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강해 02 1.28-31 평화의 왕, 솔로몬
2025년 12월 7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28] 다윗 왕이 명령하여 이르되 밧세바를 내 앞으로 부르라 하매 그가 왕의 앞으로 들어가 그 앞에 서는지라
[29] 왕이 이르되 내 생명을 모든 환난에서 구하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라
[30] 내가 이전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가리켜 네게 맹세하여 이르기를 네 아들 솔로몬이 반드시 나를 이어 왕이 되고 나를 대신하여 내 왕위에 앉으리라 하였으니 내가 오늘 그대로 행하리라
[31] 밧세바가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내 주 다윗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니라
성경에는 평화, 화평, 평안 등의 단어들이 많이 나옵니다. 구약에 200번 넘게 나오고 신약 성경에 120번 정도가 나올 정도로 많이 쓰였다는 것은 단어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평화는 어떤 이미지인가요?
휴양지 썬베드에 근심 없이 누워있거나,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 웃고 대화하거나, 세상에 전쟁이 사라지고 아무런 갈등이 없는 상황을 떠올리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도 평화입니다. 우리는 평화가 가져온 결과인 안식의 상태를 흔히 평화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성경은 ‘평화’를 ‘안식’과 병행해서 사용합니다. 그런데 안식은 평화의 결과로 누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평화는 히브리어로 ‘샬롬’입니다. 이 단어는 ‘평화’ 외에 ‘온전하다’는 의미도 가집니다. 온전함이란 어떤 존재가 만들어진 목적과 기능에 잘 부합하는 역할을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 천장에 에어컨 겸 히터가 달려 있습니다. 에어컨의 역할은 여름에는 시원한 냉기를, 겨울에는 따뜻한 바람을 내보내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하면 온전한 것입니다.
성경이 ‘온전하다’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중요한 두 가지 영역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 인간관계, 또 하나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입니다. 성경적 샬롬은 관계의 온전함을 뜻합니다. 하나님과 인간관계의 원래 만들어진 온전한 모습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만드셨기에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모든 필요한 좋은 것을 공급하십니다. 그 좋은 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나요? 복입니다.
복의 다른 말은 생명인데, 생명보다 ‘복’이 사용된 빈도가 훨씬 높습니다. 생명은 눈에 안 보이니까 눈에 보이는 축복 곧 복이라는 단어를 통해 사람들이 이것이 좋은 것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 인간은 어떻게 해야 되나요?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순리적인 온전함이고, 그 상태가 평화입니다. 그러나 이 평화가 깨어졌고 그 상태가 바로 죄입니다. 죄로 인해서 복 대신에 저주가 들어오게 되었고, 인간과 하나님의 사이는 이제 원수된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원수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더 이상 복을 주실 수 없습니다. 저주의 가장 무서운 점은 인간이 원래 만들어진 모습대로 생명을 받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안식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안식이 없으니까 다른 사람도 사랑하고 섬길 수 없게 됩니다. 이 생명 없는 상태를 성경은 공허라고 부릅니다. 죄와 공허는 다른 말로 생명이 고갈된 상태, 텅 빈 영혼입니다.
영혼이 텅 비어버려서 인간은 욕심을 냅니다. 욕심이 생기니 인간 사이에 갈등, 분쟁, 미움이 일어나고 평화가 깨어집니다. 평화가 깨지니 안식이 없습니다. 지금 인생이 너무 힘들고 불안하고 짜증나고 고통스러운 이유가 복 대신의 저주 안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하게도 이런 우리를 그냥 두시지 않고 회복시키시겠다고 성경은 끊임없이 약속하십니다. 솔로몬 왕의 이야기는 이스라엘이 과거 한 때 잘 살았다는 역사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깨어진 평화를 회복시키셔서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는가를 이 사람을 통해 그림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 솔로몬이 어떻게 평화를 회복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어떻게 솔로몬은 평화를 회복하나요?
1. 성전을 지어 회복합니다.
첫 번째로 솔로몬은 성전을 지어서 이 평화를 회복합니다. 본문 30절 말씀입니다.
[30] 내가 이전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가리켜 네게 맹세하여 이르기를 네 아들 솔로몬이 반드시 나를 이어 왕이 되고 나를 대신하여 내 왕위에 앉으리라 하였으니 내가 오늘 그대로 행하리라
솔로몬은 권력 다툼에서 승기를 잡아 왕이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미리 정하셨습니다. 지금 다른 사람이 왕이 되려고 움직이자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켰고 그래서 다윗이 솔로몬이 왕임을 선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이유에서 솔로몬을 후계자로 정하셨나요? 솔로몬이 탁월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이라는 이름부터도 하나님이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역대상 22장 9절 말씀을 보시면
대상 22:9 보라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그는 온순한 사람이라 내가 그로 주변 모든 대적에게서 평온을 얻게 하리라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그의 생전에 평안과 안일함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
개역 개정판에는 ‘온순한 사람’이라고 번역했는데 이전 개역판에는 ‘평화의 사람’이었습니다. ‘온순’에 모든 뜻이 들어있기는 합니다. 히브리어 ‘매누아’는 안식 혹은 평화라고도 번역되어서 처음에는 ‘평화의 사람’이라고 한 것인데 사람에게 붙이는 형용사로 ‘온순’이 낫다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원 의미에 가까운 것은 평화나 안식입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에 단어가 반복됩니다. ‘평화’의 사람이 ‘평온’을 얻게 하고 하나님이 그에게 ‘평안’과 ‘안일’을 주십니다.
솔로몬의 이름 역시 샬롬에서 나왔습니다. 보시면 시옷, 리을, 리을, 미음이 같습니다. 히브리어는 원래 모음을 사용하지 않기에 히브리어로는 샬롬과 솔로몬이 같은 단어입니다. 아시다시피 샬롬은 평화, 온전함, 안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 같은 의미입니다. 평화로우면 생명이 주어지니까 안식이 있고, 그것이 바로 평화의 상태입니다. 즉 하나님은 솔로몬이라는 이름 안에 그 사람을 통해 어떻게 안식과 평화를 주실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솔로몬이 어떻게 안식을 가져왔나요? 그가 한 제일 중요한 일은 성전을 지은 것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것과 평온한 안식은 무슨 관계가 있나? 위의 약속 뒤에 하나님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역대상 22장 10절입니다.
대상 22:10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지라 그는 내 아들이 되고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어 그 나라 왕위를 이스라엘 위에 굳게 세워 영원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니
안식 혹은 평화가 꼭 성전을 통해 주어진다고 합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하심을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건물은 의미가 없습니다. 죄가 해결되지 않은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이 인간과 직접 함께하실 수 없어서 특정한 장소를 정하시고 그것을 거룩하게 하신 뒤 그들과 언젠가 영원히 함께하겠다는 그림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만약 아버지로부터 용돈을 받아 살아가는 사람이 아버지하고 관계가 깨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연락도 안 하고 보지도 않는 관계에서 어떻게 용돈을 받나요? 이것처럼 하나님과 인간관계가 깨졌을 때 인간은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없었고 인간은 안식할 수 없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언젠가 내가 너희와 영원히 함께 살 것을 지금 그림으로 보여주겠다 약속하시면서 솔로몬을 통해 성전을 짓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인간이 복을 받아 생명이 회복되자 어떻게 되었나요? 평화로 인해 안식을 누리자 충만해져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구약의 성전은 그림입니다. 금이 번쩍번쩍하는 성전이 사라졌다니 아쉬운 사람도 있겠지만 하나님은 일부러 다 훼파되게 하셨습니다.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쓸어버리겠다고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진짜에 집중하게 하기 위해서입이다. 요한복음 2장 19절과 21절입니다.
요 2:19, 21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님이 성전이 되셨기에 눈에 보이는 성전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 사이에 오셨고 우리가 성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다른 이름이 바로 임마누엘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을 보시면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예수님의 이름이 성전이고 임마누엘로 우리와 함께하시자 평화가 임했습니다. 관계가 회복됩니다. 복이 임합니다. 복을 많이 받은 자들은 안식을 누리니까 이제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복을 받지 못한 자들은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해서 결혼한다고 하지만 사실 좋아해서 결혼하는 것입니다. 결혼할 때는 다 서로 좋아합니다. 키가 커서, 목소리가 좋아서, 통통해서, 날씬해서. 그러나 좋아한다는 것은 욕망에 기반한 반응입니다. 그것이 나를 채워줄 것 같아서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은 한 가지로 채워질 수 없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공허하기에 하나가 채워져도 나머지가 채워지지 않습니다. 얌전해서 좋았는데 알고 보니 너무 게으르고, 활달해서 좋았는데 알고 보니 집에 붙어 있지를 않고 내 생각과 달라서 힘이 듭니다. 노력으로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영혼이 복으로 차 있고 생명으로 차 있고 성령으로 차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 좋아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평화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과 16절을 보시면
엡 2:14, 16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예수님이 화평 즉, 하나님과 인간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막혀서 복이나 사랑이 오갈 수 없을 때 예수님이 십자가로 해결하셨고, 이렇게 복이 임하게 된 상태가 안식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30절 말씀을 보시면
마 11:28-30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저는 2,30대에 인생이 늘 힘들었고 어느 날은 정신적 눌림이 너무 심해서 몸에 몇 십 킬로짜리 무게 추를 달아놓은 것처럼 걷는다는 행위 자체가 버거울 때도 있었습니다. 고통이 끊임없고 불안하고 두렵고 낙망하고 복이 없는 상태를 처절하게 느꼈던 그 기간을 통해 하나님은 저에게 참된 복과 생명을 열망하는 마음을 만들어 내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참된 복을 맛보지 못하니까 대체물을 찾습니다. 물론 대체물들이 일시적 만족을 주기도 합니다. 맛없는 것 먹는 것보다는 맛있는 것을 먹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그러나 그때 뿐입니다. 물론 비쌀수록 시간이 길어지기는 하지만 그것 역시 일시적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을 얻는 길을 배우라고 초청하십니다. 예수님이 단번에 효과 있는 선물을 주셨으면 좋겠는데 이것은 ‘과정’이 필요한 선물입니다. 특별히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매야 합니다.
멍에는 소 두 마리를 하나로 묶는 도구입니다. 잘 훈련되고 능숙한 안소 한 마리와 제 멋대로 길을 가려고 하는 훈련 안 된 어린 마라소 한 마리를 묶어서 밭을 갈게 하면 한 방향으로 밭을 가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이 소 두 마리를 묶어서 겨리라고 합니다.
시키는 대로 밭을 가는 게 어려워 보이지만 예수님은 이것이 쉽고 가볍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온유와 겸손을 배워야 하는데 지금 우리는 온유하지 않아 강퍅하고 겸손하지 않아 교만합니다.
교만하여서 하나님 대신 돈, 지위, 학력 등 눈에 보이는 힘을 의존하고 그 교만 때문에 강퍅하여져서 남에게 강퍅하게 대합니다. 돈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지위가 높으면 높은 대로 낮으면 낮은 대로 교만하고 강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초대하십니다. 이것은 전 존재를 부인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자기가 계획한대로 인생이 잘 풀린 사람이 ‘하나님, 저는 무력하니 주님만 의지합니다’라고 고백하기란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님과 멍에를 메고 가다 보면 고통도 만나지만 예수님의 능력과 힘에 의해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사는 자가 되는 안식을 누립니다.
지금 만약 인생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처럼 느껴진다면 돈이나 능력이 없어서도 아니고 다른 사람 때문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교만하고 강퍅해서입니다. 다른 것을 의존하고 있어서 하나님 뜻을 순종하지 않으니까 죄가 만들어내는 생명 없는 상태에서 허우적대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예수님을 통해 온유와 겸손을 배워 참 안식을 맛보기 원합니다’ 기도하시고 안식을 맛보셔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 나라에 가면 영원히 안식을 누릴 것이지만 이 땅에서 먼저 맛보면 그것을 열망하는 마음으로 이 땅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솔로몬은 평화를 회복하나요?
2. 강력한 권세로 회복합니다.
두 번째로 어떻게 솔로몬은 평화를 회복하나요? 강력한 권세로 회복합니다. 열왕기상은 솔로몬이 이스라엘 역사에 유례없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자세하게 기록합니다. 4장 21절 보시면
4:21 솔로몬이 그 강에서부터 블레셋 사람의 땅에 이르기까지와 애굽 지경에 미치기까지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므로 솔로몬이 사는 동안에 그 나라들이 조공을 바쳐 섬겼더라
솔로몬의 군대의 영향력이 너무 강력해져서 주변국에서 조공을 바칩니다. 그 중 제일 강력한 조공은 공주들이었습니다. 반역하면 딸이 죽으니까 주변국들은 반역할 위험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솔로몬이 강했다는 것을 4장 24절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4:24 솔로몬이 그 강 건너편을 딥사에서부터 가사까지 모두, 그 강 건너편의 왕을 모두 다스리므로 그가 사방에 둘린 민족과 평화를 누렸으니
이래서 솔로몬이 평화의 왕인 것입니다. 평화는 그냥 주어지지 않습니다. 힘이 있어야 평화 가 있습니다. 국방비 몇 십 조가 아깝다고 우리나라가 군대와 무기를 없애면 어떻게 될까요? 평화가 사라집니다. 이 나라를 노리는 무리가 나라를 차지해 국민은 노예가 될 것입니다. 평화는 힘에서 나옵니다. 평화 속에 이스라엘 백성은 또 무엇을 누렸나요? 4장 25절입니다.
4:25 솔로몬이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더라
안식입니다. 단에서부터 브엘세바는 북쪽부터 남쪽 끝까지인데 온 나라가 평화로웠습니다. 이것이 무슨 모형이라고 했나요?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는 지의 모형입니다. 인생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우리의 교만과 강퍅이라고 말씀드렸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를 교만하고 강퍅하게 만드는 네 가지 강력한 영향력이 존재합니다. 첫 번째 죄는 우리 안에 공허를 만들어 우리가 생각한대로 살 수 없게 만듭니다. 이것은 내 속에서 나를 조종하는 힘이기 때문에 절대 싸워 이길 수가 없습니다. 두 번째 악한 영을 총칭한 마귀라는 대상은 쉬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합니다. 세 번째 인간 자체의 연약함은 질병이 대표적이지만 사실 우리는 지혜도 사랑도 능력도 다 부족합니다. 마지막 환경은 관계를 포함한 내 모든 주변을 통칭합니다.
이 모든 것을 싸워 이기려면 우리가 가진 정도의 능력이 아니라 강력한 권세를 가진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이 이 모든 것을 어떻게 다스리시는지를 공생애를 통해 보여줍니다. 마가복음 2장 10절입니다.
막 2: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
예수님은 쉽게 병을 고치실 수 있었지만 굳이 중풍병자에게 죄를 사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을 언급함으로 그곳에 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자극했고 결국 십자가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사함의 권세를 보이시기 위해 일부러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마귀를 다스리는 권세도 보여주십니다. 마가복음 1장 27절입니다.
막 1:27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귀신들이 말을 듣는 것을 통해 예수님의 말에 마귀를 제어하는 권세가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또 연약함과 관련해서는 마태복음 8장 14절부터 15절을 보시면,
마 8:14-15 [14]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15]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인간의 연약함을 온전케 하시는 능력이 예수님에게 있음을 질병 치유를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이심은 마가복음 4장 9절에 써있습니다.
막 4: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말로 죄를 사하시고 말로 마귀의 권세를 무찌르시고 말로 인간의 연약함을 치료하시고 말로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십니다. 예수님이 어느 누구보다 강력한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이심을 생생하게 보여주셨습니다. ‘너는 모든 싸움에서 실패하지만 예수는 너희를 구원하여 평화를 주어 안식하게 하는 하나님이다.’ 사실 우리는 이것을 배우기 위해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영역에서 모두 싸워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합니다. 실패로 끝나면 안 됩니다. 예수 붙드셔야 합니다. 싸움의 끝에 예수 믿고, 나는 실패한 자리에 예수가 어떤 평화와 안식을 주셨는지를 경험함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능력과 승리와 영광을 찬양하는 존재로 변화해 가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 예수님만이 가져오시는 놀라운 평화와 안식을 맛보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