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 강해 11 7.1-10 메시아의 사역의 결과
2025년 11월 23일 주일예배 설교문/ 장우현 목사
[1] 왕이 하만과 함께 또 왕후 에스더의 잔치에 가니라
[2] 왕이 이 둘째 날 잔치에 술을 마실 때에 다시 에스더에게 물어 이르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냐 곧 허락하겠노라 그대의 요구가 무엇이냐 곧 나라의 절반이라 할지라도 시행하겠노라
[3] 왕후 에스더가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여 내가 만일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으며 왕이 좋게 여기시면 내 소청대로 내 생명을 내게 주시고 내 요구대로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4] 나와 내 민족이 팔려서 죽임과 도륙함과 진멸함을 당하게 되었나이다 만일 우리가 노비로 팔렸더라면 내가 잠잠하였으리이다 그래도 대적이 왕의 손해를 보충하지 못하였으리이다 하니
[5] 아하수에로 왕이 왕후 에스더에게 말하여 이르되 감히 이런 일을 심중에 품은 자가 누구며 그가 어디 있느냐 하니
[6] 에스더가 이르되 대적과 원수는 이 악한 하만이니이다 하니 하만이 왕과 왕후 앞에서 두려워하거늘
[7] 왕이 노하여 일어나서 잔치 자리를 떠나 왕궁 후원으로 들어가니라 하만이 일어서서 왕후 에스더에게 생명을 구하니 이는 왕이 자기에게 벌을 내리기로 결심한 줄 앎이더라
이제 에스더서가 중간인 6장을 넘어가면서 큰 산을 넘었습니다. 그런데 이 에스더서 6장 이후는 여러분들도 생소하실 수 있습니다. 하만의 민족을 진멸하는 이야기가 계속 나오고, 부림절에 대한 설명도 길게 나와서 이 말씀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기가 어려운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요, 에스더 후반부는 저희 삶과 정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에스더를 오랜 시간 충분하게 연구해서 여러분들과 한 편 한 편 나누는 이 날들이 아주 기대가 될 정도입니다. 그리고 저희 신앙생활에 필요한 신학적 주제들도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섭리라는 주제가 에스더서에서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6장을 세 번에 나눠서 자세히 봤구요, 우연이나 점술, 부림절 같은 주제도 중요하고 서로 밀접하기 때문에 그 관계에 대해 따로 봤습니다. 이 외에도 에스더서에 많이 나오는 잔치나 영광, 분노, 같은 주제들도 중간 중간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보시게 될 7장 말씀에서는 메시야의 사역에 대한 내용이 부각됩니다. 에스더 4장에서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이다만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하시기 쉽지만, 사실 4장은 모르드개가 그런 메시야를 세우는 과정이었다면 7장에서는 그 메시아의 사역이 뚜렷하게 실현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통해 메시아의 사역이란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 사역이 저희에게 어떤 의미가 있고, 저희의 삶이 변화되는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메시아의 사역을 통해 성도들은 어떻게 되나요?
1. 하나님을 주인삼게 됩니다.(1-7)
[2] 왕이 이 둘째 날 잔치에 술을 마실 때에 다시 에스더에게 물어 이르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냐 곧 허락하겠노라 그대의 요구가 무엇이냐 곧 나라의 절반이라 할지라도 시행하겠노라
이런 큰 잔치를 연회라고도 하죠. 이런 곳에서는 공식적인 공연이나 행사를 마치고 마지막 순서로 식사를 하며 술을 마시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술을 마신다는 표현은 이 잔치의 시대가 어느새 끝에 다달았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왕이 기분이 좋아지니까 또 에스더에게 어떤 소원이든지 다 들어주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제 마지막 때가 다 되었다는 것을 안 에스더는 하나님의 섭리를 기다리며, 회개의 기회를 줬던 첫 번째 잔치와는 달리 자기의 소원을 말합니다. 3절입니다.
[3] 왕후 에스더가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여 내가 만일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으며 왕이 좋게 여기시면 내 소청대로 내 생명을 내게 주시고 내 요구대로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내 백성을 내게 주소서. 어디서 많이 들어본 유명한 구절이 생각나지 않으시나요? 내 백성을 내게 주소서. 네. 갈렙의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와 딱 들어맞죠. 이런걸 표절이라고 하나요? 아닙니다. 에스더의 이 소원은 갈렙의 소원과 함께 성경의 중요한 양대 축입니다.
갈렙은 지금은 이방인들이 소유해서 세상 풍조로 다스려지는 저 땅을 정복하고, 하나님의 뜻으로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가 되게 해달라는 소원을 말한 것입니다. 이게 남들보다 더 좋은 땅을 더 많이 소유하고 싶다고 욕심 내는게 아니라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선 중보자로서 이 죄악된 땅을 구속해달라고 중보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에스더 역시도 메시야를 예표하는 사람으로서, 하만의 소유가 되어 죽음 앞에 휘둘리는 이 백성들을, 다시 하나님의 소유가 되도록 구속해 달라고 중보 사역을 감당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갈렙과 에스더가 중보한 땅과 백성의 회복에 대한 소원은요, 모두 하나님 나라와 통치의 회복에 대한 성경의 두 축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메시아의 중보 사역을 통해 마귀의 소유였던 저희가 하나님의 소유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저희는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 익숙합니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 소유가 되는것이 오늘 하루를 사는데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현대 사회에서는 사람을 물건처럼 소유하거나 사고 팔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개념은 사람에 대한 소유권 개념이 있었던 고대의 주인과 종의 개념 안에서 살펴봐야 지금 저희에게 좀 더 와닿습니다. 왜냐하면 소유권이 바뀐다는 것은 주인이 바뀐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 가운데 있었던 저희를 보고 마귀에게 속한 자, 그러니까 마귀가 소유한 자라고 하구요, 또 마귀를 주인으로 섬기는 종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같은 표현인거에요.
백성들이 그렇게 마귀의 소유가 되어 있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에스더는 그 때 왕이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하는 유혹을 뿌리치고, '아니요. 저는 그것보다 더 귀한 것이 있습니다. 내 백성을 내게 주소서.'라고 소원을 말한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온 세상을 주겠다고 유혹한 마귀의 시험을 이기시고 백성들의 중보자의 사역을 완성하신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요, 마귀에게 넘어간 소유권을 넘겨받는게 공짜가 아닙니다. 그 값을 치뤄야 합니다.
3장에서 하만이 백성들을 자기 마음대로 하기 위해 왕에게 치룬 그 값이 은 1만달란트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36만 키로그램이구요, 1톤 트럭 360대 분량입니다. 이건 저희 스스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으로 팔린 죄값이라는거에요. 3장에서 이 일만달란트가 뜬금없이 나온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죗값을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값으로 치루시고, 마귀를 주인 삼고 살던 비참한 삶에서 하나님을 주인 삼고 살 수 있는 영광스러운 삶으로 그 소유권을 이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저희가 온전히 하나님만 주인 삼고 살 수 있도록 이렇게 중보하고 계세요. 제가 다른 것 다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이 백성을 온전히 내게 주소서.
그렇다면 저희의 삶에서 마귀를 주인 삼는다는 것은 무엇이고, 하나님을 주인 삼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게 저희 삶에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사실 제 인생을 돌이켜보니까 하나님을 믿기 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훈련받은게 결국 하나님을 주인 삼는 일이었더라구요.
제가 김일승 목사님과 성도님들을 만나게 된 건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요, 사실 김일승 목사님과 저는 성향이 극반대입니다. 김일승 목사님은 학자 스타일이구요, 저도 공부를 좋아하지만 사람 만나는걸 더 좋아합니다.
저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몇 시간씩 사는 이야기 듣고 나눔하는걸 좋아하구요, 전화통화도 한 시간도 짧습니다. 그게 어느정도냐면 만약 제가 제 성향대로 설교를 했다면요, 강단 없이 성도님들이 가까이 둘러 앉아 있고, 귀에 마이크 끼고 돌아다니면서 토론하면서 설교 했을꺼에요. 초등부에서 그렇게 합니다.
그리고 제가 이전에 잠깐 사역했던 교회에서도 집 근처니까, 평일이나 주말이나 시간만 나면 초등부 아이들 만나서 햄버거 사주고, 놀아주고, 얘기하고, 전화하고, 학교 찾아가고, 그러면서 신대원 과제하고, 초등부 설교 준비하고 저희 애들 돌보다가 과부하 온거거든요. 그런데 목사님 딱 만나고 나니까 이게 말씀 연구를 제대로 안하면 안되는거에요.
결국 사람 만나는 시간을 줄일 수 밖에 없게 됐습니다. 그렇게 집중해서 말씀 준비해야 두 세달에 한 번 하는 설교 간신히 준비할 수 있었는데요, 그 결과가 항상 만족스럽지가 않았어요. 말을 잘 했냐 못했냐가 아니라 성도님들께 말씀을 올바로 전하지 못한다는 것이 힘들었던거에요. 그래서 그렇게 몇 년을 지내니까요, 친구들 전화를 못받게 됐습니다.
전화하다보면 만나서 밥이나 먹자는 얘기가 꼭 나거든요. 그런게 한 달에 몇 번만 만나도 설교 준비 못하는거에요. 아니 두 세 달에 한 번 설교하는데 친구 한 번 만났다고 설교 준비 못하는게 말이 되느냐라고 하실 수 있겠지만, 이게 말이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한쪽에서는 김일승 목사님 따라서 말씀을 준비하지만 한쪽에서는 제 아내가,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거든요. 그럼 저는 말씀 준비 다 하면 가족과 함께 시간 보내야 되는거에요. 좋은 일이죠. 그래서 아내는 제가 말씀 준비하는데 시간 쓸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해줍니다.
아내가 아침 일찍부터 저녁까지 어린이집에서 일하고 와서도 제가 말씀 준비하느라 바빠서 집안일 못해놓으면 힘들어도 다 해줍니다. 그런 상황에서 제가 말씀 준비 좀 일찍 끝났다고 친구 만나러 갈 수 있나요? 아, 오늘따라 제 무덤이 어떻게 생겼나 궁금해서 한 번 둘러보고 싶으면 친구 만나도 되는거에요. 지옥이 펼쳐집니다.
그런데 제가 친구나 사람을 만나는게 그냥 놀자고 만나는게 아니라, 인생에 힘든 일들 들어주고, 나눔하러 가는거거든요. 불신자이든, 믿는 사람이든요.
특히나 제가 그렇게 경청하고, 그 말하는 상황을 최대한 이해하고, 공감하는 은사를 받았어요. 제가 손금, 관상, 타로카드를 잘한 이유가요, 그 은사가 합쳐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아무 것도 아닌 저에게 점을 보러 모였겠어요.. 그러니까 하나님 믿은 후에는 이 은사를 하나님을 위해 써야겠다는 생각이 가득하게 된거죠.
그런데 지난 10년간 그걸 제 성향대로, 제가 원하는대로 못하게 됐던거에요. 김일승 목사님과 아내가 쌍끌이 어선으로 끌고 가는데 제가 하고 싶은걸 못해서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었을까요? 그것도 뭐 게임이나 친구들이랑 놀러다니는거나, 값비싼 취미 같은것도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이제 좀 제대로 써보려고 했던거잖아요.
그런데 그 때는 제가 그렇게나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때에 하면서 내 인생의 주인노릇 하려고 했다는걸 모르고 아내와 주위 사람들 탓만 했던거죠. 그게 마귀를 주인 삼으며 사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나만 옳다고 여기며 고집대로 하며 관계를 다 깨뜨리는 것입니다.
그런 제가 인내심이 강했다거나, 제가 하고 싶은걸 못해도 그걸 품을 수 있는 그릇이 넓다거나, 하나님의 크신 계획이 있겠지 하는 믿음이 컸기 때문에 지난 10년을 버터온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생 쪽박 찰 것 같은 상황으로 계속 몰아가시니까 어쩔수 없이 말씀만 연구하고, 어쩔 수 없이 사람들 못만나고 꼬챙이와 그물에 걸려서 지금까지 끌려온거에요.
그런데요, 그런 시간이 1년, 3년, 5년 쌓이면서 말씀을 바르게 알게고, 또 그 말씀이 머리에만 머물지 않고 영혼 가운데 적용이 된 것입니다. 안그러면 살아남지 못하니까요. 그래서 아, 이런 내 삶을 통해 하나님이 나를 깎아내고 계시고, 나에게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고 계시는구나를 점점 더 신뢰하게 된거에요. 제가 한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10여년이 지난 이 시점에는요, 하나님께 더욱 감사하고 있습니다. 김일승 목사님과 이 교회 만나지 못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사람들 만나서 말만 번지르르하고 말씀은 몰라서 깡통인데 아는척하느라 거짓말하고, 그럴수록 말씀에 권위가 떨어지니까 이상한 방법들로 가짜 권위를 세우려고 하는 목사가 됐겠지. 아니 그건 목사도 아니죠.
그리고 지금의 아내를 만나지 못했으면 어땠을까. 다른 사람들 공감하고 상담한다고 나만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마음껏 나돌아 다니다가 내 가족은 다 상처받아서 돌이킬 수 없었겠지. 사람들 만나서 밥 사주고, 사람도리 한다고 명절 선물, 생일 선물 사주고 그러다가 빚더미에 앉아서 거지 되서 길에 나앉거나 평생 빚 갚는 돈의 노예가 되었겠구나..
여러분, 제가 만나던 만큼 사람 만나면요, 진짜 선물로만 빚쟁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그 당사자 뿐 아니라 그 가족에 친척까지 다 챙기거든요. 제 여동생이 쌍둥이 둘을 낳고, 음식점을 운영하면서 힘들다 힘들다 하면서도 그렇게 새벽까지 사람들 만나고 다니는거 보면요, 나도 저랬겠구나 생각이 들어요.
여러분, 제 아내 별명이 작은 위원장님이십니다. 김정은 위원장처럼 핵펀치 날리는 분이라는거에요. 장모님 별명이 큰 위원장님, 김일성급이구요. 요즘 제 딸이 엄마 닮아서 별명이 김주애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제가 만약 순한 아내를 만났다면요, 지금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는 저는 없습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에요.
여러분 그리고 김일승 목사님,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으시고 복음으로 한 길만 파시면서 목회자들 뿐 아니라 교수님들을 양성할 수 있는 초전문가입니다. 제가 저런 분 만나지 않고 조금만 허술하신 분 만났으면요, 제가 이렇게 끔뻑 죽어서 따라가지 못했을꺼에요. 제가 얼마나 교만하고, 나 잘났다고 사는 사람인데요.
여러분 그래서 제 지난 10년이 하나님을 주인 삼는 훈련이었던거에요. 아니 그런데 왜 김일승 목사님을 주인처럼 섬기고, 아내를 주인처럼 섬기는게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일까요?
김일승 목사님이 이 교회의 주인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세워주신 권위입니다. 그리고 저는 하나님이 이곳으로 이끌어주셨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면 거기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주인 삼는 것입니다. 제가 목사님이나 교회를 내뜻대로 변화시키는게 아니라, 그 순종하는 저를 통해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가 가정이나 저의 주인이 아닙니다. 교회와 가정의 주인은 하나님이시죠. 그런데요, 저는 결혼식 때 하나님이 만나게 해주신 짝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교회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시고 종노릇 하셨듯이 저도 그리 하는 것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고, 하나님을 주인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주인 삼는다는 것이 저희 일상과 동떨어진 철학이나 신학 사상이 아닌거에요. 그런데 저희는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라고 찬양하고 기도하지만, 정작 삶에서 그게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놓치니까, 직장이나 집에서 내 원하는대로 하면서 내가 하나님을 주인 삼고 사는게 맞나? 의문이 드는 것입니다.
에스더를 보세요. 왕 앞에 나아가면 죽는다는 것을 모르드개보다 더 잘 알았습니다. 그 때 에스더가 제가 아버지보다 왕을 더 잘 알아요. 고집좀 부리지 마세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게 하나님 뜻이라면 내가 죽더라도 나아가겠습니다. 아버지이자 하나님의 대리 양육자인 모르드개에게 순종한게 하나님께 순종한거에요.
그런데요, 여러분들이 삶의 현장에서 그 주인을 바꾸는 과정이 죽도록 하기 싫고, 힘들다는 것을 예수님이 모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꼭 그 상황을 바꿔주시는 방법으로 도움을 주시는게 아닙니다. 그 고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주인 삼아 참된 평안과 기쁨을 얻게 해달라고 피땀 흘리며 중보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억눌린 상황 속에서도 이게 하나님이 나를 빚어가고 계시다는 것을 믿으며, 바로 그 자리에서도 참 자유와 감사를 누리는 사람으로 어느덧 성장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오직 하나님만 주인 삼는 복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메시아의 사역을 통해 성도들은 어떻게 되나요?
2. 죄값을 대속 받게 됩니다.(8-10)
[7] 왕이 노하여 일어나서 잔치 자리를 떠나 왕궁 후원으로 들어가니라 하만이 일어서서 왕후 에스더에게 생명을 구하니 이는 왕이 자기에게 벌을 내리기로 결심한 줄 앎이더라
에스더의 중보를 통해 하만의 죄가 폭로됐습니다. 그러자 왕비와 그 가족과 민족을 죽이려 한 그 어마무시한 대역죄에 왕은 강력한 분노가 일어나서 후원으로 들어가버립니다.
여기서 아하수에로 왕의 분노는 1장에서 와스디 왕후 에게 쏟아냈던 인간적 분노와 다릅니다. 에스더서에서 이 왕은 6장 이전과 이후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6장 이전은 자기가 왕 노릇하려는 자의 모습을 보여줬다면, 6장의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 하나님이 세우신 이 땅의 대리 통치자의 모습을 회복합니다.
그래서 이 때 아하수에로 왕의 분노는 백성들이 마귀에게 팔린 것에 대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진노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면 그 진노의 심판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만의 상황을 들었던 하만의 아내와 지인이 이렇게 말했었죠.
[13] 자기가 당한 모든 일을 그의 아내 세레스와 모든 친구에게 말하매 그 중 지혜로운 자와 그의 아내 세레스가 이르되 모르드개가 과연 유다 사람의 후손이면 당신이 그 앞에서 굴욕을 당하기 시작하였으니 능히 그를 이기지 못하고 분명히 그 앞에 엎드러지리이다
그래서 하만은 그 왕의 진노를 보자 에스더 무릎에 바짝 엎드려서, 한 번만 살려달라고 간절히 구하게 된 것입니다. 왕의 분노가 단순히 사람의 분노로 보인게 아니라 아내와 지인이 말했던 하나님의 진노가 겹쳐 보이는거에요.
아니, 그런데...기회를 줄 때 회개 했어야죠. 이제 잔치는 다 끝나고 마지막 심판의 자리에 서게 되면 기회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때 마침 왕이 후원에서 돌아오다가 하만이 왕비 무릎에 엎어져 있으니까, 이게 왕비한테 못된짓을 하는 걸로 오해해서 일말의 여지 없이 사형에 처한 것입니다.
사실 왕이 잠깐 화를 풀고 와서 좀 봐줄 수도 있었거든요. 아무리 하만이 나쁜 짓을 했어도 아직 누가 죽은건 아니었고, 왕에게 돈도 많이 주고 왕이 총애하던 사람이었잖아요.. 와...그런데 지금 상황이 우연히 오해해서 생긴 일이지만, 회개의 기회가 지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면 얄짤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또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마침 왕 옆에 있던 하르보나라는 신하가 하만이 그렇게 충성된 모르드개를 매달아 죽일려고 나무 세워놨다고 시기 적절하게 말해줍니다. 9절입니다.
[9] 왕을 모신 내시 중에 하르보나가 왕에게 아뢰되 왕을 위하여 충성된 말로 고발한 모르드개를 달고자 하여 하만이 높이가 오십 규빗 되는 나무를 준비하였는데 이제 그 나무가 하만의 집에 섰나이다 왕이 이르되 하만을 그 나무에 달라 하매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던 신하가 우연히 왕 옆에 있다가 말한거에요. 우연한 일인 것 같지만, 하만이 준비한 나무에 하만이 달려서 완벽한 역전을 이룰수 있도록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섭리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국의 2인자 하만의 결말은 너무 허무하게 한 줄로 끝납니다.
[10]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한 나무에 하만을 다니 왕의 노가 그치니라
이 죽음이 허무하게 한 줄로 뎅그러니 기록된 것입니다. 아니 누구 하나가 절 안해서 화 났다고 은 360톤을 거리낌 없이 태울 정도면 전재산은 최소 10배 이상 창고에 쌓여있지 않았을까요? 다 빼앗겼죠. 가족, 친척, 민족까지 다 죽게 됐죠, 또 그렇게 쌓았던 권력과 명성과 영광...아침의 안개처럼 순식간에 다 사라져버렸습니다.
마지막 심판의 때가 되면 이 땅에서 아무리 떵떵거리며 살던 사람이라도 이렇게 죗값을 반드시 치루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 대역죄는요, 하만 한 명의 죽음으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민족이 진멸된다는 하나님의 오래된 약속이 이 때 실현된 것입니다.
저희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진멸하는 모습을 보며 너무 잔인하다, 구약성경의 하나님은 사랑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는데요, 그건 하나님에 대한 저희의 반역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요 사실 하만의 민족 뿐 아니라 인류 전체가 그냥 싹 다 멸망을 당해도 그 값은 치룰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만이 나무에 매달려 그 죗값을 치루는 모습은요, 그랬어야 할 저희 모습과, 그 죗값을 대신 치루어 주신 예수님의 죽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희는 에스더 말씀을 통해 에스더처럼 순종해야지, 모르드개처럼 기도해야지라고 다짐하거나, 하만처럼 살지 말아야지라고 적용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하만과 같은 마귀나 나쁜 사람들이나, 나를 괴롭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통쾌하게 역전 당해서 심판 받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저희가 먼저 적용해야 할 포인트는요, 내가 바로 그 십자가에 매달려야 했던 하만이며, 바로 그 하만과 같은 나의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혀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 옛사람은 아하수에로 왕처럼 왕노릇하고자 하며, 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마귀와 죄의 종노릇 하며, 하만과 같이 끝까지 스스로 회개하지 못하는 교만한 자라서, 그 어마어마한 대역죄에 대한 죗값을 치뤄야 한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값을 저희 스스로는 치룰 수가 없다는거에요.
그 절망스러운 현실 가운데 예수님이 그 값을 대신 치뤄주셨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어떻게 대신 치뤄주셨나요? 저희가 달려야 할 이 하만의 나무에 예수님이 대신 달리신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메시야가 저희의 죄값을 대속해 주셨다고 합니다. 대속이 값을 대신 치루어주다는 의미이거든요.
그래서 이 대속은 인간이 할 수 없고,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메시아만의 고유한 사역입니다. 그런데 여기 계신 분들 중에 이 예수님의 대속을 모르시는 분은 없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 대속해 주셨다는 사실이 오늘 내 삶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한 오해가 한국교회에 많습니다.
사실 그 죗값을 대신 치루어 주셨다는 것은요, 저희는 그 값을 치룰 수 없어서 스스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신 치뤄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은요, 2000년 전에 딱 끝난게 아니라 시작이 되어서 예수님 다시 오실 때 완성됩니다.
그래서 저희는 지금도 매일같이 그 대속의 은혜에 힘입어서 구원의 완성을 소망하고, 죽기까지 성화되며 사는 것입니다. 그 대속의 은혜가 저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의 원동력인거에요. 살면서 어떤 다른 새로운 은혜가 계속 필요한게 아닙니다. 저희가 이미 받은 은혜가 족하다는 것이 그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죗값을 대속하셨다는 이 신학적인 말을 쉽게 풀면요, 이 구원의 시작부터 완성까지 저희가 할 수 있는게 아무 것도 없어서, 그저 매일매일 대속의 은혜에 의지해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분은, 그럼 우린 아무 것도 안해도 되겠네? 하면서 그런 신학은 결국 신앙생활을 해이하게 만든다고 오해합니다. 그 대속의 은혜의 능력에 힘입어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걸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은요, 그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저희는 교회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차에서부터 부부관계에 갈등이 생깁니다. '무슨 쓸데없는 얘기를 하느라 목장 모임이 이렇게 늦게 끝났어!, 또는 아니 거기서 그렇게 말을 하면 내가 뭐가 돼?' 그리고 월요일이 되서 직장에 출근하면 누가 나를 괴롭힙니다. 자녀가 나의 인생에 큰 짐이 됩니다. 서로 의지해야 할 가족들이 나에게 큰 상처를 줍니다.
몸이 예전 같지 않고, 건강에 문제가 생깁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인생의 긴 터널을 혼자 걷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인류에게 들어온 죄로 인해 공허하고 혼돈하고 고통스럽고 꼬여버린 것 같은 인생 가운데 그 대속의 은혜를 힘입어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힘겹게 사는 사람을 보고 왜 아무 노력을 하지 않냐고 누가 말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두요, 한국 교회에는 이 대속의 은혜를 대하는 태도가 세 가지로 나뉩니다. 첫 번째는 대속을 통해 구원 받았으니까 이제 하나님이 더 큰 은혜를 부어주실 것이고, 이제 복주머니가 터지게 되서 병도 낫고, 부자 되고, 하던 일들도 잘 풀려나갈 것이라는 기복신앙입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이단에 들어가진 않습니다. 여기서 십자가 대속으로 이미 용서 받았으니까 이젠 회개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단입니다. 그게 구원파죠. 신기하게도요, 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대속의 은혜라는 객관적인 사실과 성경을 앞에 두고도 이렇게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신학을 세우는거에요.
그래서 그 기복신앙을 말하는 사람들은요, 구원 받았다는 성도가 병도 안낫고, 부자도 안되고, 일도 잘 안풀려서 힘들다고 하면요, 제대로 믿지 않거나, 헌금을 많이 내지 않거나, 교회 봉사가 적거나, 기도와 예배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지 않거나, 하늘의 언어인 방언을 못받아서 그렇다고 하면서 이 구원의 과정을 사람의 노력 여부로 돌립니다.
이건 무속신앙과 같이 가장 저급한 신앙인데요, 현대 사람들도 쉽게 빠져듭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원하는 욕망과 딱 드러맞거든요. 자, 그리고 이 대속의 은혜에 대한 두 번째 태도는 그 은혜를 받은 자로서 마땅히 말씀에 순종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얼핏 들으면 되게 맞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 '마땅히'라는 강제성으로 인해 교묘하게 인간의 노력과 행위가 섞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이 있어서 마땅히 기도도 잘하고, 열심히 봉사하고, 헌금도 잘 하고, 직분도 높은데, 자기 의가 가득해서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바리새인 같은 사람들이 생깁니다. 그래서 이런 신앙은 율법주의와 연결됩니다.
그런데 그 바리새인 같은 사람이 저였어요. 저 진짜 하나님의 강권적인 섭리와 은혜로 하나님 믿게 됐거든요? 그런데 이 대속의 은혜에 대해 성경적인 이해가 없다 보니까 오히려 신앙의 년수가 쌓여갈수록 나의 의는 쌓이고, 그걸 드러내서 자랑하려고 하고, 이웃은 정죄하는 바리새인이 되어가고 있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처음 믿었을 때랑 다르게, 이상해져 가니까, 그 때부터 제가 득달같이 성경을 연구 했던거에요. 내가 처음 만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그 이후의 구원이 완성되는 과정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된다는 것을 제 스스로가 먼저 납득을 해야 자신 있게 설교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런 사람이 김일승 목사님이나 저만 있는게 아닙니다. 그래서 그렇게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대하는 세 번째 부류가요, 저희는 전적으로 타락해서 구원에 있어서 무능력하며, 구원의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씀으로나 기도로나 삶에서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희는 교만해질 틈이 없습니다. 내가 구원에 있어서 무능력하다고 자백하는 자는 그 겸손의 자리에서 벗어나는걸 스스로도 용납할 수 없게 되구요, 매일의 삶에서 드러나는 나의 죄악을 보며 더 확신하게 되요.
그러면요, 은혜 받았으면 감사하면서 살아라, 말씀 좀 제대로 들어라, 매일 묵상 해라, 용서하고 사랑좀 해라, 헌금 좀 똑바로 해라라고 윽박지르지 않아두요,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도록 무릎꿇게 만드는 것이 이 대속의 은혜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이 메시야의 십자가 대속 사역이 구원의 핵심이고 나의 모든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지금 7장에서 하만이 나무에 달려 죽었는데, 어떻게 거기서 하만이 아니라 성도가 그 나무에 달려야 된다고 하고, 어떻게 예수님이 그 나무에 매달려야 된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만이 나무에 달리는건 명백히 마귀가 심판 받는 내용이라고 하면서요.
물론 하만이 나무에 달려 죽은 것은 마귀와 죄와 사망 권세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이 에스더는 장별로 샌드위치 구조를 가지고 있거든요. 1장과 10장, 2장과 9장, 그렇게요. 얼마전에 봤던 5장과 6장은 하나님의 섭리를 기다리는 에스더와, 하나님의 섭리로 짝지어져 있습니다.
이 7장은요 4장과 짝입니다. 4장 초반부에는 모르드개가 재를 뒤집어 쓰고 성 앞에 나아가 하만에게 팔려 죽게된 백성들을 대신해서 중보기도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의 초반부였던 1대지가 메시아의 중보사역으로 그 마귀에게 팔렸던 백성들의 주인이 바뀌는 내용이었죠.
그리고 4장에 하닥이라는 신하가 서로 만날 수 없는 모르드개와 에스더 사이를 다니며 말을 대신 전해주는데요, 여기서도 하르보나라는 신하가 하만이 세운 나무에 대해 대신 전해줍니다.
그리고 4장 후반부에 죽으면 죽으리이다하면서 백성들을 대신해 생명을 바치겠다는 메시야가 준비됩니다. 바로 그 내용이 하만이 나무에 매달리는 것과 연결이 됩니다. 하만과 같이 나무에 매달렸어야 할 저희를 대신해 메시야가 그 값을 생명으로 대신 치룬다는 성경 전체에서 말하는 복음과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께서 성경에 단단히 기반한 건강한 복음으로 이 죄값에서 진짜 자유케되는 복을 누리시는게 소원입니다. 그게 제가 목사가 된 소명이에요. 그런데요, 예수님은 그 기도제목으로 지금 하늘 우편에서 저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중보하고 계세요.
오늘 말씀을 통해 구원에 있어서 나의 전적인 무능력함을 인정하시고, 이 복음의 핵심인 메시야의 중보사역과, 대속사역의 은혜의 능력으로 하나님만을 주인 삼는 믿음이 성장해 나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