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14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20] 밧세바가 이르되 내가 한 가지 작은 일로 왕께 구하오니 내 청을 거절하지 마소서 왕이 대답하되 내 어머니여 구하소서 내가 어머니의 청을 거절하지 아니하리이다
[21] 이르되 청하건대 수넴 여자 아비삭을 아도니야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소서
[22] 솔로몬 왕이 그의 어머니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하여 아도니야를 위하여 수넴 여자 아비삭을 구하시나이까 그는 나의 형이오니 그를 위하여 왕권도 구하옵소서 그뿐 아니라 제사장 아비아달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을 위해서도 구하옵소서 하고
[23]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여 이르되 아도니야가 이런 말을 하였은즉 그의 생명을 잃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이다
[24] 그러므로 이제 나를 세워 내 아버지 다윗의 왕위에 오르게 하시고 허락하신 말씀대로 나를 위하여 집을 세우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아도니야는 오늘 죽임을 당하리라 하고
[25]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보내매 그가 아도니야를 쳐서 죽였더라
열왕기상 2장에 솔로몬은 왕이 되자마자 다윗 왕 때 문제가 있던 사람들을 하나씩 제거합니다. 첫 타자가 본문의 아도니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윗이 뒤끝이 길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정치 보복이 아닙니다. 성경은 솔로몬의 심판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영적인 진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심판’이라는 단어에 대해 나쁜 짓을 한 사람이 응당 받는 벌이라고 좁게 생각합니다. 교회에서 많이 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성경에 어떤 단어가 100번 이상 나오면 아주 중요한 중심 주제라고 보시면 되는데, 심판은 몇 번 나올까요?
200번 이상입니다. 구약에는 히브리어, 신약에는 헬라어 번역인 이 단어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풍성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 18장 25절에 심판하다 단어를 보겠습니다.
창 18:25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악인을 죽이고 의인을 죽이는 심판은 히브리어 ‘샤파트’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나쁜 사람에게 벌준다는 의미보다 판단하다, 판결하다, 통치하다, 다스리다 등으로 폭 넓게 번역됩니다. 신약의 헬라어 ‘크리노’도 고린도전서 11장 32절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고전 11:32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찾으려고 한 ‘심판’이라는 단어가 바로 ‘판단’입니다. 성도도 심판을 받는데 이는 곧 주의 징계입니다. 징계는 ‘아이를 어른 되게 만들다’는 뜻으로 양육 혹은 훈육으로 번역됩니다. 즉, 성도가 받는 심판은 우리의 성장을 위한 하나님의 양육 과정인 것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만 심판 받는 것이 아니라, 성도도 심판을 받고 훈육을 받아야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사회에서도 벌을 줄 때 필요한 과정이 무엇인가요? 잘못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과 그 기준에 따라 대상에 대한 ‘판결’을 하고, 마지막으로는 판결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는 ‘시행’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심판’은 마지막 단계인 시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 드린 것처럼 심판은 기준, 판결, 시행의 세 가지를 모두 포함하며, 이것을 통틀어 성경은 통치라고 합니다. 이것은 옛날에만 혹은 성경에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지금도 통용되는 일입니다. 국가에서 하는 일이 통치입니다.
기준을 세우며 법을 만드는 입법부는 국회입니다. 어제까지 괜찮았던 일도 국회에서 법을 만들면 오늘부터 불법이 될 수 있습니다. 사법부인 법원에서 법이라는 기준에 의해 잘못되었다고 판단을 내리면 그를 잡아 감옥에 가두고 시행하는 일은 행정부가 합니다. 입법부가 기준을 만들어 법을 제정하고, 사법부가 판결하고, 판결에 따라 행정부에 소속된 경찰과 교도관 등이 행정적 처분을 합니다.
왕정 시대에서는 왕이 혼자 정하고 판결하고 심판했습니다. 그러나 한 집단이나 사람이 힘을 가지면 자신에게 유리한 법만 만들고 시행하는 폐해를 경험하고 나서는 국가가 생길 때 삼권을 분립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부패했기 때문에 온전한 심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기심이 없어야 되고, 부패하지 않아야 되고 늘 공정한 분은 하나님뿐이시라 오직 하나님만 공정한 심판을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 일관된 기준을 우리는 의라고 부릅니다. ‘의’가 무엇인가요?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 요구하시는 온전한 사랑의 행위,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완벽하게 지킨 상태가 의입니다.
하나님은 그 기준에 의해서만 판결하십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이 성경의 결론입니다. 인간은 욕심으로 인해 죄에게 지배당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 결과 우리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의롭지 않으면 심판 받습니다.
그런데 심판자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불가능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마치 예수의 의를 나의 의로 인정하여 주셔서 ‘너는 예수를 믿었으니 의롭다’라고 판결을 내리시고 심판 대신 구원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모든 자들은 심판 앞에 서게 됩니다. 이 때 하나님이 어떤 자들을 심판하시는지를 솔로몬 왕의 통치를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통치를 하실 때 그분의 통치와 심판이 어떠한지 솔로몬을 통해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하늘의 왕은 누구를 심판하시나요?
1.하나님과 관계가 깨진 자들을 심판하십니다.
하늘의 왕은 누구를 심판하시나요? 첫 번째로 하나님과 관계가 깨진 자들을 심판하십니다. 본문 22절에서 아도니야가 심판을 받습니다.
[22] 솔로몬 왕이 그의 어머니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하여 아도니야를 위하여 수넴 여자 아비삭을 구하시나이까 그는 나의 형이오니 그를 위하여 왕권도 구하옵소서
아도니야는 다윗이 약해지자 왕권을 탈취할 생각으로 사람들을 모아 스스로를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그때 나단 선지자가 밧세바와 함께 들어가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겠다고 했던 약속을 다윗에게 상기시키어 다윗은 솔로몬을 왕으로 세웠고 솔로몬은 아도니야를 살려 주었습니다.
아버지가 아직 살아 있는데 왕이 되겠다고 한 아도니야는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해 하나님 대신에 왕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반역을 보여주는 모형입니다. 창세기에서 인간이 지은 죄의 본질이 스스로 선악을 판단해 하나님처럼 되려고 한 것입니다.
왕은 선과 악의 기준을 정하고, 잘못된 자들을 판단하고, 그를 벌 줄 수 있는 능력까지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반복하여 왕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왕이 되고 싶어 합니다. 지금은 옛날 같은 의미의 왕은 되지 못하니까 힘 있는 영역에서 왕처럼 살기를 원합니다. 돈 벌고, 권력 얻고, 공부하고, 다 같습니다. 왕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 솔로몬이 아도니야를 반역으로 여기고 처단한 이유는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한 인간의 모습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람이라는 모형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대행자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아도니야는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하여 내 마음대로 살겠다고 주장하는 반역적인 인간의 모형입니다. 왕 되고자 한 아도니야를 1장 5절은 어떻게 이야기하나요?
1:5 그 때에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이르기를 내가 왕이 되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기병과 호위병 오십 명을 준비하니
일반 사람은 할 수 없습니다. 50명이나 되는 기병과 호위병으로 왕이 되겠다는 야심을 품었습니다. 결국에 어떻게 되나요? 25절입니다.
[25]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보내매 그가 아도니야를 쳐서 죽였더라
심판이 임합니다. 스스로 왕 되고자 하는 자에게 무서운 심판이 임합니다. 아도니야는 힘이 있었지만 사실 대부분은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또 다른 부류의 사람이 한 명 나옵니다. 시므이라는 사람은 어떤 일을 했는지 사무엘하 16장 13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삼하 16:13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는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그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리더라
시므이는 다윗이 강할 때는 대적하지 못하다가 그가 아들 압살롬에게 쫓기어 피난길에 오르자 저주를 퍼붓고 돌을 던졌습니다. 시므이는 사울 왕과 같은 베냐민 지파 사람이었습니다. 사울 왕 때 권력을 누리다가 다윗이 왕이 되니까 베냐민 지파의 영향력이 줄어들게 되면서 손해를 보았을 것입니다. 내내 원한을 품고 있다가 다윗이 도망자가 되자 쫓아가 저주한 것입니다.
시므이는 아도니야처럼 왕처럼 살 수 없는 자입니다. 다윗 때문에 시므이가 손해를 본 것처럼,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있는데 그 신이 나를 안 도와주는 것 같아서 결국 신을 저주하고 비난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이 세상 사람들을 모형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면 이런 행위들이 인간의 삶에 점점 증폭됩니다. 우리도 어떤 때는 아도니야, 어떤 때는 시므이와 같은 모습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해도 온전하게 의롭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는 옛 사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아도니야처럼 하나님처럼 되고 싶고,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 타고, 여행 다니면서, 편하게 살고 싶가도 생각합니다. 그런데 원하는대로 할 수 없어서 대부분은 주로 시므이처럼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향해 주변 사람을 향해 원망하고 불평을 쏟아냅니다.
근원 안에 내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무서운 욕구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물론 우리를 예수의 의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지만 우리 본질 안에는 아도니야와 시므이가 있고, 하나님은 이것을 ‘심판’하십니다.
먼저 기준으로 우리를 달아 보십니다. 아도니야와 시므이는 죽어야 합니다. 남아 있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판결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의 외에 다른 부분을 제거하는 심판을 행하십니다. 이 과정이 꼭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래야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한 번 정죄가 내려지고 나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믿지 않는 자와 믿는 자를 가르는 마지막 기반입니다. 우리 안에서 아도니야와 시므이가 얼마나 자주 표출되나요? 하나님과 관계가 멀어지면 이런 모습들이 더 자주 나옵니다. 이것은 심판받아야 되는 모습입니다.
성경은 세상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가 아닌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인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과 건강한 관계를 맺고 계시다면 여러분 안의 아도니야와 시므이는 힘을 쓰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이 힘을 분별하지 못하면 아도니야와 시므이처럼 살면서도 자신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인지 깨닫지 못하고 계실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탓하지 말고 내 안에 힘이 어떻게 드러나고 확장되는지를 깨달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하늘의 왕은 누구를 심판하시나요?
2. 타인과 관계가 깨진 자들을 심판하십니다. vv.28-34
두 번째로 여러분 하늘의 왕은 또 누구를 심판하시나요? 타인과 관계가 깨어진 자들을 심판하십니다. 2장에는 한 의외의 인물이 심판을 받습니다. 요압입니다.
다윗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 장군이자 사촌인 요압이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죽으면서 솔로몬에게 요압을 편히 죽지 못하게 손보라고 합니다. 구속사적인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면 마음에 안 들었던 사람에게 뒤끝이 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진리를 전하는 그림입니다. 31절입니다.
[31] 왕이 이르되 그의 말과 같이 하여 그를 죽여 묻으라 요압이 까닭 없이 흘린 피를 나와 내 아버지의 집에서 네가 제하리라
요압은 불의한 일들을 여러 번 저질렀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사무엘하 3장 27절입니다.
삼하 3:27 아브넬이 헤브론으로 돌아오매 요압이 더불어 조용히 말하려는 듯이 그를 데리고 성문 안으로 들어가 거기서 배를 찔러 죽이니 이는 자기의 동생 아사헬의 피로 말미암음이더라
아브넬을 죽인 일차적인 이유는 그가 요압의 동생 아사헬을 죽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사이의 전쟁 중에 아브넬을 쫓던 아사헬에게 아브넬이 그만 멈추라고 여러번 경고했습니다. 그래도 아사헬이 계속 쫓아오자 창 끝으로 뒤를 민 것이 아사헬의 배를 뚫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요압은 친하게 인사하듯 가까이 가서 칼로 찔렀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개인적 보복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넬은 북 이스라엘 열 지파의 전체 총괄 장군이었는데 북이스라엘 전체를 다윗에게 넘기겠다고 제안을 했습니다. 요압이 자신의 군대 장관 자리를 뺏길까봐 그를 제거한 것입니다. 게다가 아마사를 어떻게 죽였는지도 사무엘하 20장 9절, 10절에 나옵니다.
삼하 20:9-10 [9] 요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내 형은 평안하냐 하며 오른손으로 아마사의 수염을 잡고 그와 입을 맞추려는 체하매 [10] 아마사가 요압의 손에 있는 칼은 주의하지 아니한지라 요압이 칼로 그의 배를 찌르매 그의 창자가 땅에 쏟아지니 그를 다시 치지 아니하여도 죽으니라 요압과 그의 동생 아비새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뒤쫓을새
아마사도 수염을 잡고 인사하는 척하다 배를 찔러서 죽였습니다. 아마사는 요압과 이종 사촌입니다. 요압은 압살롬 반란 때 압살롬을 죽여서 다윗에게 밉보였고 그 때 아마사가 군대 장관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군대 장관 자리를 빼앗기게 생기자 몰래 불러 처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의입니다. 하나님과 인간관계의 온전함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불의는 왜 생기나요? 요압이 아브넬을 왜 죽였나요? 욕심 때문에, 보복하고 싶어서입니다. 아마사를 왜 죽였나요? 욕심 때문에, 두려움 때문입니다.
불의는 욕심에서 생깁니다. 욕심 때문에 사랑할 수 없습니다. 솔로몬 왕이 이들을 제거하듯 우리도 우리 안에 제거해야 할 무서운 죄가 있음을 이 그림을 통해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우리 인생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심판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이 ‘선’이라고 하시는 기준에서 어긋나는 부분들을 제거하시는 과정입니다.
내 욕심을 채우려다 보면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미워하고 짓밟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심판받아야 모습은 다른 사람을 향한 이런 반응으로 나타납니다. 물론 우리는 요압처럼 직접 누군가를 죽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말로 죽이고 마음으로 미워합니다.
여러분이 정말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자라면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임하여 여러분이 질투하고 미워하는 대상을 드러내시고 요압과 같은 모습을 제거해 나가고 계실 것입니다. 만약 이런 개입이 여러분 인생에 임하지 않았다면 아마 여러분은 마지막에 정죄를 받고 영원한 심판에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솔로몬의 심판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심판하시며 훈육하시는 기준, 판결, 시행의 그림입니다. 여러분 안에 누가 사는지를 분별하셔야 합니다. 아도니야가 왕이 되려고 하는지, 시므이가 원망하는지, 요압이 설치는지를 발견하시고 십자가 앞에서 그 더럽고 추한 모습을 벗어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