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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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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 강해 07 6.1-3 하나님의 섭리의 특징 1

2025년 7월 6일 주일예배 설교문/ 장우현 목사

말씀: 에 6:1-3

[1] 그 날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아니하므로 명령하여 역대 일기를 가져다가 자기 앞에서 읽히더니

[2] 그 속에 기록하기를 문을 지키던 왕의 두 내시 빅다나와 데레스가 아하수에로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모르드개가 고발하였다 하였는지라

[3] 왕이 이르되 이 일에 대하여 무슨 존귀와 관작을 모르드개에게 베풀었느냐 하니 측근 신하들이 대답하되 아무것도 베풀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때에 이 세상에 개입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불신자들 뿐만 아니라 성도들 역시도 그 사실을 믿기 어렵게 하거나 오해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섭리의 특징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섭리의 목적을 오해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이 섭리 하시니까 아브라함이 부자가 되고, 요셉이 총리가 되고, 다윗이 왕이 되고, 룻이 보아스와 결혼하고, 에스더가 왕비가 되고, 모르드개가 일이 잘 안풀리다가 풀리게 되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예수님의 말씀과 삶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비춰보지 않으면 세상도 원하는 잘 되는 것을 위해 섭리하신다고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다 보면 기독교가 세속화되면서 불신자가 봐도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운영하는 종교 사업으로 여기게 됩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두 번째 특징은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 삶에 나타나는 여러 결과들이 정말 하나님이 하신 것인지, 저희가 한 것인지, 우연히 일어났는지 애매합니다. 내가 열심히 해서 시험 점수가 좋은 것일까요, 하나님이 도와주신 것일까요, 여자친구나 아내를 내가 노력하고 선택해서 만난 것일까요, 하나님이 만나게 해주신 것일까요, 내가 잘 해서 돈을 잘 버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돈을 잘 벌도록 도와주신 것일까요? 그냥 하나님이 다 하신 것이라고 믿기에는 분명히 노력이나 확률적인 운이 영향을 미치는 것 같구요, 좋은 일은 하나님이 하신 것이고, 나쁜 일은 마귀가 한 짓이라고 한다면 기복주의 신앙이 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마지막 특징은 하나님이 개입하고 계신다기엔 세상이 너무 악하다는 것입니다. 전지전능신 분이 진짜 섭리를 하신다면 이 악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거나, 최소한 선하게 사려는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는 않게 해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이유들 때문에 하나님이 섭리를 하신다고 믿기 보다는 자신의 노력의 여부에 따라 인생의 결과가 달라지고, 부모가 건강하고 재력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이고, 아니면 운이라도 좋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쉬운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분명히 살아계신 하나님이 저희의 모든 삶 가운데 섭리하신다는 것을 아주 강력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에스더 6장에는 방금 말씀드린 세 가지 특징이 다 드러나 있어서요, 성경의 어느 부분에서보다 자세히 드러납니다. 그래서 6장을 그 특징들에 맞춰서 3번에 나눠서 보려고 합니다. 특히 오늘은 섭리의 목적에 관한 특징이 나타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것이 맞는지 의문이 들었던 분들이나, 아직 그 경험이 부족한 중고등 학생들에게는 특히 도움이 될 부분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1. 하나님의 공로와 은혜를 기억하게 하십니다.(1-2)


[1] 그 날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아니하므로 명령하여 역대 일기를 가져다가 자기 앞에서 읽히더니 [2] 그 속에 기록하기를 문을 지키던 왕의 두 내시 빅다나와 데레스가 아하수에로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모르드개가 고발하였다 하였는지라


아하수에로 왕은 에스더와 두 번째 잔치를 앞두고 그날 따라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왕의 일들을 기록한 역대 일기를 읽게 되는데요, 그 때 자신을 반역에서 구해줬지만, 잊혀졌던 모르드개의 공로와 은혜를 알게 됩니다. 여기서 히브리어로 역대 일기는 '기억의 책'입니다. 그런데 고대 역사책들을 기억의 책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성경 다른 곳에서도 종종 역사책들이 나오는데요, 대부분 히브리어로도 역사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에스더 10장에도 책이 한 권 또 소개되는데요, 거기서도 히브리어로 역사책입니다. 그런데 왜 여기서는 일부러 기억의 책이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기억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하나님이 저희를 구원해주신 공로와 은혜를 기념하는 절기나 요단강을 건너며 세웠던 기념비 같은 곳에 사용된 단어입니다. 기념이안 기억할 기에, 생각 념입니다. 기억해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책이 실제로는 페르시아 사람들이 쓴 페르시아 역사책이지만, 이 맥락 안에서는 모르드개의 잊혀졌던 공로와 은혜를 기억하는 책으로 하나님이 섭리하시는데 사용하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절정이 나타나는 에스더서의 가장 중심부에서요.


그런데 에스더서에서 가장 중심에 있어야 할 사람은 에스더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도 에스더서 설교라고 하면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는 부분을 가장 많이 들어보셨고, 또 그 모습이 예수님의 희생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부분이 에스더서에서 가장 절정인것 같고, 에스더가 주인공인 것 처럼 보입니다. 제목도 에스더서이구요. 그런데 사실 그 부분이 담겨있는 4장도요, 위기에 빠진 백성들을 향한 모르드개의 애통한 마음과 그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딸을 중보자로 세우는 모습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에스더서를 끝까지 읽어보면요, 결국 모르드개가 페르시아를 다스리는 실세가 돼서 영광을 회복하고, 백성들에게 참된 평안, 바로 샬롬을 주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이런 모습들은 마치 하나님이 죄에 빠진 백성들을 애통하게 바라보시고, 예수님을 중보자로 세우시고,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그 아버지인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되고, 통치가 회복되서 참된 샬롬을 주시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그래서 에스더가 예수님의 모형이듯이 모르드개가 하나님의 모형이라고 보는 것이구요,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 잊혀졌던 하나님의 공로와 은혜를 기억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의 목적이라는 것을 에스더서의 가장 중심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책의 중심에서 하나님의 공로와 은혜를 강조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책이 또 있는데요, 레위기입니다. 레위기에는 제사법과, 여러 절기들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모두 죄에서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공로와 은혜를 기억하게 하는 율법들입니다. 그런데 이 레위기는요 모세가 쓴 다섯 권의 책인 모세오경 중의 하나인데요, 모세오경은 나머지 성경들을 쓴 저자들에게 핵심적인 영감을 주는 중심 뼈대와 같은 책들입니다. 그런데 이 레위기는 또 그 다섯 권 중에서도 가장 중심에 있습니다. 혼돈과 공허로 시작되는 창세기부터 질서와 충만함이 회복되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신명기까지 그 신앙의 여정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공로를 기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레위기도 1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대칭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요, 가장 중심에 가장 중요한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바로 절기들 중의 절기인 대속죄일입니다. 대속죄일은 백성들의 대표인 제사장들 중에서도 대표인 대제사장이, 성전에서도 가장 중심부인 지성소에, 1년 365일 중에서도 정해진 그 날 하루 들어가서, 지난 1년간의 백성들이 지은 모든 죄를 용서 받으며 그 용서를 위한 하나님의 공로와 은혜를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참 신기죠. 극적인 스토리가 담겨있으면서 명시적인 하나님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 에스더서와 하나님의 법조문이 가득 담겨서 어떻게 보면 딱딱한 레위기 모두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공로를 기억하는 것이 중심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사실 성경 전체가 그 목적을 위해 하나님이 섭리하신다는 것을 강력하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저희가 그 은혜를 잘 기억해서 감사와 기쁨이 가득하게 살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삶이 하나님을 품고 사는 삶이고, 구원 받은 삶이고, 은혜가 충만한 삶이고, 복된 삶이구요, 그것이 저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매일 은혜가 충만하면 감사와 기쁨이 가득해지구요, 그러면 삶에 만족과 여유가 가득해집니다. 그러니까 불평불만이 사그라지고, 과도한 욕망과 집착이 사그라듭니다. 그러면 바로 그 때 이웃을 돌아볼 수 있게 됩니다. 돈과 시간이 있다고 이웃을 돌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삶에 감사와 만족이 없다면요, 욕망과 집착, 자기 만족과 자기 자랑으로 인해 돈과 시간을 나에게만 쓰느라 이웃을 진심으로 돌아볼 여유가 없게 됩니다. 그런데 특히 십자가 용서의 은혜가 충만해지면요, 이웃이 나에게 실수를 하거나 큰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너그럽게 용서해 줄 수 있는 스펀지 같이 푹신한 마음의 공간이 생깁니다. 결국 매일 매순간 하나님의 공로와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 모든 신앙의 출발점이고, 하나님과 이웃 사랑이라는 신앙 생활의 기반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가 은혜의 종교라고 불리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공로와 은혜를 기억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이 섭리를 해주셔야 한다는 사실은요, 죄인들인 저희는 오로지 그 은혜를 잊고 죄악의 길을 따라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증거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하루라도 잊으면, 끊임 없이 불평불만을 한다는 것입니다. 주변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불평불만이 가득한 분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런 분들에게 아 불평불만좀 고만해! 라고 한다고 멈춰지지 않습니다. 영혼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메말라서 만족과 기쁨이 없어서 그런 것인데 사람이 말하고 다그친다고 그게 어떻게 채워질까요. 아 그럼 하나님이 빨리 은혜좀 채워주시지, 저 불평불만하는 사람 때문에 모두가 죽겠어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가 없으면 얼마나 인생이 고통스러운지를 그 광야 같은 과정을 통해 그 당사자 뿐 아니라 주변사람 모두를 가르치고 계신 중입니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기도하며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적 성장과 함께 모든 순간 하나님이 섭리하셨다는 것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 불평불만은 마음과 말에서 나오는 모습인데요, 이게 삶에 단단하게 고착되기 시작하면요, 자신과 이웃의 삶에 실제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불만족이 계속되다보면 욕심과 집착을 따라 살거나, 아니면 아무리 해도 채워지지 않는 그 욕심과 집착 앞에서 의욕을 잃어서 끝도 없이 게을러집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주위 사람들도 고통스럽게 하면서 삶의 기쁨을 빼앗아 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집착과 욕망 추구가 성공이라도 하게 된다면, 자기의를 드러내며 교만해집니다. 하나님이 해주셨다고 말은 하지만 마음 속에는 내가 한거라고 생각하는거에요. 실제로 내가 정말 남들보다 더 열심히 노력했거든요. 그렇게 자기의가 쌓이고 교만해지면요, 반드시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찮게 여기게 되면서 이웃도 하찮게 대하게 됩니다. 교만은요, 내가 하나님보다도 높은 사람으로 여기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입력되지 않고 튕겨 나가는거에요. 반대로 그 집착과 욕망 추구를 실패하게 되면, 한없이 좌절하고 우울하고 분노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모습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생기는 모습이기 때문에 교만이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도 이웃을 돌아볼 여유가 없을 뿐 아니라 이웃을 내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여기며 함부로 대하게 됩니다. 결국 모든 죄악의 시작과 개인과, 가족과 사회 공동체의 불행의 시작은 하나님의 공로와 은혜를 잊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들이 바로 6장 이전까지 나타난 아하수에로 왕과 왕비와 하만의 모습이었습니다. 욕망과 자기자랑과 지혜 없는 거절과 수치와 상처와 분노와 좌절 가운데 이웃과의 관계가 다 깨어지고 있는데요, 성별도 다르고 지위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그들의 모습이 바로 저희의 모습입니다.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모습이 아니라요. 그래서 하나님은 저희에게도 기억의 책을 선물로 주셔서 매 순간의 은혜를 기억할 수 있도록 섭리해 주고 계십니다. 바로 성경책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섭리하십니다. 저희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 섭리를 해주시면요, 그 내용이 머리로만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그 공로와 은혜가 새겨지면서 마음을 움직이게 해주십니다. 특히나 저희가 일상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올바르게 발견하기 위해서는요, 성경에서 하나님이 어떤 목적을 위해, 어떤 방법으로, 어느 때에 섭리하시는지를 먼저 배워야 합니다. 그러지 않았을 때 내 생각이나, 미신이나, 다른 종교와 철학 사상의 영향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섭리의 목적과 방법을 오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오해가 쌓이다보면 이상하게 짬뽕된 종교인이 되고, 이런 이유들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를 더 믿기가 어려워지는 악순환에 빠집니다. 그래서 저희도 이렇게 매주 함께 모이는 이유도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에 성경을 비추어 보며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기념하기 위한 것입니다. 바로 그 때 감사와 만족과 기쁨이 가득한 삶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하나님을 처음 믿었을 때를 돌아보면, 요한복음이라는 성경책을 통해 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보다 더 오랜 기간 잊혀졌던 공로와 은혜를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와 그 때 그 은혜가 인생의 방향을 바꿀 정도로 크게 다가왔습니다. 단순히 직업이 바뀐게 아니에요.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 이후의 인생이 은혜가 충만하게 살아오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를 돌아보면요 항상 그 엄청난 하나님의 공로와 은혜마저도 잊고 교만이 머리 끝까지 차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제 아내, 지난 설교 때도 나눴지만, 하나님이 그렇게나 그 때 마침, 그 때 마침 섭리해 주셔서 은혜의 선물로 만나게 해주신 배우자입니다. 그렇게 만나게 해주신 제 아내가 일해서 돈 벌어주고, 애들도 많이 낳아서 키워주고, 목회자의 길로 갈 수 있도록 지지해준 덕분에 이렇게 목사가 됐을 뿐 아니라 제가 원하는만큼 집에서 하루종일 성경 연구해서, 이렇게 제가 원하는대로 설교를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만족스러운 삶인가요? 제가 10대 20대 때 제 장래를 찾기위해 헤맸던 시간들과 정말 가난하게 살았던 때를 생각해보면요, 저는 지금 제 인생이 너무나 만족스럽습니다. 다 이루었어요. 제가 만약에 사례비를 더 벌기 위해, 사택을 얻기 위해 일반적인 교회에 가서 풀타임 사역을 했다면 이렇게 성경 연구 못합니다. 일주일에 설교 10개씩 하면서 허덕거리게 됩니다. 저와 아내가 존경하는 목사님이 분당우리교회에서 분립개척을 하셔서 요 옆에 교회에서 담임목사님으로 사역하고 계신데요, 그 분도 말씀 연구하는거 엄청 좋아하시는데, 그 교회 감당하느라 피골이 상접해 계세요. 안검마비까지 오셔서 입이 돌아가셨어요. 저는 그렇게 되면 몸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성도님들께 제대로 된 말씀을 전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들어서 제 스스로가 불행해지고, 이럴꺼면 아얘 하지 말자 하고 성경은 그냥 개인적으로 천천히 공부 하고, 다른 일을 하러 갔을겁니다. 그런데, 놀라운 섭리를 통해 아내를 만나게 해주신 은혜와, 아내를 통해서 섭리해 주시면서 저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들을 잊게 될 때, 아내에게 불평불만이 쌓이게 되고, 내가 그래도 뭘 했다는 자기 의를 드러내게 되고, 상대방 탓만 하면서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귀한 배우자를 하찮게 여기며 싸우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곧 그 배우자를 통해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탓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남편과 아내와 자녀와 부모님 모두 그럴게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통해 만나신거 아닌가요 그래서 사실 저는 성도님들 삶의 이야기 듣는걸 좋아하는데요 제 삶에만 국한된 하하님의 섭리를 더 넓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실 매일 아침 저녁마다 말씀을 통한 십자가 은혜와, 저희를 육적으로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부모님의 은혜와, 아내와 가족들과 교회 공동체를 통해 받은 은혜들을 기억하며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를 경험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멀리 계신게 아니라 그들을 통해서 섭리하시니까요. 물론 저희가 말씀을 많이 읽거나, 새벽 일찍 기도를 하거나,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바로바로 원하는대로 섭리를 해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섭리해주시죠. 하지만 바로 이 기억의 책, 성경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때가 되면 그 섭리를 경험하고, 그게 하나님이 섭리해 주신 것이라는 것을 분별할 수 있게 되고, 믿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또 하나님의 섭리를 기대하고, 기다리고, 더 쉽게 발견하게 되는 선순환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기억의 책인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삶 가운데 잊혀진 은혜들을 기억나게 해주시고, 또 저희 삶 가운데 이미 충만한 은혜가 잊혀지지 않도록, 하나님의 섭리를 소망하시고 기다릴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2.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합니다.(3)


[3] 왕이 이르되 이 일에 대하여 무슨 존귀와 관작을 모르드개에게 베풀었느냐 하니 측근 신하들이 대답하되 아무것도 베풀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


왕은 기억의 책을 읽으며 자기가 모르드개의 공로와 은혜를 잊고, 아무런 보상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건 아이고 내가 깜빡 했네라고 말하고 지나갈 수 있는 단순한 실수가 아닙니다. 왕권에 큰 흠이 되는 수치스럽고 위험한 일입니다. 김정은과 푸틴과 시진핑도 자기 혼자서 권력이 막강한 것이 아니죠. 그 주변에 공로를 세운 사람들과 가족들을 기억뒀다가 충분한 보상이 주기 때문에 그렇게 보상이 주어진다는 것을 보는 주변 사람들까지도 반역을 막고 통치력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요즘 시진핑이 그게 잘 안되가지고, 공로와 은혜에 대해 골고루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충성하는 주변 사람들이 다 없어지고, 지금 실각 위기설이 돌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반역이죠. 시진핑이 죽인 사람들이 많아서 실각하면 살아남는게 기적입니다. 내 가족까지도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인거에요. 아마 지금 큰 충격 속에 있을 것이구요, 시진핑이 실제로 실각하게 된다면 중국인들도 큰 충격에 빠질 것입니다. 실제로 아하수에로 왕도 반역 때문에 죽었구요, 그 반역과 암살 징후가 많았기 때문에 항상 두려웠을거에요. 그러니까 이 반역을 막은 공로와 은혜에 보상을 안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요, 자신의 허술함에 수치와 두려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일은 왕에게 적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온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왕의 모습이 이 순간부터 완전히 바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전까지는 우유부단하고, 자기 자랑에 빠져있고, 쉽게 분노해서 가까운 관계를 파괴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영광을 높이기 위해 자랑하고 자기 수치를 가리기 위해 상대방의 잘못과 수치를 크게 부풀렸습니다. 그리고 또 그런 삶을 위해 세상의 지혜에 귀기울이는 왕노릇하는 교만한 자의 모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후부터는 모르드개를 존귀하게 높이고,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지혜로운 말에 귀를 기울이고, 마귀 같은 하만을 심판하는데 쓰임받고, 하나님을 모형하는 모르드개를 실질적 통치자로 높이면서 하나님 백성들의 구원과 평안이 회복되는 일에 사용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세상에 권세자를 세우신 올바른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왕이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이 섭리하시면 하나님의 은혜만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를 잊고 교만하게 살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회개하게 된다는 영적 원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게 너무 당연한 흐름인거에요. 잊혀졌던 공로와 은혜를 기억나게 해주시면 당연히 내가 그걸 잊고 교만하게 살고 있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것은 다그치고 혼낸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은혜로 가능하다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인 것이죠. 물론 아하수에로 왕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개종을 하거나 이 페르시아가 기독교 국가가 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성경의 이런 스토리들은 실제 일어난 사건들을 바탕으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여기서 하나님이 깨닫게 해주시는 죄의 본질을 알 수 있습니다. 죄는 단순히 욕을 하거나 화를 내거나 법을 어기는 행위적인 것을 넘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내가 잘난듯이 교만하게 되는 영적 태도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교만한 사람들은 말씀보다 자신의 생각과 선택을 더 우위에 두게 되고, 그러다 보니 선악의 옳고 그름을 스스로 판단하게 되고, 그래서 악한 말과 행위가 나와도 괜찮다고 여기게 되고, 그로 인해 자신과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불순종 행위라는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많은 경우에 그런 잘못된 행위들에 대해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는 것을 회개라고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런 행위적인 것들은 자범죄라고 하는데요, 이런 자범죄들은 저희의 내면에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중요한 외적 모습이긴 합니다. 그런데요, 말씀 묵상하고 기도할 때 그런 자범죄에 집중하게 되면요, 아무리 생각해도 요즘 내가 특별히 잘못한게 없고, 그래도 교회는 잘 나가고 있고, 헌금도 하고 있고, 말씀묵상과 기도도 어느정도 하고 있고, 봉사도 하고 있고, 신앙생활에 큰 문제가 없고 다른 사람들 보다는 잘 하고 있다고 여기기가 쉽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렇게 '하나님 나는 다른 잘못하는 사람들 같지 않은 것에 감사합니다'라고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상대방을 하찮게 여기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 주어지는 죄 용서의 은혜를 가장 강력하게 거부하고 예수님을 죽이는데 앞장 섰습니다. 자기는 죄 없다는거에요. 죄 없는걸 자신의 가장 큰 영광으로 삼고 한껏 교만해져 있는데 용서를 받으라고 하고, 회개하라고 하니까 죽이고 싶을 정도로 분노하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죄와 회개에 대해 오해한 것이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그 섭리의 이유를 오해한 것입니다. 이건 그저 작은 오해가 아닙니다. 그 오해가 그들을 하나님보다 더 교만하게 만들었고, 그래서 하나님이 뵈내신 예수님을 멸시하게 만들었고, 구원의 기회를 잃게 만들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 역시도 인생에서 엄청난 과오를 저지르지 않는 이상 이런 행위적인 죄에 집중하면 그 바리새인처럼 되기 쉽습니다. 그러면 아무리 교회 잘 다니고, 말씀을 많이 읽고, 외우고, 많은 시간을 기도하고, 도덕적으로 흠이 없고, 또 교계에서 큰 업적을 쌓은 분들일지라도 자기 마음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하나님께 대들거나, 이웃을 하찮게 여겨서 함부로 대하는 교만한 사람이 됩니다. 그런 사람들 많이 보셨잖아요. 모두 이 하나님의 섭리의 목적을 오해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실 저도 그런 오류에 빠진적이 있습니다. 선교지에서 길을 걷다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스스로 성경책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믿게 되니까 그 큰 은혜로 학교 수업도 빠지면서 성경책 읽고, 기독교 역사책 읽고.. 한국 와서 도 집이랑 도서관에 앉아서 그렇게 지냈습니다. 특히 제가 회심했던 중국의 연변과기대에서 저를 전담해서 신앙교육을 해주시고, 세례도 받게 해주신 교수님이자 선교사님이자 저의 제2의 어머니이신 분이 제가 하루종일 성경 읽고, 질문도 많이 하니까 본인의 사택 방 하나를 내주셨어요. 거기서 책장의 신앙서적들 다 읽게 해주시고, 거기서 잠자고 학교 다니고, 그래서 새벽에 대학 교회에 같이 가서 기도 훈련 시켜주시고, 본인이 읽으시던 목회자들이 주로 읽는 톰슨 주석이라는 것도 주셨습니다. 그 주석책이 한 권으로 되어 있어서 들고 다니기 쉬운데요, 아주 작은 글씨에 종이는 한지처럼 얇아서 내용이 꽉 차있거든요. 그래서 저는 한국에 돌아와서도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 주석성경으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게다가 제가 하나님을 믿기 전부터도 준법정신도 강하고 이웃을 배려하고 양보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는데 하나님을 믿게 되니까 그게 더 강해졌어요. 그러니까 어떤 문제가 생겼냐면요, 한국에 돌아와서 26살 때, 그 때는 여자친구였던 아내 교회 청년부에 자리를 잡게 됐는데요, 시간이 갈수록 교회 청년들이 신앙생활을 너무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거에요. 나눔하는거 보면 성경을 제대로 읽는 것 같지도 않고, 자기 삶에 적용하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 같지도 않고, 믿는다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말을 너무 함부로 하고, 게다가 불신자들보다 봉사하는 삶을 사는 것 같지도 않고. 자기 유익과 즐거움만 챙기는 이기적인 모습만 보이고. 그러니까, 내가 불신자였을 때도 저정도는 아니었는데 이 사람들은 왜 이러고 사는걸까 하는 정죄하는 마음이 정말 가득했습니다. 제가 정말 처음 은혜를 잊지 않았다면 그런 청년들이 보이면 기도하고 도와줬을텐데, 은혜를 잊고 교만해진 증거가 바로 불평불만하며 이웃을 하찮게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이웃만 하찮게 여기는 것인가요?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을 하찮게 여긴 것이고, 저에게 그 베풀어주신 그 큰 은혜를 다 잊고 무시하는 죄 안에 거하는 모습입니다. 그게 교만이고, 죄의 본질입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하나님이 많은 실패와 좌절과 큰 수치들을 경험하게 하시면서 은혜를 잊고 교만해졌던 본질을 깨닫게 해주고 계십니다. 그게 한 번으로 되는게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를 깨닫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특히 제가 그렇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이웃을 배려하는 삶을 중요하게 여기다 보니까 누구와 결혼을 하더라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큰 교만에 빠져 있었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이 저와는 그렇게 다른 성향의 아내를 만나게 해주신 것 같습니다. 결혼생활 10년 하면서 몇 주 동안 연락 끊고 인천 집에서 부산까지 집도 나가보고, 요나처럼, 열받는데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냉장고에 머리 박아서 찌그러뜨리기도 하고, 제 공부 책상을 꽝꽝 쳐서 유리도 깨뜨려보고, 사역하던 교회에서도 말도 안하고 무단으로 나와도 보고..신학대학원도 중도에 포기도 해보고. 신학대학원도 다시 돌아갈 생각을 안하고 무단으로 그만 뒀던거라 제적이 되면서 휴복학이 불가능하게 됐거든요. 다시 다닐려면 입학시험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던겁니다. 그런데 학교 관계자님이 특별히 도와주셔서 휴학처리가 되서 다시 다닐 수 있었어요. 정말 저의 본질을 끝까지 파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래서 책상 유리와 냉장고도 수리 안하고 지금 그대로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제가 얼마나 쉽게 은혜를 잊고 교만해지는 죄인인지를 깨닫고 기억하게 하는 기념물이에요. 그리고 제가 무단으로 나온 교회가 애들 초등학교 바로 앞에 있어서 하담이 졸업할 때까지 10년은 더 지다다녀야 됩니다. 어떻게 그런 위치의 교회에서 사역하게 됐을까요? 그 때는 애들이 2, 3살 때고 그 옆 학교가 있는 동네에 살았기 때문에 지금 이 초등학교에 다닐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죠. 그런데 그 교회 담임목사님과 성도님들이 정말 좋은 분들이었어서 제가 문제 없이 사역을 했다면 집 바로 앞, 아이들 학교 바로 앞에서 가족 모두가 걸어서 교회를 다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는 이제 저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해주신 하나님의 섭리를 기억하게 해주는 기념물이 됐습니다.


결국 이렇게 지나서 보면 다 저의 교만한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기억하며 복음에 더 매진할 수 있도록 해주신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을 믿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모르드개의 공로와 은혜만 잊는 허술함만을 보였지만, 저는 다행인지 부족하고 허술한 부분이 정말 많아서요 하나님이 그걸 사용해서 섭리해주셔서 그렇게 많은 실패와 좌절과 큰 수치들을 경험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저도 한 편 한 편의 설교에서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와 죄의 본질을 드러내는 복음을 전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게 된 것입니다. 이 설교가 당장 사람을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결국 이 복음을 접하고 있다 보면 하나님의 때가 되셔서 섭리하실 때 그걸 더 쉽게 알아차릴 수가 있거든요. 아, 이거 하나님이 하신거구나!


성도님들이시든, 목회자이든 죄의 본질을 깨닫고 회개하지 않고, 그것을 위해 하나님이 섭리하신다는 오해하면, 우리가 교회와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잘 하고 있던거 같은데 한국 교회가 왜 이렇게 됐지? 하는 순간들이 다가오게 됩니다. 죄인은 하나님이 섭리해주시지 않으시면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살고 있다는 사실조차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겉모습의 변화나 외형적인 성장을 추구하기 위해 인간적 노력과 세상 지혜에 귀기울이려는 유혹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 내가 어떤 공로와 업적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의 공로와 은혜를 기억하고, 그 은혜를 잊고 살았다는 것을 깨닫고 그걸 회개하는 것만으로는 볼품이 없어 보이고, 아무 것도 안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섭리를 하신다고 하고, 그 섭리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하면 그럼 우리는 아무 것도 안해도 된다는건가? 라고 오해를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를 기다린다는 것은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르드개와 에스더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그 죄와 교만으로 인해 고통과 슬픔과 죽음 앞에 직면해 있는 저희와 이웃을 위해 함께 애통해 하고, 기도하며 함께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실 저희가 뭘 하려하지 않고 기다린다는 것만큼 여러운 일이 없습니다. 저희는 저희가 원하는대로, 아니면 저희가 선이라고 여기는대로 뭔가를 해야한다고 생각하기가 쉽거든요. 그래서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대로 일이 돌아가지 않는데 인내하면서, 이웃 역시도 하나님의 섭리를 기다릴 수 있도록 권면하고 섬기는 일은 아무 일도 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섭리하신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의 섭리의 목적을 바르게 아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저희가 그렇게 기다릴 때, 하나님의 가장 좋은 때에 하나님은 잊혀졌던 하나님의 공로와 은혜를 기억하게 하시고, 저희가 그 은혜를 잊고 교만하게 살던 죄를 깨닫게 하시는 목적을 위해 섭리하십니다. 그 섭리의 절정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였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얼마나 은혜로우신지가 드러났고, 저희가 그 엄청난 은혜를 잊고 교만하게 살았음을 깨닫게 될 때 저희의 모든 삶이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 십자가에 드러난 섭리의 목적을 잘 기억하셔서 성경에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잘 발견하시고, 또 저희의 삶의 구석구석에서 함께하시며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를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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