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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공개·회원 1명

사도행전 강해 47 21.1-26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는 자의 반응


[10]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13]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14]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사람은 어려워 보이는 길보다는 쉽고 유익이 되는 선택을 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선택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이고 상식적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려운 결과가 예측됨에도 불구하고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 있습니다. 본문의 바울이 그렇습니다.


바울과 주변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큰 환란이 있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당연히 말렸지만 바울은 기어코 환란이 예정된 길로 가기로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과 성숙하지 않은 사람의 차이입니다.


영적으로 성숙하지 않은 사람은 당장 좋아 보이는 것을 선택합니다. 좋다는 기준이 무엇인가요? 편리와 이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을 뛰어넘어 모든 것을 보시고, 개인이 아닌 하나님 나라, 즉 영적 관점에서 인도하시기 때문에, 그 길이 우리에게는 선택하기 어려운 길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우리를 강제로 인도하시지는 않습니다. 바울이 이 선택을 한 이유는 그가 인생의 여정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되었고 그분을 온전히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는 자의 반응은 무엇인가요?

1. 어려움을 피할 쉬운 길을 거부합니다. vv.4-16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는 자의 반응은 무엇인가요? 첫 번째로 어려움을 피할 쉬운 길을 거부합니다. 3절 하반절부터 4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3b] …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가 짐을 풀려 함이러라 [4a]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


바울은 3차 선교 여행을 마치며 예루살렘에 가까워 가고 있었습니다. 중간 도착지 중 하나인 두로는 구약에 자주 나오는 도시 국가로 중개무역을 통해 큰 돈을 벌었습니다. 일주일간 물건을 내리고 또 다른 곳에 보낼 물건을 싣기 위해 머무는 동안 바울은 그곳의 제자들과 함께 시간을 보냅니다. 그런데 함께 있던 그 제자들이 무엇을 알게 되었나요? 4절 하반절을 보시면


[4b] …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그저 느낌이 아니라 기도하며 마음을 모으다 성령을 통해 알게 된 것입니다. 기도하다 온 확신이었기에 두로의 제자들은 당연한 반응을 한 것입니다. 이 일이 처음은 아닙니다. 바울은 20장 23절에서


20: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가는 곳마다 성령이 제자들에게 같은 마음을 주셨습니다. 이쯤 되면 가지 않기로 기울 법도 한데 그럼에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야 한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20장 22절을 보시면


20:22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


성령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으셔서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도록 이끄셨던 것입니다.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성령은 한편에서는 바울의 마음을 사로잡아 예루살렘에 가라고 이끄시고 다른 한편으로는 바울이 감옥에 갇히고 결박당할 것이라고 교인들한테 알려주고 계십니다.


나쁜 일이 있을 것을 알려주시면서 순종하라고 하시는 건가? 본문을 읽고 헷갈릴 수도 있습니다. 이 혼란은 단순히 개인적 차원의 평안이나 이익의 차원에서 바라볼 때 생기는 것입니다.


바울은 분명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심하게 매를 맞고 죄인의 몸이 되어 고통스러운 과정을 지나게 됩니다. 물론 개인의 차원에서는 환란이고 고통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어떤 목적이 있나요? 사도행전 내내 보았듯 모든 일은 하나님 나라라는 배경 안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이들에게 알려주신 이유는, 나쁜 일이 있을 것이니 바울을 가지 못하게 말리라는 것이 아니라 동참하여 중보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지금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성령의 인도이며 하나님의 뜻 안에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 사역의 중요한 마무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확신에 따라가고 있는데 홀로 싸우기 어려운 싸움 가운데 바울이 낙담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나갈 용기와 힘을 낼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라고 이들을 초청하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라는 큰 사명을 앞두고 마음에 근심하여 내가 죽게 되었다고 말하실 정도로 고통스러워서 제자들을 겟세마네 기도의 자리로 초청하셨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육신이 약하여 기도 중에 잠들긴 했지만 힘든 상황 가운데 정말 필요한 것은 함께하는 기도의 힘입니다.


저도 깊은 회의와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가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어느 날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갈 수 있을까 심히 낙심된 적이 있었는데 한국에 계시던 어떤 권사님이 전화로 하나님이 마음을 주셔서 저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해 주셨습니다. 보통 통화를 하면 대부분 목사인 제가 기도로 통화를 마무리하는데 이분이 저를 위해 기도해 주셨습니다. 그때 ‘내가 광야에 버려진 것이 아니고, 내가 너무 고통스럽고 힘들 때 큰 친분이 없는 분께도 하나님이 마음을 주셔서 포기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구나’ 생각하며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선봉에 세우시지는 않습니다. 모두가 바울처럼 살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 알려주시는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가 선봉에 선 사람을 위해 기도에 동참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참여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일은 8절에도 계속됩니다.


[8]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이들은 두로의 남쪽에 있는 항구 도시 가이사랴에 도착하자 초대 교회에 세워졌던 일곱 집사 중 하나인 빌립 집에서 머물렀습니다. 빌립이 워낙 영향력이 있어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교류를 했는지 그 집에 아가보라는 한 선지자가 찾아옵니다. 10절과 11절 말씀입니다.


[10]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단순히 ‘환란’이 아니라 띠를 묶고 이방 죄수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자, 또 그곳에 있던 기독교인들이 12절에서 바울에게 강권합니다.


[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우리’는 바울과 10년 넘게 선교 여행을 다니며 사도행전을 쓴 누가도 포함입니다. 이렇듯 모든 성도가 사랑과 애틋한 마음으로 강권했지만 13절에 바울에게는 어떤 확신이 있었나요?


[13]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더 귀하게 사용 받을 수 있는 바울이 죽음도 각오하고 있으며,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니 울지 말라고 위로합니다. 이것은 충성인가요? 무모함인가요? 에베소 장로들에게 이야기한 사도행전 20장 24절에 바울의 마음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당시에 온 세계라고 알려진 유럽과 소아시아를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늘 동족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이방인 구원을 위해 애썼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 받았던 유대인들을 위해 생명을 바치고 싶은 마음이 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자신의 삶을 바라보았습니다. 모든 선택은 상대적입니다. 지금 바울에게는 모든 사람들이 가장 귀하다고 여기는 생명보다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것이 중요했고, 여태까지는 이방인들에게 전했지만 예수가 그리스도이시고 그분을 믿어야 산다는 사실을 동족에게 말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로마서 9장 3절입니다.


롬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바울은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그의 인생을 바라보며, 복음을 전하는 일이 그를 사로잡았기 때문에 기꺼이 생명과 편안함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인생의 주인이며 그 관점으로 인생의 선택을 합니다. 그런데 그 선택이 늘 좋은 결과를 남기나요?


우리는 10년 뒤, 1년 뒤가 아니라 하루 앞도 내다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미련한 선택을 많이 하지만 하나님은 때로는 막으시고 때로는 선하게 인도하셔서 지금까지 이르게 하셨습니다.


인생의 많은 부분에서 하나님이 필요 없는 길은 막으시고, 필요한 길은 여시며 인도하십니다. 항상 쉽고 편한 길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모든 길은 선하고 아름답습니다. 돌아보면 저는 말씀을 연구하고, 사람들이 교회 다니며 확실하다고 믿던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일깨워 바른 방향으로 가르치며, 복음 위에 사람을 세우는 일이 얼마나 귀한지를 깨닫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내 기준에서 나와 남의 인생을 재단합니다. 이것이 집착이 되고 다른 사람의 길을 막고 자신도 불행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사야 55장 8절부터 9절은 무엇이라고 하나요?


사 55:8-9 [8]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9]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많은 부모들은 자녀의 주어진 능력과 모습에 관계없이 부모의 욕망을 투영하곤 합니다. 저희가 11년째 후원하고 있는 장바울 선교사님도 그렇습니다. 예전 사역하던 교회에서 이분은 다른 부서였지만 열정과 진심으로 사역하시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제가 대학부를 그만두면 후임으로 맡기고 싶다는 생각을 평소에 하다가 유학을 가게 되면서 여쭈어 봤습니다. 대학부 전체 담당 목사님은 반대하셨지만 제가 며칠을 변호할 정도로 마음이 갔습니다.


교회를 개척하면서 이 분을 후원할 마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단순히 예전에 제 후임이어서가 아니라 이 분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어떤 희생을 치렀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장 선교사님 아버님도 목사님이십니다. 목회를 오래 하셨고 중형 교회를 이루셨고, 본인 교회를 물려줄 수는 없지만, 좋은 조건으로 아들 목사를 데려가려는 친구 목사님들이 많으셨던 차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들이 이슬람 선교를 간다고 하자 너무나 강하게 반대하셨습니다.


장 목사님은 남이 일구어 놓은 편한 곳이 아닌 새로운 곳에 가서 개척하는 것이 하나님이 오래전부터 주신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아버지가 얼마나 실망하시고 화가 나셨는지 10년 동안 선교지를 한 번도 안 오셨답니다.


그런가 하면 또 장 선교사님의 사모님의 아버지는 큰 병원을 운영하시는 장로님이셨습니다. 어려움 없이 편안하게 살았고 목사님이랑 결혼한 이유도 큰 교회 부목사니까 비슷한 사역을 하겠지 생각했기 때문이었고 해외로 나갈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다가 남편을 향해 하나님이 이렇게 강력한 소명을 주셨다면 하나님 뜻이려니 하고 순종하신 것입니다. 제 주변에는 사모님이 반대해서 선교를 포기하거나, 나갔다나 포기하고 돌아온 목사님이 여럿 계십니다.


강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사로잡히지 않으면 눈앞에 보이는 쉬운 길을 자연스럽게 선택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동역할 수 있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어서 교회의 첫 후원 선교사로 우리가 영입해서 11년째 후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장 좋아 보여서 했던 선택이 가장 좋은 결과를 낳았나요? 좋아서 택했는데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고 계시나요? 그래서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목적에서 우리를 다면적으로 알고 이끄시는 하나님이 가장 선한 결정을 내리도록 우리를 이끄실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준이 여러분의 선택의 기준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인생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는 자의 반응은 무엇인가요?

2. 중요한 목적을 위해 본질이 아닌 것은 양보합니다. vv.17-26


두 번째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는 자의 반응은 무엇인가요? 중요한 목적을 위해 본질이 아닌 것은 양보합니다. 17절 말씀입니다.


[17]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예루살렘 교회를 만나 19절에 바울이 제일 먼저 한 일은


[19]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선교 보고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모체가 되는 교회니까 10년 동안 하나님이 얼마나 이방에 놀라운 일을 하셨는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는 바울의 놀라운 사역을 듣는 것보다 시급한 문제가 바울 때문에 일어난 소동을 처리하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이 이방에 미친 영향력이 컸을수록, 바울이 이단적인 사상을 전파했다는 이유로 모든 유대인들의 미움이 쌓여 예루살렘 교회까지도 붕괴될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들은 20절과 21절에 무엇을 제안하나요?


[20]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21]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유대인 입장에서 바울은 이단의 괴수가 되어 버렸고, 예루살렘 교회에게 이것은 심각한 사안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에 감탄하는 것보다 현안을 해결하고자 제안합니다. 22절부터 23절입니다.


[22] 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대가 온 것을 들으리니 [23]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이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고 예수를 믿었다 해도 유대인으로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서원도 지키고, 성전의 예배도 드리고, 제사도 드리고 혼재된 상황입니다. 특히 24절에 보면


[24]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결례는 나실인의 정결 예식을 의미합니다. 유대인이 하나님께 자신을 헌신한다고 하면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한 달 동안 포도주 등 술을 먹지 않고 머리도 깎지 않고 시체도 가까이하지 않는 결례의 기간을 가졌습니다. 그런 이들과 함께 정결 의식에 참여하라는 제안이었습니다.


구약의 나실인 정결 예식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바울이 율법을 존중하는 사람임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게다 나실인 기간 동안 길었던 머리를 잘라서 재단에 불태우는 제사 의식 비용을 내라고 합니다. 이 의례에 돈을 내는 사람은 율법을 수호하는 사람이라는 열망이 있다고 여겨졌기 떄문입니다.


바울은 이제까지 이방에 전도하면서 이런 예식이 다 소용없다고 얘기했습니다. 율법은 구원을 줄 수 없는 초등 교사와 같으며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다고 수없이 강조했습니다. 이런 바울에게 율법으로 돌아가고 율법을 행하고 지키라고 했는데 26절에 바울이 어떻게 했나요?


[26]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


이들과 함께 나실인의 결례를 행했습니다. 이런 것이 다 소용없다고 믿는 사람이지만 더 중요한 목적을 위해 본질이 아닌 것을 양보한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느냐, 나실인의 결례를 행하느냐는 본질이 아닙니다. 이것을 함으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의로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가 걸려 있습니다. 바울이 죽음을 각오하고 예루살렘에 온 목적은 유대인들에게 마지막으로 복음을 선포하기 위함입니다. 그 본질을 위해 비본질을 감내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백성의 인생에 중요한 단서를 보여줍니다.


사람마다 자기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아이들한테 인사를 너무 강요하는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저를 일주일에 한 번 잠깐 보니까 부끄럽고 해서 인사 못하는 아이들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억지로 머리를 쥐어 누르고 강요하고 인사 안 하면 구석으로 끌고 가서 훈육하고, 듣기로는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도 보는 어른에게마다 인사시키고 혼내고 때린다고 합니다. 이런 비본질에 집착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왜 인사에 집착하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사람마다 가지는 가치가 다 다릅니다.


우리는 내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강요하느라 관계를 깨트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 본질적인 것인가 고민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내가 생명을 내걸고 고수해야 되는 것인가 아니면 나의 체면, 가치, 고집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때로는 하나님이 선택의 기회를 주십니다.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위해 살아간다면, 특히 가까운 사람들에게 여러분을 통해 복음의 능력이 미쳐야 한다면 중요하지 않은 것들은 내려놓을 수 있어야 됩니다.


어떤 가치로 살아가느냐에 따라 맺는 열매가 달라집니다. 여러분은 어떤 가치를 선택하셨나요? 바울처럼 때로는 고난의 길도 선택할 수 있고 때로는 불필요한 일을 하기로 선택하여 양보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모습들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는 자의 반응입니다. 이런 믿음의 반응으로 선택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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