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14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6] 오바댜가 가서 아합을 만나 그에게 말하매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러 가다가
[17] 엘리야를 볼 때에 아합이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18] 그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
[19] 그런즉 사람을 보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을 갈멜 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아오게 하소서
[20] 아합이 이에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로 사람을 보내 선지자들을 갈멜 산으로 모으니라
본문에는 엘리야와 그 반대 세력인 아합과 바알 선지자들의 영적 대결 장면이 나옵니다. 아합과 바알 선지자들도 사실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원래 모두 하나님을 섬겼어야 하는 자들이 왜 지금 반대편에 서서 영적 전쟁을 하게 되었나요? 이들이 우상에게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우상에는 물론 당시에 섬긴 바알도 있지만 사람이 한 우상적 존재를 숭배하고 그의 힘을 얻어 자기의 욕망을 이루고자 할 때, 그 우상의 영적 영향력이 그 사람을 사로잡게 됩니다. 영적인 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영적 영향력은 현저하게 그들의 인생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우상의 지배를 받으면 어떻게 되나요?
1.자기 죄를 부인하며 남탓만 합니다. vv.16-18
우상의 지배를 받으면 어떻게 되나요? 첫 번째로 자기 죄를 부인하며 남 탓만 합니다. 16절과 1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16] …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러 가다가 [17] 엘리야를 볼 때에 아합이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사람을 만나면 인사부터 하는 게 정상인데 지금 아합은 엘리야를 만나자마자 이 말을 너무 하고 싶었던 나머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고 단죄합니다. ‘괴롭게 하다’라는 히브리어 ‘아카르’는 성경에서 언약을 깨뜨려서 공동체를 파멸시킬 때 사용되는 강력한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가 나오는 곳이 여호수아 7장 25절입니다.
수 7:25 여호수아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냐 여호와께서 오늘 너를 괴롭게 하시리라...
아간 때문에 아이성 전투에서 패하여 사람들이 죽고 모든 것을 잃은 상태입니다. 아간이 무슨 짓을 했나요? 여리고의 모든 물건은 하나님께 바쳐졌기 때문에 손을 대면 안 되는데 몰래 물건들을 훔쳤습니다. 그 결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에 패해 괴롭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너를 괴롭게 하실 것 즉, 멸망시키실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이런 단어를 쓴 것을 보면 아합은 엘리야 때문에 자신과 이스라엘 전 백성들이 고통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고통 받는 진짜 이유는 18절에 있습니다.
[18] 그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
이스라엘에 3년 반이나 비가 내리지 않아 사람들이 굶어 죽게 된 상황의 진짜 원인은 엘리야 개인의 저주가 아니라, 아합과 그 아버지 오므리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해 전 이스라엘이 고통당하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아합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가 괴롭게 된 진짜 원인은 영적이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눈에 보이는 고통을 경험하고 있지만 영적으로 이들은 바알을 따르고 있었고 그래서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이들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바알을 따르면 바알의 영적 영향력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듣고 따를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에 거역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따르고 있지 않은 것이고 어떤 사람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을 잘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영적인 것이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우리 삶에서 드러납니다.
특별히 구약에서는 하나님 백성들에게 상세한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순종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교보재였습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에게 이런 것들을 구체적으로 요구하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약에 이렇게 자세한 율법을 주신 것은 역설적으로 본질 안에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고 믿지 않으면 절대 말씀을 구체적으로 순종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이것을 다 지키면 우리는 의로운 자가 되지만 인간은 절대 의를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모두 순종할 수 없기에, 그래서 예수를 믿어야 함을 가르치고자 구약에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명령은 하나님만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데, 이것조차 하나님이 은혜로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바로 아합과 바알 선지자들, 즉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모습입니다. 결국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17장 1절에서 엘리야가 그들의 죄악에 대해 심판을 선포했던 것입니다.
17:1 …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우리도 때때로 가뭄과 같은 고통을 지나갑니다. 돈이 없거나 병들거나 관계가 깨지거나 실직하는 눈에 보이는 상황들입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직접 주신 상황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목적이 있으실 때는 이 상황들을 통해 개입하실 때가 있습니다. 문제는 우상에게 사로잡혀 있으면 하나님이 상황을 통해 말씀하셔도 그것을 듣고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점입니다.
바로 아합의 모습입니다. 가뭄이 임했을 때, 아합과 엘리야는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접근합니다. 아합은 가뭄이 엘리야의 저주 때문에 임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합의 우상숭배 때문이었습니다. 아합 한 사람이 아닌, 아합과 결부된 이스라엘 모두가 연합해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를 하자 눈에 보이기로는 가뭄이 왔지만 진짜 원인은 영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우상에게 사로잡힌 자들은 절대로 영적인 영향력을 알아챌 수가 없습니다. 우상은 나의 욕망을 충족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되기에, 하나님의 개입 없이는 자기 죄를 볼 수 없습니다.

이유를 다른 데서 찾았더니 반응도 전혀 다르게 됩니다. 아합은 마음에 분노가 일어나 엘리야를 미워합니다. 여기서는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가 너냐고 질문만 했지만, 사실 3년 반 동안 엘리야를 죽이고자 찾아 다녔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회개를 촉구합니다. 아합은 엘리야만 제거하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상황의 유일한 해결책은 회개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두 세계관 사이에서 늘 갈등합니다.
가뭄과 같은 어려움이 닥칠 때 자기중심적 아합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상황, 주변 사람, 정치인, 남 탓을 합니다. 죄는 내가 하나님이 되어 선과 악을 마음대로 결정한 다음 그 선대로 살고 싶은 것인데, 우리는 그런 인생을 살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분노하게 되고, 걸림돌이 된 대상을 향한 미움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너 때문에’의 근원에는 아합적 사고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다면 우리 삶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다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나에 대해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 중심적 태도를 가진 자만이 결국 자기 죄를 인정합니다. 가뭄과 같은 고통에서 자기 죄를 인정하는 것은 엄청난 은혜가 필요한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를 인정하면 약하고 비굴하다고 착각하지만 죄를 인정하는 것은 영적으로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만 가능한 일입니다.
가까운 관계에서 죄를 인정하지 못하고 남 탓을 하면 어떤 해결 방법을 찾을까요? 지금 아합은 엘리야를 죽이고 싶었습니다. 부부관계에서도 제일 미숙한 반응이 쉽게 이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미숙한 아합적 사고인지를 성경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회개와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물론 완전히 하나님 중심적 세계관으로 세상을 살기란 불가능합니다. 싸움이라는 것도 서로 똑같이 공격해야 지속됩니다. 만약 아내가 ‘당신 때문이야’ 공격했는데 남편이 ‘맞아 나 때문이야 미안해’라고 답하면 싸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질적으로 억울해합니다. 나도 잘못은 했지만 난 10%라면 상대는 90%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입니다.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내가 아합이라고 스스로를 상기시켜야 합니다. 써붙이는 것이 도움이 되면 써 붙이기까지 해야 합니다. 아합적으로 살면 인생이 망가집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있다면 관계가 회복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인간이라고 하면 팔, 다리, 눈코입이 있는 육체를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영을 만드셨습니다. 영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통로입니다. 하나님이 영이시니까 영이 서로 연결이 되고, 하나님은 영 안에 생명을 부어 넣으십니다. 그래서 이것을 ‘영적 생명’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은 이렇게 영적 생명이 있는 존재로 살아가도록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영향력이 인간 존재를 지배하면 인간의 말, 감정, 모든 것이 이 다스림 안에 있고 충만하고 기쁘게 되고, 하나님이 뜻하시는 대로 반응할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영향력이 가장 강렬하게 나타나는 영역이 바로 관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온전한 관계를 만드시는 분, 자기 중심성이 하나도 없는 상태, 우리도 이런 생명이 있으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위 사람도 사랑하는 충만함 가운데 살게 됩니다. 그래서 아담이 하와를 처음 만났을 때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그를 가장 귀한 존재로 바라본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왔습니다. 죄를 도덕적,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만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자기를 죄인이라 인정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죄는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면 관계가 깨지고, 관계가 깨지면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오지 않고, 생명이 없으면 공허해지고, 공허하면 자기중심적 욕망이 휘몰아칩니다.
하나님처럼 되려면 뭐가 필요한가요? 더 똑똑하고, 부자되고, 능력있고, 더 강한 힘으로 나를 행복하게 만들 어떤 대상 즉, 우상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단절되니까 인간은 하나님을 대신할 대체품을 찾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우상의 이름이 바알이었지만 요즘은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돈, 힘, 권력, 학교, 각자 추구하는 우상들이 다릅니다.
그런데 이것들을 아무리 소유해도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영혼에서부터 어떤 대상을 의존하니까 이 우상 또한 영적으로 우리를 지배합니다. 나는 단순히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 생각의 근원이 영혼에서부터 시작되었다보니 단순히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끝나지 않고 돈의 영적 영향력이 우리 영혼에 들어와 우리 본질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의 ‘돈’은 헬라어로 맘몬입니다. 이것은 종이 돈이 아니라 돈을 관장하는 헬라의 신입니다. 즉 원래 구절은 돈의 신을 섬기든지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으로, 나는 보이는 돈을 의존하는 줄 알았는데 돈의 배후에 있던 영적 영향력이 영혼으로 들어와 사람을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상의 영향력이 한 사람을 지배하면 어떻게 되나요? 아합처럼 자기밖에 없고, 자기 욕망을 좌절시키고 불편하게 만드는 인간을 파괴하고 싶어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주변 사람이 왜 원망스럽나요? 내 원하는 대로 안 해서입니다. 나의 행복과 나의 쾌락이 우선이고 싶은데 내 편리를 방해하니까 마치 아합처럼 엘리야를 죽이고 싶다는 죄성이 발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먼 이방 왕의 예시로 반면교사 삼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합은 원래 하나님 백성이지만 우상의 영향력에 사로잡히다 보니 이방 왕보다 심하게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다 영적 존재입니다. 우리도 계속 갈등합니다. 내가 은밀하게 사랑하는 그 대상이 여러분을 지배하고 있다면, 원망하고 불평하고 미워하고 분노하며,자기 중심성이 풍선처럼 확장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태도로 살아가고 계신가요?
가뭄과 같은 어려움이 닥쳤을 때 ‘하나님 이것을 통해 나의 죄성을 깨닫게 하셔서 내가 의존하고 사랑하는 우상으로부터 자유케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하고 변화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우상의 지배를 받으면 어떻게 되나요?
2. 헛된 구원을 기대하며 열정적으로 예배합니다. vv.19-29
두 번째로 우상의 지배를 받으면 어떻게 되나요? 헛된 구원을 기대하며 열정적으로 예배합니다. 21절 상반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21a]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백성들은 눈치를 보고 있습니다. 이들도 다 하나님 백성들이기에 엘리야의 말을 모르지 않습니다. ‘머뭇머뭇하다’는 절름발이처럼 한쪽 발에 힘을 주지 못하고 왔다 갔다 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21절 하반절입니다.
[21b] …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이들이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지만 가장 힘 있는 자가 바알 숭배를 선동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세상의 힘은 강력합니다. 잘나고 멋지고 힘 있는 자가 이게 맞는 길이라고 말하고 다수가 추종하면 넓은 길이 맞아 보입니다. 게다 하나님은 현실적으로 별로 유익을 주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 섬긴다고 대학교에 척척 붙는 것도 아니고 사업이 더 잘 되는 것도 아니니 다른 것을 의존하는 유익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 때 23절에 엘리야가 뭐라고 제안하나요?
[23] ... 송아지 둘을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그들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말며 나도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않고
영적 전투를 제안합니다. 그리고 24절 상반절에
[24a]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
평소에 할 법할 일이 아닙니다. 원래는 제물을 놓고 나무도 많이 쌓은 다음 불을 붙여야 제물이 타는데, 진짜 신이라면 하늘에서 불을 내리실 거라는 주장입니다. 24절 하반절에 백성들이
[24b] …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하니라
하나님이 진짜 신인지 바알이 진짜 신인지 대결해 봐야 알겠다고 동의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대결해서 참 신을 가려내자고 합니다. 하나님이 눈에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 25절에서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에게 우선권을 줍니다.
[25]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많으니 먼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잡고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나 불을 붙이지 말라
이들은 신이 났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자기 우상이 힘이 없을 것 같다고 의심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힘을 의존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힘이 있다고 믿고, 돈, 권력, 인맥, 다 열렬히 믿습니다. 이들도 바알이 실제적 힘이 있다고 여겨서 영적 대결을 받아들인 것이고 그래서 강렬하게 예배하기 시작합니다. 26절 상반절 보시면
[26a] 그들이 받은 송아지를 가져다가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
아침부터 낮까지 믿음이 없이 어떻게 바알을 부를 수 있을까요? 이것은 진짜 믿음입니다. 그 뿐 아닙니다. 26절 하반절 보시면 충만한 감정에 사로잡힙니다.
[26b] …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바알이 감정의 충만을 준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 감정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감정은 강렬한 것입니다. 감정이 없이 말다툼을 하면 길게 지속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싸우다 보면 감정이 올라와서, 처음에는 가벼운 지적만 하려고 했던 것이, 사로잡혀서 미친듯이 감정을 내뱉고 나면 나중에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이들도 기도하다 보니 자기 감정에 휩싸여서 뛰놀기 시작합니다. 엘리야가 27절에 조롱합니다.
[27] 정오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우상의 무능함입니다. 물론 세상에도 힘이 있지만 모든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안 된다고 하시면 안 되고 된다고 하시면 됩니다. 아무리 100억이 있고 제일의 권력이 있어도 해결 못하는 일이 많습니다. 우상의 나약함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이제 멈추는 것이 아니라 한 단계 더 나아가 자신을 상하게까지 합니다. 28절입니다.
[28] 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
자기 희생은 예배의 굉장히 중요한 조건입니다. 더 많은 헌신으로 신을 감동케 하여 기도 응답을 받고자 하는 종교성은 기독교에도 있습니다. '하루 7시간 기도' ‘40일 금식’ ‘보좌를 흔드는 기도’ 등 이런 책이나 간증으로 남들보다 많이 헌신했기에 하나님과 직통 계시가 있다는 목사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감정적 황홀경에 사로잡힙니다. 29절입니다.
[29] 이같이 하여 정오가 지났고 그들이 미친 듯이 떠들어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르렀으나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나 돌아보는 자가 아무도 없더라
자기 중심적 예배를 드려봤자 우상이 응답하지 않습니다. 이 모습은 기독교 안에도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첫 번째로, 열심과 희생에 대한 대가를 기대합니다. 내가 이만큼 희생했으니 신이 응답해 줘야 된다는 논리의 중심에 내가 있는 것은 율법주의입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 종교를 수단화하여 아침부터 낮까지 기도합니다. 마지막으로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추구합니다.
이전 교회에서 40일 새벽 기도를 할 때 설교는 30분 이내로 하는데 수백, 수천 명이 두세시간 동안 함께 찬양을 하자 분위기와 음향과 웅장함에 압도되어 황홀경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황홀경을 느끼기 위해 본당에 앉으려고 새벽부터 줄을 서다 그 시간이 점점 당겨져서 밤 12시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곤 했습니다.
진짜 그들이 매일 하나님을 만났을까요? 아니면 감정만 충만했을까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러 감정의 충만함만을 경험하는 것만이 진짜 예배라고 생각하고 그것이 없으면 예배가 아니라는 관점은 옳지 않습니다. 저도 혼자 기도하고 찬양하며 황홀경을 경험한 적이 많습니다. 그런데 저도 경험해서 좋았다면서 왜 여러분에게 강조하거나 시키지 않을까요? 그것이 본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감정으로 아무리 행복한 것을 경험해도, 마음의 본질 안에서 자아를 내려놓고 하나님을 만나 순종하지 않으면 참 예배가 아닙니다. 내 감정을 예배하고 흥분하는 것을 좋아해서 나를 위해 두 시간 노래한 것입니다. 황홀경을 좇다 보면 나중에는 그런 자리만 찾아가게 됩니다.
미국에서 70년대 빈야드 운동이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히피들이 대거 교회에 들어왔는데 장로교 예배가 너무 심심하니까 찬양을 강조하며 두세시간씩 복음송으로 찬양 집회를 많이 가졌습니다. 그런데 황홀경에서 끝나지 않고 신비한 경험을 했다는 사람들이 늘면서 한국에도 그 운동이 있었습니다. 한 장로님이 기도하면 사람들이 쓰러지는 집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쓰러진다고 자아가 죽나요? 말씀에 순종하나요? 자기 죄를 발견하나요? 이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자신을 예배하고, 신을 감동하게 할 만큼 충분히 희생하고, 자신이 기쁠 때까지 감정을 끌어 올리는 것은 바알 종교입니다.
참 예배와 복음적 영성은 은혜 의식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할 필요가 없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이미 은혜로 주셨습니다. 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이뤄지지 않을 수 있지만 그것도 응답입니다. 마지막으로 감정을 넘어선 회개와 순종이 나와야 합니다. 찬양하다 눈물을 흘릴 때도 있지만 울었으니까 좋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울면서 내 죄를 발견하고 하나님께 더 순종하겠다고 하나님 중심적으로 예배하면 여러분의 기도가 다 이루어집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에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조건이 무엇인가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즉 예수님과 연합되어 있으면 우리가 하는 모든 기도가 예수님 기도와 똑같아야 됩니다. 우리가 하는 기도가 응답이 안 되면 예수님과 관계없는 간구였는지 확인해 봐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꼭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도장이나 우표가 아닙니다. 요한복음 16장 24절입니다.
요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고 내가 너희 안에 거한다”와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똑같다는 것입니다. 내 존재가 예수님으로 대표되는 것, 즉 내가 기도했지만 기도의 모든 내용이 예수님의 기도와 똑같기 때문에 예수 이름으로 기도한 것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다 이루어집니다. 여러분이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할 때마다 생각해 보셔야 됩니다. 진짜 내가 예수님의 마음과 뜻으로 기도했나? 바알 선지자들처럼 나의 욕망을 이루어 달라고 외치고 난리 법석을 친 것은 아니었나?
하나님은 우리 안의 바알적 사고와 영향력이 잘라져 나가길 원하십니다. 인생에 가뭄이 임하셨다면 그 상황을 통해 “하나님 내 죄악과 우상숭배를 깨뜨리셔서 참된 하나님의 회복과 은혜를 경험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