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겠다는 크고 은밀한 일은 4절부터 나오는데 대부분 설교는 3절까지만 한다는 점입니다.


고난을 당할 때 기도하면 하나님이 고난의 이유 알려주시고, 공부 못하는 아이는 공부 잘하게, 사업하는 사람에게는 지혜를 주시고 문제 해결의 은혜를 주신다고 덧붙입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을 알려주실까요? 우리가 부르짖으면 사실 받아들이기 어렵고 충격적인 것을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고난의 때에 부르짖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역사와 개인의 인생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고난을 통해 내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그 뜻을 따라갈 수 있게 알려주시고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난 중에 알게 되는 은밀한 일은 무엇인가요?


고난 중에 알게 되는 은밀한 일은 무엇인가요?

1. 하나님의 심판을 알게 됩니다. vv.4-5


첫 번째로 하나님의 심판을 알게 됩니다. 4절과 5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4]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무리가 이 성읍의 가옥과 유다 왕궁을 헐어서 갈대아인의 참호와 칼을 대항하여 [5a] 싸우려 하였으나 …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이 살아남고자 얼마나 몸부림치고 있는지 다 알고 계십니다. 성벽이 부실할 것 같으니까 왕궁을 헐어서 벽돌을 다 꺼내 성을 보강해서 절체절명의 상황을 살아남으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다 아신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도와주시겠다는 말을 기대하지만, 5절 하반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충격적인 말씀이 나옵니다.


[5b] … 내가 나의 노여움과 분함으로 그들을 죽이고 그들의 시체로 이 성을 채우게 하였나니 …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크고 은밀한 일을 알려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이 성이 시체로 가득 찬다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미워한 것입니다. 절체절명의 상황입니다. 바벨론은 강력한 나라입니다 소망이 있어야 버틸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을 향해 ‘너희는 다 죽을 것이고, 성벽을 보강해도 소용없고, 성은 시체로 가득 찬다’고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양면성입니다. 우리는 좋은 이야기만 듣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이야기만큼이나 무서운 심판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왜 복음에 심판과 구원이 동시에 존재할까요? 심판 없이 구원은 완성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상태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좋은 것을 주시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어려움에서 건져주시고 죽어서는 천국에 데려가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궁극적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어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것입니다.


결혼과 비슷합니다. 여러분 중 혹시 좋은 집에서 살려고 결혼하시는 분 있나요? 결혼은 좋은 집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이 결혼입니다. 천국도 길에 금이 깔려 있어서 좋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좋아서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있을 사람은 하나님과 똑같은 사람이어야 되는데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우리는 거룩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모습에서 변하지 않고 천국에 간다면 그곳은 더 이상 천국이 아닙니다.


인간의 본질 안에 있는 죄악은 이 땅을 떠날 때까지 우리에게서 벗겨지지 않기에 우리에게 심판이 필요합니다. 하나님도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한 이유를 5절 하반절에서 말씀하십니다.


[5c] … 이는 그들의 모든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얼굴을 가리어 이 성을 돌아보지 아니하였음이라


‘심판’이라는 단어 때문에 하나님이 악인들을 혼내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글에서 심판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원래 ‘판단,’ 즉, ‘judgment’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 32절입니다.


고전 11:32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판단(심판) 받는 이유는 ‘징계’인데, 징계 역시 혼낸다는 뜻이 아니라 아이들을 훈육하여 어른처럼 되도록 교육한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판단하셨더니 우리가 아이 같아서 우리를 어른처럼 만들어 주시는 것이고 그 이유는 정죄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판단할 때는 기준이 있습니다. 검다 하얗다, 덥다 춥다, 밝다 어둡다. 그리고 판단의 결과대로 행동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하나님의 기준으로 우리를 판단하시는데 그 기준은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의 기준으로 판단하셨더니 우리는 불의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하나님의 의에 어긋난 우리의 부분을 제거하시는 것을 성경은 심판이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의 기준에 어긋난 부분을 제거하여 하나님의 기준과 똑같아지게 되는 것이 심판의 개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백성은 이 땅에 사는 동안 계속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서 튀어나온 부분들이 제거되며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지 않는 사람은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마지막에 정죄(condemnation)가 기다리고 있고, 마지막 정죄가 일어나면 그 영혼은 돌이킬 기회를 잃어버립니다. 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 백성의 무엇을 심판하시나요? 에베소서 4장 22절입니다.


엡 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옛사람은 왜 유혹을 받나요? 욕심 때문입니다. 이 욕심은 아이부터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고 이 욕심은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영향력을 강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옛 사람을 제거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 모습을 벗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마치 우리에게 옷을 입고 벗듯 새 옷을 입으라고 표현하지만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먹는 습관, 잠자는 습관, 노는 습관 하나 바꾸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고 살지 못하게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고난이 무엇인가요? 회사가 망하고 취업에 실패하고 대학교를 못 가야만 고난인가요? 내가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 고난입니다. 인생마다 내 욕망을 따라가는 본질에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제거해 나가십니다. 이 내용이 곧 고린도전서 4장 16절부터 18절에 있습니다.


고전 4:16-18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환란을 통해 겉사람, 옛사람이 낡아지는데 우리는 영원한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결국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했던 무서운 심판은 모든 하나님 백성들이 경험해야 하는 변화를 그림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망하게 하신 이유는 우리를 위해 샘플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과정을 지나갈 때가 있습니다.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랬는데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이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을 지어서 성취하시고 그것을 행하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의 인생에 하나님의 계획을 가지고 모든 일을 행하심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난 중에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는 사람이 은밀하게 숨겨진 일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이제까지 복음의 좋은 면만을 얘기했습니다. 물론 예수 믿고 복 받고 천국 가는 것 맞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 말고 다른 것을 의존하는 그 불의와,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무서운 자아와, 내 맘대로 되지 않으면 분노하는 옛 사람을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 과정은 고통이지만 지나고 나면 얼마나 큰 은혜인지요.


하나님이 이렇게 선하고 위대하신 분이심을 더 일찍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합니다. 믿음이 없어서 너무 힘들 때 누군가가 이야기 해줬더라면 고통이 덜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고난 중에 심판을 당하더라도 그 심판을 통해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믿고 감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고난 중에 알게 되는 은밀한 일은 무엇인가요?

2. 하나님의 구원을 알게 됩니다. vv.6-9


두 번째로 고난 중에 알게 되는 은밀한 일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구원을 알게 됩니다. 6절 말씀입니다.


[6]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읍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안과 진실이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다 죽이겠다고 하신 다음에 곧바로 치료하고 낫게 하고 평안과 진실을 알려준다고 하십니다. 이것 모순 아닌가요? 맞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양면성입니다. 옛사람이 제거되면 제거되는 만큼 우리 안에 새 사람이 나타납니다. 본문 뿐 아니라 구약 성경에서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백성의 모형으로 사람처럼 표현됩니다. 이사야 52장 9절을 보시면


사 52:9 너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기쁜 소리를 내어 함께 노래할지어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셨음이라


성에게 노래하라고 하고, 성을 구원하십니다. 즉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예루살렘, ‘평화의 성’이라는 이름 자체가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실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평화’가 무엇인가요? 강력한 힘에 의해 균형이 유지되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백성을 흔들림 없이 다스리고 계시기에 결국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 가실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예루살렘 곧 하나님 백성을 회복시키실 지를 보여주는 것이 결국 성경의 주제입니다. 하나님이 때린 다음에 또 온전케 하시는 것이 영적으로는 심판이지만 우리에게는 고난과 환란으로 임합니다. 호세야 6장 1절도 마찬가지입니다.


호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처음부터 치지 않으셨으면 치료 안 하셔도 될 텐데, 때려서 아프게 한 다음에 치료해 주십니다. 이것이 구원의 양면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제거되어야 될 죄를 다루십니다. 왜 나쁜 놈들은 놔두시고 내 인생에만 간섭하시나 싶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영원한 정죄를 받고 지옥에 갈 것이기에 하나님이 놔두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옆집 아이가 시험을 못 봤든 편식하고 밥을 먹지 않든 그 집에 가서 간섭하지 않습니다. 내 자식에게만 관여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어떻게 하십니까? 회복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최종적으로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라고 부르십니다. 요한계시록 21장 9절과 10절을 보시면


계 21:9-10 [9] … 일곱 천사 중 하나가 … 이르되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10] …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어린 양의 아내이고, 교회이고 여러분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예루살렘이 황폐화됐는데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회복시키신 것을 그림으로 보여준 뒤에, ‘네 인생에 눈에 보이는 어떤 것들이 황폐해지고 무너지는 것 같지만 내가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세우고 있는 거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7절부터 9절은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어떻게 회복시키실 지를 계속 그림으로 보여줍니다.


[7]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


다시 사람이 많아진 도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다음에 무슨 일을 하시나요? 8절입니다.


[8]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이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죄악을 이제 용서해 주시고 마지막으로 하시는 약속이 9절입니다.


[9]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나의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내가 이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을 들을 것이요 내가 이 성읍에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안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며 떨리라


망가졌던 성이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나요? 하나님의 본질을 드러낼 때 영광과 찬송이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1절에서도 교회가 이렇게 됩니다.


계 21: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이 땅에서는 보석을 팔면 돈이 되니까 귀한 것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보석처럼 바뀌는 것입니다. 보석이 보석이 되기 위해 제일 중요한 조건이 무엇인가요? 불필요한 부분들이 잘려나가서 빛을 반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봤던 가장 아름다운 보석은 LA 자연사 박물관에 갔을 때 본 보석입니다. 저는 보석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망설이다가 잠깐만 들르려고 들어갔는데 방이 깜깜했습니다. 온 방이 어둡고 가까이 가 보니 유리 안에 보석에만 빛을 직사로 비추게 조명을 두었습니다.


그 때 처음으로 왜 보석을 아름답다고 하는지를 알았습니다. 보석에 빛이 반사되어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운 색과 빛을 띄는데 그 찬란함에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름다운 보석에 비추는 빛을 끄면 어떻게 되나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반사해서 빛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보여주는 것이 보석의 역할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 닮은 존재로 만드셨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드려야 할 것입니다. 영광은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서 우리를 통해 드러내시고자 하는 모습이 골로새서 3장 10절에 나옵니다.


골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것이 영광입니다. 창세기에 있는 아담과 하와에게는 하나님의 모습이 영광으로 드러났기 때문에 옷을 입지 않아도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모습이 없어지자 부끄러워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그 영광을 다시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하나님 닮은 모습은 예수님을 통해 다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만 온전히 신뢰하고, 자기를 낮춰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죽기까지 순종하고, 죄인들을 위해 생명을 바쳐 그들을 구원하시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 안에서 그런 사랑이 나타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노력으로 만들어낸 사랑이 아닙니다.


인간은 욕망과 죄로 인해 나를 위해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인데, 하나님이 심판을 통해 옛 사람을 제거하시면 나타나게 될 그 새 사람이 아름답게 드러나게 될 때, 이 땅에서는 가끔 맛볼 뿐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모두 하나님과 같은 모습으로 아름다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그 날을 매일 소망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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