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짝단어 01 룻 1.15-18 신실하신 하나님과 불충한 성도
2026년 6월 28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오랜 기간에 걸쳐서 에스더서가 끝났습니다. 하지만 제가 여기서 설교했던 룻기와 에스더서를 좀 더 깊이 있게 보면서 뼈에 붙은 살까지 발라서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 두 책에서 등장하는 성경의 중요 단어들을 짝단어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경의 짝단어는요, 서로 반대되는 의미의 단어끼리 짝을 지어서 볼 수도 있구요, 아니면 함께 잘 쓰이는 단어들을 짝지어서 보는 것을 말합니다. 아이들 영어 공부를 가르쳐주다가 그렇게 짝단어로 학습을 하는 문제집이 있었는데요, 성경에도 적용해보면 좋겠다는 아이디어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초등부 때부터 벌써 짝단어를 꽤 배웠습니다.
오늘 함께 살펴볼 말씀은 시간과 관련된 짝단어입니다. 몇 주 전에 청소년부 아이들이 소그룹실에 걸려 있는 세계 지도를 보면서 이 세상이 만들어진 '태초란 언제일까?', '시간이란 언제 생겼고, 시간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자기들끼리 대화가 시작됐습니다. 저는 평소에도 이 시간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 주 예배후 시간에 아이들끼리 시간에 대해 고민하고 토론하도록 도와줬습니다. 밥 먹는 중에도 칠판에 같이 정리해 가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한 주는 아이들에게 시간과 관련된 각각 다른 영화를 한 편씩 보게 했습니다. 각자 노트북이 한 대씩 있으니까 그런 활동도 할 수 있더라구요. 그리고 지난주에는 AI를 활용해서 ppt를 만들어서 발표도 했습니다. 이렇게 먼저 스스로 궁금증을 가지고 질문하고, 생각하고 토론하고, 관련된 책이나 영화를 보면서 생각을 확장하고, 그 생각을 다듬고 정리하는데 AI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우리 친구들 그냥 모든걸 AI에 다 맡기지는 않아죠? 그리고 오늘이 그 시간과 성경이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최종 결론으로 말씀을 듣는 날입니다.
우리는 보통 시간을 어떻게 계획적으로 잘 쓸 것인가에 대해서는 중요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시간이 무엇이냐에 대한 고민은 많이 해보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답이 쉽게 나지 않는 소모적인 생각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과 하나님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는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강물처럼 흐르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지금이 몇 시 몇 분인지 시각을 확인하고, 지나간 과거를 그리워하거나 다가올 미래를 기대하면서요. 그런데 과연 시간은 정말 흐르는 것일까요?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하루가 24시간이라는 것은 지구가 한 바퀴 도는 현상을 24개로 임의로 쪼개 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50개나 100개로 쪼갤 수도 있었습니다. 1시간은 지구가 24조각 중 한 조각만큼 움직인 상태를 말합니다. 지구가 한 바퀴를 돌고 나면 원래 처음 자리로 돌아갈 뿐입니다. 태양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고, 우리가 서 있는 지구가 한 바퀴 돌아서 똑같은 태양을 다시 바라보게 된 것일 뿐인데 우리는 이것을 기준으로 어제와 오늘이 나뉘었다고 말합니다. 시간이 흘러서 상태가 변한 것이 아니라, 천체가 변한 상태를 기준으로 하루라는 시간이 흘렀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간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천체들이 움직이고 계절이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꾸로 이 천체들이 변화하는 양을 인간이 임의적으로 쪼개서 날짜와 시간으로 가늠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지구를 벗어나 먼 우주에서 이 모습을 보면 어떨까요? 깊은 어둠 속에서 천체들이 태양 주위를 조용히 돌고 있을 뿐, 그곳에는 밤낮의 바뀜도 계절의 변화도 없습니다. 하루와 1년이라는 시간은 결국 지구와 태양이 움직이는 변화의 양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개념입니다. 저희가 태어나면서부터 이 시간대 속에서 당연하게 살다 보니, 시간이 흐르니까 세상이 변한다고 거꾸로 생각하게 되기 쉬운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은 독자적으로 흐르는 실체가 아니라 피조 세계의 변화와 패턴을 읽어내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예희가 이제 중1이 됐는데요, 바로 이 이야기를 하는거에요. 자기가 이런 생각하는걸 좋아해서 시간에 대해서도 생각해본적이 있는데 잘은 모르겠지만, 시간이 흐르는 것 같지 않고, 변화의 패턴일 뿐인거 같다구요. 그런데 저는 먼저 답을 주지 않았구요, 집에가서 부모님과 더 깊이 대화해 보라고 숙제를 내줬습니다. 부모님께도 예희가 생각이 깊으니까 대화를 잘 해주시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자, 여러분들도요, 마지막으로 사진 몇 장을 같이 보시면요 좀 더 확실하게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똑같은 장소를 위 아래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 앞에 길이 보이시죠? 몇 시간이 흐른 것 같나요, 몇 십년이 흐른 것 같나요. 그런데 이 사진 안에는 시간을 표시하는 시계나 달력이 없습니다. 그러면 저희는 어떻게 그 시간의 흐름을 찾은 것인가요? 맞습니다. 얼마나 변화 했는지를 통해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만약 감옥처럼 전혀 변하지 않는 공간에 갇혀서 밤낮의 변화마저 체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느 순간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잘 변하지 않는 다이아몬드가 영원한 사랑을 상징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영원함이라는 시간적 개념은 결국 변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성경에서 하나님을 변치 않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그런 하나님을 보고 영원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시간을 초월해 계신 분이라고도 말하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이 그러신게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은요,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저희의 태도가 어떻게 변할지라도 그 성품이 변하지 않으시고, 구원 약속을 변경하지 않으시고, 영원히 그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걸 성경에서 한 단어로 표현한 것이 바로 '신실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저희는 어떤가요? 상황이 변할 때 마다, 관계가 변할 때 마다 마음이 바뀌면서 하나님에 대한 태도도 변하고, 이웃에 대한 태도도 변합니다. 그걸 한 단어로 표현한 것이 불충입니다. 변덕스럽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시간에 대해 고민이 있어야지만, 이 신실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저희가 얼마나 불충한지 더 깊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요 룻기 1장을 통해서 저희들이 하나님께 충성스럽지 못하더라도, 저희에 대해 신실하신 하나님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도가 불충할지라도 하나님은 어떠하신 분인가요?
영원히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룻기의 처음 시작은 베들레헴에 흉년이 찾아오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베들레헴은 빵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변에 비해서 곡식 생산량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상황이 180도 변한 것입니다. 그런데요, 하나님 백성들은 상황이 변했을지라도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하나님보다 먹고 사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을 데리고 이방 땅으로 옮겨 간 것입니다. 상황이 변하니까, 하나님에 대한 마음도 변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있어서충실하지 못한 것이죠. 게다가 거기서 두 아들이 이방 여자들과 결혼까지 하게 됩니다. 율법에서는 금지하는 일이지만 상황이 변한거에요. 이방 땅에 살고 있던 때에 아들들이 결혼할 때가 됐으니까 이방 여자들이라도 결혼 해야된다고 생각이 변한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이 모든 결정을 주도했던 엘리멜렉과 두 아들이 죽게 됩니다. 결국 이제 남겨진 나오미의 입장에서도 또 상황이 변했습니다. 그 전에는 남편과 아들들이 이방 땅에서 먹고 살게 해줬는데 이제 그것도 안되고, 같은 핏줄이 없어서 외로우니까 다시 고향 생각이 나는거에요. 이게 내가 잘못했구나 하고 회개하면서 돌아가고 싶어진게 아닙니다. 나오미가 베들레헴에 돌아와서 한 말을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1장 21절입니다.
[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자기들 상황에 따라 하나님 나라를 떠나는게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는건데, 자기가 풍족하게 나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여호와가 나를 이렇게 비어 돌아오게 해서 괴롭다는거에요. 이렇게 하나님 탓을 하고 있는데, 회개하며 돌아왔다고 생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돌아갈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을 때, 우연히 베들레헴에서 흉년이 끝났다는 기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다 정리하고 집에 돌아가려고 하는데요, 며느리들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8절 말씀입니다.
[8]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이걸 어떻게 보면 나오미가 두 며느리를 정말 배려하고, 하나님이 잘 돌봐주시길 기도 해주는 것 같지만요, 이게 아들들이 있을 때는 우리 가족이었지만, 이제 없으니까 너와 나의 관계도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가 아니라는거에요. 상황이 변하니까 관계도 변합니다. 그런데요, 하나님은 백성들이 실수로 이방 여자들과 결혼을 했을지라도 한 번 하나님의 가족이 되면 영원히 자기 백성을 삼으시려는 분이십니다. 이방 여인의 자손을 통해서라도 예수님을 보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나오미가 결정적으로 또 뭐라고 말을 했나요? 15절입니다.
[15]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너가 우리랑 살 때는 하나님께 예배도드리고, 하나님 믿고 살았겠지만, 상황이 변했으니까, 이제 너네 신 믿으러 가라고 그러는거에요. 이게 겉으로 보면 이런 배려 많은 시어머니가 되셔야 합니다라고 설교 할 수도 있을 것 같지만, 그게 아닌 것입니다. 상황이 변하는 것에 따라 하나님 나라를 떠날 수도 있고, 이방 여인과 결혼할 수도 있고, 다른 신을 섬길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그 약속에 대해 신실하지 못한, 불충한 모습 그 자체인 것입니다. 그런데요, 이런 나오미 앞에서 룻이 이렇게 답을 합니다.
[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아.. 이게 젊어서 남편을 잃고, 이제 내 아들이 죽었으니 너도 내 며느리 아니라고하는 시어머니 앞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인가요. 한 번 가족이면 영원한 가족, 한 번 내 하나님이면 영원한 내 하나님. 이것이 바로 신실한 모습입니다. 결국 이런 룻으로 인해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집안에서 다윗 왕이 태어날 수 있었고, 예수님이 오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룻의 모습에 나오미가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됩니다.
[18] 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여기서 굳게라는 히브리어 단어는요, 신실하다는 단어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의미는요, 꽉 붙잡아주다, 변하지 않는 사실, 확실하다, 그래서 아멘이라는 단어도 같은 뿌리입니다. 아멘의 뜻이 확실합니다.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의미이죠. 그래서 이런 룻의 모습을 보고 변치 않는 신실함으로 자신을 희생해 백성들의 구원을 얻게 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실 나오미가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때 베들레헴에서 기쁜 소식이 들려온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나오미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유익을 위해 하나님 나라로 돌아오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시고 그 기쁜 소식으로 나오미를 부르시고, 준비하신 룻과, 보아스를 통해 신실하게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에스더서도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충으로 인해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에 잡혀왔고, 바벨론이 망하고 페르시아가 들어서면서 돌아갈 기회를 줬는데도 이제 수십년이 지나면서 단순한 포로가 아니라 살만해졌으니까, 상황이 변했으니까 눌러 살고 있었던거에요. 그런데도 하나님은 모르드개와 에스더를 사용해서 이들이 하만에 의해 멸망하지 않도록 그 구원 약속을 변치 않고 지켜주셨던 것입니다. 결국 이 모든 성경의 이야기들이 똑같이 불충한 저희의 죄에 대한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라는 복음의 이야기를 하고 있구요, 결국 저희들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저희도 얼마나 불충한가요. 상황이 좀 좋아지면 나의 하나님이 이렇게 좋게 해주셨다고 자랑하고, 상황이 좀 나빠지면 내가 뭘 잘못했길래 이렇게 힘들게 하시냐고 따지고. 가족과 이웃을 신실하게 사랑하지 못하고, 그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가진 조건이 변하는 것에 따라서 그 사람을 좋아하기도 했다가 싫어하기도 했다가. 아부했다가 멸시했다가. 아내를 향해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사랑하겠다고 했다가도, 쟤가 저렇게 하는데 내가 어떻게 사랑할 수 있냐고 말을 바꿔버리고. 하나님 이번에만 이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주시면 평생을 하나님만 섬기고 살겠습니다 했다가도 좀 몸과 마음이 편해지면 마음이 또 변하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역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 덕분에 지금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 첫째 하임이가 막내 하담이 재활병원 선생님께 써준 편지인데요, 막내 하담이가 일주일에 이틀은 하루종일 재활병원에 가서 여러 선생님들께 재활을 받습니다. 그 중에 하담이를 가장 아껴주시던 선생님이 이직을 하게 되셨어요. 저희가 그럴 때마다 편지와 선물을 드렸거든요. 편지의 내용은 제가 쓰고, 손편지로 아내가 썼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아내가 일하느라 어깨가 아파서 못쓰겠다고 해서 저보고 쓰라고 하는데 워낙 악필이라서 하임이에게 맡겼더니 와.. 엔간한 어른이 쓴 것 보다도 예쁘게 잘 쓴거에요. 그래서 이거 보면서 하임이가 벌써 이렇게 컸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든 생각이 뭐냐면요, 아... 이 아이들이 어렸을 때 아내랑 싸워서 집 나가고, 그 때 이혼까지 했으면 이런 모습을 볼 수 없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습니다. 하임이 두살 쯤에 싸우고 집도 나가고, 다니고 있던 신학 대학원도 무단으로 그만두고 이혼 서류까지 썼었거든요. 뭐 그렇게까지 했나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그 싸움 한 번의 문제가 아니라 몇 년간 계속 쌓여왔던거죠. 제가 어느정도였냐면, 지금도 목사가 이혼을 하게 되면 한국에서 목회는 거의 못하거든요. 그런데 어차피 결혼을 유지해도 제대로된 목회를 할 수 없겠다는 생각까지 간거에요. 그래서 신대원 다니는게 시간낭비 돈낭비라고 생각해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 목사를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 이혼을 하지 않게 하는 거의 마지막 보루였거든요. 그리고 최종 보루가 뭐였냐면 아이들이었습니다. 아.. 이제 앞으로 이 아이들 자라나는거 못보겠구나.. 그런데 우리가 부부로 있으면 오히려 이 아이들이 더 불행하겠다는 생각에 이르니까 결국 이혼 서류까지 준비를 해놨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요, 이렇게 문득 아이들 자라는 모습을 보면요, 그 때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지 않으셨으면 어쩔뻔 했나하는 생각이 자주 납니다. 그래서 지금의 저는요, 여러분들한테 더 똑바로 믿으세요, 인내 하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사랑하세요 라고 말을 잘 못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언제나 불충했고, 신실하신 하나님이 다 해주셨거든요.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께 해드릴 수 있는 말은 견디기 힘들고, 화나고, 우울하고, 고통스러울 때 오늘 그 인생의 쓴 맛, 고통스러웠던 나오미에게 해주셨던 것처럼, 신실하신 하나님이 일해주실 것이라는 말씀 뿐입니다. 여러분, 나오미가 하나님이 보고 싶은게 아니라 자기 상황이 변해서, 자기가 외로워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고 싶어졌을 때, 우연히 베들레헴에서 기쁜 소식이 들려오잖아요. 그게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 게획을 이미 해놓으신 상태에서 그 우연한 상황을 통해 하나님 곁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저희가 불충할지라도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들도 삶 속에서 나의 불충함에도 불구하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발견하며 은혜를 누리고 계신가요? 그것이 은혜를 잊지 않는 유일한 비결입니다. 그렇게 불충한 저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변화무쌍한 시간 속으로 들어오신,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붙드시며, ' 사랑하는 나의 충성된 종아' 라고 불리워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