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강해 18 17.8-24 믿음이 성장하는 과정
2026년 5월 31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2]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13]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14]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5]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16]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이스라엘에 내린 가뭄의 시기에 엘리야 선지자는 그릿 시내물을 마시고 하나님이 보내신 까마귀가 가져온 고기를 먹으며 지냈습니다. 그런데 그 땅 전체에 기근이 임하며 결국 시내도 말라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음식 없이는 100일까지도 버틸 수 있지만 물 없이는 3일을 버티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물이 떨어지자 하나님이 본문 8,9절에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십니다.
[8]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9]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하나님이 이제 과부를 통해 음식을 줄 것이니 시냇가에 혼자 머물지 말고 어느 지역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는데 사실 이 명령 또한 아주 이상하고도 어려운 명령이었습니다. 본문의 시돈은 지금 엘리야를 죽이려고 하는 아합의 아내 이세벨의 고향입니다.
그릿이라는 광야 지대는 멀리 떨어진 곳이어서 들키지 않을 장소이지만 시돈의 사르밧은 이스라엘 북쪽으로 이세벨의 고향이며 우상숭배가 가장 강력한 이방 땅입니다. 이스라엘 땅과 유다 땅에 얼마나 많은 하나님 백성들이 있는데 하나님은 왜 하필 이방 땅의 이방 여인을 통해 엘리야에게 공급하셨나요? 여기에는 사실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원수의 목전에서 엘리야를 보호하시는 분임을 보여주시고자 한 것입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듯이, 아합과 이세벨은 엘리야를 죽이고자 사방을 찾고 있습니다. 아마 이세벨의 고향에 숨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겠지요. 하나님의 놀라운 보호하심을 보여줍니다.
두 번째 목적은 이방 여인의 구원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예수를 믿기만 하면 모두가 구원받는다는 보편적 구원관이 아닌, 유대인만 구원 받고 유대인만 선택을 받았다고 믿었습니다. 지금 상황이 어떤가요? 선택받았다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방 사람들이 우상 숭배하는 것을 나무라시지 않으십니다. 내 욕망을 이루어줄 강력한 것을 끊임없이 열망하는 그 우상숭배에서 인간은 아무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나님 백성을 부르셨을 때는 그 우상숭배로부터 벗어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인생의 주인임을 고백하며 하나님을 따르라고 명하셨는데 하나님 백성들이 전부 눈에 보이는 우상을 선택하고 하나님을 버린 상황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방 땅의 이방 여인을 구원하심으로써 구원은 하나님이 온 세상을 향해 가지신 계획이심을 가르치시고자 한 것입니다.
자신들만 구원을 받을 것이기에 이방인은 개나 돼지와 같다고 여기던 정통 유대인들은 이 이야기를 불편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방 여인의 구원을 통해 만민을 향한 구원 계획을 보여주셨고 이 이방 여인은 엘리야를 만나 믿음을 갖게 됩니다. 본문을 통해 믿음이 어떻게 성장하는가 함께 보고자 합니다.
믿음은 어떻게 성장하나요?
1.하나님이 공급해 주심으로 시작됩니다. vv.10-16
첫 번째로 믿음은 하나님이 공급해 주심으로 시작됩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바로 사르밧으로 갑니다. 열왕기상 17장 10절 상반절을 보시면
[10a] 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 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
하나님이 신비한 방법으로 알려주시니 않아도 아마 여인의 복장만으로도 이 여인이 과부이며 비참한 상황에 처했음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고대에는 과부의 의복이 따로 있었고, 과부는 아무런 의존의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가장 가난하고 비천한 자였습니다. 허름한 복장의 여인에게 엘리야가 말을 겁니다. 열왕기상 17장 10절 하반절을 보시면
[10b] ... 이에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
엘리야는 이 여인이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인지 테스트하려고 가장 작은 것을 요구합니다. 물 한 모금 정도는 줄 수 있었는지 여인이 응답을 하고 움직입니다. 그런데 11절에
[11] 그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먹을 것이 하나도 없어서 밀가루 한 줌을 아들과 먹고 죽으려는 여인에게 물 한 모금만 달랬다가 떡도 달라고 합니다. 이것은 문전 걸치기라는 심리학적 기법으로 마케팅에서도 쓰입니다. 영어로는 foot in the door라고 해서 발을 문에 걸쳐서 집 안으로 들어가는 수법입니다. 처음에는 진짜 원하는 것을 얘기하지 않고, 설문조사만 해 주세요, OX 체크만 해주세요, 라고 접근해서 사람들이 호의를 베풀면 그때 본론을 꺼내는 것은 이단도 많이 쓰는 방법입니다.
엘리야도 만약 처음부터 떡을 달라고 했으면 이상한 사람 취급하며 상종하지 않았을 텐데 쉬운 부탁을 먼저 하고 그 김에 떡도 달라고 했습니다. 여인은 12절에 어떻게 반응하나요?
[12]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엘리야가 유대인이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기에 자신의 절망적인 상황을 토로합니다. 처음 만난 사람한테 내가 가난하고 굶주리고 힘들다고 말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처음부터 떡을 달라고 대립함으로 대화를 단절한 것이 아니라 물을 줄 마음을 열고 그 다음 조금 더 요구함으로 저도 힘듭니다 라는 절망적 고백을 이끌어낸 것입니다.
밀가루 한 움큼을 요리하려면 나뭇가지도 많이가 아닌 두어 개 정도 이상 필요도 없는 비참하고 수치스러운 절망적 상황, 하나님을 만나는 시작점은 바로 여기입니다. 하나님은 앞이 깜깜하고 보이지 않는 상황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 때 중요한 게 무엇인가요?
그 절박함을 인식할 뿐 아니라 고백해야 됩니다. 우리도 때때로 답이 없고 힘들고 사라지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의 수준이 아닌 영혼 깊은 곳의 자기 모습을 토해내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도록 이끌어내십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 앞에 겸손한 태도를 가지게 됩니다. 가리고 싶은 수치까지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이런 태도를 성경은 무엇이라고 부르나요? ‘거지와 같은 마음’의 ‘거지’는 성경에서 ‘가난하다, 겸손하다’와 같은 단어입니다. 누가복음에서 거지 나사로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사로가 가리는 것이 있나요? 아닙니다. 부자가 땅에 흘린 음식을 먹지 않으면 살지 못하는 비참한 상황이 바로 거지인데 성경은 그 단어를 또 ‘겸손하다’고 사용합니다.
하나님 앞에 이렇게 가난하고 겸손하게 자기 상황을 고백할 때 무엇이 주어지나요? 공급에 대한 약속이 주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 힘들어요 도와주세요’ 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시길 기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육적 필요를 당장 채워주는 것이 목적 아니시고, 이 과정을 통해 믿음이 시작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일단 약속을 주십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거십니다. 이 여인은 역시 하나님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들어는 봤습니다. ‘남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라는 신을 섬기더라.’ 그런 이 여인이 말씀에 그의 인생의 기반을 둘 수 있도록 하나님이 약속을 주셨습니다. 또한 그렇게 작게 시작된 믿음으로 인한 순종까지 요구하십니다.
믿음은 영적인 것이지만 우리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에 하나님은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작은 믿음으로 순종하면 하나님의 약속과 응답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진짜임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이런 과정들을 경험하면 작은 믿음은 서서히 성장합니다.
기도가 무엇인가요? 기도는 내가 절박함을 인식해서 하나님께 고백하는 과정입니다. ‘하나님 저 혼자 할 수 없어요. 하나님 도와주세요.’ 이것이 기도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고, 우리가 말씀에 순종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경험할 때 우리의 믿음이 조금씩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13, 14절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13]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먹고 죽으려고 했던 한 움큼을 자기한테 준 뒤 그 남은 것으로 모자가 먹으라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지만, 그러나 이 요구 뒤에 하나님의 약속을 줍니다. 14절입니다.
[14]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여인은 너무나 당연하게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고 있습니다. 땅에 비를 내리는 신들이 비를 안 내려서 굶어 죽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하나님은 ‘내가 먹여주겠다’며 세상의 신은 바알이 아니라 나 하나님임을 알리시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 여인이 자신의 절망적 상황을 고백했고, 그래서 약속을 받았는데 이제 믿음의 반응을 보입니다. 이 믿음의 가능성 때문에 하나님이 택하신 것입니다. 어차피 너무나 절망적이어서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여인을 택하여 엘리야를 보내신 것입니다. 15절입니다.
[15]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어떤 사람만 순종할 수 있나요? 아무런 다른 수단이 없이 과부와 같은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 믿음으로 반응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 말대로 해도 안 해도 자기는 죽을 것 같고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순종했더니 기적이 벌어집니다. 16절입니다.
[16]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어려서 본문을 읽을 때는 이렇게 밀가루와 기름이 계속 나오면 온 동네에서 기름병을 얻어다 부어 팔면 부자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잉여를 주시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스물셋에 아버지 회사가 망하고 30년을 가난과 고통의 과정을 지나는 동안 하나님의 놀라운 공급을 경험했지만 딱 죽지 않고 살만큼만, 등록금 낼만큼, 필요한 만큼만 주시더라구요.
물질을 많이 받아서 부자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믿음의 시작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가장 작은 것, 눈에 보이는 것에서 믿음을 시작하십니다. 모태 신앙은 오히려 경험 못할 수도 있지만 처음 교회 나오고 믿음이 시작될 때 기도가 이루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학부에서 새 신자 학생이 교회를 처음 왔는데 지갑을 잃어버렸습니다. 한 달 용돈인데 큰 일 났다고 울길래 제가 함께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며칠 후 연락이 왔는데 지갑을 찾았는데 돈이 그대로 들어있고 그뿐만 아니라 다른 일들도 기도만 하면 다 응답되었다면서 하나님이 자기만 특별히 사랑하시는 것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런 일이 없으면 믿음을 시작할 수가 없으니까 하나님이 처음에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평생 갈까요? 아닙니다. 성장하면 이제 믿음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한국 교회적으로도 이 과정을 겪었습니다. 70년대 초에 교인이 300만 명이었다가 10년 만에 700만, 또 10년 만에 천만 명을 육박하게 되었습니다. 세계 기독교 역사에 전례 없는 성장이었지만 그 후로 다시 줄기 시작해서 요즘은 주일 예배 인원이 500만 미만으로 유추됩니다.
이 부흥의 이면에 무엇이 있었나요? 사람들이 진짜 예수 믿고자 모인 것이 아니라 교회 가면 복 받고 죽어도 천국 간다고 해서 나온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런 흐름의 중심에 여의도의 한 교회가 설파한 삼중 축복과 오중 복음이 있었습니다.
제가 80년대 중고등학교 다닐 때도 도시락 못 싸와서 점심시간에 물로 배 채우는 애들이 있었고, 한겨울에 봄 잠바 입고 다니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음식과 옷이 남아 도는 세대는 상상 못할 절대적 가난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영혼이 잘 되는 것 만으로는 사람들을 모을 수 없자 환경의 축복으로 부자 되고 자녀도 잘 되고 건강의 축복도 준다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요한3서 1장 2절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요삼 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 세 가지 축복만으로 모자라서 또 오중 복음을 만들어 냈습니다. 예수를 믿어서 새로 태어난 복음, 성령 충만의 복음, 신유의 복음, 물질 축복의 복음, 재림의 복음. 예수 믿고 영혼만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이 물질적 복음에 사람들이 열광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성기에는 이 교회에 100만 명까지 모였다고 하고 지금은 많이 줄어서 전성기의 3분의 1 정도 모인다고 합니다.
또 조용기 목사님의 동생 조용목 목사님도 순복음에 있다가 형처럼 열심히 있어서 은혜와 진리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안양에 본 성전, 전국 60개의 지교회를 다 자기가 설교하고 통치합니다. 여기도 2~30만 명까지 모였다가 지금은 10만 명 정도 모이는데 이 교회가 한국의 교회 중 성도수 2위입니다.
아직도 한국에서 1, 2위 교회가 삼중축복 오중복음 가르치는 순복음 교회와 은혜와 진리 교회입니다. 영혼도 구원받지만 우리 육신이 만족하고 육신이 축복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얘기인데 왜 더 늘지 않고 수가 줄었을까요? 이제 한국이 잘 살게 되었고 교회 다니지 않아도 부자 될 다른 방법들이 많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 시작했으나 성장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이 여인이 떡을 공급받는데에서 끝났다면 이 여인은 구원받는 믿음으로까지 성장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부자 되게 하는 세상의 신이 아니십니다. 영혼의 근원이 망가진 상태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밥을 못 먹어서 목마른 것이 아니라 영혼이 목마른 것입니다. 육적인 것으로 믿음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 맺는 기초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성장하기 위해 두 번째 단계가 꼭 필요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 단계를 경험하지 않다면 여러분은 교회를 오래 다녔어도 이방 여인과 비슷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항아리에 밀가루가 계속 채워지고 기름병에 기름이 채워지는 놀라운 경험을 매일 하는데도 이 여인은 구원받을 만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반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두 번째 과정을 시작하십니다.
믿음은 어떻게 성장하나요?
2. 하나님이 생명을 주심으로 성장합니다. vv.17-24
두 번째로 믿음은 어떻게 성장하나요? 하나님이 생명을 주심으로 성장합니다.
[17] 이 일 후에 그 집 주인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물론 옛날에는 먹을 것도 부족하고 의료 기술도 없어서 죽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이 아이도 얼마나 못 먹었을지, 아마 영양실조와 겹쳐서 감기만 들어도 쉽게 약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최악의 상황조차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목적하셨습니다. 무엇을 위해서인가요?
이 여인에게 물질만 공급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더 깊은 차원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참된 구원받는 믿음으로 성장하여 생명을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여인이 18절에 어떻게 반응합니까?
[18]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아들이 죽었는데 왜 이렇게 반응하나요? 고대에는, 아니 지금도 사람들은 예상치 못한 나쁜 일이 닥치면 인과응보적으로 내가 뭔가 잘못해서 신이 나를 벌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구나 잘못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두 가지가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는 이 심각한 일이 생긴 것과 두 번째는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야와 함께 있다 보니까 자기 죄가 자꾸 더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안 왔으면 내가 죄인임을 깨닫지 못했을 텐데 당신 때문에 내 죄가 드러나 내 아들이 그 죄 때문에 죽었다고 결론 지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도 인과응보적 세계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나쁜 일이 일어나면 하나님이 벌 주신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반대로 뭘 잘하면 하나님이 축복하신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에 영향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일 때 이미 우리를 위해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 복음의 은혜 안에 있지 못하면 인생 내내 인과응보적 태도를 가지게 됩니다. 주일에 뭐 사 먹으면 혼내시는 분이 아니라 이미 아들을 바치셔서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가 그 사랑 안에 성장하길 원하십니다. 19절입니다.
[19] 엘리야가 그에게 그의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받아 안고 자기가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
엘리야도 이 심각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지 못해서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합니다. 20절에서 21절입니다.
[20]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이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21]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셨다고 얘기할까요? 엘리야는 자신이 선지자로 있는 이스라엘에 재앙이 내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고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거처를 옮긴 곳에도 재앙이 내리자 가슴이 아팠고 그래서 죽은 아이 위에 몸을 엎드립니다.
하나님은 구약에 시체는 만지지도 가까이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죽은 사람은 만지지 말라고 하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라 생명과 죽음의 차이를 가르치시고자 하신 명령입니다. 죽음의 결과인 시체는 가장 부정하고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즉 생명과 관계된 것만 거룩하기에 하나님께 속한 자는 시체와 가까이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도 엘리야는 가장 부정한 대상과 자신을 동일시했습니다. 이 아이를 마치 자신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자기가 죽은 시체인 것처럼 하나님 앞에 생명을 간구했습니다. 22절입니다.
[22]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구약에서 첫 번째 일어난 부활 사건입니다. 하나님 백성이 아닙니다. 이방인의 아이가 놀라운 기적을 경험합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은 앞으로 엘리야와 같은 분이 오셔서 이렇게 죽은 자들을 살려내실 것이다, 이런 일을 보면 그분이 하나님이 내신 구원자임을 믿고 따르라고 구약에서 그림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떤 사람도 할 수 없었던 죽은 사람을 살려내시는 일을 여러 번 하신 것입니다. 여인은 24절에 이제야 무엇을 고백합니까?
[24]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
여러분 이제야 믿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언제인가요? 죽음 가운데 생명이 주어졌을 때입니다. 죽음만큼 파괴적이고 강력한 영향력은 없기에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어떤 사람도 죽음을 거슬러 돌아올 수 없고 한 번 죽음이 임하면 끝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누가 죽으면 살려내시나요? 왜 지금은 엘리야를 보내시지 않나요? 본문은 그림입니다. 죽었다 살아나지 않아도 더 큰 생명의 능력이 우리에게 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죽은 자들입니다.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육신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닌 영원히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만약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생명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아마 죽은 것처럼 인생이 끝나버렸을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아들 하나 있는 과부입니다. 인생의 유일한 의존이며 사랑의 대상이 사라져 버리면 한 존재의 근원이 뒤흔들린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는 다 멋지지만 우리 영혼이 지금 죽음의 냄새를 풍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오기 전에 우리 안에 영향을 미친 옛사람에게서 나는 냄새입니다. 자신의 죽음의 냄새를 맡는다면 여러분은 성숙하신 것입니다.
제일 무서운 것은 인간은 스스로 풍겨내는 죄악의 냄새를 맡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의 냄새는 너무 잘 맡습니다. 영혼에서 쏟아져 나오는 분노, 미움, 짜증, 통제, 영혼의 어두움. 이것은 모르는 사람, 가깝지 않은 사람한테는 쏟아지지 않습니다. 또 문제가 없을 때는 잘 숨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위기, 힘든 상황, 내 힘으로 안 되는 절망적인 상황, 내 근원이 뒤흔들리는 상황에서는 죽음의 모습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시야가 외부로만 향해서 남의 죄악을 잘 보는 사람은 자신은 이미 죽어서 썩은 냄새를 풍기고 있는데 코가 망가져 버린 상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때로 이런 절망적인 상황을 마주하게 하십니다.
나와 한 몸처럼 붙은 그 사람으로 인해 답답하고 잘라내지도 못하고 해결할 수도 없는 존재론적 위기를 만나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물론 사르밧 과부가 경험한 기적을 한두번 경험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과 진짜 관계 맺는 생명을 얻는 믿음으로 발전하지 못합니다.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그런 하나님으로 끝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죄를 발견하며 그 죄가 마치 아들이 죽은 것 같은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무서운 것임을 인지하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생명을 맛보지 못하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이 죽음의 냄새를 풍기게 됩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럽고 추한 모습이 해결되며 생명이 드러나야 되지 않을까요? 어릴 때는 다 이기적이고 원하는 대로 살며 내가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죽음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지만 지금 말씀을 듣고 약속을 듣고 계시면 변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구원받은 이유는 하나님이 이 땅에서 죄를 잘라내셔서 거룩하고 온전한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하나님이 바꾸시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눈을 열게 해달라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아직도 제 안에 죽음이 가득합니다. 예수로 말미암은 생명을 주셔서 죽음을 이겨내는 생명의 능력이 얼마나 놀랍고 큰가를 맛보게 해 주세요’ 기도하셔야 합니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고집 세고 짜증 내고 자기주장만 하고 이기적인 욕망만 위해 살아가고 있다면 여러분은 심각한 죽음의 그림자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교회 100년 다녀봐야 소용없습니다. 한국교회에 예수를 자신의 필요만을 채워주는 하나님으로만 바라보는 사람 너무 많습니다.
1단계는 시작했습니다. 교회 오고 예배도 드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공급도 맛봅니다. 그러나 발전하지 못 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자기 안에 얼마나 무서운 죽음의 그림자가 있는지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존재적 위기를 한 번씩 보내십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 내가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아니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내 노력으로는 타고난 기질과 모습을 바꿀 수 없습니다’ 인정하며 그 생명을 간구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생명의 능력을 경험케 하십니다.
저는 2,30대의 저보다 지금의 제가 훨씬 좋습니다. 그 때는 늘 불안하고 두렵고 그래서 울고 자책하고 내 영혼 안에 몰아닥치는 죽음의 그림자와 고통을 싸워내느라 매일이 힘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시나요? 본인은 잘 못 보기 때문에 죽음의 그림자를 지적해 주는 분을 옆에 붙여놓으신 것입니다. 배우자, 자녀, 가족이 말하는 여러분 모습이 진짜입니다.
‘당신은 나를 어떻게 생각해? 너한테 아빠는 어떤 아빠니?’ 한 번 물어보십시오. 그 답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서 회개하셔야 합니다. 완벽하다는 답을 듣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실수하고 연약하지만 여러분 안에 예수가 주시는 생명이 죽음을 짓누르고 나와서 주변에 생명의 영향력을 미치는 모습 때문에 여러분이 좋다는 반응이 나와야 합니다.
우리는 다 사르밧 과부입니다. 일단 태생이 이방인입니다. 바알 숭배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엘리야를 통해 놀라운 생명의 은혜를 베푸셨듯, 예수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부르셨습니다. 이 부름에 응답하여 죽음을 이겨낸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능력을 드러내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